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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 연합군 2차 일본 원정 이야기입니다. (2)
게시물ID : history_947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10/4
조회수 : 67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5/25 19:11:19

이후에는 비교적 평안했습니다, 제국대장공주가 찡찡대는거야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만 이 때만큼은 얌전한 모습을 보인데다가 홍다구도 흔도도 없는 고려는 말 그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낼수 있었지요,


더불어 재정이 상당히 튼실해진 까닭에 왕궁도 짓고 흉년에 구휼도 하고 심지어는 원나라에서 구휼미를 얻어올수 있을정도였으니 말을 더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장춘몽이라 했던가요, 쿠빌라이와 약속한 시간은 촉박하게 다가오는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원나라에서 일본에 보낸 사신들이 몰살을 당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1280년 8월 22일에 충렬왕은 원나라에서 일본 원정에 관한 계획을 듣게 되는데 1차 원정과는 비교도 안되는 거대한 계획임을 알게됩니다.


1차 원정에 버금가는 규모에 추가로 만군(蠻軍) 즉 남송군 10만이 더해진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보자면 현대에도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그 중에 으뜸가는 것은 바로 퇴역 군인의 문제입니다. 


양민으로 돌리기에는 점령지의 민심을 고려했을때 분명 뒤 탈이 발생할터인즉 이 들을 그냥 풀어둘수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군에 수용하기에도 문제가 있어 등급별로 차출하기를 몇차례 반복하고 또 거르고 걸러 정말 최하급의 병력을 차출한게 이 병력입니다.


이 만큼 병력이 늘어 난다면 분명 작전의 성공 확률은 높아질테지만 고려는 결코 이 것을 반길수는 없었습니다.


병력에 맞춰 물자가 준비되었나 보면 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원에서 이 병력을 먹여 살리며 일본에 보낼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니 말입입니다. 즉 1~2만 병력을 차출하기도 재정이 시쳇말로 똥줄타는 고려로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충렬왕은 여기서 쿠빌라이에게 쇼부를 칩니다.



앞서 왕이 박의(朴義)를 보내어 매를 올리고 말을 전하기를,“신이 직접 들어가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2일(신미)에 왕이 왕경을 출발하여 22일(신묘)에 원의 수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흔도(忻都) 다구(茶丘) 범문호(范文虎)가 모두 황제의 명령을 받고,“신이 만일 일본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다시 폐하를 뵙겠습니까?” 하여마침내 일본을 토벌할 계획이 결정되었다.


흔도와 다구가 몽한병(蒙漢兵) 고려병 4만군을 거느리고 합포(合浦)에서 출발하고,문호는 만군(蠻軍) 10만을 거느리고 강남(江南)에서 출발하여모두 일본의 일기도(壹歧島)에서 모이기로 되었다.


26일(을미)에 왕이 황제에게,  


1. 탐라(耽羅)에 주둔한 우리 나라의 군대를 일본 토벌에 참가시킬 것.  

2. 고려군과 한군(漢軍)의 수를 줄이고 몽고군을 더 많이 동원할 것.  

3. 홍다구의 관직을 올리지 말고 그가 공을 세우는 것을 보아서 상을 내리며, 도리첩목아(闍里帖木兒)와 신이 정동성(征東省)의 사무를 관리하게 할 것. 

4. 우리 나라의 군관에게도 모두 사령을 내려줄 것.  

5. 대국의 해변에 거주하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뱃사공과 수부(水夫)에 충당하게 할 것.  

6. 안렴사(按廉使)를 파견하여 백성의 생활고를 구호할 것.  

7 신이 직접 합포에 가서 군대를 사열할 것. 


등 7개 사항을 요청하니,황제는, “벌써 아뢴 바를 알고 있다.” 하였다.


앞서 왕이 글을 중서성에 보내어,“다구는 우리와의 감정이 좋지 않으니 그가 감독한다면 백성이 반드시 놀라 달아날 것이므로 일이 제대로 안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다구가 꼭 일본 토벌에 참가하려 하므로 황제도 허락하여 다시 나오게 된 것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2상. 

경진년 충렬왕 6년(원 세조 지원 17, 1280)



뭐 매국노 홍다구가 다시 기어나온 것은 결코 반길수 없는 일이지만 이 정도 양보를 받은것도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리고 일본 원정을 맡을 고려군의 책임자로 이때 연세가 예순 아홉으로 당시 평균 수명을 보자면 이미 끝자락을 걷고 있던 김방경을 다시 불러들입니다.(...)


본인은 나이를 사유로 임관을 거절했지만 충렬왕은 원나라에 내보일만한 장수가 없다는 것을 이유로 불러들입니다.


노인 학대다 뭐다 할만한 일이었지만 고려의 인재 부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충렬왕은 어디서 샘솟은 용기인지 원나라에 다시 사신을 보내 조건을 더 내겁니다.


“제후가 들어가서 재상이 되는 것은 옛법입니다. 요(遼)와 금(金) 두 나라에서도 우리의 선조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봉한 적이 있고, 나도 은혜를 받자와 특진상주국(特進上柱國)이 되었습니다. 


제후로서 대국의 재상 관직을 겸임하는 것은 옛날과 오늘날에 예가 있으니 잘 말씀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모든 행성(行省)의 군사와 행정문제를 반드시 우리와 함께 상의하여 실시하고 사절을 보내어 조회하러 갈 때에도 반드시 우리 나라의 관리와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요즈음 성(省)의 공문을 받으니 내년 5~6월 경에 배가 출발하려 한다 하는데, 우리 나라의 5~6월에는 해마다 흙비가 그치지 아니하고 조금이라도 서풍이 불면 바다에 안개가 끼어 캄캄하게 됩니다. 


만일 오랫동안 여기서 지체한다면 군량이 떨어질 것이니 이해관계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활ㆍ화살ㆍ갑옷ㆍ투구가 부족하오니 상당한 양을 주소서. 그리고 김방경과 그 부하 여러 장군에게도 호두패(虎頭牌)를 내리어 후세의 사람을 권장하게 하십시오.”하니, 원주는 모두 들어주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2상. 

경진년 충렬왕 6년(원 세조 지원 17, 1280)


이때 고려가 준비한 병력은 1만에 군량은 11만석으로 병선은 9백척, 뱃사공과 수부(水夫)는 1만 5천명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이 것은 말 그대로 고려가 한계치까지 추려낸 물자와 병력으로서 더 이상의 지원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즉 상기의 요구 사항은 어찌보면 당연한 요구이지만 상국인 원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마국을 고려할만한 것은 아닌터라 이 것이 쉽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당시 원나라도 고려의 사정은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거니와 고려를 대하는 당시의 원의 입장과 사정이 어떠한가를 알수 있었던 대목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이런 저런 사정속에 시간은 흘러 1281년 5월, 마침내 여러 우여곡절이 있기는 하였지만 2차 일본 원정을 위한 모든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함선 900척에 4만 2천명의 고려와 몽골군으로 구성된 이른바 동로군은, 함선 3천 5백척에 10만명으로 구성된 남송의 잔당들 강남군과 함께 일본으로 향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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