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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 줄래?”
며칠 전 헤어진 여자친구로부터 대뜸 이런 문자가 날아왔다. 그 뒤로 지금까지 매일 밤 12시가 되면 똑같은 메시지가 휴대전화에 뜬다. 다른 내용은 없었다. 오직 “죽어 줄래?” 한 마디뿐이었다. 그녀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어째서 죽어 달라는 잔혹한 말을 던진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한 가지 짐작이 가는 사연이 있었다.
이야기는 우리 엄마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한양대학병원에 입원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가 6인실로 옮긴 다음 날, 할머니 한 분이 입원했는데 꽤 중증인 듯했다. 할머니는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옴짝달싹 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문제는 간병인이 자주 투덜거리며 할머니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틈틈이 할머니 옆으로 가서 말도 걸어 드리고 심부름도 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좋아하셨다. 노인은 같은 이야기만 되풀이하니까 지루해서 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되풀이되는 데에 질릴 만큼 연장자의 이야기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로 즐거웠다. 일주일이 지나자 유쾌한 이야기에는 크게 웃고, 무서운 얘기에는 조마조마해하는 내가, 아무래도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거워 한다는 것을 할머니는 알아차리신 것 같았다.
한번은 잠에서 깨어난 할머니가 나를 찬찬히 바라보시더니 물었다. 지금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몹시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여자친구와 헤어질까 고민하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한데 “음, 사귀는 사람이 있긴 한데 좋아하진 않는구만” 하고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본 것처럼 앞질러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어째서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네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거든”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다시 물으려고 하자 할머니는 그것을 가로막듯이, 조금 피곤하니 이제 자야겠다, 하며 정말로 코를 쿨쿨 골며 주무시기 시작했다.
그때는 그게 다였다. 납득이 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사소한 일이어서 나도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한데 다음 날. 여자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엄마 문병을 오겠다는 거다. 당장은 만날 기분이 아니었던 나는 거절하려고 했으나, 여자친구는 막무가내였다. 음, 어떡한다. 그때 통화를 듣던 엄마가 이런 말을 했다. “여자친구야? 오라고 해.” 할머니도 옆에서 거들었다. 엄마 기분 좀 맞춰드리라고. 자신이 관상을 좀 볼 줄 아니까 봐주겠다면서. 다만 할머니 침대 주위에 커튼을 쳐둘 텐데, 여자친구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아주 조금만 열어놔 달라고.
마침내 점심때가 지나, 여자친구가 병원으로 찾아왔다. 별 생각 없이 나는 할머니 침대 주위에 커튼을 살짝 열어두었다. 그러고는 엄마와 여자친구가 이야기하는 사이에 커피라도 사올 요량으로 잠시 매점에 다녀왔는데. 캔커피 몇 개를 사서 병실 입구로 들어선 순간, 여자친구의 얼굴이 순식간에 눈보다 더 새하얘지는 것이 보였다. 놀라서 크게 뜬 눈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이윽고 여자친구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며 팔을 쭉 뻗었다. 마치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듯이. 왜 그러나 싶어 의아해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여자친구는 할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의 커튼을 가리키고 있었던 거다. 가려진 커튼 틈 사이로 뭔가가 보였던 걸까.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내가 말릴 틈도 없이 부랴부랴 병실을 나갔다. 몹시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나와 엄마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그러다가 할머니에게 다가가 커튼을 열어보았는데. 할머니는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다가 이렇게 말했다. “아아, 아무래도 저 여자아이에게는 엄청난 것이 보인 모양이구나.” 그 말을 듣자, 별안간 나도 등골이 오싹해졌다. 엄청난 거라니, 대관절 그게 뭐냐고 나는 물었다.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그건 다음에 천천히 얘기해 주마”라고 말씀하시고는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워 버리셨다. 대체 여자친구는 무엇을 보고 놀랐던 걸까. 할머니는 그 ‘엄청난 것’의 정체를 알고 계시는 걸까―.
이 이야기는 소설 <N>에서 모티브를 얻어 끼적여 본 것인데 이쯤에서 “죽어 줄래?”의 사연이 궁금하신 형제자매님들은 미치오 슈스케의 소설을 읽어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게 아주 신묘막측한 작품이거든요. 전부 6장으로 구성된 장편이지만 읽는 사람에 따라 엔딩이 달라져요. 게다가 독자들이 ‘습관적으로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을 것’임을 감안하여 각 장의 연결을 끊기 위해 이야기를 한 개씩 상하 거꾸로 인쇄해 놓은 디테일까지. 아주 제대로 만들었습니다. 한 번 거들떠봐 주시길.
간만에 아이디어 넘치는 소설을 읽고 흥이 나서 길게 읊조려본,
마포 김 사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