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13년. 결혼 초기 비슷했던 생각이 많이 달라졌음을 확인하면서 '다르게 바라보기'를 서로의 관점에서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 그 남자의 다르게 들리지만 다르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 '그 여자 그 남자의 다.다.다.'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 남자 이야기는 남편 지용민 시민기자가, 그 여자 이야기는 아내 박보경 시민기자가 썼습니다.... 기자 말
지난 연말 가장 재미있었고 인상 깊었던 방송은 단언코 무한도전의 '토토가'였다. 90년대 인기 가수들이 모여 자신들의 히트곡을 불렀던 그 공연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어깨가 들썩거리고 기분이 좋아지는 방송이었다. 거기 나온 수많은 가수들과 함께 보낸 나의 10대를 회상하며 즐거운 마음에 노래를 따라 불렀다. 'S.E.S'의 '슈'가 나오기 전까지.
그런데 이상하게 '슈'의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는 웃음보다는 눈물이 먼저 나왔다. 그녀의 이야기, 그녀의 삶이 어쩌면 나와 이렇게 닮아 있는 건지. 텔레비전을 통해 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처럼 화려한 인생을 산 건 아니었지만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그녀가 참아야 했던 그녀 안의 욕망들, 또 그녀가 놓아야 했던(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재능들이 마치 내 것들인 것만 같아 공감의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최근 예전에 같이 일한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내 소식을 전해 들었고 안부인사 차 연락했노라며 통화 말미에 "왜 집에 있느냐?"고 물었다. 또 지금은 일 할 생각이 없느냐고도 물었다. 귀가 번쩍 뜨일 만큼 반가운 소리였지만 불러주는 곳이 없어서 집에 있다는 농담을 하고 넘기려 했다. 선배는 장난하지 말고 진짜로 말하라고 했다. 진짜 일 할 마음이 있는 건지,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물었다.
경력직 공고를 내려고 하는데 공고를 내면 바로 알려줄테니 지원을 하라는 것이었다. 아이들 생각은 까맣게 잊고 냉큼 "알았다"고 대답했다.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설렜다. 출근을 해서 내 책상에 앉아 일을 하고, 동료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하는 평범한 직장생활이 다시 시작된다 생각하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시 바삐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흥분된 나와는 달리 남편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지금 이동 중이니 자세한 얘기는 집에 가서 하자는 것이다. '오케이. 당신도 당신의 일을 해야지' 선배와 통화한 이후 갑자기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어져서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내가 다시 일을 하게 되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첫째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다. '아이 1학년은 엄마 1학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초등학교 1학년 아이는 엄마의 손이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실제로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육아휴직을 신청했던 선배도 있었다. 그리고 둘째, 이 녀석은 아토피가 있어서 음식을 잘 가려 먹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는 6살 개구쟁이이다.
남편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뿌리 깊은 '모성이데올로기'
▲ 경.단.녀 아내의 말 "일 그만둔 것 매일 후회" 경력단절녀들의 고통을 취재한 <조선일보> 2014년 1월 4일자 기사. 아내의 말과 동일하다.
경력직을 뽑는다는 곳은 시민단체로 급여가 많지 않은 곳이다. 그러니 내가 퇴근해서 올 때까지 아이들을 여러 학원에 보내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다. 또 엊그제 전세 재계약을 한 입장인지라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집을 서울로 옮기자고 하는 것도 무리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정녕 방법은 친정엄마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것뿐일까? 사실 그것도 명쾌한 답은 될 수가 없다. 친정엄마는 우리 집에서 차로 3시간 거리에 산다. 그 곳에서 텃밭도 일구고 운동도 하며 엄마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 설사 엄마가 흔쾌히 우리 아이들을 돌봐 준다고 해도 거주 문제가 걸린다. 그렇다고 우리 집 근처에 집을 얻으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것도 여러모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도 내 '일'을 갖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남편 그늘 밑에 들어가 편하게 사는 것보다 부딪치고 깨지더라도 '사회'라는 바닷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어떻게든 그 위험한 불구덩이 속으로 다시 뛰어들고 싶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그 밖으로 빠져 나오고 보니 상실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일을 시작했을 때 우리에게 닥쳐올 어려움과 그런데도 일을 하고 싶다는 열망. 그 사이를 갈팡질팡하는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면 좀 더 나은 결론을 얻을지도 몰라' 생각하며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내 조급함과는 달리 남편은 평소보다 늦게 귀가했다. 어영부영 자리를 깔고 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쯤 이야기를 시작할까 눈치를 보던 나를 봤는지 못 봤는지 남편은 리모콘으로 '무한도전'을 검색하고 있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
"아까 내가 한 얘기 당신은 생각 좀 해봤어? 어떻게 생각해?" "무슨 생각?" "아까 내가 얘기 한 거 있잖아. OOOO에서 다시 일 하는 거." "애들은 어떻게 할건데?"
대뜸 남편이 큰 소리를 쳤다. 남편이 들고 나온 반대깃발에는 '아이들'이라는 글자가 너무나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닫아도 들리는 아이들. 남편은 또다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머리 끝까지 '분노'가 치솟았지만 자리를 피했다. 지금 싸워봐야 별 소득이 없을 것이다. 남편의 머릿속에 뿌리 깊이 박혀있는 '모성이데올로기'의 벽은 너무 견고하고 높았다.
남편은 아이들을 핑계 삼아 내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정말로 아이들의 운명이 엄마인 내 손에 달려있는 것일까? 남편(남성)은 그걸 핑계 삼아 육아에서 한 발 비켜선 뒤 본인의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고 있는데... 엄마(여성)인 나는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처럼 두 아이를 품에 안아 잘 펼쳐지지 않는 날개로 힘겹게 퍼덕거려야 한다. 여전히 가부장제인 우리사회에서 여성들의 욕구를 '모성'으로 누르는 것은 사회 전체의 문제는 아닐까?
남편과 옥신각신한 밤이 지나고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 돌아왔다. 오랜 겨울방학을 끝내고 유치원이 개학한 지 이틀째. 둘째는 느닷없이 엄마랑 같이 있고 싶다며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했다.
'너도 나한테 일하자고 전화 온 거 눈치 챈 거냐? 너도 내가 다시 일하는 게 싫은 거냐?'
우는 아이를 달래서 유치원에 보내놓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먹은 것들, 아이들 옷가지, 너저분한 이불들... 홀로 된 나를 반기는 것들은 이런 것들뿐이었다. 쓸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부지런히 뒷정리를 했다. 아이들 방과 주방을 정리하고 나서 안방으로 들어선 순간,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내 화장대 위에 남편이 어제 신었던 양말과 샤워하면서 갈아 입은 속옷이 사이 좋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려고 반대한 거야? 임금 없는 가정부를 쓰고 싶어서? 너무하네 진짜. 이럴수록 일한다 내가!'
[그 남자 이야기] 재취업 전화 한통에... 가정의 평화가 깨졌다
"앞에 보이는 저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예전에 내가 다니던 ***가 나와"
무심코 쳐다본 교차로는 내게 익숙한 곳이었다. 예전 아내가 다닌 직장이 있는 곳으로, 출장이 잦았던 아내를 위해 무수히 다녔던 길이다. 아내가 경력 단절되기 직전까지 그녀가 '동료'라 부르던 사람들과 함께 근무하던 그곳에 아내의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아내는 사회과학서적을 많이 보았고 특히 환경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공부를 마친 후 그녀가 선택한 '환경단체'는 국내에서 활동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시 같은 종로에서 근무하던 집사람은 내 회식 장소에 불쑥 찾아오곤 했는데, 아내는 처음 만나는 회사의 최고위직 임원에게 '지렁이를 집에서 키워보시라'는 엉뚱한 제안을 하며 지렁이의 장점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기도 했다.
당시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이 진행되던 즈음이기도 했다. 나를 볼 때마다 매일 아내는 어디를 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대통령이 어느 정도로 강을 훼손시키고 있는지 등에 대해 들려주었다. 아내는 이명박 정부와 관련된 시사에 밝았고, 행동에 적극적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나는 강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았고 소극적으로 듣는 입장이었다.
둘째가 2살 때, 지금으로부터 4년 전 아내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둘째는 외할머니를 따르던 첫째와 달랐다. 엄마와 잠시도 떨어져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아이의 외할머니가 지쳐갈 무렵 '왜 2살 짜리가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하지?' 나의 반문은 잦아졌다. '나인 투 식스' 근무환경이었더라면 달랐을까? 당시 '환경 컨설팅' 회사에 다녔던 아내는 유독 '출장'이 잦았다.
성격이 사교적이고 웃음이 예쁜 아내는 직장 동료들과 잘 어울렸다. 지방출장을 가면 늘 밝은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무엇을 먹고, 그 지방의 관광 명소인 무엇을 보았는지 자랑했다. 첫째 아이와 통화를 한 뒤 전화기는 자연스레 둘째에게 건네진다. 놀랍게도 엄마의 목소리를 확인한 둘째는 이내 울기 시작한다. 2살짜리 아이의 명백한 신호가 반복되면서 아내도, 장모님도, 나도 '선택'이 임박했음을 느끼던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내를 불렀다. '변화가 필요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외할머니를 원하지 않고, 엄마만을 찾는 둘째 때문에 장모님이 받는 스트레스를 언급했다. 아내의 침묵은 길었다. 그 당시에 나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아이는 엄마가 집에서 봐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기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아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4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아내가 무엇 때문에 망설였는지 느낄 수 있다. 한 번 무리에서 이탈하면 다시 무리로 돌아가기 어려운 한국사회.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일까.
지난 4년을 아내는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구구절절이 그녀가 무엇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기록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분주하고, 바빴고, 동동거렸다. 늘 옆에서 뒷바라지를 하는 엄마를 아이들은 충분히 신뢰했으며 그동안에 몰라볼 정도로 키가 컸다. 오후 10시가 넘어 집에 들어가는 날이면 잠든 아이들 옆에 잠든 아내가 있었다. 야근하고 돌아온 나만큼 지쳐 보였다. 집안일도 '일'임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었다.
'현실 불가론'을 외친 나, 아내여 미안하다~
최근 아내에게 변화가 감지됐다. 두 아이가 말귀를 조금씩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아내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 모습이다. 동네 생활협동조합 일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고, 아이들이 유치원에 간 동안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있다. 더욱 과감하게 올해 가게를 해보고 싶다며 그동안 생각한 몇 가지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 불경기에 뭘 하겠다고' 심드렁하게 대꾸했지만 잘 웃고, 서글서글한 아내라면 손해 볼 것 같지는 않았다.
아내가 다시 사회에 관심을 두던 어느 날,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아내가 처음 직장생활을 하던 환경 시민단체의 한 선배가 전화를 한 것이다. 그는 최근 아내를 만난 지인으로부터 아내가 집에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며 '단체에 상근간사로 다시 일해볼 생각이 없는지'를 물어왔단다. 아내는 많이 흔들리는 듯했다.
"그럼 아이들은 누가 보고. 아직 애들이잖아." 아내에게 건넨 내 첫 마디는 그것이었다. 이제 곧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을 둔 엄마에게 '나인 투 식스' 근무는 불가능하다. 출퇴근 시간까지 고려한다면 집에는 오후 7시 넘어야 도착할 것이다.
"엄마에게 부탁하려고." 아내의 구원은 엄마였다. "엄마도 이제 60대 중반이다. 당신 일하려고 장모님에게 아이들을 맡기는 건 이기적이야." 이렇게 말하는 나는 아내에게 또 다른 의미의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었다. 경력을 이어가던 나와 경력이 단절된 아내, '지속과 단절의 두 경력'을 이제 와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현실적으로 불가'를 설득하는 내 앞에서 시무룩하게 돌아선 아내는 다음날부터 아팠다. 누워있는 아내에게 퇴근한 나는 몸 개그를 한답시고 지난 지방선거에서 화제가 됐던 아무개 후보자 흉내를 내면서 "아내여~ 미안하다!"고 외쳤다. 그게 솔직한 내 마음이기도 했다. 우스꽝스러운 내 몸짓이 재미있었던지 아이들이 덩달아 따라 했지만 아내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