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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과 그 시대를 모르는 철없는 그들에게 고하는 글
게시물ID : history_95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wHat
추천 : 15
조회수 : 50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5/29 20:38:35

가끔식 5.18을 폭동이다 북한개입이다 하는 철없는 사람들이 있어 이글을 적습니다.

 



1.1979년 부산과 1980년 광주를 아는가...........

가끔식 5.18광주를 말할때 요새 잊혀지는 부마항쟁과의 연결선상이 거의 빠져 있습니다.솔직히 말해 1979년 10월에서 부산,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시위가 1980년 5월 광주의 실질적인 시작점이었습니다.부마항쟁이 시민과 군이 처음으로 충돌했던 근현대사의 비극점이고,그 끝이 바로 5.18광주민중항쟁이었습니다.이 두사건의 본질은 군부독재의 지친 시민들의 저항이었고,권위주의의 강력한 청산을 외친 시위들입니다.

 



2.5.18폭동론의 전면적인 허구성

이른바 5.18폭동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의견이 성립되려면,5.18을 진압한 주체가 합법성을 가진 정부라고 해야되는데,왠걸로요.이미 1980년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로 사실상 대한민국의 합법성이 있던 최규하정부는 해산되었습니다.최규하정부의 기능을 담당하던 신혁환내각은 무력화 되었습니다.엄연히 헌법상의 한축이던 국회도 해산되었습니다.신군부는 당시 군부를 장악한 기본세력이었지.사실상의 정치조직이 아니었습니다.유신헌법임에도 그래도 합법성을 가진 사람은 최규화 대통령이었고,최규화 대통령은 1980년 긴급조치를 해제하였고,신현확 내각에 국정을 일임하였고,최규하정부는 국회에서 여당인 공화당,야당인 신민당과 더불어 협력해가여 국정을 이끌어 간다고 공표한 상황이었습니다.그리고 정치적 일정을 이끌면서 자신들의 과도정부라고 지칭했습니다.


그런 정부가 갑자기 5.17일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방부장관 주영복장관의 주재아래 사실상의 전군주요지휘관의 결의로 인한 국보위설치,내각사퇴,국회해산,주요정치적인사 검거등을 결의하여,대통령과 내각을 협박하여 결국 자신들의 유리한대로 통과시킵니다.이비 밤에 벌어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 사실상 신군부는 합법성을 지닌 과도정부를 붕괴시켰고,국보위라는 비상대책기구가 성립될때까지 한시적인 군정을 실시한것이나 다름없습니다.이렇게 구성되어 5.18을 진압한 정부가 어떻게 합법성을 가진다고 할수 있을까요.만약 5.18 폭동론이 옳다면 5.18을 진압한 정부는 사실상 국민의 지지로 탄생한 합헌적인 정부가 되어야 겠죠.

 



3.헌법상에 보장된 개인의 재산과 신체의 자유의 침해를 행한 계엄군

얼간이 같이 관가하고 있던 부분이,독재적으로 알려진 유신헌법에도 엄연히 개인의 저항권이라는 부분이 첨가되어 있습니다.5.18의 전개과정을 볼까요.이미 5월18일에 광주도심에 진주한 7공수여단이 시위를 한 학생이 아니라 처남을 역으로 데려다 주던 농아장애인인 김경철씨를 공수부대원들 광범위한 구타로 살상하였습니다.5월19일에 발생한 사망자를 볼까요.당시 과격한 구타로 사망한 인부 김행부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용직 노동자였습니다.5월20일 광주역발포로 사망한 2명의 사망자중 한명은 광주역 근처에 살던 평범한 가장이었습니다.더 해볼까요.5월21일 주남마을에서 아침에 공단으로 출근하던 미니버스가 총격을 당해 10명이상의 남녀가 살상 당했습니다.과연 제가 상기한 이 사망자들 중에 누가 시위자입니까.볼일에 갑자기 외출했다고 어이없이 죽었습니다.말 그대로 교통사고 날 확률보다 낮은 이유도 없이 맞아죽거나 총격을 당했습니다.과연 이들이 시위를 하다 죽었습니까.말 그대로 거기 현장에 우연히 있다고 죽었습니다.과연 이게 헌법상 보장된 국민이 자유롭게 활동하고,신체의 자유가 침해당하지 안했다고 할수 있나요.이른바 공수부대는 이미 과도한 국가폭력을 휘두르고 있었고,이미 법의 한계를 넘어선 살인행위 였습니다.


과연 저항을 하지 않으면,그 살상행위가 멈추다고 판단이 나올것 같습니까.5.18본질중 하나가 이른바 과잉폭력에 대한 저항입니다.전국에서 5월에 열린 대학생들의 시위를 보면 시민들은 동조를 하지 않았습니다.광주도 5월16일 전남도청 햇불시위때 시민들도 동조하지 않았습니다.하지만 5월18일이후로 수십만의 시민들이 시위에 동조하며 거리에 나왔습니다.다른사례를 들어보면 당시 이만원내과원장이라는 분이 광주국군통합병원에 실려왔는데,이만원원장이 병원 출근하던중 공수부대에게 군화발로 배를 걷어 차여 병원에 실려왔습니다.국군통합병원에서 급히 수술을 받았는데.각종 장기가 모조리 파열되어 대수술을 했다고 합니다.더구나 무수한 사례를 보면 기업중역,심지어 공무원까지 신분과 남여노소를 가리지 않고 진압봉을 휘둘렀고,그것도 다리를 치는게 아니라 머리를 주로 타격하는 이른바 살상타격을 감행하서 폭력의 수위를 더 높였습니다.그리고 5월18일-19일 영업장이나 공장에 난입하여 근무하던 근로자를 타격하여 주둔지로 연행하여,구타를 감행하고,결국 사람사냥을 한것입니다.시위를 하는 사람들을 연행한게 아니라 말이죠.이것은 엄연한 헌법이 보장한 국민의 권리을 폭력으로 억압하면서 헌법을 어기고 군대가 폭력을 행사 한것입니다.이유도 없이 말입니다.그리고 재산의 침해를 보자면,엄연히 사유재산체인 사기업이나 학원,호텔에 난입하여 기물을 대규모로 파손하였고,대학에 주둔하면서 연행자의 손목시계나 금반지등을 타의로 갈취한 사례가 있습니다.몇가지 사례를 열거할까 헌법에 보장된 개인권리가 지켜질까요,광주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측면에는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지키고자한 엄연한 저항권의 원리가 다분합니다.


만약에 5.18폭동을 성립하고 싶다면 앞으로 5.18같은 선례가 생기면 주장하시는 분들은 현장에 이었도 절대 저항하지 않고,맞아야 됩니다.그래야 당신들의 오류가 성립됩니다.당신들은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자유와 재산에 대한 침탈행위를 우습게 보는 분들이니까요.

 



4.총기 무장의 저항권에 대해서.

 5.18폭동론의 주장 중 하나가 시민이 경찰서와 예비군무기고를 탈취해서 계엄군이 저항했다고 하는데,이것도 보면 바보 같은 소리죠.시민들이 본격적으로 무장을 했던 시간이 5월21일 오후3시이후 부터입니다.근데 이 무장의 이유중 하나가 바로 대규모 살상행위가 벌어졌기 때문입니다.이미 5월19일에 공수부대의 위협용 발포로 근처에서 하교하던 고교생하나가 중상을 입어 총기부상자가 발생했고,5월20일밤 광주역에서 대치하던 중 공수여단이 갑자기 공포를 발사하고 뒤이어 수백발의 총탄을 발생하여,적어도 3명이 사망했고,시신은 광주역이 대합실에 방치되었습니다.공수부대 철수후 이시신들은 발견되었고,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이끌어 내게 됩니다.문제는 이미 오전8-10시사이에 이미 광주로 출근하던 미니버스에 광주외곽에서 공수부대가 발포하여 10명의 사망자를 내게한 상태였고,발포의 범주가 비무장시민에게 대한 발포로 확산되던 상황입니다.그리고 광주도청에서 20만의 이상 시민과 대치중이던 공수부대가 시위대의 차량돌진시위에 중화기로 발포하였습니다.문제는 사용된 중화기가 캘리버50기관총이었고,M113장갑차에 발사되어 버스에 탑승한 비무장시위대 20명을 사망시켰습니다.그리고 M16이 대량사용되어 도청앞에서만 사망한 사망자가 54명이었습니다.


과연 이런상태에서 시민들이 무장을 하지 않을수가 없죠.박달나무진압봉과 무차별구타,살상행위,연행행위,고문,거기다 시민들에게 대한 대규모 총기사용까지 과연 어느나라에서 이런 차례차례 악수를 두는 군대가 어디 있었을까요.이것은 광주시민들의 생존을 걸고 목숨을 지키기 위한 자위권을 발동한 사례입니다.이른바 헌법에 포함된 저항권이기도 합니다.5.18이전에 이 저항권이 포괄된 사례가 바로 4.19혁명이었습니다.그러나 4.19혁명에서는 군부가 중립자적인 입장으로 이승만정권의 붕괴를 촉진시켰지만,5.18은 군부가 정치의 주체로 시민과 정면대결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헌법에 명시된 폭력에 대한 저항권의 말 그대로 광주시민들의 공수부대의 잔인한 폭력에 맞서서 개인의 자유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무장을 한것에 불과합니다.그렇기 때문에 5.18폭동론에서 무장의 당위성은 폭력에 대한 저항권으로 이미 원인인 공수부대의 대규모 살상행위에 대한 저항에 해당됩니다.

 



5.북한개입설

솔직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에 해당하는 신군부조차 북한간첩침투했다는 공식적인 발표는 단 한번도 한적 없습니다. 북한의 사주를 받았을수도 있다.이런식으로 표현했지 궁극적으로 따지면 그냥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입니다.이것도 결국 고문과 증거조작으로 인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특히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일부 탈북자들은 그들 스스로 겪어보지 못한 것을 북한에서 얻은 조잡한 유언비어로 진실을 호도해서 이런 분란들을 초래했죠. 이미 안기부는 1982년 이한영씨 망명으로 증언을 토대로 5.18에서 북한이 개입했다는 사실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1985년이 되면 광주의 대한 분위기가 이른바 군인의 과잉진압의 의한 인식으로 바뀌어 갑니다.특히 광주폭동드립은 단 1년 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다음 무조선 광주사건, 광주사태입니다. 광주폭동은 용어집으로 조차 꺼렸던게 5공 분위기였습니다.

 



6.현재 민주주의 정통성

1993년 문민정부에서 김영삼대통령은 담화를 발표합니다. 현재 문민정부는 4.19혁명-5.18광주민중항쟁-6월항쟁을 이어받은 민주정부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을 토대로 하자면-문민정부-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이명박정부-박근혜정부까지 정당한 대통령직선제로 구성된 정부들은 이른바 5.18민중항쟁의 정신을 이어받은 정통성있는 정부라고 분석이 됩니다.

 



7.차라리 대통령 투표권도 반납하지

5.18폭동론자를 보자면 전두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데,말 그대로 하겠습니다.그대로 5공시절로 돌아가십시오.오직 총선투표만 하시고,민주화의 산물인,대통령직선제,지방자치제,등은 투표권을 절대행사하지 마십시오.5공이 좋고 정통성으로 포장하고 싶으면 총선투표만 하십시오.뭐하러 5.18을 폭동으로 묘사하는 분들이 뭐하러 5,18-6월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혜택을 누리려 하십니까? 그니까 총선투표만 하시고,다른 투표는 하지 마세여.그러면 내가 인정해 드리죠

 



8.1980년과 5공화국을 한번 살아보시지

사람은 역시 그시대를 살아봐야 됩니다.한번 끌려가서 뒤지게 맞아보고,이유없이 고문 당해보고,권위주의 절대 복종해야 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침해되는 시대를 살아봐야 전두환대통령의 위대함도 참 잘알게 됩니다.

 



9.견디면 인정한다.

5.18폭동론을 주장을 인정받고 싶으면,일단 당시 시민들이 당했던 박달나무 진압봉으로 가격당해서 버티면 인정해 드립니다.공수부대 타격술을 알려 줄 용의는 있습니다. 머리를 먼저 가격하고,군화발로 배를 칩니다.인정은 없습니다.집에서 찾으세요.그리고 도망갈것을 염려하려 겉옷을 벗겨 드립니다.피가 나도 저항하지 마세요.5.18이 폭동이라고 인정받으려면 이정도 국가폭력은 참으셔야 됩니다. 공수부대 주둔지로 데리고 가서 원산폭격이나 구타를 해도 저항하지 마세요.잠을 재우지 않고,이른바 사역을 시켜도 참으세요. 석방을 당할때 초소마다 오리걸음으로 걷고,계속 구타를 당해도 참으세요.5.18은 폭동이 이잖아요.석방이후에도 보안대에 끌려와 전기고문,볼펜고문,물고문,구타를 당해도 참으세요5.18은 폭동 이잖아요. 석방된다고 해도 취업이 안되도 참으세요.5.18은 폭동이잖아요

이거 전부 버텨어 내면 내가 의견은 인정해 드립니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쉽게 주장을 하는지 참........

(적어도 공수부대 구타를 당해서 생긴사망자만 10명에 달합니다.부상자도 수천명이 달하고 말이죠.한번 죽도록 맞아보고 폭동이라고 주장할수 있을까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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