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을 넘어
뫼이건 산(山)이건 서있고
내이건 천(川)이건 흐른다
한낱 글자만이 변할 뿐이다.
백제의 고토에도 봄은 오고
천년의 고도에도 비는 온다
사람 말씨만이 다를 뿐이다.
거지도 웃음있는 사람이고
부자도 눈물있는 사람이다
다만 빚 받을 놈 줄 놈 차이는 좀 있다.
그러나 우리는 뫼나 산을 들먹이며
그까짓 사소한 내나 천을 들먹이며
그따위에 서로를 힐난치 않는다.
이제 허울뿐인 부에 홀리지 말고
이제 촛불같은 맘에 헐뜯지 말자.
그냥 뫼도 산이고 산도 뫼라 부르듯
우리도 말씨나 돈푼 따윌랑 잊어버리고
내처럼 천처럼 살아보자.
빼앗긴 집에도 봄은 오는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사각의 종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A4용지에서 올라가는 숫자에 한숨쉰다.
길을가면 보이는게 집인데,
깨어나면 지어지는 집인데.
오늘도 민초는 셋방살이로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도 민중은 내집마련을 꿈꾸며 살아간다.
주인도 없고, 월세도 없고 전세도 없던
그 한 옛날에 내집 내마당에 살던 민초.
그들의 빼앗긴 집에도 봄은 오는 것일까.
그들의 빼앗긴 꿈에도 봄은 오는 것일까.
초가삼간같은 자그마한 집이라도 가지고
오손도손 살아가는 날이 언젠가, 언젠가
오리라 믿으며 살아간다
속박의 진주 조개
'살기 위해서는 초원의 가젤과 사자가 되어야 합니다.'
생존이 아닌 식욕을 쫓는 자들의
그 가찹고 허망한 헛소리들이
저열한 이기의 족쇄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잔혹한 현실의 그물에서
우리는 양식장의 진주조개가 된다.
더 큰 욕망의 구슬을 위하여!
그물 속 자유로운 속박에서
우리는 우리네의 인내와 고난을 허송한다.
안전한 그물창에 들어 앉아
칙칙한 싸구려 진주알을 뭉쳐댄다.
그것이 세상이라고 속없이 지껄이며
포식자 없는 낙원에서 검게 퇴색하여 썩어간다.
깨달아야만 한다.
그리고 가야만 한다.
허황된 그물의 바다를 부수고 바다로,
참시련이 있는 진실의 바다로 가야만 한다.
시뻘건 불가사리의 아가리에 맞서
핏기어린 눈물과 땀의 껍데기를 덧씌우는
바닷속 밑바닥에서도 당당한 진주조개가 되어야한다.
그리하면 우리 인고의 세월이 지나
이 어둑한 심해까지 빛이 닿는 그날
영롱한 순백의 진주를 남기리라.
그곳에 있다
내리쬐는 태양의 계절이 가까우나
우리의 피부는 눈처럼 희어져만 가고
맘흔드는 그대의 머릿결 흩날리나
우리의 심장은 냉기속에 굳어만 간다
어둑하고 음산한 그리고 슬픈 그곳
열기와 습기의 생명이 넘실대는 지금
한기와 먼지의 허상만이 가득찬 그곳
우정을 죽이고 사랑을 삭히며
이기를 배우고 차별을 깨닫는
승리한 자만이 살아남는 그곳
모든 추악을 제련하고 사랑을 토해내는
그 건조함과 냉기만 멤도는 이기의 방
그곳에 우리가 머물고 있으며
그곳에 우리는 자신을 묶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침잠의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으리!
내 마음이 저 멀리 하늘을 날아
다가올 태양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으니
언젠가 생명의 빛이 돌아오는 그날
그곳에서 붉게 타오르는 심장을 품은
검게 그을린 피부의 우리가 있으리라.
폭풍이 내리는 날에
사실이 내 마음을 흐물었다.
내리는 비가 폭풍이 되리라는
그 잔혹한 사실이.
아, 얼마나 소나기를 바랐는가.
둔기같은 바람의 격정도
화살같은 번개의 무리도
내게 폭풍은 너무나 거대하기에
그렇게 소나기를 바랐건만
폭풍이라니.
나는 젖은 신문지가 되버렸다
어떤 손길도 견딜 수 없이 비루한.
내 안의 텅빔이 나를 삼키어 갔다.
천천히...
천천히...
.
.
.
.
.
그러다 문득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구원을 보았다
하늘을 집어삼킨 공포스런 구름 떼 사이
찬란하고 강렬한 해와 너무나도 파아란
시리도록 파랗게 빛나는 그 하늘을.
그래, 하늘은 언젠가 돌아오리니!
아무리 두텁고 거대한 녀석들도
결국 열기와 푸름에 흩어질 것이니.
나 이제 돌아올 그대를 믿고 기다리리
잔혹한 저 비바람에 당당히 맞서살리.
우전(雨前)의 심상
초여름의 늦된 오후가 습하다.
교정의 자그마한 정원 사이로
매미의 메에엠 소리가 소란스레 울려퍼진다.
저녘 어스름함의 하늘은
폭풍전야의 짓푸른음에 짓눌린
까아만 먹구름떼에 뒤덮여 있다.
잠깐의 소나기가 내리고
더러운 잿빛공기가 쓸려나간
별의 미리내로 장식된 청명한 밤바다를 볼까.
아니면 태풍이 휘몰아쳐
쉼없이 비바람을 쏟아내며
어둠의 공포속에 침잠된 흐린 안개떼를 볼까.
알 수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미래의 여명을 희망한다.
북쪽에서의 강철비와 가난한자의 비명속에
그저 내 앞길 찾는 어리석은 내게
그것은 너무나 아리송할 따름이다.
꿈의 다음 이야기
무난하게 사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이야기다
어려운 삶이 아닌 삶은 삶이 아니기에
다섯 꼬마의 삶이나 여든 노인의 삶이나
의미가 없다면 삶은 똑같이 죽은 것이다
무난은 그저 나에게서 '나'를 앗으려는 세상의 속임이니.
무난하게 사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잃어버린 하늘을 되찾고 싶을 뿐이다
언젠가 잃어버린 나와 당신의 하늘
지금의 권태로운 무난의 삶을 원했는가
아니면 시련너머 행복의 삶을 바랐는가
그저 세상에 빼앗긴 그 아련한 하늘을 되찾고 싶을 따름이니.
무난하게 사는 것 따윈 원치 않았고 않는다.
다만 꿈의 다음 이야기를 만들고 싶을 뿐...
이 꿈결같은 나라의 오후
황혼의 어스름함과 창공의 푸르름이 있는
이 꿈결같은 나라의 오후에 서 있다.
모두가 꿈을 꾸는 나라
모두가 잠을 자는 나라
모두가 꿈결에 서성이는 그곳에서,
스스로 변화해야 하지만
변화를 기다리는 그들은
단지 바라기만 할 뿐 꿈속을 헤멘다.
자신을 이끌어야 하지만
환상에 목메다는 젋음은
그저 뜨겁기만 할 뿐 잠꼬대만 한다.
아, 이 꿈결 같은 나라의
아, 이 꿈결 같은 오후의
모두가 꿈을 꾸고 있다.
모두가 잠을 자고 있다.
불꽃
나는 한 때 잿빛 세상에 살았다
홀로 쓸쓸히 앉아 마음을 잃어가는 나와
그저 앞만 보며 환상을 잃어가는 사람들과
기적을 잃고 죽어가는 나라만이 존재하는
그래, 나는 길을 잃고 방황하며 죽어가는
잿빛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보았다.
길가의 자그마한 촛불 하나를
길가의 자그마한 촛불 한 쌍을
길가의 자그마한 촛불 한 무리를.
자신의 마음을 열고
각자의 환상을 이야기하며
죽어가는 나라에 기적을 일으키려는,
잿빛 세상을 환하게 밝힐 색채를 가진
작지만 찬란한 불꽃을 나는 보았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세차고 사나운 비바람이
작고 연약한 그들의 불꽃에 달려들었다.
나는 곧 불빛이 사라져 버리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바라보았다.
촛불은 바람에 뒤흔들렸고
촛불은 빗물에 흠뻑 젖었다
그러나 불빛은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보잘것 없던 길가의 작은 불구덩이가
길가에 흐르는 작은 불줄기가 되었고
이윽고 길가를 뒤덮는 불꽃의 강이 되었다.
해도 없고 달도 없던 잿빛 세상에
내게 그것은 하나의 구원이자 혁명이었다.
타오르는 불꽃은 내게 마음을 찾아주었고
타오르는 불꽃은 사람들이 환상을 품게 했다.
지금, 강은 바다가 되지 못한채 사그라들었다
점점 죽어가는 세상에 기적이 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믿기에 나는 말할 수 있다.
내가 믿고 행동하고 우리가 믿고 움직여
마침내 우리 모두가 광장으로, 광장으로
자그마한 촛불을 손에 쥐고 걸어나온다면
자그마한 촛불로도 세상을 뒤덮을 수 있는
자그마한 촛불로도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불꽃의 바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이상향행 티켓
어떤 이들은 무언가를 바라고
어떤 이들은 무언가를 믿으며
그들이 원하는 이상향행 티켓을 얻으려 한다.
어떤 이들은 끊임없이 희망하고
어떤 이들은 끊임없이 상상하며
그들이 원하는 이상향행 배편을 기다린다.
그들은 이상향에 가기위해
그들은 악귀처럼 투쟁하며
그들은 이상향을 원하기에
그들은 끊임없이 기다린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이상향은 선택된 자만이 가는 곳이 아니고
이상향은 기다린 자에게 오는 곳이 아니다
이상향은 가야할 곳이 아니다.
이상향은 기다릴 곳이 아니다.
아, 이상향 그곳은 여기다.
아직은 터뿐인 이상향이지만
이곳이 그대들의 이상향이다.
그러니 그대여 이상향에 가려하지 말라.
그러니 그대여 이상향을 기다리지 말라.
다만, 이 빈 땅에 이상향을 세울 생각만 해라.
윤회
시간이 흐르면 바윗돌도 모래알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 호숫물도 웅덩이가 된다.
그래,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이 바뀐다고
모두 그렇게들 말하고 그렇게들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나는 시간이 흘렀어도
나는 세월이 지났어도
나는 당신을 미워하고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시간이 흘러도 흘러도
증오든 사랑이든 그 무엇도
바스라들지 않고 윤회하기 때문이다.
억만겁의 세월이 지나도 이것은 진리이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을 미워하며
그렇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
p.s 이걸 다 어떻게 썼는지도 모르겠고, 지금에 와서는 생각이 바뀐 글도 많지만 그냥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