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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9. 귀향(9)
“아무래도 그 새끼들이 수상해. 우리가 잘못 봤을 리가 없어. 안 그래? 우리가 정보밥 먹기 시작한 지가 언제야. 우리도 이제 도사가 다 됐다구, 안 그래?”
그러면서 동의를 구했다. 둘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미련이 남은 박가는 의심증에 부채질을 했다.
“한 번 생각해 보라구. 진짜 그 새끼들이 하면서도 얼마든지 그렇게 꾸밀 수도 있는 일 아니야? 위장하기 위해서 말이야. 강도질하는 새끼들이 여러 놈 더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냐?”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그렇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되지?”
“그래.”
“좋아, 그러면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구. 이가놈한테는 진짜 말하지 말고. 뭔가 큰 게 있을 게 분명해. 명백한 증거를 잡으면 우리가 기무라하고 바로 거래를 하자구. 절대 이가 그 새끼한테 이야기하지 말자구. 언제까지나 그 새끼 그늘에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냐?”
박가들은 의기투합해서 다시 종로와 명동을 감시하기로 했다.
아직도 박가들이 알짱거린다는 것을 청년단에서도 알았다. 김정달과 최명원 등에게 계속 움직이지 말도록 주문했다.
김중의 일이 소문을 통해 퍼져나가자 이제 재력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재산과 신변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고용하느라 분주했다. 지은 죄가 많은 부왜파들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주먹잡이들을 고용하려고 했다. 물건만 훔쳐가는 도둑이 아니라 사람까지 해하는 강도들을 물리치는 데는 주먹잡이들이어야 그런대로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조선의 주먹잡이들 7할이 청년단원들이었기에 그들의 몸값은 곧 건국연맹의 자금이 되었다. 하루에 5천 원 가까운 거금이 건국연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모인 자금 일부를 임정에 전달하기 위해 김인수가 중경으로 향했고, 노상만은 팔로군 포병사령관 류청에게로 출발했으며, 건국유격단에도 제법 많은 자금이 배분돼 청년들을 규합하는데 더욱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재력가들에게 고용된 각 지역의 청년단원들은 내놓고 칼과 죽창 등으로 무장을 하고 군사훈련과 함께 체력단련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합법적(?)으로 무장봉기를 준비하는 셈이었다. 그래도 경무국에서는 모르는 척했다. 왜인 강도들을 잡는 데에 매달릴 여유가 없었고, 강도들을 잡지도 못하면서 재력가들이 자구책으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을 막을 명분은 더 없었다. 전황이 나빠질수록 총독부에 대한 저항은 강해지고 있었다. 건국유격단의 활동으로 각종 징집영장을 받고도 줄행랑을 쳐버리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을 잡기에도 중과부적이었다. 도망을 간 이들이 어디로 향했는지를 총독부도 대강은 알고 있었으나, 그들을 궤멸하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병력이 필요한 만큼 섣불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덕분에 건국유격단의 대원들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건국연맹 지도부는 지금의 상황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김중을 비롯한 많은 민족자본가들도 청년단원들을 고용했다. 심지어 여운형도 청년단원들을 고용했다. 그렇게 청년단을 통해 자금도 대고, 총독부의 눈도 가리는 전략이었다. 그리고 의심을 받을 만하면 독립운동에 자금을 대 온 부호들의 집에서 강도행각(?)을 벌이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걸인 행색으로 여운형의 집을 나오던 강성종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때는 늦어 있었다. 마침 여운형의 집을 감시하러 오던 박두희와 마주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를 지나쳐 온 박가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뒤를 돌아봤다. 걸인은 벌써 저만큼 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았다. 어느 골목에서인가? 아니면 경성역에서인가? 여기도 아니고, 저곳도 아니었다. 여기저기를 한참이나 떠올린 끝에 박가는 종로 뒷골목에서 자주 마주친 걸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여운형의 집이라고, 또 종로 뒷골목이라고 걸인이 드나들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뭔가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종로 뒷골목과 여운형의 상관관계를 이모저모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윽고 박가는 손뼉을 쳤다. 그거다! 저 거지놈이 연락책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거지를 연락책으로 쓴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박가는 다시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걸인은 이미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뒤였다. 박가는 여운형이 장태식을 포함한 주먹패들과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다는 확신했다. 그러면 그렇지! 그 강도놈들은 왜국 낭인놈들이 아니라 조선 깡패놈들이 분명해. 내 생각이 맞았어. 박가는 김중의 집 강도사건 후에도 계속 종로와 명동을 감시해 온 보람을 느꼈다.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감지하지 못한 박가들은 요즘 들어 자신들이 정말 헛다리를 짚은 것이 아닐까, 의심도 들고 지쳐가는 중이었다. 하마터면 포기할 뻔했던 것이다.
그는 박가와 마주친 순간 당장 처치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안 될 일이었다. 박가뿐만 아니고 두 놈이 더 있는 것이었다. 제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남은 두 놈이 더욱 의심을 품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왜경의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그놈들이 공을 세우기 위해 독자적으로 하는 감시라고 판단하고 있던 터였다. 이리 오래도록 감시를 풀지 않는 것을 보면 여간 독한 놈들이 아니라고 보고 제거할 기회를 노리는 중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로 봐서 박가가 자신을 기억해 낼 것은 분명했다. 이제 놈들은 더욱더 철저하게 감시를 하려고 들 것이었다. 이렇게 된 바에는 빠른 시일 안에 세 놈을 한꺼번에 감쪽같이 제거해야 했다.
이틀 후 해질녘, 하오리 하까마 차림의 낭인 넷이 종로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종로는 완전한 장태식의 구역으로 왜인 낭인들이 종로 바닥을 활보한다는 것은 충분히 눈에 띄고도 남았다. 박가들이 아니라도 누구나 이상하게 생각할 일이었다.
박가는 옳다구나, 했다. 김시재를 시켜 정인호도 불러오게 만들었다. 드디어 이놈들이 오늘 밤에 움직이려는 모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들은 그만큼 철저하게 드러나지 않도록 감시를 해왔다고 믿었다. 이중형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짜로 확실한 단서를 잡아서 경무국에 바로 보고할 계획이었다. 그런 연후에도 이가에게는 연락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래야 이번 일의 공이 고스란히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뙤놈이 챙기는 배 아픈 일은 다시는 하지 말아야 했다. 박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이가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리라, 생각을 굳혔다.
과연 박가의 추측은 옳았다. 밤이 되고 어두워지자 종로 뒷골목에서 낭인들 여섯이 조심스럽게 나와 어디론가 향했다. 지금 각처에서 출몰하는 왜인강도들도 대여섯이라 했다. 그 정도가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고 빠지는데 적당한 인원이라고 박가들은 판단했다. 또 확신이 아니 들 수 없는 것은 그들의 움직임이 지극히 조심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뒤를 밟았다. 낭인들은 발소리를 죽이고 빠르게 걸었다. 낭인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박가들도 이쪽저쪽으로 몸을 숨겨가며 따라붙었다. 장충단에서 낭인들이 멈췄다. 여기서 무엇을 하려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려는데 주먹이 날아들었다. 박가들은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벌떡 몸을 일으켜 칼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더 빠르게 날아온 발길질에 다시 한 번 나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