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60.조선열전(朝鮮列傳)
게시물ID : history_1948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3
조회수 : 117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1/29 15:37:34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ㅡㅡ 팟캐스트를 들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

blog.daum.net/carilla



*조선열전(朝鮮列傳)

 

반만년전 대륙의 동북쪽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조선은 중국과의 거리가 워낙 멀어서 유사이래로 중국의 힘이 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의 충신 ㅡ기자가 동쪽으로 달아났다ㅡ 는 기사가 처음 나오고

또 ㅡ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ㅡ는 기사가 나온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3100년전의 일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조선의 역사를 그때부터,

즉 3천여년정도로 보고있는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이 말에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갔다'라는말은 무엇인가?

조선이 이미 존재하지 않고서야 어찌 조선으로 달아날수가 있겠는가?

 

위 ㅡ주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였다ㅡ 라는 기사 외에도

ㅡ기자는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ㅡ라는 기사도 보인다.

 

왕이 제후로 봉하였으면 당연히 신하가 되는것인데 어찌하여 제후가 신하노릇을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것은 기자가 은나라 신하로서 주무왕의 신하노릇을 하지 않았다는것이고

조선또한 기자가 동쪽으로 가서 세운 나라는 아니라는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조선의 역사가 3100년이라는것은 거짓이고

그 이전의 시기 즉, 4300여년이 되었다는 말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볼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입장에서 본 우리 조선의 역사는 참으로 크게 왜곡되었고

그러함에도 우리 사학계와 일제침략기의 사가들은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았으며

거기에 더해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중국의 사서를 마치 종교적 바이블쯤으로 받들어

사실을 제대로 고증하지 않고 중국의 위조된 사서만을 철석같이 믿어 왔으니

이는 참으로 개탄하지 않을수 없는 일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열전의 조선열전 역시 우리 조선의 입장이나 상황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한나라의 입장만을 위주로 하여 지어졌으며

그뿐만이 아니고 오히려 조선열전의 전체가 믿을수 없는것 아닌가 하는 사학자들도 있을 정도이니

본편 조선열전을 설명하는데 참으로 난감하고 걱정이 앞서는것이 사실이다.

 

사마천이 효경제와 무제의 잘잘못을 바로 썼다가 무제가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였으므로

효경본기와 무제본기를 삭제하였는데

그로 말미암아 부형에 처해지기도 했으니

사마천으로서도 당세의 사실을 모두 바로 쓸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글의 말미에 다시 좀더 알아 보려니와

사마천의 마지막 죽은 이유등이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점 등도

이와 연관하여 상상해 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며

우선 열전에 나와있는 조선의 이야기를 알아보려 한다.

 

연태자 단의 군사가 진나라에 쫓겨 요하 근처에서 어지럽게 흩어진뒤

위만은 이들 망명한 백성들을 거두어 해동에 집결 시켰다.

진번을 병합하고 국경을 확보하면서 한나라의 외신이 되었다.

이제부터 조선열전의 본문을 알아보겠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

 

조선왕 위만은 본래 연나라 사람이다.

연나라는 전성기에 일찌기 진번.조선을 공략해 복속 시키고

요새를 쌓아 관리를 두었다.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킨 뒤로 조선을 요동 국경 밖의 땅으로 간주했다.

 

한나라가 일어난 뒤에도 조선은 너무 멀어 지키기 어렵다 하여 요동에 있던 요새를 새로 쌓고

패수까지를 경계로 삼아 연나라에 속하게 했다.

 

연왕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치자 위만도 연에서 망명해

1천여 무리를 모아 만이복장에다 상투를 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

그런후 요새 밖으로 나가 패수를 건너 본래 진나라때의 공터였던 땅을 근거로 한의 요새 부근을 왕래 하면서 점차로 진번과 조선의 만이 및 그 전에 연.제 에서 망명해 온자들을 모아 조선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왕검에 도읍 하였다.

 

효혜제.여후시대에 천하가 처음으로 안정되자 요동군 태수 위만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조선은 한나라의 외신이 되어 국경선 밖 만이를 막고

변경지대에서 약탈을 못하게 함으로서 한나라의 번병이 되겠다"

 

그러자 요새 밖의 여러 만이들의 군장들이 한나라에 입조하여 천자를 뵙기를 원했고 
조선왕 위만은 이를 금하지 못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황제는 그들의 입견을 허락했다.

 

이리하여 위만은 점차 무력과 재력을 이용하여 근방의 소읍들을 침략,병합했다.

진번.임둔도 자진하여 복속해 왔으므로 위만의 영역은 사방 수천리에 달했다.

 

그후 왕위는 아들에게 전해지고 다시 손자 우거때에 이르러서는

권유를 받고 조선으로 망명해 오는 한나라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원봉2년.

 

한나라에서는 섭하를 파견해 우거에게 귀순하라고 타일렀지만 우거는 듣지 않았다.

섭하가 교섭에 실패하고 조선을 떠나 경계인 패수에 임했을때

전송나온 조선의 비왕 장을 부하를 시켜 찔러 죽였다.

빈손으로 돌아가는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섭하는 급히 패수를 건너 수레를 몰아 요새로 들어갔다.

얼마후 귀국해 황제에게 보고했다.

"말을 듣지 않길래 조선의 장수를 죽이고 왔습니다."

 

황제는 섭하의 행위를 가상히 여겨 책망하는 대신 요동의 동부도위로 삼았다.

 

조선에서는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동원해 습격해 가서 섭하를 죽였다.

그러자 한나라에서도 죄수들로 병사를 모아 조선을 치게 하였다.

 

그해 가을 누선장군 양복에게 군사 5만을 주어 제에서 발해로 배를 띄웠다.

좌장군 순체에게는 요동으로 출격하게 하여 우거를 공격하게 했다.

 

우거도 병사를 동원해 나와 험준한 지점에서 방비를 튼튼히 했다.

드디어 좌장군의 졸정 다 가 우거를 공격했으나 철저히 깨지고 도망했다.

다 는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해졌다.

 

누선장군이 제나라 군사 7천을 이끌고 왕검성으로 육박했다.

우거는 왕검성을 굳게 지켰다.

그런데 우거는 양복의 군사가 얼마 안되는것을 알아 차리고 성에서 나가 양복의 군사를 들이쳤다.

양복의 군사는 대패하고 양복은 산중으로 도망쳤다.

십여일이나 숨어있던 양복은 흩어진 병졸을 다시 모아 일단 군대를 재편성 했다.

한편 좌장군 순체는 패수서쪽을 공격했으나 오히려 격퇴 당하고 전진도 후퇴도 못하고 머뭇 거렸다.

양복과 순체는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조선군은 의외로 강하오.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 우리는 병력의 숫자로 위협하는 한편

위산을 시켜 항복을 권고해 보는게 어떻겠소?"

 

그래서 위산이 우거에게 파견 되었다.

그러자 뜻밖에도 우거는 위산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원래 항복할 작정 이었는데 두 장군이 나를 속이고 죽이지 않을까 두려워 하고 있소.

이제는 신절을 보았으니 안심하고 항복 하겠소."

 

그러면서 우거는 태자를 한에 입조시켜 사과케 하고 말 5천 필과 군량미를 보내기로 했다.

 

태자가 군사 1만여를 데리고 패수를 마악 건너려는 순간 좌장군 순체는 번쩍 의심이 들었다.

"태자는 이미 항복 했으니 군사들에게 무장을 해제 하도록 명하시오."

그러나 태자 역시 순체의 요구를 듣자 의심이 들기 시작 했다.

"그것은 싫소.

좌장군이 나를 해치지 않는다는것을 어찌 믿을수 있겠소?"

 

그래서 태자는 패수를 건널것을 단념하고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위산이 먼저 귀국해 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그러나 황제는 노하여 위산을 주살해 버렸다.

 

일이 어긋나자 좌장군 순체는 군사를 몰아 패수를 건너 왕검성 밑까지 쳐들어 갔다.

양복 또한 군사를 몰아 성의 남쪽에 포진했다.

그러나 우거의 왕검성은 수비가 견고했으므로 두 장수는 수개월이 지나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순체는 본래 궁중에서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던 총신 이었다.

연과 대의 사나운 용사들을 이끌고 온 데다가 전에 패수에서 조선군을 무찌른바 있어서 매우 교만했다.

 

그런데 양복은 제나라 병사들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왔으나 자주 패했고

이미 많은 군사를 잃고 있어서 병사들은 이미 우거를 두려워 했다.

그래서 양복은 속으로 매우 부끄러워 했으며

항상 싸우기 보다는 화친을 맺기를 원해 우거를 회유 하려 했다.

 

양복은 화친을 원하고 순체는 왕검성을 자주 공격했으므로

우거는 두 장군의 군략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결국 우거는 양복에게 사자를 보내 항복한다는 밀약을 통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미적거리며 시일을 끌고 있었다.

 

순체는 양복에게 공동작전을 펴자고 했으나 양복은 일부러 순체의 사자를 만나지 않았다.

조선의 항복문서를 받아 공을 독점 하려는 속내였다.

 

순체역시 그러한 기미를 알아차리고 더욱 조선을 강하게 공격했으나 조선의 저항은 완강했다.

이렇게 되니 두 장군은 서로 화합 할수가 없었다.

 

순체가 불평 했다.

"양복은 많은 군사를 잃었으니 그 죄가 크다.

그런데 이제는 조선과 몰래 내통하여 우호하고 있지 않은가?

양복은 모반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본국의 황제 또한 화가 났다.

"두장수가 군사를 잘 지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위산을 사절로 조선에 보내 우거를 회유토록 하여

우거는 마침내 태자를 시켜 한나라에 입조토록 했으나

위산이 능히 일을 알아서 처리하지 못해 좌장군과 함께 일을 그르치고 
결국은 약속이 깨졌다.
그리고 또한 오늘 두 장수가 왕검성을 포위하고 있으나
다시 서로 마음을 합치지 않고 있으니 함락은 이미 틀린듯 하다.

이래서야 어느 세월에 해결을 보겠는가?"

 

그래서 황제는 제남군 태수 공손수를 파견하여 사태를 해결 하도록 했다.

공손수가 이윽고 조선에 도착하자 좌장군이 그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성이 함락되지 않은 이유는 누선장군이 여러 차례나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며

지금 이와 같은 상황에서 성을 취하지 못하게 되면 커다란 피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또한 누선장군이 조선과 함께 힘을 합쳐 우리 군사들을 멸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공손수 역시 좌장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부절을 보내 군사의 일에 관해 의논할 일이 있다고 누선장군을 좌장군의 군영으로 불렀다.

 

공손수는 양복이 도착하자마자 군사를 시켜 체포해 버렸다.

그런후 양복의 군사들을 순체에게 병합 시켜 버렸다.

공손수는 귀국해서 그 일을 황제에게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무어라?

적절한 조치라는게 겨우 그것이더냐?

양복의 말은 들어 보지도 않고 순체의 말만 들어 그를 체포한것이 감히 그대가 할 짓인가?"

황제는 노하여 공손수를 주살해 버렸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한편 순체는 기왕에 양군을 통합하자마자 즉시 조선을 급습했다.

이때 조선의 재상 로인 과 한음.그리고 이계의 재상 삼.또 장군 왕겹 등이 모여 의논했다.

"애초에 우리는 누선장군에게 항복하려 했으나 그는 지금 체포 되어 버렸소.

사나운 좌장군이 양군을 병합 했으니 이제 전투는 더욱 급박하고 치열해 질 것이오.

상황이 이러하니 우리는 승산이 없는데 왕은 항복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모두 죽게 될것이오."

그러자 한음.왕겹.로인등은 모두 한나라로 도망했다.

로인은 도망가던중 우거의 군사에게 잡혀 죽고 말았다.

 

원봉3년.

아계의 재상 삼이 드디어 조선왕 우거를 죽이고 투항해 왔다.

그러나 왕검성은 아직도 함락 되지 않았다.

대신 성이가 우거를 대신하여 굳게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에 순체는 우거의 아들 장 과 재상 로인의 아들 최 를 시켜서 성이를 죽이도록 백성들을 회유 했다.

그래서 성이는 피살되고 조선은 평정 되었다.

 

한나라에서는 그곳에 사군(진번.임둔.낙랑.현도)을 설치했다.

 

삼 을 봉하여 획청후로 삼고 한음을 추저후로 삼고 왕겹을 평주후.장 을 기후 로 삼고

최 는 아버지가 피살된데다 공로도 컸으므로 온양후로 봉해졌다.

좌장군 순체는 황제에게 불려가 공로를 다투고 질투해 전략을 배반한 죄로 기시에 처해졌다.

누선장군 양복은 열구에 이르러 좌장군의 군사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전진해 많은 군사를 잃은 죄로 주살될뻔 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우거는 요새의 견고함만 믿다가 나라를 망치고 조상의 제사를 끊어지게 했다.

섭하는 공로를 속임으로써 전쟁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양복은 적은 군사를 이끌고 고생 하다가 죄를 입었다.

파우에서의 실패를 만회 하려다가 도리어 의심을 산것이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 되었다.

 

누선.좌 두 장군모두 치욕을 당했으므로 그 부하장수들 역시 아무도 후에 봉해지지 못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상으로 조선열전의 본문을 모두 알아 보았다.

 

이 열전의 내용을 빌어 보건대 조선이라는 나라는 애초에 야만의 집단으로서

국가의 면모를 갖추지 못하던 부족이었다가 위만이 진나라를 피해 건너온 이후로

겨우 국가의 면모를 갖춘듯 묘사 되었다.

 

그리고 나라가 망할때에도 우거가 크게 저항 했으나

국력이 부족하여 한군에 패하고 말았던것같이 단순하게 설명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의 전부가 아님은 이제 여러곳에서 조금식 드러나고 있고

사기열전 본문의 여러곳에서 은연중에 곳곳에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역사를  밝혀내는데 주력 하고 깊은 연구를 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에 보면

사기열전의 잘못된 구절과 그 이유가 자세히 설명 되어 있기도 하다.

 

단재선생은 이러한 오류와 왜곡의 이유를

ㅡ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ㅡ 라 일갈하고

이에 대하여

ㅡ중국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것이 공구의 춘추 이래 중국 역사가의 유일의 종지가 되었다ㅡ

고 설파 하였다.

 

단재선생은 한과 조선의 싸움에 대해

그 싸움이 한번이 아니고 두번이었다고 설명한다.

 

그 첫 싸움은

ㅡ무제가 팽오를 대장으로 하여 연.제의 군사와 양식을 총 동원하여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싸우다가

고구려의 대항이 뜻밖에 강하여 9년간 혈전을 벌였는데 한이 여러번 패해 창해군을 폐한다는 핑계로 군사를 거두어 전쟁을 결말 지었다ㅡ

라고 설명하고

이에 대하여 사마천이 이 사실을 사기에 바로 기록하지 아니한 이유를

ㅡ경제와 무제의 잘못을 사기에 적었다가 사형에 처해질뻔 한것을 부형으로 바꾸어 간신히 살아 남았는데

만일 한의 패전을 곧이곧대로 썼다면 부형은 고사하고 목이 달아나는 참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ㅡ

라고 설명 했다.

 

또 조선이 좌장군 순체에게 멸망하기 이전에 대하여는

사마천이 조심하고 조심하여 조선 이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하다가

우연히 한마디 했던 평준서 에 의거하여 ㅡ팽오가 예맥조선을 명망시켰다ㅡ는 기사를 들어

열전의 기사를 부정하는 한편

 

이 기사ㅡ팽오가 조선을 멸망시켰다ㅡ 하는 부분에 있어서도 역시

마치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 시킨것처럼 묘사 되어 있으나

이 또한 거짓임을 반고의 한서 식화지에 나온 한 글자 천(穿)자 하나로 추론해 내었다.

 

이는 한서의 저자 반고가 역사의 사실을 알고 있으나

역시 사마천과 같이 형벌을 당하는것을 꺼려 차마 바로 쓰지는 못했지만

그 사실이 너무 바르지 못한것을 싫어하여

조선을 <멸> 했다ㅡ 라고 쓰지 않고 천 으로 고쳐 썼다고 설명 하고 있는 것이다.

 

단재선생의 설명을 바탕으로 당시의 사세를 설명 하자면 다음과 같다.

 

<당시에 조선 땅에는 남북의 여러 나라가 분립하던 시기였고

고대 아시아에 불완전한 글자이나마 이두문을 써서

역사의 기록과 정치의 제도를 가져 문화를 가졌다고 할 민족은 중국 외에 오직 조선 뿐이었는데 

당시 조선이 강성하여 매양 지나를 침략하고 혹은 항거 하였으며 중국도 제.연.진(秦) 이래로 조선에 대해 서로 침략하고 방어하던 일이 잦았거니와

진이 망하고 한이 일어나서는 북쪽의 흉노 모돈을 공격하다가 고조가 백등산에서 크게 패하여

세폐를 바치고 황녀를 모돈의 첩으로 바치는 굴욕적 조약을 맺고

그 조약을 유지하여 무제의 때까지 이르렀다.

무제는 야심이 큰 제왕이라 백년태평으로 나라가 부강해지자 흉노를 쳐서 선대의 수치를 씼는동시에

조선에 대해서도 명분없는 군사를 일으켜 민족간 혈전을 벌였다.>

 

또 후한서 예(濊)전을 인용하여

ㅡ한나라 무제 원삭원년에 예의 남려왕이 모반하여 우거가 28만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와서 항복하여

한나라에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만들었다ㅡ 는 기사와 함께 사기열전 공손홍 전에

ㅡ공손홍이 여러번 간하여....창해군을 폐지하고 오로지 삭방만을 받들게 하기를 청하여....

왕이 이를 허락했다.ㅡ 는 기사를 인용하여

연대가 거짓되고 조선과 한의 9년전쟁의 사실을 고의로 삭제했음을 증명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양복과 순체의 조선정벌에 대해서도 단재선생의 분석은 사기열전과 매우 상이하다.

 

이때의 기록은 오직 사기 조선열전이 유일한데

거기에는 한이 수만금의 황금과 비단을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뇌물을 준 기록이 없지만

그 이유 역시 사마천이 형벌을 두려워 하여 한나라가 병력으로 조선을 이기지 못하고 

오로지 뇌물로서 조선을 공략한 사실을 쓰지 못한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증거로 사기열전 본문을 들어

ㅡ위만은 병위와 재물로 그 이웃 작은 고을을 침노하여 항복받아서 나라를 얻었다ㅡ

는 기사에 대하여

<은근히 한무제가 위씨를 당당히 병력으로 멸하지 못하고

재물로 적을 매수하는 비열한 수단으로 성취한것을 꼬집어 비웃은것이다>라고 설명 하였고

 

ㅡ위산을 보내어 병위로서 우거를 타일렀다ㅡ는 기사를 인용하여

<병위'두글자만 쓰고 재물'두글자는 뺐으나 이때 순체와 양복은 이미 여러번 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었고

후원병도 오지 않은 상태여서 병위가 도리어 우거만 못할때인데 무슨 병위가 있었으랴?

이는 위만때의 기사에서 병위.재물.넉자를 이어받아

위산이 가져간것이 병위가 아니고 재물이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것이고

위산과 공손수가 다 까닭없이 처형 된 것으로 기록한것은

한무제가 재물만 허비하고 성공하지 못함에 노했음을 표시한것이며

위씨가 멸망한 후에 순체와 양복이 하나는 참형 당하고 하나는 파면 되었는데

봉후의 상을 받은것은 도리어 위씨의 반역자인 로인의 아들 최 와

왕겹등 네 사람뿐이었으니

이는 곧 위씨의 멸망이 한의 병력에 있지 않고

한의 재물을 받고 나라를 판 간신에게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라고 설파 하였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위씨가 망하고 한이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 하였다고 하는데

그 사군의 위치 역시 후세 사가들에 의해 큰 쟁론이 있었다.

 

단재선생은 그것을 바로잡는 외에도 패강을 지금의 대동강이라 하고 왕검성을 지금의 평양이라 하는등의

지명과 그 실제 위치가 현재와 다름을 설명하고 그것들이 크게 왜곡되었음을 바로잡았는데

이 또한 위에서처럼 중국과 여러 나라의 고서들을 깊이 연구하고

각기 그책들의 내용이 위조.날조된부분을 깊은 고증을 통해 바로잡고 밝혀내었으니

선생이 당시 우리 조선의 강역이 어떠했는지를 밝힌 부분에 이르러서는 자못 통쾌하다고 아니할수 없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러한 위대한 역사관을 가진 단재선생은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국내 역사학계에서는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역사관이 유교를 배척하고 민족주의적 관점을 너무도 깊이 투영한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필자는 사마천의 사기를 읽으며 우리나라의 위대한 민족주의 역사학자이며 독립투사이기도 하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어서 그 감상이 매우 크다.

 

선생은 중국의 춘추필법의 폐해를 크게 비판하고 다음과 같은 말로 주체적 역사관을 고취하였으니

이제 단재선생의 민족주의적 역사관을 잘 나타낸 사자후를 옮기면서 이번회를 마치려 한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정여립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바꾸지 않는다"

하는 유교의 윤리관을 여지없이 말살하고

"인민에게 해 되는 임금은 죽이는것도 가하고 행의가 모자라는 지아비는 버리는것도 가하다"

고 하고

"하늘의 뜻, 사람의 마음이 모두 주실을 떠났는데 존주가 무엇이며

군중과 땅이 벌써 조조와 사마에게로 돌아갔는데 구구하게 정통이 다 무엇이냐"

하며 공자.주자의 역사필법을 반대하니,

그 제자 신극성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예전의 성인이 아직 말하지 못한 바이다." 하고

당시의 재상과 학자들도 그의 재기와 학식에 마음을 기울이는 이가 많았으나

세종대왕의 삼강오륜의 부식이 벌써 터를 잡고

퇴계선생의 존군모성 주의가 이미 깊이 박혀 전 사회가 안돈된지 오래이니

이같은 엉뚱한 학자를 어찌 용납하랴?

그러므로 애매모호한 한장의 고발장에 목숨을 잃고 온 집안이 폐허가 되었으며

평생의 저술이 불 속에 들어갔다.

이것이 사회의 이미 정해진 국면에서는 위대한 개인이 성공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