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나라
15세기 말엽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던 즈음 중앙 아메리카의
멕시코에는 아즈텍(Aztecs)족, 마야(Mayas)족과 같은 대단히 문화
수준이 높은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시대에 남미 대륙의 서부 태평양 쪽으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안데스 산맥의 중심부에 살던 잉카인 들도 그들 못지않
은 높은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다.
잉카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신화로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어렵다.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을 지나는 안데스 산맥에는 티티카카(신의
금대야)라는 호수가 있다.
길이 176Km, 최대 폭 46Km, 면적 8,280㎢, 표고 3,810m 남 아메리
카 최대의 호수이자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정 호수이다.
예로부터 이 호수는 잉카인 에게는 가장 신성한 것 중의 하나였다.
이 천상의 거울처럼 맑은 산정 호수에는 "티티카카""고아디"의 두
개의 섬이 있다.
잉카의 전설에서는 망코.카팩(Manco Capac)과 그의 누나가 부부가
되어 아버지 태양신의 명령으로 잉카 제국을 세우기 위해 지상으
로 내려와 첫발을 디딘 곳으로 이 섬들은 금과 은으로 된 섬이었다
한다.
태양신의 아들로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은 잉카 국왕은 이 섬에 훌
륭한 궁전과 태양신의 신전을 세우고 황금으로 태양신 상을 만들
어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차래 신성한 호수에 평화를 기원하는 공물
을 던져 넣었다 한다.
섬에는 지금도 고고학적 유적이 남아 있다.
호수 주변의 땅은 농경에 충분한 우량이 있고 호수는 기온을 조절
하는 역할도 하여 현재에도 보리,감자 등을 심고 리야마(駱馬)를 사
육하고 갈대의 일종인 도토-라를 엮어서 만든 풀 배(草船)와 돛대
는 유명하다. 도토-라는 사람과 가축의 먹이로도 쓰인다.
호수에서는 고기잡이도 하는데 모래무지 같은 작은 고기 뿐이다.
마추.피추
고대 잉카인 은 신비하고 뛰어난 민족이었다.
태양을 신으로 받들고 무지개 문양을 한 깃발을 걸었으며 대 민족으
로 발전하고 위대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9세기초 유럽 제국은 아직 암흑시대로 잠자고 있을 때 잉카인 은 안
데스 산맥 동쪽에 거주하며 표고 3천 미터가 넘는 고지에 화강암으
로 된 훌륭한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마추.피추"라고 불렀다.
도시에는 400호의 돌집이 있고 훌륭한 궁전과 신전도 세웠다.
신전의 제단석(床石)은 100톤이 넘는 잘 연마된 한 개의 돌 판이다.
석물을 조립하는데는 일체 몰탈을 쓰지 않고 순전히 돌을 깎아 마
추었다. 얼마나 정교한지 틈새가 보이지 않을 정도이고 1천년이 지
난 후에도 변한 곳이 없다.
이 돌들을 잘라 낸 채석장은 600미터나 산아래 계곡의 바닥이다.
이와 같이 무거운 돌을 어떻게 솔개의 집처럼 높은 절벽 꼭대기로
운반을 하였을까?. 또 철제 연장이 없던 그 시대에 어떻게 해서 돌을
잘라 낼 수 있었으며 어떻게 해서 다듬을 수 있었을까?.
현대의 건축 기술자들도 해답을 찾지 못하는 난 문제이다.
이 땅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고대 선조들은 "천사의 건축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며 천사의 건축가는 마법의 기술로서 돌들을
산 꼭대기로 운반했다고 하는데 "마법의 기술"이 어떤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200년 동안을 마추.피추에 살다가 인구가 늘고 식량이 부족해지자
마야인 들은 그곳에서 안데스산을 넘어 태평양이 보이는 산맥의
서쪽 고원 구스코로 이주했다.
12세기초 망코.카팩의아들 신치.로카(Sinchi Roca)가 그의 누이
마마.쿠라(Mama Cura)를 아내로 맞아(근친혼의 풍습이 있던 모양)
당시 구스코 계곡에 정착해 있던 키추아족(Quichua Indians)의 통
치자가 되었다.
그는 이미 부모들처럼 신화적 인물이 아닌 역사상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로카왕의 손자 마이타.카펙(Mayta Capac,1195~1230)의 시대에는
통치 면적이 15,000평방마일에 이르러 북으로는 콜럼비아에서 남
으로는 아르젠친,칠리까지 이르는 잉카 제국의 최성기를 이루었고
인구는 1,100만명에 달했다.
잉카인 은 글자가 없었다. 기록을 위해서는 "키브스"라는 결승문자
(結繩文字)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끈의 색깔,묶는 방법,매듭 모양
등으로 뜻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이것은 해석하기가 어려웠고 특
별히 훈련받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통할 수 있는 것으로 보급이 안
되여서 자연 문화의 계승도 되지를 않았다.
그들은 훌륭한 도로와 교량 농업용 수로와 성채와 믿을 수 없을 만
큼 호사한 궁전과 신전을 건설하였다.
이 지방에서는 금이 대량으로 채굴 되였다. 우리가 구리나 놋쇠를
쓰는 것처럼 여러 가지를 금으로 만들었다.
잉카인의 종교는 태양숭배이다. 그래서 종교적 건물에는 태양신의
상징으로서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을 더더욱 풍족하게 사용하였다.
스페인은 이 소문을 듣고 황금을 손에 넣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 황금은 모든 것이었다. 황금을 미개한 인디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였다.
약탈자 피사로
1531년 1월 스페인의 탐험가 프란시스코.피사로는 3척의 배에 165명
의 병사와 27필의 말을 싣고 파나마를 남하하여 페루-로 가는 도중에
에쿠아돌 앞 바다에서 조난하여 간신히 작은 섬에 상륙을 하여 목숨을
건졌다.
스페인 정부는 구조선 2척을 보내서 데려오려고 하였으나 피사로가
바란 것은 구조가 아니라 성공이었다.
그는 허리의 검을 뽑아 모래사장에 동서로 금을 그었다.
"자 제군! 이 선의 남쪽에는 고난과 굶주림과 불모의 땅과 폭풍우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이겨내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재보가 있는 페루가 있다. 그리고 이 선의 이쪽에는 편안함과 쾌락과
가정과 빈곤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 선조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위대
한 스페인 인이 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택하라!.나는 단연코 남으로
간다." 라고 말하며 선을 넘어갔다.
여기에 13명의 젊은이가 그의 뒤를 따랐다.
구조선은 이들 14인을 남겨 놓고 돌아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갈려는 나라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바가 없었으나
오직 대 잉카제국에 대한 기대와 십자군을 일으킨다는 기원 하나만으로 피가
로는 13명의 부하와 함께 페루로 건너가서 잉카제국을 약탈했다.
피사로 일행이 페루에 상륙하여 안데스 산맥으로 오를 즈음 백인을 처
음본 잉카인 들은 자기들의 평화적이고 착한 마음만 믿고 이들을 초인
(수-퍼맨)으로 알고 호의적으로 대하고 환대했다.
피자로는 이 어수룩한 마음을 악용하여 아타할파(Atahuallpa)왕을
식사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포로로 잡아 버렸다.
이윽고 아타할파 왕은 이들이 이 나라에 온 것은 황금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고 왕이 갇혀 있는 방으로 가득 차게 금을 줄 터이니 풀어 달라고
협상을 제기했다.
방의 크기는 폭이 5.1미터, 길이 6.6미터, 높이 2.7미터이었는데 그
방에 하나가득 이라니 엄청난 것이다.
잉카인은 왕의 몸값을 치르기 위해 사원과 궁전에 장식한 금까지 벗
겨서 한달 후에는 그 방을 금으로 가득 채웠다.
그 값이 얼마나 되었겠는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마도 스페인 전체
가 가지고 있는 금 보다도 많을 것이었다.
악마로 변한 피사로는 왕을 풀어 주면 자기들에게 보복할 것을 두려워
해서 왕과의 약속을 어기고 풀어 주는 대신에 카사마루카 광장에서 왕
을 화형 해 버렸다.
잉카인 들은 왕을 신으로 알고 있었다. 신이 살해당하는 것을 본 잉카인
들은 태양신이 잉카인 들을 버린 것으로 알고 반항을 단념하였다.
우리는 종교의 강점과 약점을 본다.
악이 성하면 선이 짓밟히는 것을 본다.
착한 마음과 평화주의만으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도 본다.
탐욕이 인간을 얼마나 간악하게 만드나 하는 것도 본다.
악마로 변한 이들 14인 강탈자들은 약탈하고 또 강탈하고 끝도 없이 악행을
계속하였다.
만약 그들이 처음의 금만 가지고 순순히 본국으로 돌아갔더라면 유럽
제일의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탐욕에 미치고 약탈에 미쳐 있었다.
약탈할 것이 남아 있는 한 약탈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하나둘씩 잉카에서 죽어 갔다.
피사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부하에게 암살 당했다.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두 사람 뿐 이었다 한다.
레기사노 라는 기병은 전리품의 배당으로 잉카 제국의 태양신 상이 조
각된 두꺼운 금 판을 얻었는데 하루 밤의 도박으로 몽땅 털리고 말았
다. 그후부터 스페인에서는 "해가 뜨기 전에 태양을 써 버렸다" 라는
말이 유행되었다고 한다.
100인의 처녀의 최후
이보다 앞서 구스코에는 평생을 태양신에게 바치기 위해 상류 가정에서
선발된 100인의 청순한 처녀가 있는 사원(尼僧院)이 있었다 한다.
카톨릭의 수녀원이나 불교의 비구니 사원 과 같은 것이었다.
피사로 일당이 구스코에 침입할 때 이 소문을 듣고 우선 이곳을 습격
하여 아름다운 비구니승들을 노리개로 노예로 삼으려 했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 다다랐을 때에는 절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쪽같
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아마도 태양신이 데려갔으리라는 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로부터 400년간 밝혀지지 않은 체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11년 우연한 기회에 수수께끼가 풀린다.
1911년 미국 예일대학 교수 고고학자 하이람.빙험(Dr Hiram Bingham)이
동료 해리.워드.푸트(Harry Word Foote)및 윌리암.지.이빙(William G.
Erving)과 함께 울반바 협곡의 유적을 탐사하였을 때 멜콜.알테가라
는 현지 안내인의 인도를 받아 마추.피추의 고적을 발견했다.
안내인은 특히 "어느 높은 곳"(高臺)을 보기 위함이라고 박사 일행을
"금단의 절벽" 정상으로 인도하였다.
박사 일행은 올라가는 길이 너무 험해서 몇 번인가 포기하려고 하였으
나 안내인이 너무 열심인 것에 이끌려 간신히 정상까지 올라가게 되
었다.
그곳이 바로 천사가 세웠다는 마추.피추였다. 그곳에는 175인분의
유골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150인이 여성의 유골이었다.
아마도 그 대부분이 태양신을 모시던 성 처녀일 것이라고 믿어진다.
1531년 피사로 일당이 구스코에 침입하였을 당시 위험을 느낀 성 처녀
들은 어느 신관의 안내로 비밀 통로로 해서 울반바 계곡으로 피한 다음
다시 사람이 다니지 않는 험한 산길을 오르고 올라 마추.피추에 이르러
속세와 인연을 끊은 체 외롭고 쓸쓸한 생애를 이 높은 고지에서 마쳤
을 것이다.
전설은 다음과 같이 전해져 내려온다.
성 처녀들은 해가 감에 따라 아름다움은 시들고 나이를 먹어 세상을
잊고 세상에서 잊혀지고 하나 하나 죽어 가 드디어 남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죽었다. 마지막 남은 사람은 말벗하나 없이 폐허에서 바람소리를
들으며 목숨이 다 하기를 기다렸다. 라고.........
인구 1,100만을 자랑하던 잉카 인의 후예도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들은 왕년의 수도 구스코에서(현재 인구 45,000)그들의 "키츄아"어
로 옛날 이야기를 하며 살고 있다.
구스코는 옛날과 같은 금으로 장식된 궁전이나 신전이 있는 훌륭한
도시는 아니다.
그러나 모로코의 후에스, 인도의 베나레스, 아라비아의 멕카, 이스
라엘의 예루살렘과 같이 태양신의 도시이며 "성지" 임에는 틀림없다.
스페인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갔다. 토지도 자유도 재화도
신앙의 대상인 태양마저도.....
그래도 그들은 백인과 같이 살고 있다.
황금으로 장식한 돌집이 아닌 흙으로 만든 작은집에서 살고 있다.
백인들은 그들에게서 모든 것을 가져갔다. "매독"(梅毒) 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