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도종화 의원이 문체부 장관 후보자가 되자 그가 동북아특위에서 했던 <동북아역사지도> 폐기 등이 잘못되었다고 연신 맹공을 퍼붇고 있다. 그 주장중의 하나가 <낙랑군 평양설>은 이미 정설이고 검증끝난 학계 학설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낙랑군 평양설은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을까?
《한국일보》는 현충일 하루 전인 2017년 6월 5일자에 기경량(39) 가천대 강사, 안정준(38) 경희대 연구교수, 김재원(31) 만인만색연구자네트워크 공동대표의 대담을 대서특필했다. 그 중 한 대목을 보자.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
안(정준)=“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재원)=“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경량)=“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한국일보』, 2017년 6월 5일)」
이제는 조선 실학자들을 내세운다. 과연 실학자들은 낙랑군 평양설만을 주장했는가
조선 후기 학자들 사이에 중국의 1차사료를 직접 검토하는 실학적 학풍이 일어나면서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는 인식이 많이 생겨났다. 정약용은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내에서 찾았지만 그도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의 「사군총고(四郡總考)」에서 “지금 사람들은 낙랑군 소속의 여러 현이 요동에 있었다고 많이 생각한다.”라고 부기해서 자신이 만난 많은 학자들은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본다는 사실을 적어 놓았다.
정약용이 평생 사숙했던 성호 이익 선생도 「조선사군(朝鮮四郡)」이란 글에서 ‘낙랑군, 현도군은 요동에 있었다’고 서술했다.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 「도강록(渡江錄)」에서 낙랑군을 흐르는 강인 “패수(浿水)를 요동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고,
연암보다 앞선 약천 남구만(南九萬:1629~1711)도 『약천집(藥泉集)』에서 “현도, 진번은 지금 요동의 여진땅에 있었다”고 말했고,
이보다 앞서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김시양(金時讓:1581~1643)도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낙랑·현도·대방은 다 요동에 있었던 땅이다”라고 말했다.
... ‘100년 전에 낙랑=평양설이 논증이 끝났다’고 하다가 이 시기가 조선총독부 시절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자 기경량은, “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라고 깔깔거렸다. 『조선일보』로부터 ‘국사학계의 무서운 아이들’이란 닉네임을 부여 받고 크게 고무된 아이들답게 안정준, 기경량은 선조들의 삶까지 황국사관 옹호를 위해 모독했다.
조선 실학자들이 만약 ‘낙랑=평양설’이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일제의 흉계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일본을 몇 수 아래로 보던 그분들의 자존심으로 중국 1차 사료를 구석구석 뒤져서 ‘낙랑=평양설’을 모두 무너뜨렸을 것이다.
21세기판 황국신민들이 역사학계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놀라고 분개하는 국민들이 대폭 늘어났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해방 70년이 넘도록 조선총독부 추종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 부끄러운 현실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
(2017. 6. 11 이덕일 페북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