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야화(野話)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 첫번째 밤, 광대패 속의 여인
게시물ID : panic_950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ementist
추천 : 9
조회수 : 140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8/21 17:20:50
옵션
  • 펌글
★웃긴대학 공게작가  네오냥머신Mk7 님의 글입니다.★


그날, 유독 더웠던 여름의 정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를 매미란 미물들은 마치 비명이라도 지르듯 소리를 높인다.
해가 뜨면 매야미가 울고 달이 뜨면 악머구리가 울고.

그 천지 분간 못하는 미물들도 한창 소리를 높이고 나면 쉬는 때가 오건만.
어찌 사람이라는 자들은 한시도 고요함이 깔리게 두는 법이 없으니.





“어찌하여 궐 밖에도 나가지 못한단 말이냐!!!”


펄펄 끓어오르듯 달궈진 돌바닥들이 아른거리는 아지랑이를 온통 피워대는 와중에도, 나무로 만들어진 궐 안의 나무 바닥은 시원하기만 했다.
그러나 대전에 고개를 묻고 조아리고 있는 모든 대신들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치 물에서 방금 건진 빨랫감들 마냥 대전 바닥마저 흥건하게 적시고 있는 대신들은, 더워서가 아니라 온통 긴장한 탓에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지만.


“전하, 어찌 귀하신 옥체를 이끌고 백성들을 보러 친히 행차를 하신단 말씀이시옵니까. 바깥구경을 원하신다면 저희와 함께 사냥을 나가시지요.”

“그럼 짐은 백성들을 만날 자격이 없다는 것인가!! 짐이 진정 이 나라의 임금 된 자가 맞는가!!”

“그런 뜻이 아니오라…!”

“닥치거라!!!”


주체 못하고 꽉 막힌 속내를 견디지 못해 끓는 분노를 있는 대로 쏟아내고 있는 왕.
그 단단히 쥐어진 주먹은 분기를 견디지 못해 온통 요동치고 있었다. 그가 입은 용포마냥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목에는 울컥이는 핏대가 꿈틀대고 있었다. 왕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고, 그의 가슴은 이미 불이라도 난 듯 타들어가고 있었다.

왕은 답답했다.

그는 본인이 다스리는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 수가 없었다.
신하들이 이야기하고 가져다주는 소식들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전부였다.



여름에 가뭄이 심각하다 하여 분명히 국고의 쌀을 최소한의 비축분만 남기고 백성들에게 풀라 하였고 물이 부족한 고을에는 군사들이 개입해서라도 물을 길어다 주라고 명했다.
헌데 그런 일이 있고 한 달 후, 왕은 식사를 하던 중 돌을 하나 씹게 되었다.
결국 그 돌이 나온 전을 부쳤던 궁중 나인 하나가 왕의 앞에 불려갔고, 치도곤은커녕 사지 멀쩡히 죽는 것을 바라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기겁을 하며 사시나무 떨듯 떠는 게 아니겠는가. 왕은 벌을 주지 않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 떠는 모습이, 제대로 된 놀이 하나 없었던 궁중 생활에 큰 자극이 되어 조금 지켜보려고 했다. 짐짓 근엄한 얼굴을 하고는 아무 말 없이 궁녀를 바라만 보던 왕.
그 궁녀는 그저 왕이 무슨 말을 할까 벌벌 떨기만 하다, 제 풀에 긴장감을 못 이겨 그대로 궐 바닥에 납죽 엎드려 싹싹 빌었다.


그 궁녀의 말에 왕의 가슴 속 불씨가 피어오른 것이다.



“살려 주십시오! 제가 죽으면 가뭄 때문에 풀죽도 못 먹고 있는 저희 아버지 어머니께서 그대로 유명을 달리 하셔야 하옵니다! 제발… 제발…!”









처음에는 그 불씨가 그리 뜨겁지 않았다.
하지만 왕을 움직이게 하고 생각하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힘을 지녔다.
궁중 나인들을 무심히 불러 은근히 근황을 묻고, 궐 밖의 백성들 사는 이야기도 물었다.

자신이 쌀을 풀고 식수를 마련코자 대책을 마련했는데 대체 백성들이 왜 굶고 있냐는 말이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신하들이 자신에게 전하는 소식들이었다.



“덕이 높은 임금이 쌀을 한가득 풀어, 백성들은 단 한사람도 굶지 아니하고 걱정 없이 여름을 나고 있다며 나라님을 높이 칭송하고 있사옵니다.”



자신이 궁중 나인들을 통해 은근히 전해 듣는 소식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신하들은 좋은 소식들만을 들고 왔다. 그 행동들로 인해 여태껏 살며 전해들었던 신하들의 수많은 말들이 하나도 믿을 수 없는 그들의 사심에 얽힌 사견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몸으로도 직접 느꼈으니, 이제는 머릿속까지도 열불이 가득 들어차 죽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지금 과인을 능멸하는 것이냐!!! 네놈이 머리를 잘려봐야 저승에서나마 정신을 차리겠구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찌 신하된 자들의 간언을 듣지 못하신단 말씀이시옵니까!”

“내가 들은 바와 너희가 그 잘난 세 치 혀로 지껄이는 말들이 다르거늘, 어찌 통촉 따위를 입에 올린단 말이냐 감히!!!!”




처음에는 너무도 다른 나인들의 말과 신하들의 말을 지적하며 직접 궐 밖으로 시찰을 나가겠다고 역정을 냈다. 실제로도 왕은 시찰을 나가기 위해 채비를 단단히 하라 일렀고, 그 자신도 그에 걸맞은 의복을 입었다. 하지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부르지도 않은 조정 대신들이 잔뜩 입궐해서는 임금의 앞을 가로막아 고개를 처박고 엎드렸다.

체통을 지키라는 말이 그들의 핑계였다.

충신들의 간언을 믿지 않는 군주의 행동은 아랫사람을 간신인 것처럼 만들며, 어찌 하늘이 내린 옥체를 함부로 낮은 곳을 향해 이끌 수 있겠냐는 말을 모두가 입을 모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모습들에도 왕이 그들을 무시하고 궐을 나서려고 하자, 신하들은 왕에게 자신들이 직접 백성들을 데려올 테니 제발 나가지만 말아달라며 소리를 높였다. 그런 모습에 왕도 마냥 무시만은 할 수 없어, 간소한 여장을 풀고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이 데려온 백성들은 임금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들은 기분 좋은 소리만 지저귀는 새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왕의 은혜를 드높이며 칭송할 뿐인 그들의 말은 아무 진실도 담겨 있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그들을 내치고 다시 한 번, 궐 밖으로 나가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었다.


현재 조정 대신들은 통촉만을 연이어 외치며 임금과 대치하고 있다.

그들은 악머구리들이었다.
시끄러운 그들의 소리는 온통 그들만의 사심과 욕망으로만 점철되어 있을 뿐, 한 치의 진실이나 왕을 향한 존중도 전혀 볼 수 없었다.
본능에 따라 울어대는 짐승과 다를 바 무에 있는가.

조정 대신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외출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대신들은 항상 똑같은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꽤 많았다.



왕은 두 번을 참았다.

이번에는 신하들이 직접 광대패들을 데려오겠다고 한 탓이다.
저잣거리에서 권력가들과 소위 국정운영을 하는 높은 사람들을 목표로 우스갯소리를 이용해 희화시켜 풍자하고 그들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들이다. 물론 양반의 혓바닥 놀림 한번에도 목이 서너 개 씩 떨어질 수 있는 민초들인지라 자리를 봐 가면서 놀기도 하지만, 역시 이들보다 국정을 잘 비판하고 이야기 하는 이들은 흔치 않다.

왕은 다음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 가슴 속에서 꿈틀대는 마음은 두 번이나 마음을 다스리며 참아냈기에 불씨가 많이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이미 타들어간 마음은 숯이 되었다.

시꺼먼 숯.
불이 다 꺼져 더 이상 불길이 솟구칠 일은 없는 것이 숯이지만.
사실 장작개비의 불 보다도 더 뜨거워 질 수도 있는 것이 숯이다.

임금의 타오르던 마음에 냉랭한 분노가 들어차 마치 숯과 같은 심정으로 독기가 품어지게 된 것이다.







그 다음 날은 어쩌면 예상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미 앞서 보았던 조정 대신들의 더러움에 환멸을 느껴, 더 이상 희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저들이 저를 어찌나 신랄하게 비판하는지, 어떨 때는 고개도 못 들고 다니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모두 저의 부덕한 탓이 아니겠는가 싶어 스스로를 돌아보는 거울로 삼기도 합니다! 허허허허허.”


형조 판서가 너스레를 떨며 껄껄 웃는다.
투실투실한 턱살이 그가 웃을 때마다 출렁이며 보기 싫은 파문을 보인다.


“그런 저들이 이리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참으로 덕이 많으신 것 같사옵니다! 허허허허!”


익살스러운 춤사위의 광대들이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놀고 있고, 옆에서는 수많은 악사들이 한데모여 합을 맞춘 풍악 소리가 신명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들은 전혀 흡족하지 않았다.
광대에게 탈이란 무엇인가.
탈은 특정 인물들로 화 할 수 있게 도와주는 매개요, 그들이 위정자들을 비판하고서도 칼날이 그들에게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비밀을 이용한 방패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광대들은 임금의 탈과 용포를 입고는 백성들에게 연신 칭송받고 하늘의 신선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는 내용의 허무맹랑한 놀이 한 판을 벌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거짓 놀음이다.



“이 놈들이 나를 업신여기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주먹이 바들바들 떨려오는 왕의 모습에는 짙고 무거운 노기가 가득 서렸다. 왕의 눈에 독기가 바로 옆 호위무사의 칼을 찾아낸다. 당장에라도 저 쇠붙이를 뽑아 들어 분기를 쏟아내고 싶다. 눈물이 나올 정도가 아니라 눈알이 뽑힐 정도로 감정이 격해진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가 온 정신을 태운다.
그때, 왕의 시선이 새로 나타난 누군가에게 꽂힌다.



하늘거리는 하얀 천을 이리저리 흩트리듯 날리며 춤을 추는 여인이 하나.

어두운 빛의 붉은 비단 옷이 여인의 춤사위 하나하나에 흐드러지게 물결쳤다.
빛이 가득한 천상에서 갓 내려온 선녀를 보는 듯 고고한 자태를 보였으나, 교태에 흠뻑 젖어있는 몸짓과 살살 아른거리는 듯 애잔한 눈빛에는 농염한 색기(色氣)가 가득하여 남정네의 가슴속에 욕정의 불길을 지르고 있었다.


그 여인의 뒤에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며 분주하게 군무를 보이는 광대들은 알 바가 아니었다. 임금의 눈에는 오로지 한 여인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꽹과리와 장고 따위의 시끄러운 타악기 소리가 귀를 어지럽히기도 하련만 정작 그 길거리 농악과도 같은 음악에는 어울리지도 않을 저 고고한 자태의 여인만이 눈에 들어와 마음의 홧병을 모조리 꺼트리고 있었다.

여인이 발돋움을 하여 사뿐사뿐 그 몸을 돌릴 때 마다 치맛자락이 가볍게 날리고, 두 손의 새하얀 천을 하늘에 수놓아진 구름이 높이 나는 새 옆을 지나듯 고고하면서도 격정적으로 휘날렸다. 하늘 위를 날아다니는 듯 착각마저 든다.


왕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위무사들과 내시가 고개를 숙여 자리에서 일어난 왕에게 예를 표하는 와중, 왕은 내시에게 나직이 지시한다.


“지금 저 여인을 과인이 침소에 들 적, 데려오도록 하라.”


나머지 조정대신들은 비교적 거리가 있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왕의 지시를 듣지 못하였고 자리를 떠난 왕의 모습을 바라보며 앞일을 생각할 뿐이었다.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광대패의 거짓놀음에는 정신을 두지 않은 것이다.





보는 의미가 있을까 싶은 상소문들을 보며 대소사를 확인하던 왕은 날이 저물어 침소에 들었다.
저녁상도 뜨는 둥 마는 둥 하고서 상을 물리니, 큰방상궁이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어의를 찾으려 했지만 귀찮아하며 물리쳤다.
식욕마저 물리칠 정도로 왕은 깊게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침소에 들어서는 왕.


“네놈은 누구인가.”


왕의 침소 앞에는 시커멓게 피부가 그을린 남자 하나가 엎드려 있었다.
옷을 나름대로 정갈하게 입은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생겨먹은 태가 몹시 남루하였다.


“네놈은 누구냐고 묻지 않았는가!”


대답하지 않는 사내에게 왕은 노성을 보였다.
그에 그 엎드린 남자는 기겁을 하며 몸을 떨었는데, 몸이 얼었는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요 입 또한 얼었는지 떨어질 줄 모르고 침음성만을 겨우겨우 흘렸다.
그러자 왕의 뒤를 따르던 내시가 입을 열었다.


“마마, 낮에 말씀하신 사람이옵니다.”

“네가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죽고 싶은 게로구나? 네가 이러고도 살아남을 줄 알고 있는 것이냐!!!”


진노한 왕의 일갈에 내시는 몸을 떨어댔다.
왕의 한마디이면 내시 본인은 고사하고 일가친척들에 알고 지내는 지인들 목까지 다 떨어져나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지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포감에 그의 목소리가 떨려오나 왕에게 진실을 마저 고한다.


“마마, 광대패에는 여인이 없사옵니다.”


내시의 한마디에 왕의 용안에는 의문이 가득 차오른다.
계속해서 말을 잇는 내시.

“소인이 잘못된 이해로 틀린 행동을 하였다면 부디 죽여주시옵소서. 허나, 낮에 부른 광대패들은 여인이 놀음판에 들어서면 부정을 탄다 하여 여인을 들이지 않는 패였사옵니다. 그나마 여인이라 하시어 각시 탈을 쓰고 있는 자를 속히 데려왔을 따름이옵니다.”

아무 말 없이 왕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엎드려 있는 그 광대를 제치고 침소의 문을 열었다.
텅 빈 침소가 눈에 들어왔다.
왕은 노기가 전부 가시고 기운마저 한 풀 꺾인 듯, 나직한 목소리로 내시에게 말했다.


“짐이 찾는 여인은 그자가 아니다, 침소에 사내놈을 부를 리가 없지 않느냐. 물러가거라.”


왕은 홀로 침상에 들었다.
의아한 일들에 머리가 식고 나니 왕은 그제야 똑바로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의 미인은 궁궐에서도 만나보기 힘들었고, 하물며 그 고고한 자태야 말할 것도 없이 귀한 것이었다.
그런 여인이 고작 길거리 광대패라니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같이 놀이를 감상했던 조정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미인이 들어서서 선녀와도 같은 몸짓을 보여주는데 누구하나 흔들리는 자가 없었고 실상 왕을 칭송할 뿐, 놀이 자체에 관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왕은 침상에서 어둠을 관찰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꽤나 어둑어둑해진 모양이었다.

원래 여인을 밝히는 인물이었다면 진즉 비나 시녀를 불러놓았을 것이다.

가슴이 진탕되는 느낌의 매혹적인 여인.
그 당시에는 진정 눈에 어느 것 하나 다른 것들이 들어설 틈 없게 그 여인만이 밟혔었는데, 지금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히 생각해 보니 무언가에 혹했었던 모양인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미색이 뛰어나다 한들 이토록 온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니.



드르르륵


매우 조용하게 침소의 문이 열렸다.
임금은 고개를 돌려 임금의 명 없이는 열릴 리 없는 침소의 문을 의문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검고 붉은 빛으로 물이 들여져 다소 몸에 달라붙듯 늘씬한 맵시의 비단 옷.
문이 열리고 들어서는 그 여인의 한 걸음 한 걸음에 결코 흐트러짐은 없었다.

낮에 보았던 그 여인.



“너는 누구냐, 귀신인가.”



낮에 입었던 옷이 하늘하늘하고 넓게 늘어진 국화라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야심한 밤에 피어난 초롱꽃이라 할 것이다. 몸에 꼬옥 맞아 몸매를 예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여인의 옷은 어디하나 맨살이 드러나지도 않았건만 그 농염함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왕은 그 짙은 매력 속에서도 무겁고 답답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지요.”



어느덧 임금의 옆에 다가와 무릎을 꿇고 다소곳하게 자리한 여인은 짐짓 왕의 근엄함이 아무렇지 않다는 모습을 보였다. 왕은 기침하여 침상위에 앉아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긴 속눈썹이 도드라지나 그 너머에 비춰지는 눈동자는 마치 어두컴컴하고 깊은 천길 아래의 물길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왕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는 별 허깨비 같은 것들도 과인을 얕보는 게로구나. 짐과 선문답(禪問答)이라도 할 생각인 것인가.”


왕은 그리 얘기하면서도 문 밖을 넌지시 눈을 돌려 바라보았다.
여인은 그러한 왕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게 미소 지었다.
밖은 너무나 조용했다. 침소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면 임금이 잠결에 뒤척이는 소리까지 다 알아낼 호위무사와 궁궐나인들이 이 대화를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의 신상에 문제가 없다면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여인을 막아서지 않았을 리가 없지만.


“아랫것들은 자고 있사옵니다.”

“네가 한 것이냐?”

“제가 하지 않고서야 감히 임금의 침소 앞에서 잠을 청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소에도 매력이 뚝뚝 묻어났지만 호감이 일어나고 애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임금이 느끼고 있는 그 매력은 한 여인을 바라보는 데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센 힘을 가지고 흉악한 일을 벌이는 범도 그 털과 자태만큼은 아름답지 않던가.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평범한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서는 그 매력이 애정으로 발전되지는 않는다.


“고민이 있으신 가 봅니다.”


몹시 걱정되어 어쩔 수 없이 묻는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물음을 던지는 여인의 행동은 어린아이를 다루는 어른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그 모습에 기분이 상할 법도 하련만 왕은 그러지 않았다.


“그대 눈에도 그리 보이는가.”

“풍파를 이리저리 겪고 온통 깎여나간 전하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옵니다.”


임금은 여인이 건넨 그 말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솟아 마음이 요동쳤다.
진심인지 허투루 하는 말인지도 모를 여인의 한마디에 임금의 마음이 달래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자신의 괴로움을 알아주는 것 같은 여인의 그 한마디는 매우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임금은 다시 한 번 여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해가 밝을 적 보았던 그 애잔한 눈빛이 다시 한 번 임금의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기댈 곳 없이 고독한 것은 만인지상보다도 더 높은 곳에 머무르는 임금일 지도 모른다.




“과인은 허수아비 임금이었다. 백성들은 지금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코자 염통을 찢는 고통 속에서 살아가건만, 과인은 궐 안에서 호의호식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지내고 있으니 어떤 고민과 고뇌를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비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몹시 부끄럽고 창피하구나.”


누구에게도 내어 놓지 못했던 고민.
난생 처음 보는 여인에게 털어놓게 되어버렸다.
임금의 마음속에 가득 들어차 온 가슴을 꽉 막히게 하던 감정들이 조금은 녹아내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을 주었다.


“전하의 사람은 한명도 없고 잘못된 권력과 재화에만 눈이 멀어 돌아다니는 사람들뿐인 궁궐이 많이 답답하셨을 테지요.”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근자에 궐 밖의 모습들을 친히 눈에 담으시고자 마음 쏟으시는 전하의 모습들을 우연찮게 보았을 따름입니다.”


궐 밖에 발길을 돌릴 자유도 없는 왕.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있건만, 높을수록 힘이 있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여인의 오른손이 왼손을 감싼다.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어진 긴 손톱이 인상적인 여인의 하얀 손.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어 놓은 여인은 잠시 눈을 감는다.
임금은 말을 잇지 않았다. 여인이 어떠한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다. 다른 이였다면 속히 말하라고 하였을 테지만 이 여인은 가벼운 인사가 아니다. 그저 임금은 기다린다.


“제가 바꾸어 드릴 수 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이 꺼내어 놓은 의미 모를 한 마디.
하지만 임금은 뭔가 자신의 머릿속을 관통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물을 것이 많았지만 여인의 이어지는 말들은 실로 알기 어려운 것이었다.


“모든 새는 날개를 가지고 있사옵니다. 하지만 날아가는 거리는 천차만별일 테지요.”

“무슨 말인가.”

“날개를 지녔어도 날지 못하는 닭 보다야 구만리를 날아가는 대붕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무릎 위에 포개었던 두 손을 엄지손가락끼리 구부려 걸어놓은 채, 새의 모양처럼 손바닥을 펼쳐 두 손으로 날아가는 새의 모양새를 흉내 내어 보여준다. 표정에는 장난기가 잔뜩 어려 천진함마저 보인다. 새의 모습을 흉내 내는 모양새가 퍽 신이 나 보인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새를 까딱거리며 미소 짓는 여인.


“날아가는 법을 어미에게서 배우지 못한 새도, 평생 새장 안에서 사람만 보고 살아온 새도. 자유를 찾으면 제 분수껏 날아오를 수 있답니다.”


새.

임금은 궐 안에서 새를 본 적이 많이 있다.
항상 하늘에 보이는 익숙한 새.
사냥용이나 식재료로 진상되어져 온 새.
계절 따라 보였다가 사라지는 새.
흔치 않은데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우연찮게 본 새.
새장 안에 넣어서 기르는 새.


“어떻게 바꾸어 줄 수 있단 말이냐.”


임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체 이 여인에게 어떤 힘이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이제부터 저는 매일 밤 전하의 침소에 들어,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들려 드릴 것이옵니다.”

“그리고?”

“그저 이야기를 들으시면 되는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상 위에 앉아 있는 임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여인.
이내 다시 한 번 그 고운 미소를 보여준다.
이번에는 그 미소가 다소 가볍다.
일어선 여인을 바라보는 임금의 눈에는 당혹감이 어린다. 이야기만 듣고도 해결이 된다니, 묘수라도 알려준다는 뜻인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들이라 하면 그저 소문이나 이야기들 아닌가. 아이들이나 놀래 주려고 지어내는 괴담들도 그런 것들 아닌가.


“내일 밤,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소녀는 물러가지요.”


그리고 저절로 침소의 문이 열리고 여인이 유유히 빠져나갔다.
두 다리로 걷는 것이 아니라 둥실둥실 떠서 돌아다니는 것처럼 스르륵 빠져나가 버렸다.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지만 임금은 두려움보다는 의문이 자리 잡았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다.
귀신이냐고 물었는데 이리 답을 했으니 사람도 귀신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이 침소를 나서자마자 문이 드르륵 하며 저절로 닫혔는데, 그 문소리가 들리자마자 밖에서는 웅성대며 수선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어떤 치도곤을 당하려고 이리도 졸고 있어!”

“자네도 잠들지 않았나, 입에 침이나 닦고 말하게!”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에도 임금은 여인의 정체에 대해, 들려주고자 한다는 그 이야기에 대해 골몰한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








아, 웃대 연재 처음으로 시리즈물을 써봅니다 ㅎㅎ

매번 단편만 써오다가 장편 한 번 가려니까 기대 반 근심 반 그러네요.

사실 전에 다른 커뮤니티에서 시리즈물 한 번 쓴 적이 있는데 편 수만 늘어가고 좀 묻히는 감이 있어서 관뒀었거든요 ㄷㄷ

좀 걱정이 있기는 하지요..


하여튼 되는데 까지는 열심히 써 볼 계획입니다.

나름 결말도 뚜렷하게 만들어 놓기도 했구요 ㅎㅎ


내용이 별거 없는건 프롤로그 격이라서 그렇습니다 으음 으음





그럼 여튼...

'야화(野話)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시작합니다!








출처 : 웃긴대학 공포게시판
작성자 : 네오냥머신Mk7 님
http://m.humoruniv.com/board/read.html?table=fear&number=73908
출처
출처 : 웃긴대학 공포게시판
작성자 : 네오냥머신Mk7 님
http://m.humoruniv.com/board/read.html?table=fear&number=73908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