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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내리려고 일어났는데 어떤 아가씨가 바싹 다가오더니 물었다
게시물ID : mystery_95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포김사장
추천 : 1
조회수 : 20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4/08/13 09:35:00
지하철에서 헌팅 비슷한 걸 당한 적이 있다.

학동역에 있는 북스피어 사무실로 출퇴근하던 시절의 일이다. 내리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어떤 아가씨가 바짝 다가오더니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 내리세요?”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제대로 들었는데 이해를 못한 거겠지. 내가 “네?” 하고 되묻자 상대는 입을 아까보다 더 귀에 바짝 대고 물었다. “이번 역에서 내리시는 거 맞죠?”라고. 

CF 속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사람이 지금 나를 유혹하려는 건가.’ 그제야 비로소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랑 세 살 터울인 사촌누나 또래쯤 됐겠다.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상대는 암구호를 전파하는 병사처럼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번에 내리시면요, 저기 문 앞에 서 있는 여자분을 따라가 봐 주시면 안 될까요.”

자매님의 시선이 향한 곳에 검정색 치마 정장 차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탔으니 아마도 출근하는 중이었으리라. 이상했던 건, 남자 한 명이 뒤에 찰싹 붙다시피 서있었다는 거다.

그게 왜 이상했냐면 두 사람이 전혀 동행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쯤, 밤색 잠바를 입었고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작았다. 

자매님이 들려준 사연은 이랬다.

자신이 보기에 정장 여자와 잠바 남자는 서로 관계가 없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잠바 남자가 정장 여자 뒤에 어색할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다고 한다. 출근 시간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않나 했는데 정장 여자가 한 걸음 옆으로 옮기면 잠바 남자도 슬금슬금 뒤에 붙어 서고 정장 여자가 또 한 걸음 자리를 옮기면 잠바 남자도 다시 그 뒤에 붙어 서더란다.

이건 추행이다! 라고 자매님은 확신했다. 그때부터 지금껏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급한 상황이 벌어지면 자기라도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으리라. 얼마간 무섭기도 했을 테지. 정장 여자가 문 앞으로 다가가 내릴 차비를 했을 때는 조금쯤 안도했을까. 

그런데 남자가 거기까지 따라가자 기함하고 말았다.

자매님은 재빨리 고민했다. ‘저 둘을 따라 내릴까. 내가 내릴 역도 아닌데. 신고하면 순찰대가 오는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일단은 이번 역에서 내리는 남자에게 부탁하는 편이 나을 수 있겠다.’

그때 자리에서 일어선 내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잠바 남자에게 들릴까 싶어 자매님은 최대한 조용히 말을 걸었다. 워낙 빠르고 작은 목소리여서 자초지종을 전부 알아들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금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매님도 정장 여자만큼이나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자신과 상관없는 타인에게 이 정도로 감정이입해 있다니.

이것이, 내가 첫 번째로 감탄했던 대목이다. 나도 자매님과 같은 칸에 타고 있었지만 전혀 몰랐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구나. 나는 알았다는 의미로 고개를 한 번, 그리고 또 한 번 작게 끄덕여 보였다. 

불의를 보면 시종일관 끝까지 참았던 내 성정으로 미루어 이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그만큼 자매님의 눈빛이 절박해서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는 남자의 체구가 왜소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저 정도라면 어떻게든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투지가 용솟음치려는 찰나, 자매님이 주의를 주었다.

“근데 조심하세요, 저 남자, 손에 라이터를 들고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주먹을 쥐고 있는 잠바 남자의 손에 일회용 라이터의 윗부분이 보였다. 그때부터는 나도 슬슬 겁이 났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칼이나 가위도 아닌데 그게 뭘 겁까지 났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라이터가 화염방사기처럼 보였다. 지하철 방화사건 같은 게 떠올랐다. 

나는, 나를 도와줄 남자가 있는지 객차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객차에 있는 여자들 대부분이 정장 여자와 잠바 남자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자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신문을 읽거나 허공을 보거나 졸고 있었다. 이 상황을 간파한 남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들은 달랐다. 알게 모르게 서로서로 눈빛도 주고받지 않았을까. 이것이 내가 감탄한 두 번째 대목이다.

이내 문이 열렸다. 정장 여자가 후다닥 뛰어 내렸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나갔다. 그 틈을 헤집고 잠바 남자도 정장 여자를 쫓는 모습이 보였다.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나도 따라 내렸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다짜고짜 잠바 남자를 돌려세웠다. 남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야, 이거”라고 중얼거렸던 것 같다. 나는 약간 사이를 두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혹시 도나 기에 관심 있으세요?”

“뭐요?”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라이터를 쥐고 있는 손을 쓰지 못하도록 팔을 힘주어 붙들며 나는 말했다. “인상이 참 좋으신데. 바쁘지 않으시면 잠깐 얘기 좀 하시지요.”

내가 그를 붙잡고 옥신각신 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이 주위를 스쳐 지나갔다. 정장 여자는 이미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정신없이 개찰구를 통과해서 역을 나가자마자 택시 같은 걸 잡아탔을 거라고 짐작한다. 별 이상한 놈 다 보겠네, 라는 눈으로 아래위를 훑어보던 남자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두리번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나는 뒤를 따랐다. 하지만 역 밖에서도 정장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것은 내가 몇 년 전에 겪은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에게 귓속말을 전하던 자매님의 불안한 음성과, 평화로운 (줄로만 알았던) 객차 안이 호러영화의 한 장면으로 바뀌던 찰나와, 느긋하게 신문을 읽거나 핸드폰을 보거나 졸거나 허공만 바라보고 있던 남자들과, 걱정스럽게 한 곳을 응시하던 여자들의 모습을.

그리고 나는 비로소 왜 남자들과 여자들의 태도가 확연히 달랐는지 깨달았다.

홀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내가 타려 하자 몸을 돌려 계단으로 뛰어가던 소녀와, 배달 음식을 시킬 때마다 자기 집을 놔두고 굳이 아파트 현관까지 내려와서 받아들고 가던 옆집 여자와, 회식이 있는 날은 치마를 입지 않던 여자 동료와 밤늦은 시각에 집 앞에서 내리면 자기가 어디 사는지 노출될까 봐 택시가 떠나는 걸 확인하고 집에 들어가던 여자 동기와, 가까운 지하 주차장을 놔두고 멀리 있는 지상 주차장을 이용하던 출판사 여사장님에게는 그게 일상이었던 반면 다른 한쪽에게는 굳이 예민해질 필요가 없는 (무관심해도 상관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나 여성은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리고 많은 작가들이 이걸 공론화했다. 그중 한 명인 미야베 미유키는 이렇게 얘기했다.

“부당한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들이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 절감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연대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현실에서는 일이 ‘이렇게’ 쉽게 진행되지 않지만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담아 써내려갔습니다.”

이런 내용을 담은 <청과 부동명왕>, 한번 읽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끔찍한 일을 겪은 여성들이 서로를 지지하며 불합리한 상황을 강하게 넘어서는 모습을 통해 삶의 터전을 만들어가는 이야기인데 (괴담집이니까) 무섭지만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지거든요.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펀딩중이에요. 한 번 거들떠봐 주시길.
출처 https://aladin.co.kr/m/bookfund/view.aspx?pid=2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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