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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렌트카를 빌려 여행을 간 것까지는 좋았다. 산길을 달리는 도중에 내비게이션이 고장나 목표했던 곳과 전혀 다른 곳으로 와버리기 전까지는. 그리고 거기서 길을 잃어버렸다. 네비게이션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길을 따라 나있는 비포장도로를 달리기를 몇 시간 째, 어느 새 날은 어둑해졌지만 길은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안내 표지판 하나 보이지 않았고 하필이면 자동차도 갑자기 퍼져버리는 바람에, 친구와 나는 졸지에 조난 당하고 말았다. 휴대폰 전파도 제대로 잡히지 않을 정도로 깊숙이 와버린 탓에 친구와 나는 휴대폰 조명에 의지하여 산길을 걸어갔다. 어떻게든 전파가 닿는 곳까지만 가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믿으며 말이다. 그런데 분명 내려가는 길을 탔음에도 친구와 나는 도대체 이런 산이 있었던가, 의심이 들 만큼 산세가 험하고 가파른 길을 따랐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보조 배터리 하나 없는 상태에서 친구와 나의 휴대폰 전원이 방전이 되었다. 우리는 눈이 먼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마침 언덕 하나를 넘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전등 불빛이 보였다. 친구와 나는 이제야 살았다는 생각에 환호하며 그 작은 불빛을 나침반 삼아 다시 산길을 가로질렀다. 도중에 친구가 튀어나온 돌을 밟아 발목을 접지르는 바람에 내가 부축을 해주느라 배는 더 힘이 들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불빛이 안내하는 곳에 당도했다. 우리가 그 불빛의 근원에 도착하자,.제법 잘 차려진 2층 가정집이 나타났다. 분명 이 산에서 밭이나 일구며 사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놋쇠로 만든 사자얼굴 대문고리를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중년의 집 주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주인은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솔직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근처로 여행을 왔다가 차가 고장나서 그러니 전화를 좀 빌려주십사 했다. 주인은 나와 친구의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별말없이 비켜주었다.
“들어오시게.”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자마자 사방에서 조여오는 온기에 안정을 느끼면서 동시에 긴장이 풀어졌다. 친구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우리는 주인이 가져다 준 물 한 컵을 생명수처럼 받아 마셨다.
“여긴 전화가 들어오지 않는다네. 전화를 사용하려면 아래 마을까지 가야하네.”
당연한 소리겠지만, 나와 친구는 더 이상 움직일 힘도 없었다.
“내일 사람을 붙여줄테니 오늘은 여기서 쉬게. 방은 비어있는 방 아무거나 쓰면 되고.”
친절한 주인의 안내에 따라 아무 것도 없이 휑한 방으로 들어간 나는 방바닥에 등을 붙이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난 오래 전, 고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래된 태고의 시간 속에 있었다. 나는 어떤 죄를 저질러 내가 있던 공동체로부터 벌을 받았다. 벌은 내 두 눈을 뽑고 황야로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건 그야말로 사형이나 다름없는 벌이었다. 꿈 속의 나는 눈을 잃고 손을 앞으로 뻗은 채 연신 넘어지며 황야를 헤맸다. 손에 잡히는 것은 뭐든지 먹었고 아무데서나 잠을 잤다. 제대로 먹지 못해 쇠약해진 나는 하염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의 불씨를 그러쥔 채, 나는 내 스스로 가둔 내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느꼈다. 그 절대적인 공포의 존재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둠은 공포가 아니라 당연히 존재하는 또 하나의 진리였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인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미쳐버리기로 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 있던, 태고의 지배자는 미쳐버린 나를 비웃으며 더 깊은 어둠으로 되돌아갔다. 나는 그 지배자가 지니고 있던 힘과 공포를 공동체에게 경고했지만, 다들 나를 미쳐버렸다며 들어주지 않았다. 미쳐버린 나는, 언젠가 반드시 돌아와 다시금 지상을 지배할 미지의 존재가 주는 공포에 질려 숨이 멎었다.
귀를 깨우는 한 남자의 음성이 나를 꿈 속에서 일으켜 세웠다. 낯선 곳에서 맞은 아침은 눈이 따가울 정도로 선명한 햇빛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눈을 찌푸리는 와중에도 나는 꿈속의 이미지가 계속 떠올라 눈 뒤쪽을 후벼파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왔다. 거실 스피커에서 처음 듣는 해괴한 언어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를 깨운 건 바로 저 소리였다. 아침 라디오 방송이라고 하기에는 경건했고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언어가 일정한 음률로 계속 반복되었다. 나는 그게 일반 방송이 아니라 어떤 종교의 기도문이라 짐작했다. 기도는 5분 간 계속 되었다. 마침내 기도가 끝나자, 나는 화장실을 빌려 대충 물로 얼굴의 기름기와 먼지만 씻어낸 다음 밖을 나왔다. 그때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나를 부엌으로 불렀다. 식탁에는 소박하지만 근사한 아침밥이 차려져 있었다. 뱃속에서 천둥이 요동쳤다.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할 새도 없이 차려진 상을 해치웠다. 내가 한 상을 해치웠을 때쯤 친구도 방에서 나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게걸스럽게 밥을 해치웠다. 우리는 마치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주인이 차려주는 밥을 탐했고, 급기야 식후주까지 얻어마셨다. 주인이 직접 담갔다는 그 술은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미주(美酒)였다. 혀에 닿는 순간 미뢰를 자극하는 달디단 첫맛은 혀를 타고 들어가 혀뿌리에서 스며들듯 사라졌지만 그 여운은 입안 전체로 퍼지고 그 향은 내 뇌리에 강렬하게 남았다. 위스키나 브랜디 같은 증류주와도 다르고 벌꿀주나 와인 같은 양조주와도 다른 농후한 맛이었다. 이런 술이라면 당장에 팔아도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니, 이 술이 시판되는 순간 주류 업계의 판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 자명했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뭘로 담근 거죠?”
친구의 의견도 나와 같았다. 오히려 친구는 나보다 더 격정적으로 미주의 맛에 빠져든 듯했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든다마다요. 태어나서 이런 술은 처음 마셔봅니다. 뭐라고 부르는 술인가요?”
“여기서는 넥타르라고 부른다네만.”
“넥타르! 신들의 술! 정말 이름 잘 지으셨네요. 어젯밤에 길을 잃고 고생했던 게 이 술 한 잔으로 다 보상 받은 기분이에요.”
“귀한 재료로 담근 거라네.”
친구는 그 넥타르라는 술을 몇 잔 더 받았다. 나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처음 마시는 한 잔만 받았지만 친구는 2잔이나 더 받아마시고도 못내 모자란 눈치였다. 조금 신경쓰이는 식사를 마친 뒤, 친구와 나는 앞으로의 일을 얘기했다. 가장 현실적인 안은, 내가 먼저 전화가 되는 마을로 내려가서 도움을 구하고, 이후 친구를 데리러 오기로 하는 것이었다. 왜냐면 친구의 접지른 발이 점점 부어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순순히 친구의 체류를 허락해 주었다.
“그럼 나도 준비해야 할 게 있으니 점심 전에 출발하기로 하지. 그동안 준비하고 있게나.”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친구는 손으로 잔을 꺾는 시늉을 했다.
“넥타르를 한 병이라도 얻어갈 수 있을까요? 사례는 하겠습니다.”
친구에게는 그 술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나 보다.
“사실 넥타르는 마을 사람들만 주는 건데…”
“그러지 마시고, 섭섭하지 않게 드리겠습니다.”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야. 돈은…”
“그럼 어떻게 하면 되죠?”
“마을 사람이 된다면야…”
친구는 그 말에 조금 망설이는 듯했다.
“마을법이 그렇다네. 이해하게.”
친구는 거기까지 말하는 주인의 말에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주인이 남은 넥타르 술병을 천장 어디에 넣어두는지 놓치지 않았다.
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친구는 배도 부르고 어제 산길의 피로가 아직 가시질 않았으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잠이나 계속 자고 있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아침의 그 미주를 한번 더 맛보지 못해 적잖이 심통이 난 모양이다. 난 짐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 점심이 되기 전까지 시간도 남아 마을이나 둘러보기로 했다.
마을의 가옥은 다섯 채가 다였다. 그러나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집은 오직 주인의 집 하나 뿐, 다른 곳은 집앞에 잡초도 무성했고 대문도 엉성했다. 주인의 집 뒤에서 낡은 1ton 트럭을 발견한 나는, 이 차가 우리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줄 유일한 수단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타이어도 마모가 심해서 이런 차로 과연 산길을 내려갈 수 있을까, 걱정하는 찰나, 아침 기상 때 들었던 그 기도문이 다시 들려왔다. 그러자 그 신호에 맞춰, 집안에서 하나둘 주민들이 나왔다. 나는 그 중 한 남자와 마주쳤다. 외부인인데 고깝게 볼까 염려되어 예의상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남자는 내 인사를 본체 만체 자기 길을 갔다.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진 듯 동작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갈수록 이상한 마을이다, 생각하며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기도문으로부터 제정신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생각하는 것을 멈추고 관찰하는 것만 남았다. 나는 마을의 조금 높은 지대까지 올랐다. 그러나 어디를 둘러보아도 오로지 산골짜기 뿐, 근처에 다른 민가나 마을이라고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 나라에 아직도 이런 마을이 남아있었던가, 하고 방송사에서 좋아할 만한 소재라 여겼다. 그러는 사이, 모든 주민들이 나왔는지 이제 더 이상 집 안에서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마을 주민은 6, 70명 정도 되었는데 이런 외부와 고립된 오지마을치고는 수가 많았고 연령대도 다양했다. 공통점이라고는 입고 있는 복장이 통일되어 있었다는 점 뿐이다. 장식이 하나도 없는 회갈색 투피스. 남자고 여자고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주민들 수에 비해 가옥의 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앞서 말했듯, 집이라고 할 만한 건물은 다섯 채가 넘지 않았다. 그 외에는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창고 하나와, 덩그러니 홀로 떨어져 있는 교회 하나가 다였다. 그러니까 4인 가족이 살 법한 집에 10명 넘게 들어가 함께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이상한 점은, 하나 같이 마을 사람들의 행동이 굼뜨고 한걸음 걸음 걸을 때마다 매우 불편해 보였다는 것이다. 잘 걷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사람도 많았다. 그렇게해서 주민들은 다들 한 장소로 모여들었는데, 그곳에 있는 투박하고 오래된 방송스피커에서 아침에 들었던 그 괴상한 기도문이 재생되고 있었다. 주민들이 모인 장소에서는 산비탈을 개간하여 밭으로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스피커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기도문과 하나로 통일된 복장으로 보건데, 주민들이 모여서 일을 하는 밭은 마을의 공동 작업 구역이고 이들은 필시 어떤 종류의 종교에 도취된 사람들이라 짐작되었다.
이제보니 위험한 곳에 머물렀구나, 생각하자마자 구역질이 먼저 올라왔다. 어딘가 줄 끊어진 인형 같은 행동거지도 다 세뇌의 영향이겠지. 하지만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누구든 무엇을 믿든 자기의 자유이니까. 친구가 없길 천만다행이다. 모태신앙인 그가 이 광경을 본다면 필시 노발대발할 것이고, 사정은 더 복잡해 질 것이다. 하물며 무신론자인 나조차 속이 부글부글 끓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스피커에서 기도문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인의 1ton 트럭이 다 부서져가는 소리를 내며 주민들이 일하는 밭으로 다가왔다. 트럭 소리를 들은 주민들은 공포 영화에 나오는 좀비마냥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트랙터를 몰고 온 사람은 주인이었다. 짐칸 드럼통에 담아놓은 어떤 액체를 물그릇에 담아 그것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물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그릇을 받아들고 게걸스럽게 마셔대는 주민들의 행동이 여간 수상스러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기 하나 없던 주민이 정체불명의 액체를 마시자마자 되살아난 것마냥 활기로 가득 찼으니까. 심지어 제 몫의 액체를 다 마신 주민도 한 그릇 더 달라며 보채는 게 아닌가. 그런 주민은 주인이 뭐라 하며 구박했는데, 주민은 주인의 말에 꼼짝도 못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드럼통 안의 액체가 동이 나자 주인은 트랙터를 타고 밭을 떠났다. 그 액체를 더 마시지 못해 아쉬워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고 스피커에서 기도문이 다시 나오자 그들은 작업으로 돌아갔다. 확실히 물을 마시기 이전보다는 작업이 훨씬 빨라졌다. 뭔가 각성제 같은 걸로 사람들을 중독시킨 것인가? 이런 오지에서는 의료품을 구하기 힘들어 대마를 재배해서 약재로 쓴다고 들었다.
계속되는 관찰 중에, 한 남자가-아침에 만났던 그 남자였는지는 모르겠다. 앞서 말했듯 주민들 모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방향을 잃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고개 숙여 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등짝으로 차가운 송곳이 파고드는 듯한 소름이 끼쳤다.
남자의 두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푹 꺼져 있어 얼굴이 절반이나 날아간 것처럼 보인 것이다.
나는 가장 중요한 걸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굼뜬 동작,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병 든 닭 같은 일련의 행동들.
눈을 찌푸리며 다른 주민들의 얼굴도 살폈다. 다들 마찬가지였다. 안구가 있어 불룩해야 할 자리는 눈꺼풀과 눈거죽만 남아서 안으로 쑥 들어간 채였다.
밤중에 불 켜놓은 건물을 보지 못한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주민들은 모두 맹인이었다.
우리는 맹인의 마을에서 머물렀던 것이다.
사이비 종교 집단인 걸로도 모자라, 장애인들을 이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강제 노역까지 시키다니. 무엇을 믿든 개인의 자유라고 말했던 것은 취소다. 적어도 넘지 말아야 하는 사회 도덕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이대로 마을을 놔두면 안된다는 판단이 섰다. 내려가자마자 신문기자든 경찰이든 부르겠다 결심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마을이 바깥 세상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건, 못해도 이 지방에서는 공공연한 숨기고 싶은 비밀이라는 소리란 것이다. 섬마을 노예 사건도 그러지 않았던가. 혈연과 지연으로 똘똘 뭉친 저 간악한 작자들 중에, 이 지역 경찰이나 기자가 없다 보장하기 힘들었다. 자칫하다간, 나나 친구 또한 이들의 간계에 휘말려 영영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내 발은 자연스레 하룻밤 신세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더 주인의 집을 살필 수 있었다. 어젯밤 내가 본 사자모양이라고 생각했던 대문고리는,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사자가 아닌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사자의 갈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방으로 여러 개 달린 팔이었고 사자의 얼굴이라 여겼던 것은 커다란 입과 그 안에 돋힌 무수한 이빨이었다. 인도나 중동 신화에 나오는 악마 같은 생김새에 호기심이 동했지만 더 이상 관심을 가져선 안된다는 본능의 경고가 나의 탐구심을 자제시켰다. 그렇게 스스로 진정시키며 돌아서는데,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돌아보니, 주인이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건 ‘옛 분’을 형상화한 걸세.”
나는 그게 도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묻지 않기로 했다. 대신 언제쯤 출발할지 물었다.
“미안하지만 잠시 더 기다려 주겠나? 준비가 덜 끝나서 말이지.”
“예, 다녀오십시오.”
속으로는 한시라도 빨리 마을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이상한 낌새를 채면 곤란했기에 나는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친구를 먼저 찾았다. 하지만 방은 비어있었다. 자고 있겠다던 친구는 집안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부엌의 선반 쪽에 누군가 급히 뭔가를 뒤진 흔적이 남아있었다. 문제가 커지기 전에 친구를 찾아서 사정을 설명하던가 서둘러 마을을 떠나야 했다. 집밖을 나가 바닥을 살피니, 발이 불편한 누군가 발을 질질 끌어가며 움직인 흔적이 보였다. 흔적은 마을 교회까지 이어져 있었다. 교회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목조로 지어진 허름한 건물이었다. 첨탑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웠고 교회 대문에는, 주인의 집 대문고리에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이교의 신이 부조처럼 새겨져 있었다.
이곳에 발을 들여서는 안된다는 공포와 불안함을, 친구를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 하나로 억누르며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교회에는 십자가 대신 주인 집 대문고리에 새겨진 이교의 신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색찬란 모자이크에는 성인과 천사 대신 예의 그 흉측스런 생물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쥐똥 냄새와 섞여 희미하게 약품 냄새도 흘렀다.
불쾌함을 진정시키며 친구의 흔적을 찾다 무언가 발끝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제단 바로 앞 계단 아래에 지하실 문이 있었다. 크고 단단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는데 필시 나는 거기에 발이 걸린 것이겠지. 굳게 닫혀있는 문 사이 틈새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뭔지 몰라도, 절대 그 밑으로는 들어가서 안된다며 내 생존 본능이 소리쳤다.
어디서도 친구를 찾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려는데 밖에서 차 엔진소리가 들렸다. 나는 딱히 잘못한 게 없었는데도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아이마냥 교회 커튼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손에는 빈 술병을 들고 주인이 교회로 들어왔다. 주인은 교회의 제단에 다가가, 사회상을 잡고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제단 뒤쪽 벽에서 숨겨진 문이 나타났다. 마치 오랫동안 이 교회를 관리해온 사람처럼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주인이 문 너머로 들어가고, 잠시 후 액체로 가득찬 술병을 들고 나왔다. 나는 그 안의 액체가 예의 그 넥타르라고 생각했다. 주인이 나오자 숨겨진 문이 저절로 닫혔다. 나는 왜 술을 이런 곳에다 보관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술이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자기 집에다 보관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런데 주인은 혼자 온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주인의 뒤를 따라온 사람은 주인 몰래 온 것이었다. 그건 친구였다. 친구는 주인이 떠난 뒤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는, 주인이 들어간 것처럼 똑같이 제단 사회상을 옆으로 돌려 비밀의 문을 열었다. 나는 친구가 아침에 마셨던 넥타르를 훔치러 왔다는 걸 알았다. 차마 친구의 비도덕적인 행동에 눈을 둘 수 없었던 나는 친구가 나오는 것을 보기 전에 교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주인의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주인은 먼저 교회에서 돌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가세.”
주인과 함께 1ton 트럭을 타고 산비탈의 비포장도로를 내려갔다. 예의 그 신상의 미니 사이즈가 염주마냥 백미러에 매달려 그 흉물스런 자태를 뽐냈다. 주인이 녹음된 테이프를 틀자 스피커에서 그 기도문이 나왔다. 이제들으니 목소리가 주인과 똑같았다. 필시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이 범법 천지인 마을의 장본인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러다, 내 눈에 다소 이질적인 사진 한 장이 들어왔다. 목사안수 받은 주인의 사진이었다.
“원래 이 마을은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네.”
“지금 마을에 눈이 보이는 분이 얼마나 되십니까?”
“나 혼자일세.”
덜컹, 거리며 트럭이 돌부리라도 밟고 지나간 양 들썩였다.
“재미없는 얘기야. 눈을 뜨게 해달라 기도하고 기도했지만 신은 들어주지 않았어.”
“기도보다 의사를 불렀다면 좋았을 텐데요.”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생각나는 것 아무렇게나 지껄였다.
“그 넥타르라는 술을 팔아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잘 팔릴 텐데요. 그 돈으로 병원을 보내세요.”
“그 술은 옛 분이 주신 은혜야. 바깥에 흘릴 물건이 아니네.”
또 이교의 신 타령. 내 얼굴 근육의 긴장이 굳어지려는 찰나, 주인이 급브레이크를 세웠다. 주인은 내게 아무 말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불안한 맘을 못 이겨 내가 입을 떼려는 순간, 주인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어두웠다.
“돌아가야겠네. 곧 비가 올 거 같으니.”
대체 이게 무슨 수작질이란 말인가. 비가 오건말건 차를 타고 있는데.
“밭에 나가 있는 사람들은 비가 오면 제대로 다니지 못해. 마을은 다음에 가기로 하세.”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거짓말 같이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인이 말했던 것처럼, 비 오는 소리에 방향감각을 잃은 주민들이 우왕좌왕 돌아다녔다. 어떤 이는 아예 주저앉아 벌벌 떨며 그들이 추앙해 마지 않는 옛 분이란 작자에게 기도를 올리기까지 했다. 나는 주민들을 데려다 하나하나 집으로 돌려보내는 주인을 뒤로 한 채 주인의 집으로 향해 뛰었다.
도덕따위 엿이나 먹어라. 차를 훔쳐서라도 지금 산을 내려가야 한다. 계속 여기 있다간 또 무슨 핑계를 대고 갇힐지 모른다. 집으로 오자마자 나는 친구가 있는 방을 두들겼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은 건가. 불안해져 문을 열어 안을 확인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친구가 있을 장소는 하나 밖에 없었다. 나는 교회로 다시 달렸다. 비 때문에 날이 어둑해져서 교회 안은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바로 앞의 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그 와중에도 이교의 신을 그려낸 모자이크는 기이한 빛을 뿜어대며 타락한 교회의 안을 비추고 있었다.
우르릉 쿠우웅
천둥번개까지 몰아쳤다. 뇌광(雷光)이 비치자 순간적으로 교회 안에 크고 작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짧았지만 옛 분이라는 것의 석상의 그림자가 교회 안에 드리웠고 나는 그것의 그림자가 살아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공포를 억지로 잠재우며 나는 제단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어서 빨리 친구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숨겨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빛이 하나도 없이 깜깜한 무저갱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다시 번개가 치며 안으로 난 창을 통해 백색 빛이 가득 찼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내가 본 것은
눈동자였다.
유리병을 가득 채운 눈알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고 그것들은 반투명한 액체에 담겨 있었다. 유리병에 빛이 반사된 것인지, 안에 든 눈알들은 하나 같이 살아있는 것처럼 번뜩였다..
그런 유리병들이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좌우와 앞뒤 벽 한가득 늘어서 있었다.
이것이 넥타르라는 것의 정체였다!
마음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그곳을 빠져나가려다, 나는 무언가에 발이 채여 앞으로 넘어졌다. 친구였다.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그를 돌려 세운 나는 그의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검고 커다란 구멍만 있는 것을 보았다. 육성으로 새된 비명을 토해내며 나는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안쪽으로 눈을 돌렸다. 열린 문 틈으로 눈알이 가득한 유리병이 들어왔다.다시 친구를 보았다. 저기 어딘가에 친구의 눈이 있을 거라 생각한 순간, 나는 뒷통수에 충격을 먹고 정신을 잃었다.
차가운 물이 한 방울 눈꺼풀 위를 때렸다. 내 손발은 X자 판틀에 묶여 30cm위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사방은 고른 면 하나 없이 울퉁불퉁한 돌투성이 동굴이었다. 눈을 밝혀주는 것은 듬성듬성 매달려있는 횃불 뿐이었고 그 외 주변은 깜깜한 어둠이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곳이 잠겨있던 교회의 지하라는 것을 알아챘다. 눈이 횃불에 익숙해지자, 더 많은 것이 보였다.
내 뒤로는, 키가 큰 석상이 오래 전 잊혀진 지배자의 위압감을 풍기며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문어마냥 수십 개의 촉수 같이 길고 관절없는 팔과 중앙에 있는 커다란 입, 그 안에 난 촘촘한 이빨, 그러나 눈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형상이야말로 주인이 따르는 옛 분의 전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굴에 달린 횃불이 옛 분의 석상에 괴기스런 그림자를 자아냈고, 동굴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횃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 그림자는 생명을 얻은 것마냥 움직였다. 나는 오늘 꾼 꿈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 꿈은 이미 오래 전 잊혀진, 애써 봉인해온 태고적 지배자를 경고하기 위한 종(種)의 기억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이미 다 틀렸다. 나는 꼼짝 없이 이 악신(惡神)에게 붙들려 버렸으니까.
동굴은 어둠 너머가 보이지 않을 만큼 크고 깊었다. 그 어둠 속에서 천천히 한무리 사람들이 다가왔다. 선두에 선 것은, 흰색 고깔 후드를 쓰고 있는 주인이었다. 그의 뒤로 주민들이 따랐다. 다들 흰색 띠로 눈을 가리고 손에는 빈 술잔을 성스러운 유물인 것마냥 소중히 들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도 않는데도 주민들의 대열은 일절 흐트러지지 않은 그 모습은 잘 사열된 군대를 연상시켰다. 맨 뒤에 있던 행렬은 가마를 짊어지고 커다란 항아리를 옮기고 있었다. 항아리에는, 주인의 대문고리와 똑같이 생긴 이상한 생물의 각인으로 가득했다. 항아리 안은 넥타르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난 깨달았다.
난 산제물이었고 주인은 신성한 의식을 주관하는 제사장이며 주민들은 그의 신도였다. 이들 중 어느 누구 하나 이용당한 이는 없었다. 다들 자발적으로 주인에게 협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한패였다.
“기뻐하게. 자네는 넥타르를 마실 자격이 있으니.”
제단 앞에 선 주인이 말했다.
“내 친구는요.”
“그는 넥타르를 훔치려 했다. 죄인은 신을 따를 자격이 없어.”
나는 부디 친구의 영혼이 그가 생전 믿던 천국으로 향하길 바랐다. 주인은 돌아서 제단 앞에 섰다. 그리고 신도들을 향해 기도를 읊었다. 그러자 신도들이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오늘 하루 지겹게 들어온 그 기도문이었다. 기도를 마치자 주인은 목회자처럼 설교를 시작했다.
“빛을 기도했지만 거짓 신은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옛 분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옛 분은 자비로우시다. 거짓 신을 버리고 옛 분을 다시 따르면, 다시 빛을 줄 수는 없지만 대신 빛 속에서 볼 수 없는 이 세계의 진리와 넥타르를 준다고 하셨다.”
설교가 끝나자 주인은 성찬을 주듯 항아리에 든 넥타르를 따랐다. 기도와 함께 자신이 한 잔 마시고, 빈 술잔을 든 신도들에게 차례차례 나눴다.
“마셔라 이것은 내 피의 잔이라.”
이 모든 게 소름끼칠 정도로 주인이 버렸다는 거짓 신을 숭배하는 행위와 똑같았다. 모든 신도들에게 넥타르가 마시자, 그들의 눈동자 없는 얼굴에서 환희와 열락에 빠진 표정이 떠올랐다.
의식은 이제 절정에 달했다. 주인의 몸이 다시 신도들을 향했다.
“이제 새로운 형제를 소개하겠다.”
신도 중 하나가 단 위로 올라왔다. 한 손에는 넥타르 술병을, 다른 손에는 커다랗고 흉악스럽게 생긴 집게를 들고 있었다...
아픔은 잠시였다. 아픔조차 덮어버릴 공포가 나를 마비시켰다. 어둠이, 눈꺼풀을 감는 것보다 더 깊은 어둠이 나에게 찾아왔다.
“옛 분이시여. 여기에 또 하나 당신의 자녀가 탄생합니다. 그 증거로 이 자의 더러운 눈동자를 바치오니 이를 받아들여 주소서. 그리고 바라오니 당신의 은혜인 넥타르를 다시 내려주소서. 당신의 사제가 이렇게 간청하나이다.”
퐁당, 하고 나의 두 안구가 술병 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빛을 담고 있던 두 개의 눈동자는 넥타르에 잠겨 이들의 양식이 되겠지.
그리고 나는...
“자, 이걸로…”
주인이 나직히 속삭였다.
“자네도 우리 마을 사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