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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레슬러는 존 시나 입니다.
시나가 가장 뛰어난 레슬러라곤 물론 생각하지 않지만요.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선수는 언더테이커였고, 나름의 기준에서 볼떄 가장 완벽한 (링 위에서건, 캐릭터 소화 능력에서건) 레슬러라고 생각하는 인물은 숀 마이클스 입니다. 트리플 H의 경기 스타일을 좋아하고 오스틴의 캐릭터를 좋아합니다.
그래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레슬러는 존 시나에요.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보다보니 시나를 비난하는 포지션보다는 시나의 캐릭터에 감정이입하는 포지션에 서게 되더군요.
호감과는 별개로, 시나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가 아주 높았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습니다. 좋아한다는것과 고평가 한다는 건 좀 다르니까요. 그런데 최근엔 생각이 좀 바뀌게 되더군요. 그 이유로 최근 아주 좋은 경기들을 끊임없이 보여주던 멋진 모습들도 있고, 메인에서 내려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후배들을 휘어잡는 스타성 때문도 있겟지만요. 다른것보다 WWE의 행보 때문에 더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로만에 대한 매니아들의 반응이 크게 의미있진 않을 듯...』
작년 연말 로만 레인즈에 대한 비토가 심할때, 레닷 사이트에 욜렀던 제 생각 중에 일부였습니다. 지금 보면 정말 웃기는 글인데, 괜히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서 읽으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아무튼 그때 제가 올린 글의 내용이란 요약하자면 이랬어요. '트위터만 보면 항상 선거는 야권이 이기는것 같고 표까기도 전에 결판 난것 같은데 정작 투표 끝나고 보면 늘 여권이 승리한' 경우가 많고, '넷상의 반응이라는건 생각보다 극단적이면서도 생각보다 실제와 유리된 측면도 있다' 라는 거였죠.
즉 레인즈를 줄창 밀어줘서 역반응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어쩌겠냐. 그거랑 흥행은 별개의 일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 쪽 노선(대중성)만 계속 노리면, 코어한 팬들의 불만은 들을지언정 돈은 벌거다...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WWE 시청률은 역대 최악을 기록하고 있으며 다른 흥행 지표들도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습니다. 누적된 팬들의 반발은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올라와 있고 현 상황을 타파할 다른 계기도 보이지 않네요. 제가 1년전에 세상 다 아는듯 깝치며 나불거렸던 말은, 완전히 병신 레알못의 개똥 같은 소리가 된 겁니다.
'막장이다 막장이다 해도 설마하니 이 정도로 막장일 준 몰랐습니다.' 라는 것도 물론 이유로 들 수는 있겠지만, 왜 그런 식으로 판단을 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을 해보니 나오는 결론은, 제가 '존 시나 효과' 에 빠져 실제 현상을 굴절된 눈으로 보게 되었던 게 이유 같았습니다.
14년 이전까지의 WWE는 매니아들의 엄청난 비난을 계속 누적해 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이는 제국의 위상은 공고했습니다. 물론 폭발력만 보면 애티튜드만 못해도, 상승세의 최고점인 애티튜드에 걸맞는 흥행력을 꾸준하게 보여준다는 것만 해도 대단했다고 할만 합니다. 시청률은 꾸준히 떨어져 가도, 아직까지는 '시대의 변화 흐름' 의 일환이라고 여기며 안심할 정도는 됩니다. 여기서 이상한 모순이 생기죠. 대다수 팬들은 요즘 WWE 재미 없고 막장이라고 까는데, 흥행은 또 잘되니까.
레메 26 이후 그런 반응의 양극화 현상이 더욱 극심해졌습니다. 팬들은 존 시나가 넥서스를 두들겨 팼을 때 욕을 퍼부었지만, 시나가 나왔을때 시청률은 급상승했습니다. 레메 27은 전년도 레메 26에 비해 쓰레기 같은 퀄리티 였지만, 놀라운 흥행을 거두며 전년도의 상업적 실패를 제대로 만회 합니다. 논란의 더 락과 시나의 퓨드가 이어지고 대다수 매니아들에게 비판을 받은 '일생에 단 두번' 이 펼쳐지지만, 레메 29는 또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빈스 맥맨은 1조원이 넘는 돈을 굴리며 포브스 지를 장식합니다. 존 시나 썩 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져가지만, 시나의 페이스북 팔로워 수는 전 세계 스포츠인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팬들의 불만이 완전히 폭발하지 않고 불만과 '기다려보자' 의 반응이 혼재되있던 작년까지만 해도, 마치 소위 말하는 라이트팬적인 시선과 매니아적인 시선이 가장 갈리던 듯한 양상이었습니다. 어린이, 여자, 가족으로 대표되는 라이트팬과 성인 남성으로 대표되고 인터넷에 글을 쓰는 매니아 팬으로요.
그러니 이렇게 생각이 되게 됩니다. 세상은 라이트 팬과 매니아 팬으로 나뉘어 있고, WWE의 방향은 매니아들에겐 욕 먹어도 라이트팬들을 위한 길이다, 지난 몇년간 그렇게 성공을 거두었고 실적도 거두었다. 좀 마음에 들지 않을 순 있어도, 이게 결과적으로는 옳은 길이 될 수 있을 거다... 라고 말입니다. 인터넷 팬들의 반발에 대한 WWE 관계자들이 한 그동안의 언급이 이런 식이었고, 저도 그때까지는 그 소리에 순진하게 잘 넘어가게 되더군요.
그런데, 결국 지금 알 수 있는건 그건 다 거짓말이었고, 왜곡된 진실이었다는 겁니다. 라이트 팬과 매니아 팬의 구분도 모호하고, 팬들이 욕했던 팬들이 자기 마음대로 쇼를 좌지우지 하려고 해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재미가 없었다는 것 뿐이에요. WWE는 꾸준히 덜 떨어진 짓을 했고, 쇼는 다른 말 다 떠나서 그냥 재미가 없어졌으며, 볼 이유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럼 그동안은 어째서 그러고도 버틸 수 있었느냐 하면, 그 모순을 깨는 답이 바로 존 시나인거죠.
딱 9년전에 굉장히 많은 레슬링 팬들은 존 시나를 진심으로 죽이고 싶어했습니다.
그냥 보기 싫다거나 마음에 안드니 야유 하는게 아니라, 시나에 대해서 거의 증오심에 가까운 감정을 보였습니다. 시나를 미는 방식은 지금 로만 레인즈보다 더 불도저식이었고, 시나에 대한 팬들의 야유도 지금 로만 레인즈보다 훨씬 강렬했습니다. 못 견딘 사람들 중엔 결국 손을 털고 아예 떠나서 '존 시나나 빠는 초딩들과 요즘 레슬링판' 에 대해 극도의 비하적인 모습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고, 남은 사람들도 좋아서 남는게 아니라 시나의 시대인 지금을 자신들에게 부여된 고통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어째서 오스틴과 더 락의 시대가 아니라 시나의 시대를 살고 있는가...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떠나게 한 만큼, 시나는 그만큼의 새로운 팬들을 이 곳으로 유입 시켰습니다. 그것도 그동안의 프로레슬링 업계가 거의 건드리지 못했던 팬층을 말이죠.
난치병, 불치병에 걸린 어린이들은 착하고 정의로운 영웅 시나를 보면서 병마에 지지 않고 싸울 용기와 힘을 키워나갔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들은 멋지면서도 무섭지 않은 시나 형을 보면서 마음에 위안을 얻었고, 수많은 어머니들이 힘든 아이에게 용기를 준 시나에게 유투브로 감사를 표했습니다. 여성 팬들은 친절하고 친근하며 선량하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시나에게 환호했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도 사위감으로 삼고 싶은 듬직한 청년의 매력에 반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 편견에 눌린 자, 세상 풍파에 짓눌린 자, 용기를 잃은 자, 열정을 잃은 자, 이 세상 수 많은 약자들이 존 시나라는 강하고 멋지면서도 위트있고, 그러면서도 저 멀리가 아닌 우리 바로 옆에서 같이 손을 잡아주는듯한 영웅에게 위안을 받았습니다.
락은 콘서트에서 "시나를 빠는 남자팬들은 평생 여자랑 자보지도 못하고 스타워즈와 반지의 제왕만 보는 씹덕후들" 이라는 식으로 비하했는데, 사실 그 위대한 락조차도 그런 팬들을 끌어모으진 못했습니다. 락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요. 시나를 제외하곤.
그게 결국 '존 시나 효과' 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나가 있었을때 WWE의 결정과 판단은 '시나를 중심으로 끌고 간다' 는 것 외에는 정말 멍청하고 덜 떨어진 결정들이 많았습니다. 존 시나 본인이 쓰레기 같은 각본을 소화한 적도 많았습니다. 12년의 케인 - 잭 라이더 관련 각본은 처음부터 끝까지 쓰레기 였고, 그 외에도 많았죠. 꼭 존 시나 뿐만 아니라 대니얼 브라이언이 18초 만에 패배하고, 챔피언 CM 펑크가 한번도 메인이벤트를 맡아보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 모든 장대한 삽질등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것이 만회 되었건 것은 시나의 존재 때문입니다. 떠나는 팬들만큼의 새로운 팬들이 시나를 보기 위해 WWE를 봤고, 형편없는 각본과 기존 선수 의존증으로 특급 신인들이 잘 자라나지 못해 인재 기근이 펼쳐져도 시나의 존재감 만으로 쇼는 매진이 되었습니다. 프로레슬링의 입지가 점점 약해지고 Raw의 시청률이 떨어져도, 이미 그 자체로 최고 수준의 셀러브리티인 시나 때문에 WWE는 계속해서 매체의 포커스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시나는 이 업계에 남았습니다. 헐크 호건도 외도를 거듭했고, 에지와 오스틴은 누적된 부상을 더 버티지 못해 은퇴했으며, 바티스타와 락은 영화계로 자신의 재능을 가져갔고, 레스너는 견디지 못해서 떠났습니다. 제리코는 그 끼를 음악쪽으로 분출했고, 숀 마이클스는 은퇴했으며, 커트 앵글과 제프 하디는 TNA로 갔습니다. 하지만 시나는 WWE로 인해 이미 평상 먹고 살만한 억만장자가 되고도 여전히 떠나는 대신 남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나를 뒤에 있는 동안 WWE가 그동안 했던 건 매니아 팬들을 버리고 라이트 팬을 취하는 방향이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꾸준히 노잼이 되어갔을 뿐이죠. 신진 스타의 부족, 현 로스터의 위상 약화, 연결성이 부족해지는 스토리, 1차원적인 진행, 역할 없이 남아도는 로스터 등등 지금 지적 받는 모든 문제들은 하루 아침에 갑자기 짠 하고 나온게 아니라, 언더테이커와 숀, 바티스타, 트리플 H 등등 기존 거물 선수들이 전부 은퇴 하거나 파트타임으로 전환되던 5, 6년전부터 나오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조금도 나아지는 기미는 없었구요.
하지만 WWE의 그 모든 엉터리 짓은, 존 시나라는 불세출의 스타에 존재감 덕분에 비호됩니다. 계속된 비판이 나와도, 시나가 끌어모으는 팬층들로 인해 그게 '그들만의 리그' 에서 그들이 주장하는 소수 의견 정도로 매도되고,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는 시나의 영향으로 "마음에 안 들 수는 있겠는데, 대국적으로는 이게 맞아" 라는 식으로 단정지어집니다.
바로 이게 착시 효과죠. 옳은 길을 가는게 아니라, 엉터리로 가고 멍청한 방향을 잡아도 그게 시나의 거대한 존재감 때문에 가려지는 겁니다. 가려지면 다행이지만, 그게 '올바른 길' 로 포장된다는 게 더 문제죠.
실제 상황은, 옳은 길로 가고 있는게 아니라 시나의 등에 업혀 캐리되고 있는 쪽에 가까워 보이는데 말입니다.
시나의 시대는 그렇게 가는 것도 좋다 이겁니다. 그럼 로만 레인즈가 제 2의 시나가 될 수 있을까요?
WWE가 레인즈를 시나처럼 마구 밀어주는 건 가능하겠죠. 근육 많고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강함을 시나 이상으로 부각시킬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가장 적대적인 팬들 앞에서도 마이크 하나 쥐어주면 무대를 장악하는 시나의 다른 천재성을 레인즈에게 이식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레인즈에게 시나처럼 선량한 이미지를 부여하기도 어렵고, 모두에게 정감 가는 따뜻한 친근함을 부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처럼 성실하고 사랑받는 캐릭터를 만들기도 어렵고, 그 시나의 모든 캐릭터에 근원이 되는 선하고 바른 인격과 강철 같은 정신력을 부여하는 건 아예 불가능 합니다.
단순한 무적 선역 캐릭터는 넘칠 정도로 많습니다. 시나의 캐릭터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지구를 한바퀴 돌며 위험하고 미친 악당들을 때려눕히다가도, 주말에는 조카와 놀아주며 할머니와 할머니의 마을 회관 친구들에게 집 정원에서 바베큐를 구워 주는 듯한 캐릭터죠. 아주 단순하고 쉬운 1차원적 캐릭터 같지만, 실제로는 정말로 입체적인 캐릭터입니다. 오스틴이 그 부분을 지적한 적이 있지요.
이런 레슬링 스타가 과연 또 나올 수 있겠습니까? 제 2의 오스틴과 제 2의 더 락이 나올 수 없는것처럼, 제 2의 시나 역시 나올 수는 없습니다. 시나가 스타가 된 건 WWE가 그만큼 흙 속의 진주인 인재를 잘 키워내서가 아니라, 시나 자체가 그만큼 불세출의 스타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WWE는 존 시나를 자신들의 공식으로 키워낸것처럼 생각하고, 로만 레인즈로 시나의 뒤를 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적어도 지금까지, 시나 같은 사람은 역사상 시나 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출처 | http://wmania.net/forum/32453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