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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14. 전야(2)
임창식의 도장에서 다시 회의가 열렸다. 여운형이 엔도와의 만남을 이야기했다. 늘 그랬듯이 그날도 행동제약이 비교적 적고 연락이 쉬운 사람들만 모일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을 지 의견들을 말씀해 주시오.”
“여동지의 말씀을 들어보니 우리의 계획을 그놈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소이다. 그 점 하늘이 우리를 돕는 걸로 생각되오. 내가 보기에는 우리의 거사계획을 마지막까지 숨기기 위해서는 엔도의 말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소이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것처럼 보이면 더욱 좋겠습니다. 완전히 믿도록 말입니다.”
“완전히 믿도록? 그렇게 만들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겠소만......”
이기범과 백상열은 들떴으나 여운형은 조심스러웠다.
“선생님, 그러나 어떤 문건에도 서명은 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잘못하면 합방을 합법적이었던 것으로 인정해 주는 결과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것으로 합방도 합법적으로 했고 권력도 합법적으로 이양했다, 그렇게 우기고 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왜놈들은 분명 그런 의도를 갖고 있을 겁니다. 거사는 아직 이틀이나 남았습니다. 그 안에 그놈들이 문건을 가지고 바다를 건널 수도 있구요. 또 여기서 즉각 선포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왜놈들이 보통 교활한 놈들이 아니질 않습니까. 그리고 내일이라도 항복을 해버리면 상황은 또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 점들을 다 계산에 넣어야 될 것 같습니다.”
“마동지, 걱정하지 마시오. 내게도 다 계산이 있소.”
여운형이 마동주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선생님께서는 문화재 밀반출을 이유로 내일 당장 치안권부터 달라고 하십시오. 왜놈들은 이제 우리나라를 더는 식민지로 유지하기에는 가망 없게 돼 버렸으니 그동안 가져가지 못한 문화재들을 한꺼번에 갖고 나가려고 할 겁니다. 최대한 막아야 됩니다. 또 왜인들을 한 명이라도 더 붙잡아두는 것이 동포 송환협상에 유리합니다. 그리고......”
강성종은 지난달에 부산에 갔을 때 청년단 부산지부에 이시이의 사진 몇 장을 주고 단원들이 그 얼굴을 기필코 외우도록 간곡하게 부탁하고 왔던 터였다. 그가 지시한 대로 최창익을 비롯한 광복군 특공대 2대가 거사일인 13일 새벽에 이시이의 관사를 덮치겠지만, 이시이는 그 이전에 피신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연합국에 제공권을 완전히 빼앗긴 지금 비행기로 본국으로 도주하기는 힘들 것이고, 열차로 이동해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탈 것으로 예상했다. 왜국으로 가는 데엔 현재로선 그게 유일한 길이었다.
“...... 이시이를 잡을 수 있다면 미국・소련과 협상하는 데 아주 요긴하게 쓰일 것입니다. 왜국과는 말할 필요도 없구요. 그놈을 죽인다 하더라도 신병만 확보하면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 협상에 쓰면 됩니다.”
모두 입을 벌리고 강을 바라보았다. 여운형이 웃으며 이기범에게 말했다.
“이 두 청년동지들만 있으면 안 될 일이 없지 않겠소이까, 이동지?”
“두 동지 모두 대단하오!”
이기범의 감탄에 맞춰 다들 소리나지 않는 박수를 쳤다.
“ 내가 구미호는 못 되더라도 팔미호는 되니 뒷일은 내게 맡기시고 이제부터는 다른 것들을 논의합시다.”
몇 가지를 더 이야기한 강성종은 바로 종로로 가 청년단원 송동호를 밤기차로 부산으로 내려보냈다. 여운형이 내일의 협상에서 치안권을 받아낼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독립이 되면 왜놈들이 붙인 이름 ‘경성‘을 서울로 부르자는 의견도 그날 채택됐다. 많은 것들을 우리 식으로 부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민’도 ‘국민‘이라 부르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부른 것은 왜나라의 ‘국민’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11일 새벽, 캉다오에서는 임정 요인 일행 13명을 태운 한 척의 기범선이 닻을 올리고 있었다. 선장은 장산곶 앞바다까지 고기를 잡으러 수도 없이 다녔노라고 큰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선에까지 연합국의 폭격기가 출몰하는 상황이라 한바다를 건너다가는 물귀신이 되기 십상이라며 발을 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배를 사는 것도 가능하다 싶을 삯을 요구했다. 몇 날 며칠을 애태우며 찾아보았지만 그나마 가겠다는 사람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거금을 줘야 했다.
드디어 배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리의 크기에 비해서 속도는 형편없었다. 뱃전에 와 부딪치는 파도를 보면서 모두들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들었다. 김구도 눈을 감았다. 중국땅을 밟은지 20여 년 만에 향하는 조국행이었다. 길고 긴 세월,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이제야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날 아침, 여운형은 엔도가 보내준 차를 타고 총독부로 향했다. 엔도는 과장된 몸짓으로 여운형을 맞았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걸어온 것도 아닌데 고생이랄 게 뭐 있겠소?”
차를 마시고 나자 엔도가 정색을 하고 문서를 내밀었다. 여운형이 조선 민족대표자회의 의장으로 명기된 문서였다. 얼핏 봐도 20명도 넘어보이는 위원에는 대다수가 부왜파였다. '대의당 대표 박충금'이 맨 앞이었다. 마치 그동안 자유로운 정당활동이 보장됐던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
“이양 합의문부터 작성하지요.”
“아니, 협상을 시작도 않았는데 무슨 합의문이오. 인수인계가 완벽하게 끝나고 작성해도 늦을 게 뭐가 있겠소.”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여운형은 엔도를 빤히 바라보며 완곡하게 거부의 뜻을 밝혔다. 도둑놈 제발 저린다고 엔도는 황황하게손을 내저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맞습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여운형도 나름대로 속이 탔다. 빨리 치안권을 넘겨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서두르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엔도가 누군가를 불렀다. 한 사내가 들어왔다. 여운형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놀랍게도 그자는 바로 박석운이었다. 만주 항왜무장투쟁세력 파괴・분열의 선봉장으로서 31년에 만주의 밀정조직 ’민생단’을 조직하는 일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자였다. 박가는 교활한 이간질로 중국공산당이 홍군 내 조선인 독립투사들 전부를 밀정이라 믿게 만들어 5백여 명이나 숙청시키게 만들었던 것이다. 민생단을 발판으로 만주국 정부의 국장에까지 오른 박가는 왜제의 패망이 시간문제인 것을 알고 부왜행각이 덜 알려진 경성으로 와서 은신하고 있다가 엔도와 연락이 닿아 얼씨구나, 하고 달려 나왔다. 권력을 넘겨받는 데 기여한다면 해방 후 면죄부를 받는 것은 물론 전과 같은 권세를 누리는 것도 명약관화한 일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여운형은 기분이 몹시 언짢았지만 내색을 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이놈들이 뭘 하자는 수작인가.
박가가 닭살이 돋을 정도로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오랜만이오.”
마지못해 인사를 받았다. 여운형의 음성은 노여움 때문에 다소 떨려나왔다. 엔도가 반색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시는 사이로군요.”
“알다 뿐이겠소......”
이놈을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라는 말을 여운형은 안으로 삼켰다.
“그럼 더 잘 됐군요.”
“......”
“여선생 같으신 분이 세세한 것까지 다 아실 필요야 뭐 있겠습니까. 마침 박상이 만주에서 왔으니 세부사항은 박상에게 위임하시고 여선생께서는 전체적인 권한만 이양받으시면 안 되겠습니까? 박상은 만주국에서 고위관리를 지낸 사람이니 실무문제는 알아서 잘 할 것입니다.”
“잘 모르겠소이다. 나는 관청이라고 해야 경찰서나 형무소밖에 몰라서 말이오.”
여운형은 과장해서 껄껄거리고 웃으며 엔도를 바라보았다.
“박상에게 설명을 좀 듣고 계시지요......”
엔도가 볼일이 급한 척 자리를 비켰다. 그 꿍꿍이속을 모를 여운형이 아니었다. 박가가 얼굴을 바짝 갖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