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부터 경주 김부자라면 전국에서도 손가락 안에 드는 토호였다. 세상은 달라졌지만 그 집의 주인인 김중의 영향력은 선대에 비해서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었다. 김이 살림을 맡으면서 8.2제로 소작료를 내림으로써 소작인들의 인심을 더 얻게 됐던 것이다. 선대의 7.3제 소작료도 파격적이었는데 8.2제라면 거저나 다를 바 없었다. 거기다 중마름을 용납하지 않았다. 마름에게 토지를 분배받아 소작인들에게 분배해 주고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 중마름이었다. 그러다보면 소작인들의 부담이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지주라면 중마름은 공공연한 일이었고, 중마름에 또 새끼마름까지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지주에게 들어오는 소작료는 달라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지주들은 그런 것들을 방조하고 부추기기까지 했다. 마름들은 어차피 지주덕에 먹고 사는 처지라 일이 생기면 지주 편을 들게 돼 있었다. 그 틈에서 죽어나는 것은 소작인들 뿐이었다. 소작인에게 불리한 그런 조건들까지 아예 발붙이지 못하게 했으니 김의 소작인들은 자작농이나 별다름없는 소출을 얻고 있는 것이었다. 공출로 빼앗긴다 해도 밥을 굶는 집은 거의 없었고, 김부자네 소작인 10년이면 자작농이 된다는 말이 나왔다. 실제로 자작농이 된 사람도 더러 있었고, 자소작농이 된 사람은 아주 많았다. 김이 그렇게 유도를 했다. 사정이 급한 지주들에게서 헐값에 산 전답을 소작인들에게 헐값에 되파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니 인심이 더 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순사들 사이에서도 김을 잡아넣었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거라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다. 징용・징병 등도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마지기의 논을 부치더라도 김의 소작인이었고, 경주 일대에 2천 가구가 넘었고, 알아서 다 빼야 했다. 그러니 관리가 일하기 제일 힘드는 데가 경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었다. 김이 임정에 자금을 대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증거를 잡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사를 하자는 말은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서장부터 몸을 사리는 형편에 섣불리 나섰다가는 큰일을 당할 것은 자명했다. 목 날아갈 짓을 자청해서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임정과 김을 연결하는 자금전달책이 다른 곳에서 잡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총독부 고관들도 김의 정체를 대강은 알았다. 그들도 끊이지 않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렇다고 경무국을 닦달할 마음도 없었다. 김과의 교분을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김이 부왜파들 보다 왜인들에게 다소 호의적인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조선을 강압하고 약탈하는 데 앞장서는 왜놈들은 조선으로 볼 때는 찢어죽일 넘들이지만 왜국에서 볼 때는 충신이었다. 그자들이 조선에 악독하게 굴수록 왜국은 좋아지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에 와 있는 왜놈들은 충신 아닌 자들이 별로 없었다. 죽일 넘들이긴 하지만 그자들은 저희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로 볼 때 부왜파놈들은 역적 중의 역적이었다.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까딱하머 지 목 날아가게 생겠십니더. 자석이라꼬 생각으시고 쫌 살레주시소.” “이눔으 소상이, 어느 안전이라꼬 자석을 들먹이고 있노? 내가 은제 니긑은 눔을 자석으로 돘노? 에라, 이 돌상눔으 소상!” 안가의 말에 김이 벽력같이 고함을 지르며 벌컥 방문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장죽을 날릴 기세였다. 궐련이 나온지 언젠데 아직도 김은 쌈지 담배를 고집하고 있었다. 아차, 싶었다. 아무리 급해도 그런 말을 쓰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안가는 순간적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김이 노골적으로 자신의 출신을 거론한 것이었다. 어쩌다가 나는 하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 수모를 당해야만 하는가. 이를 뽀도독 갈고 안가는 김의 집을 나섰다. 임정과 연결돼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잡고 말리라. 다짐에 다짐을 했다. 그날부터 안가는 틈만 나면 김의 집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부산행 열차를 타면서부터 강성종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입국해서 부산행은 두 번째였다. 처음 부산에 갈 때는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때는 오직 OSS와 건국연맹의 임무 때문에 가는 길이었고, 지금은 임무도 임무지만 7년여 만에 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의열대의 방문(?)을 김중에게 예고하는 일은 어쩌면 핑계였는지도 몰랐다. 논의 끝에 김이 의열대 2진의 첫 번째 대상이 되자 그는 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김에 대한 미안함은 잠시였고 가족을 만날 기대만 가득했다. 치사랑은 없다고 했던가. 누구보다 아이들이 그리웠다. 아이들이 보고파 가슴 아렸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제 큰놈은 열 한 살, 작은놈은 아홉 살이 돼 있을 것이었다. 같이 있을 때는 제대로 안아 주지도 않은 아이들이었다. 할아버지, 어머니가 계셔서이기도 했지만 남자의 사랑은 가슴에만 묻어두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특히 자식 사랑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유교적 환경에서 자란 조선 남자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다음에 보고 싶은 사람도 죄스럽게도 할아버지, 어머니가 아닌 아내였다. 일찍 홀로 되고 고생하신 어머니도, 할아버지도 그리웠다. 자신이 순사를 죽이고 종적을 감췄으니 별일 없지는 않았을 테고, 그때 당한 고초 때문에 모두 돌아가신 것은 아닌지 또 살아계시다면 기력들은 어떠신지...... 허정만을 통해 어렵사리 소식을 알 수도, 전할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조심해야 하는 독립투사에게 그런 일을 시킨다는 것이 할일이 아니었고, 어차피 만날 수 없으니 서로 무사하리라 믿고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특별한 존재였다. 조부가 아니라 스승이라고 해야 옳을지도 몰랐다. 왜국 군대와 낭인들에 의해 왕비가 시해 당하자 왜놈들의 세상이 된 것을 알고 할아버지는 경서를 모조리 불태우고 벼슬에의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왜나라의 압제 아래에서 관리가 된다는 것은 곧 동족의 고혈을 빠는 행위임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그 대신 동의보감 등 의서를 독파하고 의원이 됐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에게 택견을 배우고 민족의식을 깨우쳤다. 아버지가 3・1운동에 앞장섰던 것도 할아버지의 영향이었다. 아버지가 경주의 장터에서 왜경의 칼에 죽임을 당할 때, 할아버지는 눈 한 번 감지 않고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했다. 눈에, 뇌리에, 가슴속에 그 장면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아버지는 왜나라와 왜왕 만세를 외치기만 하면 살려주겠노라는 왜경의 강요를 거부하고 끝까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고 했다. 왜경들은 번차례로 아버지를 찔러댔고. 주검이 되어버린 아들을 들쳐업으면서 할아버지는 비로소 울었다고 했다. 삼십 리 길을 아들의 주검을 업고 내내 울고, 웃었다고 했다. 아들의 죽음이 슬퍼서 울고, 장해서 웃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주검을 집으로 들이지 않고 아무도 모르게 뒷산에 묻었다고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아들의 주검을 보지 않고도 충격을 못 이긴 할머니는 곧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가 왜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날 밤에 할아버지가 이야기해 준 것들이었다. 누구에게도 한 적이 없는 이야기였기에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는 주먹을 그러쥔 손을 부르르 떨며 울어야 했다. 그냥 왜경의 총에 맞아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였다. “니 아비는 그래 장하디라. 내도 그 자리에서 왜놈들하고 싸우다 죽으까 생각도 해봤디라마는 그라머 끝 아이가. 그래가는 그 원수 지대로 갚는 기 아이라. 니를 잘 키우머 나라도 찾을 낀데 내가 말라 지금 죽겠노, 그래 생각했디라. 그기 니 아비 원수 지대로 갚는 길이라. 니도 니 아비맨치로 장해야 되니라. 호래이를 잡을라 카머 호래이굴로 드가야 되는 법. 그래, 인자 왜국에 가가주고 원수를 갚을 길을 배와 오느라.” 왜국 유학시절 조선인이면 감수해야 했던 멸시와 수난을 의연하게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할아버지의 말씀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