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26. 목요일
춘심애비
연대의 필수교양 승리의 필수교양 |
한때 젊음의 상징이었던 청바지. 제임스딘을 통해 전세계인의 보편적 의복문화로 완전히 정착한 지도 벌써 수십 년이 지난 그 청바지.
필자는 문득 궁금했다. 어릴 때는 핀토스와 Lee, 뱅뱅이 대표브랜드였고, 중딩 때는 Guess, CK와 함께 NIX, Storm, Levi's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세븐진, 디젤, 트루릴리전, 에비스 등등 수많은 브랜드들이 서로 간지난다며 싸우고 있는 와중에 아직도 톱스타들을 모델로 하여 광고를 쌔리고 있는 뱅뱅은 과연 누가 입길래 저런 광고비를 충당하는 걸까.
질문은 이렇게 그냥 아주 시덥잖은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뼈저릴 지, 이때는 알지 못했다.
글타. 이거슨 패션 이야기가 아니다.
이거슨 엄연한 정치 이야기이다.
1. 뱅뱅을 누가 입는가
일단 뱅뱅 얘기를 하기 전에, 이 글의 사회문화적 포지션을 밝히는 차원에서 필자 얘기를 간단하게 하자. 굳이 이 얘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패션에 관심이 좀 있긴 하지만 돈 쓰는 건 싫어해서, 거의 대부분의 옷을 동대문에서 구매한다. 검소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명품류는 별 욕심도 관심도 없다. 하지만 예쁜 옷을 사려는 욕망은 있는, 그런 류의 서울 사내다. 그리고 올해 한국 나이로 32세, Y세대라던가 N세대라는 말을 들었었다. 청바지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NIX, 리바이스를 사고 싶어 하며 중고딩 시절을 보냈고, 어쩌다 한두 벌쯤 사보기도 했으며, 디젤 같은 30만 원대 청바지에도 관심은 있지만 사지는 않고, 보통 유니클로나 동대문표 청바지를 산다고 보면 되겠다.
그런 베이스에서, 필자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뱅뱅을 입어본 적이 없고, 매장에 들어가본 적도 없다. 완전히 관심 밖의 일이다. 나와 유사한 사회문화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아마 비슷하리라 본다. 관심 자체가 없다. 뱅뱅이라는 브랜드. 혹시 공짜 쿠폰을 한 50만 원 어치 받았더라도 뱅뱅이라는 티가 가장 안 나는 옷을 고르려 애쓸 거다.
암튼 필자는 그렇다. 그리고 필자의 지인들도 대부분 그렇다. 차라리 시장에서 2만 원 짜리 싸구려를 사더라도 뱅뱅은 사지 않는 감성을 공유한다. 그러니까 필자는 <청바지에 대해 이런 감성을 지닌 부류>이다.
그런 필자는 앞서 말한 호기심을 어느 날 갑자기 느끼게 됐다. 뱅뱅을 도대체 누가 입는가 말이다. 그래서 검색을 해봤다.
뱅뱅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는 뱅뱅 어페럴의 연 매출 규모.
씨바. 2400억이다. 2009년 연매출이 2480억.(출처 : 다음까페 '백호회')
물론, 에드윈, UGIZ 같은 다른 브랜드 매출도 섞여있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2006년 뱅뱅 단일 브랜드 매출이 1850억이다. (출처 : 패션비즈. 2006년 2월27일 기사)
단일 브랜드가 이정도 규모의 매출을 올리는 거. 씨바 존나 대박인 거다.
참고로 구찌가 2800억, 버버리가 1850억, 리바이스는 1000억이다.
패션업계에 종사하는 친구와 술자리에서 물어봤다. 매출 2천억의 의미.
그쪽 업계에서는 브랜드 대박의 기준이 연매출 1천억이랜다. 어떤 계통에서 탑플레이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써의 상징이 1천억. 즉, 2천억 정도면 그냥 청바지시장을 압도하는 브랜드라는 얘기랜다.
그리고 콕 찝어 말했다. 국내 청바지 1위는 뱅뱅이 맞다고. 수 년 간 부동의 1위라고.
필자는 정신이 아뜩해졌다. 도대체 내 주변에는 단 한 명도 뱅뱅을 입지 않고, 오히려 시골에 계신 할머니와 친지분들은 아예 브랜드가 없는 걸 사면 샀지 굳이 뱅뱅을 안 사는데, 도대체 누가 산단 말인가. 대구 부산 광주 대전 같은 지방 대도시는, 패션에 대해서는 별 차이가 없어서 다들 해외브랜드 입고 다니는 거 같고, 아싸리 패션에 관심이 없으면 그냥 보세를 입더란 말이다. 필자 머리 속에서 뱅뱅을 입을 사람들이라고는 지방 중소도시나 읍 이하 단위에 거주하여, 다른 브랜드를 구매할 기회가 없는 사람들뿐인데 뱅뱅이 그렇게 지역 유통망이 좋아보이지도 않거니와, 그사람들의 총 구매액수가 대도시들의 총구매액수를 그렇게 상회할 리도 없어보였다.
필자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혼란스러워할 때 즈음 그 친구가 말했다.
필자는, 맥락상 꽤 의외의 답일거라고 생각하고 머리를 굴렸으나 골프라는 스포츠의 특성상 촌스러운 브랜드가 아예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 때 그 친구의 대답을 듣고, 필자는 완전히 넉다운됐다.
2. 우물밖 개구리
오해 없길 바란다. 필자는 잔디로나 뱅뱅을 구매하는 분들을 폄하하거나 촌스럽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앞서 필자가 굳이 청바지에 관한 필자의 패션 정체성을 얘기한 건, 이런 특징을 가진 필자는 뱅뱅과 잔디로가 부동의 1위 브랜드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상상조차 안 된다>는 표현이 맞다.
필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뱅뱅이 부동의 1위 청바지 브랜드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하겠을 거다.
즉, 이 땅에는 뱅뱅을 입는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들의 존재를 새까맣게 모르고 사는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세계 속에서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분명 서로 같은 공간에서 같이 일을 하며 살겠지만 나는 뱅뱅을 입는 그들을 마치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만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필자는 문득, 소름끼치도록 섬뜩한 사실을 깨달았다.
생각이 저 지점까지 왔을 때, 필자는 대략적으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만치도 모른 채 살아간다' 정도로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아뿔싸… 그게 아니다. 나는 그들을 모르지만,그들은 나를 안다. 무슨 말이냐고?
생각해보자. 티비에는 온통 패션, 트렌드, 스타들의 옷차림과 화장술, 새로운 헤어스타일이 판을 친다. 아무리 시골 할매여도 티비나 신문을 본다면, 몇몇 명품 브랜드는 알 것이고 그 브랜드들이 잘 나간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즉, 뱅뱅을 입는 사람들도 리바이스나 CK 같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청바지 브랜드가 있고, 그 브랜드가 많이 팔린다는 사실은 안다는 얘기.
반면 나는 몰랐지 않은가. 뱅뱅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입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들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존재를 안다. 씨바.
필자는 분명 이런 생각을 했다. 뱅뱅 사는 사람들에게 유니클로 UJ가 더 이쁘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안타까운 생각. ㅆㅂ 헛소리였다. 내가 뭘 가르쳐주고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아는데 나는 그들을 모르지 않았는가. 그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한 주제에 뭘 가르쳐준다는 말인가.
말하자면 필자는, 스스로가 우물 밖에 서서 우물안 개구리에게 뭔가 해주고 싶다는 알량한 마음을 가졌다는 얘기다. 얼마나 하찮은 생각인가. 오히려 우물 안을 전혀 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건 필자 자신이었는데. 우물 안 개구리는 최소한 우물 밖의 일부분이라도 보고 있지만, 우물 밖 개구리는 우물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게다.
이리하여 필자의 뱅뱅이론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유사한 사례는 뱅뱅 말고도 많을거다.
단적으로 '세계 인구가 100명이라면'이라는 글을 본 적 있을거다.
그 내용에 따르면, 세계 인구 중에 PC를 소유하고 있는 인구는 2%에 불과하다. 아마도 저 글이 나왔을 시점보다 지금은 PC보급률이 올랐겠지만, PC시장이 갑자기 몇천%씩 성장했을 리 없으니 이 글을 보고 있는 딴지스도 전체 인구의 10% 이내에는 속한다는 얘기다.
또 먹을 밥이 있고, 잠을 잘 집이 있는, 소유가 아니라 월세방이라도 있는 인구가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하다.
전세계가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든 거 같지만 스마트폰 누적 판매량을 다 더해봤자, 1억 수준이다. 1.5%정도.
저 수치.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으셨나? 인구 전체로 볼 때 <내가 특이한 부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고 계신가? 이 와중에, 집도 밥도 없는 75%는 집도 밥도 없는 사람들이 존나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PC와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은, PC와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이 꽤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다.
누가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야할까. 그리고, 스스로가 더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는 어느쪽일까.
가만. 이런 구도 어디서 좀 본 거 같지 않으신가.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부류가, 다른 부류의 존재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태.
SNS와 4.11 총선.
3. 뱅뱅이론의 적용
뱅뱅이론은 단순히 서로 다른 부류가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살아간다는 사회문화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부류가 지니게 되는 모순적인 편협성이라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즉, 집에 티비가 없어서 뱅뱅 광고를 못봤기 때문에 뱅뱅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은 뱅뱅이론에 해당하지 않는다. 패션에 관심이 많아서 뱅뱅을 다소 무시하는 듯한 마음을 지닌 자들이, 뱅뱅의 브랜드파워를 모르는 상황에 대한 얘기다.
트위터는 정확히 이 예에 부합한다. 트위터가 세계를 아우르는 것 같지만 2012년 공식 발표된 활동 사용자수는 1억 4천만 명이다. 인구대비 2%도 안된다. 반면 트위터 사용자들의 상당수는 트위터가 인간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리라 생각하곤 한다. 자스민 혁명에도 공헌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트위터를 쓰는 사람들은 이미 트위터를 쓰고 있다. 트위터러들에게 있어서 트위터는 마치 증기기관, 전기, 전화, 컴퓨터처럼 역사와 기술이 발전하면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라고 받아들여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트위터와 함께하는 삶이 <보다 더 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트위터러들은 본인들이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고, 이와 동시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비(非)트위터러들이 살고 있는 2012년의 삶이 어떨 지에 대해 오히려 생각하기 힘들다.
반면 트위터를 쓰지 않는 사람들은, 트위터 사용자들을 보며 살아간다. 트위터러들이 어떤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는 못해도 신문과 뉴스에 트위터에 대한 기사는 나온다. 반면 신문과 뉴스에 트위터를 쓰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기사는 성립하지 않는다.
나꼼수도 마찬가지. 나꼼수를 듣는다는 것이 더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므로, 그 반대의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더 어렵다. 나꼼수 기사는 나오지만 나꼼수 안 듣는 사람의 기사라는 건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혼란스러워 했고, 너무 큰 기대를 했다. 필자만 해도 이 뱅뱅이론이라는 걸 작년부터 생각했는데도 이번 총선이 뱅뱅이론의 근거가 될 지, 뱅뱅이론이 틀렸다는 근거가 될 지 전혀 예상치 못했다. 4월 12일날 꽤나 허탈했던 걸 보면, 뱅뱅이론이 틀렸을 거라고 믿었던 거 같긴 하다.
가슴 아프게도, 뱅뱅이론이 맞았다. 우리는 우리가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반대로 우리까지 바라보고 있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