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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9. 귀향(6)
며칠이 지나 1945년으로 해가 막 바뀐 어느날 자정 무렵, 몇 개의 그림자가 김중의 집을 향하고 있었다.
“이 솔밭 안에 집이 있다 말이가?”
김의 집을 감싸두르고 있는 솔밭에 들어선 그림자들 중 하나가 한 말이었다.
“말조심해! 어떤 일이 있어도 왜말만을 써야 한다는 걸 잊었나?”
다른 그림자가 나직하게 왜말로 꾸짖었다.
“김선샘 집인데 어떻노?”
불만이 조금 느껴지는 처음의 그 목소리였다.
“이 친구가!”
다시 왜말이었다.
“알았어. 조심하지.”
기가 죽은 처음의 목소리였다. 이제 그 목소리도 왜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자가 있었다. 바로 안문덕이었다. 안가는 그들의 대화를 바람결에 엿듣고 밀정과 고등계 형사를 하면서 체득한 직감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김에게서 지난번에 수모를 당한 뒤로, 무슨 일이 있어도 김이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단서를 잡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틈만 나면 김의 집을 감시하던 터였다.
그래, 그 강도놈들이 바로 독립운동하는 놈들이었구나. 이번에는 김가에게 자금을 받아가겠다 이거지. 이전 몇 건에 대한 의심도 피하고.
안가는 그동안 틈만 나면 와서 추위에 떨면서도 독하게 잠복해 온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김을 형무소에 처넣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자신에게 애원하고 있는 김을 떠올리면서 안가는 희열마저 느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자신이 똥을 싸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늦은 저녁으로 먹은 국밥의 돼지가 상했던 것인지, 덜 익었던 것인지 배가 살살 아프던 것이 급기야는 설사가 시작되고 만 것이었다. 혹시라도 소리가 날까봐 안간힘으로 똥만 억지로 끊고, 쪼그려 앉은 채로 윗도리에서 권총을 빼 든 안가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해야지? 한 놈을 먼저 쏘고 손들라고 할까. 그러다가 만약에 저놈들이 도망도 가지 않고 죽기 살기로 덤비면 어떻게 하지?
경찰서에서 들은 정보로는 보통놈들이 아니었다. 죽는 게 두려운 놈들이라면 그렇게 겁없이 설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전부 다 쏴 죽일 수 있을지 자신이 생기지를 않았다. 전시 비상체제에 돌입하면서 총알도 아낀다고 사격연습도 중단한 지 오래였다.
저놈들도 총을 가지고 있으면 어쩌지? 아니지. 포항에서 문갑술이가 권총 한 자루를 뺏겼다고 했으니까 적어도 한 자루는 있을 거야. 아니지. 독립운동하는 놈들이니 모두가 총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면 나 혼자서 저놈들을 잡을 수는 없어. 그리고 꼭 내가 잡을 필요는 없잖아. 저놈들의 정체를 알아낸 것만 해도 나는 일계급 특진은 되겠지. 그렇다면 내 손으로 잡으면 계장도 될 수 있을 것 아닌가. 계장이라면......
자신이 평생 고등계밥을 먹어도 계장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안가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거기다가 김가놈을 형무소에 처넣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제놈이 아무리 벗바리가 좋고, 소작인들이 폭동을 일으킨다고 해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을 터였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나섰다가 내가 죽으면? 계장도 좋고, 다 좋지만 나 죽으면 끝 아닌가. 안전하게 적게 먹고 가는 똥 싸고 말지 뭐.
한순간에 안가가 한 생각들이었다.
안가는 죽을 힘을 다해 괄약근을 조이면서 그들이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이 김의 집에 들어가고 나면 순사들을 끌고 올 작정이었다. 잘만 하면 현장에서 일망타진할 수도 있었다. 현장에서 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별문제는 없었다. 그들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냈으므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야속한 바람이 이리저리로 어지럽게 방향을 바꾸며 휘몰아치고 만 것이었다. 똥은 억지로 끊었다고 해도 냄새까지 끊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웬 생똥냄새야?”
누군가 목소리를 낮췄고.
“누가 있다!”
또 누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다다닥, 뛰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리고 갑자기 정적이 찾아들었다.
안가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놈들을 잡으려고 나선다는 것은 날 잡아 잡수, 하는 꼴이었다. 그들은 벌써 똥냄새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었다.
“저쪽이다, 잡아!”
또 한번 어지러운 바람이 불었고, 몸을 숨기고 있던 그림자들이 자신을 향해 내닫고 있었다. 권총을 치켜들며 안가는 잽싸게 소리쳤다.
“꼼, 꼼짝마래이! 다, 다께다 형사다!”
그림자들이 움직임을 뚝, 멈췄다. 그러나 그림자들은 이미 안가의 예닐곱 발짝 앞에까지 와 있었다. 안가는 자신이 목소리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심하게 떨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두 손으로 움켜잡은 권총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다께다? 개좆이다 캐라, 시바르눔아!”
그림자 하나가 코웃음을 쳤다. 총을 들고 있는데도 조금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림자는 모두 일곱이었다. 그중 하나가 앞으로 스윽, 나섰다.
“꼼, 꼼짝마! 쑤, 쑨다!”
“다께다라꼬? 그래, 다께다야. 니, 그 총으로 우리 다 직일 수 있을 거 긑나? 똥 싸니라꼬 쭈글시고 앉아가 우리 지대로 맞추기나 하겠나? 그라고 총알은 여섯 발이고 우리는 일곱인데 이 일을 우야겠노! 니, 우리 다 몬 직이머 니도 뒤지는 거는 잘 알제?”
앞으로 나선 그림자가 하는 말이었다. 마치 어른이 애 놀리듯이, 타이르듯이 했다. 안가는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를 못 잡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래, 다께다야. 니 함 생각허 봐라. 우리가 어떤 눔들인동 알제? 우리너 죽는 거 겁내는 그런 사람들이 아이야. 니, 우리 멫 직이고 뒤지구 젚나, 안 그라머 우리도 살고 니도 살구 젚나?”
“......”
“다께다야, 그라지 말고 니도 살고, 우리도 살자. 니, 우리 몬 본 텍 치머 안 되나. 보고도 띄았다 카머 우엣눔들 지랄발광 떨 끼고, 우리 잡을라 카머 니도 죽을 끼고, 안 글나? 니도 형사쯤 되이까네 그런 계산은 할꺼로?”
안가는 잠시 생각했다. 당장 여기서 체포하지 않는다고 해도 놈들의 정체를 알았으니 다 된 것이었다. 총을 쏜다고 해서 도망갈 놈들 같지도 않았고, 다 거꾸러뜨리지 못하면 자신도 죽을 것은 분명했다. 괜히 잡으려고 덤비다가 죽을 필요는 없었다. 정체를 알았으니 가도록 놔두고 자신도 무사하면 되는 것이었다. 잡는 것이야 시간문제가 아닌가. 아직도 독립운동한다고 깝죽대는 놈들을 발본색원할 기회였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 뒤에서 살금살금 다가온 그림자 하나의 발이 날았다. 팔에 통증을 느낀 순간 권총은 이미 안가의 손에서 튕겨져 나가고 없었다. 앞에 선 그림자의 말을 듣느라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뒤를 이은 발길질에 안가는 자신이 싸 둔 똥무더기 위에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아이구 똥냄새야! 이런 좆 긑은 새끼!”
“여러말 말고 빨리 처치해!”
그 말이 채 끝나자마자 팔 하나 길이는 족히 되는 왜국칼이 안가의 등이며 목이며 옆구리를 마구 휘저었다.
안가는 울부짖었다.
“가이새끼들아아! 같이 살자꼬 느그들이 그캤잖아아!”
그러나 제대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국밥을 먹은 것을 또 다시 후회하면서 뱃속에 남은 똥을 마저 쏟고, 한참을 버둥거리다가 그렇게 안가는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더는 없지? 이 새끼 하나인 게 분명하지?”
“그런 거 같은데.”
“이 새끼가 우리가 올 걸 어떻게 알았을까? 정보가 샌 걸까?”
“그럴 리가 없어. 정보가 샜다면 이놈 혼자 있을 턱이 있나. 아무래도 김선생님이 감시를 당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고 봐야겠군. 그러면 오늘 일은 포기를 해야 되나?”
“아니야. 그럴수록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저놈이 죽었으니 김선생님이 더욱 의심받게 될 거 아냐? 이 밤에 저놈을 끌고가서 다른 데다 묻을 수도 없고 말이야, 땅도 꽁꽁 얼었는데.”
“그랬다간 김선생님이 더 의심받지.”
“맞아. 오늘 일은 최대한 빨리 끝내고 뜨자구. 그러면 저놈이 우리를 잡으려다가 죽은 게 될 수도 있어.”
“그럼, 결론이 났으니 빨리 움직이자구.”
그림자들이 하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