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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드리는 꿈
7. 결의형제들(4)
그리고 걸인집단은 거대한 정보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곳이나 걸인들이 없는 곳은 없었고, 그들이 모르는 곳은 없었다. 웬만한 집의 제사며 대소사까지 꿰뚫고 있는 것이 그들이었다. 깡통을 차면 못 갈 곳이 없었다. 그들 집단의 지도자가 바로 정도한이었다. 정의 권위는 걸인들에게는 총독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결속력이 강한 그들 집단을 정은 전국적인 조직으로 체계를 완전히 갖춰 놓은 것이었다. 무장만 갖추면 바로 군사조직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로 그들의 사령관이 정도한이었다. 정은 왜놈들에게 죽임을 당한 의병의 아들로 누구 못지 않게 강한 항왜의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장태식을 앞세우고 청계천으로 정도한을 찾아나섰다. 옆구리에 깡통까지 찬 그는 누가 봐도 걸인이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한이 형님, 내가 이야기했던 그 형님이요.”
“처음 뵙겠습니다. 김대철입니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반갑소. 태식이한테 이야기 들었소.”
간단한 수인사를 나눴다.
“김선생, 아니 아우님, 건국연맹에서 아우님의 직책은 뭔가?”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직책이 없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아니야. 내 짧은 소견으로 봐도 아우님은 앞으로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 될 힘을 가지게 될 걸세. 그래서 말인데 나는 우리 거지형제들이 멸시 당하고 천대 받는 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네. 해방이 되고 나면 그런 것들은 우리 동포들 사이에선 없어졌으면 좋겠네.”
그는 며칠 전에 임시 정부로부터 왜놈들과 부왜분자들에게 몰수하는 농지의 재분배를 위해서 무산자 대중을 철저하게 파악하라는 2호 훈령이 내려왔음을 이야기했다.
“그건 내 직책과 아무 상관이 없이 우리 힘으로 왜놈들을 몰아내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겁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다들 왜놈들과 동척, 부왜분자들이 갖고 있는 땅이 우리나라의 7할이 넘는다고 봅니다. 임정과 건국연맹에서는 그 땅들을 몰수해서 어떤 방식으로 빈곤한 인민들에게 돌려줄까를 궁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우님, 말을 끊어서 미안하네만 그런다고 해도 그 땅들도 이미 누군가가 경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돌려준단 말인가? 그래봤자 피죽도 못 먹는 지금 경작하고 있는 사람들 것을 빼앗아서 준단 말인가?”
“형님,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왜놈들이나 악독한 부왜지주놈들은 거의 전부 2・8제로 소작인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습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소작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면, 지금까지는 20이라는 소출을 얻기 위해서는 100이라는 농지를 부쳐야 했지만, 앞으로는 20이라는 농지만 부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럼 얼마의 농지가 남습니까?”
“80이 남지요!”
장태식이 냉큼 끼어들었다. 정이 무릎을 탁 쳤다.
“아하! 그 80을 나눠준다는 거네?”
“이래서 배워야 한다는 거요. 형님은 생각도 못했쥬?”
또 장이 끼어들었다. 정은 민망해서 크게 웃었다.
“이놈아, 그럼 넌 생각했냐?”
“생각 못했슈. 내나 형님이나 무식하긴 마찬가지지.”
셋은 한바탕 웃었다.
"그 20으로야 겨우 연명하는 정도일 테니 넉넉잡아서 50이라는 농지를 기존 소작인들에게 분배한다고 해도 50이 남지 않겠습니까? 그걸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분배하면 되지요. 물론 개인 사정과 지역 사정도 고려를 해야겠지요. 하여간 왜놈들만 제대로 때려잡으면 밥 굶는 동포들은 없어질 겁니다."
“아우님, 그럼 무식한 내가 묻는 김에 하나 더 묻겠네. 만주로 쫓겨간 사람들은 어쩌는가, 수십 만이 될 텐데?”
“만주 땅도 9할은 왜놈들 소유고, 경작은 우리 동포들이 하고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지요. 임시 정부는 국민당 정부와 협상하면 될 것이고, 공산당 정부하고는 팔로군에서 막강한 영향력이 있는 우리 독립투사들이 협상하면 되고요. 만주 개간은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했으니 별반 문제가 없을 겁니다. 정 안 되면 국내로 다시 데리고 오면 되고요. 그래도 농지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앞으로는 걸식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없을 겁니다. 여운형 선생님께 약조를 받아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는 그에게서 정은 신뢰를 느꼈다. 해방을 되찾은 뒤에 걸인들이 배제 되지 않을까가 염려였으나 이제 목숨 걸고 싸워야 할 명분이 확실하게 생긴 셈이었다. 정은 그의 손을 꽉 잡고 좋아했다.
“각급 위원회에서는 무산자 대중 파악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형님도 형제들을 확실하게 파악 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징용・징병・정신대・성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인데요......”
목소리를 더욱 낮추는 그였다.
“조선군, 총독부, 민간인들 해서 국내에 왜놈들이 40만이 있다고 봅니다. 결국은 우리가 무력의 주축이 될 거니까 거사가 성공하면 속전속결로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칠가살은 아니라도 왜놈들 중에 관서에서 일하던 놈들하고 순사놈들까지 해서 웬만하면 죽여 버립시다. 그놈들 중에 좋은 마음으로 우리나라를, 우리 동포를 상대한 놈들이 몇 놈이나 있겠습니까. 거의 전부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와 우리 동포들을 조금이라도 더 쥐어짜지 못해 안달한 놈들입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지요. 그리고 조합 같은 데서 일하던 놈들 중에 악독했던 놈들까지요. 어지러운 상황이 끝나면 상부에서는 분명히 그런 놈들은 죽이지 않고 재판을 받게 할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 문제는 제가 책임질 테니까 모르는 척하고 다 죽여 버리자고요. 그래야 잘못하면 잡혀 있는 왜놈들 다 죽이겠다 싶어서 겁 먹고 그 쪽에 있는 우리 동포들 다 돌려보내 줄 겁니다. 관동대지진 때 왜놈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저희들 민심 수습하려고 만 명 가까운 무고한 우리 동포들을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무기를 들고 항쟁했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했습니다......"
그는 크게 후, 하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의분이 끓어올라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놈들이 우리에게 한 악랄한 짓이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왜놈들이 지금까지 한 것 보다 더 잔인하게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제대로 겁을 먹습니다. 상대가 겁을 먹게 하려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도록 무섭게 설쳐야 되는 겁니다.”
“아우님은 우리 쪽 사람도 아니면서 그런 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가?”
“형님은 참! 모르는 게 없으니 한 나라를 지휘하는 거 아니오!”
“이 사람아, 무슨 소린가? 난 단지 주석 각하의 심부름꾼일 뿐일세.”
정도한과 장태식의 말에 그는 계면쩍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 될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
"......"
이번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할지를 몰라 둘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왜나라에 있는 우리 동포들만 돌려받고 말 겁니까?"
"......"
"......"
"그동안 왜놈들이 우리에게 입힌 모든 피해ㅡ독립운동가들을 죽이고 고문하고 가둔 것,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고 토지를 빼앗고 착취한 것 등등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정당하게 아니, 승전국으로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배상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두고 보세요. 우리 건국청년단이 잘하면 순국선열들과 억울하게 죽고 고통당한 동포들의 핏값으로 살아남은 우리 동포들 모두가 부유하게 사는 날이 올 겁니다. 꼭 그렇게 돼야 되고요. 이건 왜놈들에게 철저하게 배상받는다는 주석 각하의 확고한 의지와 원칙에 제 생각을 보탠 겁니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우러러보였다.
“그래, 아우님, 우리 옷을 입어보니 어떤가?”
“괜찮은데요. 잘 어울리지 않습니까?”
“정말 잘 어울리는구만. 혹시 아우님은 전생에 정말 우리 같은 거지 아니었나?”
“하하하! 그런 모양입니다.”
“공수래공수거라. 누구나 죽으면 거지가 되지.”
셋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걸인라도 그의 변장을 알아볼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