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카페 안을 적적이 흐르는 음악과 함께 퍼져나가던 커피향이 코끝에 맺혔다. 고풍스러운 목재원탁 위로는 가을의 밀밭 같은 금빛 치즈케익이 덩그러니 올려져선 속살을 드러낸다. 무딘 포크는 케익의 한쪽 끝을 잘라내선 자그마한 입 속으로 들어가고, 뜨겁고 촉촉한 입 속에서 녹아내린 치즈 향은 그 풍미를 마음껏 자랑했다.
그 부드러운 맛에 흡족했는지, 작은 입에 행복 섞인 미소가 드리운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어쩌면 안쓰럽게 지켜보던 현일은 괜히 손을 뻗어 예쁜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맛있냐?"
"응, 맛있어! 정말로."
"더 좋은 것도 많다니까. 기껏 나와선 케익이 뭐냐, 케익이."
"그치만, 난 이게 가장 좋은걸."
쯧. 현일이 혀를 찼다. 소현을 위해 기껏 준비했던 돈이 전부 허사가 되고 만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소현은 온 세상을 가지기라도 한 표정이다. 뭐, 이거면 됐다. 어떤 식으로든 소현이 기뻐하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녀의 기쁨이 너무 소박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있지… 저 까만 케익도 먹어봐도 돼?"
긴 흑발을 뒤로 넘기며 치즈케익을 흡입하던 소현이 가리킨 것은 보기만 해도 단맛이 물씬 풍기는 초코케익. 또 케익이냐, 현일이 내심 불평했다. 그래도 어느 순간엔가 주문한 초코케익이 손에 들려 있는걸 보면 그도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마음 같아선 뷔페라도 데려가고 싶어도 실험실 안에서 소현이 먹어봤던 달콤한 음식이라곤 그가 가끔 사다줬던 케익이 전부.
사실상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는 셈이다. 우물 안에서 누려본 호사라곤 케익밖에 없는 개구리가 원할만한 것은 케익뿐. 알고 있지 않았는가. 게다가,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라고 말했던 것은 현일이다. 탓하려면 아둔한 소리를 했던 자신을 탓할 수밖에.
"많이 다니까 우유 마시면서 먹어라."
"에헤헤, 응!"
생그러운 대답과 동시에 초코케익을 삼키는 입을 바라보며, 현일은 휴대폰을 꺼내 인터넷 기사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먹는 모습을 보기만 한다는 것은 보는 사람이나, 보여지는 입장에서나 괴로운 법이니까. 인터넷 기사래 봐야 북쪽 돼지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댄 내용이 전부일게 뻔 하지만 그래도 없는 것 보다는 낫다.
"어어……?"
문득, 케익을 매섭게 쏘아대던 눈빛이 얼어붙었다. 짧은 의문사를 내뱉은 개구리의 시선이 어디론가 한곳으로 쏠린다. 애초부터 시시껄렁한 기사에는 관심도 없었던 현일이 그 모습을 놓칠 리가 없다. 재빨리 호기심 어린 눈길을 따라간 그는 피식, 입 꼬리를 올렸다.
카페의 투명한 외벽을 통해 보인 거리에 새하얀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진다. 어두운 밤하늘과 사람들이 오다니는 거리와 아날로그식 백열등 전구 빛 아래로 쌓이는 흰 꽃은 현일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하물며 소현에겐 어떠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른 현일은 석상처럼 굳어버린 소현의 입에 남은 초코케익을 마저 우겨넣곤 곧장 거리로 나갔다.
소현은 거리로 나오자마자 하늘을 향해 손을 내질렀다. 무언가를 갈구하기라도 하듯 곧게 뻗은 손이 눈송이 하나를 잡아채자, 눈송이는 온기를 못 이겨 녹아내린다. 그 차가움과 촉촉함마저도 기분이 좋은 걸까? 호기심에 물들어 있던 소녀는 어느 샌가 싱글벙글 웃음꽃을 피우는 행복한 소녀로 변해 있었다. 환희에 찬 눈동자가 먼 하늘 끝을 내다보더니, 그 시선의 끝은 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축복을 마주한다.
생애 처음으로 만끽하는 자신만의 행복한 시간. 두 번은 없을 축복을 바라보던 어린 개구리의 눈망울엔 어째선지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있지, 난 이런 건 처음 봤어."
"……다음에도 또 보여줄게. 내년에도 보러오자."
"다음… 다음에……. 다음에도 한번 더……."
소현은 연신 '다음'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현일의 팔을 껴안았다. 이 순간 이 시간을 영원에 새겨두겠다는 듯이. 그런 소현이 역시 싫지 않았던 것일까? 현일 역시 얼떨결에 소현을 껴안아주며, 소리 없이 우는 어린 소녀를 다독인다.
……이것은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찰나의 순간이자, 겨울의 끝을 알린 눈 속에서의 추억. 그리고, 세계에 종말이 선고되기까지 고작 3일전에 맺었던 맹약이 담긴 기억이다.
# 2
낡아빠진 나무상자가 가득한 군(軍)내의 보급고. 바닥에 대충 내던져진 나무상자 위에 걸터앉은 현일이 카타나를 닦으며 현대식 군장을 완비한 사내의 보고를 듣는다.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장면이건만, 웃음기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질 나쁜 용지에 기록된 보고 내용을 읊고 있었다. 못마땅한 표정을 유지하던 현일이 결국 사내의 말을 끊는 불상사만 없었다면 오늘밤 사내는 잠들기 전 하루를 되돌아보며 오늘 운수는 그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었으리라.
"너, 지금 뭐라 했냐?"
"만주 일대와 러시아에 있던 괴수들이 본격적으로 남하……"
"아니. 그거 말고. 그 전에."
보고서를 들고 있던 사내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사내로서는 그저 보고서에 쓰여있는대로 읊었을 뿐이건만 상사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런 경우, 부하된 입장에선 없던 암이라도 걸리고 만다.
"평양 인근에서 확인된 바로는 괴수들의 여왕이……"
"그래, 씨팔. 거기에 따로 뭐 적혀있지 않든? 이소현이라고? 멀쩡한 이름 놔두고 왜 그딴식으로 부르고 지랄이야."
"시정하겠습니다!"
"시정 좋아하네. 됐으니까 가봐."
보고서를 들었던 사내는 혹여나 트집이라도 잡힐라, 반듯한 자세로 경례를 하고는 재빨리 사라진다. 그런 사내의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현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살핀다. 일단 눈에 뵈는 건 칙칙한 컨테이너 박스들 뿐, 사람은 없음을 확인한 그는 작은 사진을 꺼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벌써 1년이 다 되어가는 버릇이었다.
현일의 속을 까맣게 태우는 사진 속 인물의 이름은 이소현. 태어나자마자 국가 차원에서 관리를 시작한 이능력자이자, 실험실 바깥세상이라곤 책 글귀로밖엔 본적 없었던 소녀. 그리고 '멸망' 2일 전 실험실을 탈출한 뒤로 자취를 감추고 대한민국의 척살 대상이 되어버린'동생' 이었다.
어느 날 소녀는 족쇄를 끊고 도망쳤다.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자신에겐 과분하다고 말했던 소현. 그녀가 바로 다음날 실험실을 완전히 파괴한 후 사라진 것이다. 그 현실을 현일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질 나쁜 농담일 뿐이라 여겼다. 비록 현실은 차가울지언정.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동생의 탈출이 있던 다음날에 북한이 남한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해오는게 아닌가. 그간의 격한 도발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전쟁의 발발보단 전쟁의 결과 쪽이 믿기질 않아서 문제다. 거짓말처럼, 남한은 아무런 피해 없이 전쟁에서 승리했으니까. 이쯤 되면 현일로선 이 세상이 작정하고 그를 농간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만하다.
아니, 승리했다고 말하는 게 맞는 걸까? 북한은 선전포고 직후 무언가에 의해 초토화 되어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국군이 북한 전역을 살폈을 때엔 이미 황폐화된 땅만이 황량한 바람으로 손님을 맞고 있었다. 그 많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대체,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현일이 이를 바득 갈았다. 사라진 몇 천만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기에 느낄 수 있는 분노다. 지금 이 순간마저도 인류의 끝을 고하기 위해 거친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세계 전역에서 나타난 괴수(怪獸)들. 마치 세상의 주인을 바꾸기라도 하겠단 듯이 진격해오는 불길은 그에게도 닥쳐온 현실이었다. 불길에 휘말린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그래, 좋다. 벌써 엉겁의 시간동안 세계를 지배해온 인류다. 슬슬 왕좌를 내어줄 때도 되었지. 죄 없는 생명의 죽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그도 순응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불길의 중심이 소현일 것은 뭐란 말인가.
전 세계 몇십개 국가를 무너뜨리고 몇 십억 인구를 학살한 괴수들의 지배자가 하필 이소현. 현일의 동생이었다. 서양엔 운명을 다스리는 '모이라이'라는 신이 있다는데, 그녀들의 성품을 의심해볼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소현은─
"……."
예고 없이 울려 퍼진 사이렌 소리가 생각의 흐름마저 끊어놓는다. 사람을 짜증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고주파 소음과 5분 대기조를 애타게 찾는 방송은 괴수들이 공격해옴을 알리는 공습경보. 현일은 1년간 지긋지긋하게 들어왔던 경보음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털레털레 걸음을 옮긴다.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으므로.
은빛 칼날이 햇빛을 반사시키며 궤도를 그린다. 검은 거침없이 움직여 눈앞의 인간형 괴수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단단한 갑피를 뚫고 질긴 근육을 잘라낸 검은 마침내 새하얀 뼈마저 두 동강을 내고서야 다시 빛을 보았다.
시커먼 가죽을 뒤집어 쓴 괴수가 쓰러지자 드러난 주변의 상황은 그야말로 지옥도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양새였다. 사방에 수북이 쌓인 누런색 탄피들이 드문드문 반사광을 일으키고, 벌써 검붉게 굳어버린 핏물이 찢겨나간 시체 위에 굳어있었다. 이제 적응될 만도 하건만, 참혹한 전투가 필연적으로 불러온 참상은 도저히 익숙해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현일은 마지막 남은 짐승형 괴수의 입에 검을 쑤셔 넣곤 거칠게 걷어찼다. 다 쓴 크레모어가 그 여파에 휩쓸려 괴수와 함께 내동댕이쳐진다. 시커먼 재를 컥컥 뱉어내던 괴수는 풀썩 쓰러지더니 그대로 바람에 휩쓸려 사라진다. 늘 이런 식이다. 녀석들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 놓곤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끝났나."
고된 전투를 마치고 피로감 섞인 눈이 뻥 뚫린 대지를 훑는다. 그들은 오늘도 이겼다. 승리의 보상은 치열한 싸움의 흔적과 시체가 되어 돌아온 전우들의 얼굴이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욕설을 삼킨 현일의 눈에 막사로 되돌아가는 다른 두 사람이 보였다. 열병기가 난무하는 시대에 도끼 따위의 냉병기를 찬 양복 차림의 사내가 둘. 인류가 이능의 축복을 받은 뒤로, 그리고 세상에 종말이 시작된 후로 지겨우리만큼 보았던 모습이다. 그런 현일에게 그들의 차림새가 신경쓰일린 없을 테니 아마도 현일이 그들을 주목한 이유는 그들의 대화였으리라.
"못할 짓이구만 진짜. 그래도 곧 이짓도 끝이라지?"
"그렇지. 미국 놈들이 남미 쪽을 핵으로 쓸어버렸다잖아. 조만간 우리도 그렇게 하겠지."
"아, 그러고 보니 평양 쪽에 나타났다며? '마녀'. 그년 뒤지면 다 끝나는 건가?"
마녀. 소현의 이명. 현일은 자신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단어를 태연하게 입에 담은 둘을 어떻게 패놔야 속이 시원할지를 생각하다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억하심정으로 울분을 참았다. 그런데, 기어코 그의 귀에 들려선 안 될 말이 흘러들었다.
"한반도 정화계획. 그거 다시 한다잖아. 하여튼 윗대가리 새끼들, 작명센스 드럽게 없네."
"됐어. 이름이 뭔 소용이냐. 빨리 이 짓거리 끝내고 집에서 발 뻗고 잠이나 자면 되지."
현일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마음 같아선 먼저 아무 놈이라도 잡아다가 주먹질을 해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아니, 할 수 있더라도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다.
한반도 정화계획. 대규모 폭격을 북한 전역에 퍼부어 한반도의 전란을 끝내는 방안. 밀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괴수들의 공세가 폭격 몇 번 해대면 잠잠해질 거라는 생각 자체가 너무나 안일해서 취소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소현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소현을 죽이는 쪽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다. 소현의 죽음만은 절대 바라지 않는 현일로서는 한소리 하지 않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방안이기도 하고.
생각은 몸보다 빠르다. 대신 한번의 생각이 끝나면, 또다시 생각을 하는 속도보단 몸이 훨씬 빠르다. 여동생의 목숨과 귀결되는 문제를 직면한 오빠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것을 반증하듯, 현일은 화살처럼 곧게 쏘아져 나갔다.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무언가 대화를 하면 될 일이다. 죗값은 자신이 치르면 된다. 여동생은 무관하다. 너무 어려서 그랬을 뿐이야. 평생을 실험실에서만 갇혀 살던 아이가 알면 뭘 알겠냐고.
# 3
"제가 막을 수 있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진 알고 있나?"
김해성 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껏 현일의 뒤를 봐주었던 준장이지만, 이번에는 무리다. 현일을 따로 빼내서 소현과 대화를 하게 해달라니, 일반 군인들에겐 까마득한 하늘로 보이는 그로서도 그럴 권한은 없다.
현일 역시 큰 기대는 없었던 듯, 고개를 숙인다. 군 생활 하루 이틀 해본 것도 아닌 만큼 현일도 알건 다 안다. 그저 한 가닥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식으로 왔을 뿐이지, 큰건 바라지도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고작해야 대위 정도의 취급인 현일이 준장씩이나 되는 고위 간부와 일대일 대면을 할 수 있는 것조차 기적이나 마찬가지고, 해성에게도 군의 대규모 작전에 왈가왈부할 권한이 없단 것 정도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텁텁한 공기를 들이쉬며 경례를 마치고 문을 열려는 찰나, 준장이 흘리듯 말을 꺼낸다.
"너도 알겠지만 막진 못해. 정화 계획은 예정된 대로 3일 뒤에 시행될 거다. 하지만 계획 시행을 막는 게 아니라 늦추는 것이라면 가능하지. 전황을 핑계로 하루 이틀정도 까진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테니까. 그래도 그게 끝이다. 네가 이 군대에 속해있는 이상, 넌 북한 땅으로는 한 발짝도 갈 수 없어."
심장이 철렁, 숨이 막혀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슨 뜻인 진 알고 있다. 정말 가고 싶다면 혼자서라도 가라고,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고. 아버지처럼 그를 돌봐줘왔던 준장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준장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 있으면 목숨은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나가는 그 순간, 네겐 탈영병의 낙인이 찍히고 말겠지. 그래도 갈 테냐? 모두를 적으로 만들고서라도 소현이를 볼 테냐? 글쎄, 현일의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다. 네 앞가림이나 잘 해라. 쯧."
하늘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먹물을 끼얹은 도화지 위로 달빛이 두둥실 떠오른다. 늘 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하늘. 그런데 그 밑은 삭막한 철조망이 삭막해진 감정을 대신하고 있었다.
두세 명 정도로 이루어진 그룹이 추위에 떨며 불평불만을 내뱉으며 보초를 선다. 보통 계급이 높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며 시간을 때우곤 하는 식으로 지루함을 달래던 그들은 갑자기 바뀐 시간표에 따라 다음 순번의 보초를 맞이한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아니, 못 들었는데."
갑작스레 사람이 많아지니 정신이 산만해진 탓일까? 보초 중 한명이 바람소리에 놀라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하긴, 괴수들이 여기까지 왔으면 얌전히 있을 리가 없지. 북한이랑 투닥거릴 때에는 탈북자가 오든 월북자가 있든 했겠지만, 지금 사람이 북쪽으로 올라가봐야 개죽음밖엔 당할 리 없으니 사람일리도 만무하다. 분명 바람소리거나 산짐승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보초는 아무렇지도 않게 옆의 동료와 음담패설을 주고받으며 길고 추운 밤을 버텨나간다. 이미 교대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가는 동료를 보자면 괜히 부러워지곤 한다. 그저 착각으로 넘겨버린 소리는 어느 샌가 생각의 저편으로 날아간 지 오래. 한번 뒤로 넘겨버린 생각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춥다, 추워."
제 할일을 할 뿐인 보초는 언 손에 입김을 불어대기 바빴다.
'달려야 한다.'
현일의 숨이 거칠게 몰아쳤다. 한시라도 빨리 부대로부터 멀어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는 그의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 외에는.
그가 머물렀던 막사가 점점 멀어진다. 막상 있을 땐 고마운 줄 몰랐던 싸구려 전등 빛이 사라지니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 초월적인 균형 감각이 산비탈을 구르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주고 있어도 어둠에 만연한 공포만은 건재하다.
도대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뛰었을까. 기울어진 달이 저물고 낯가리는 해가 산 너머에서 붉은 얼굴을 드리울 때에서야 현일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산지는 어느 샌가 벗어난 지 오래. 록 파괴된 폐허에 불과하더라도 사람의 흔적이 보이니 마음이 편해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바람이 차다. 12월을 앞둔 산지의 바람이란 시베리아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들곤 하니까. 현일은 이제서야 실감이 온 추위를 피할만한 장소가 없을지 고심하다가, 폐가 하나에 들어간다.
먼지가 자욱한 탁상. 망가진 가전제품. 챙겨왔던 랜턴을 켠 폐허 위의 침입자는 침을 삼켰다. 벽 한구석에 튀어있는 피와 썩은내 좀 풍겼을법한 시체가 쓸쓸히 누워 있는 것을 밀쳐내고 집안 곳곳을 살피던 그는 섬찟한 감각에 한손에 들고 있던 카타나를 움직였다.
"키아아아악!"
시커먼 늑대를 연상시키는 괴수 한마리가 송곳니를 들이민다. 사람의 몸 정도는 가볍게 찢어버릴 듯한 송곳니가 카타나에 막혀 부들부들 떨렸다. 급히 검을 뒤로 물린 현일이 늑대의 머리를 발로 내리찍는다. 방치되어있던 나무 바닥이 그대로 무너져버렸지만 현일은 신경 쓰지 않고 늑대의 입에 발을 쑤셔 넣은 뒤 한 손으로 주둥이를 벌리고 그 속에 칼을 꽂아 넣는다.
구에에엑, 그에에에에엑! 시커먼 잿가루가 소화기처럼 뿌려지더니 완전히 두조각으로 찢어지고야 만다. 그 뒤는 그간의 공포와 긴장만을 남긴 채 사라지는 악몽처럼 어디론가 흩어져버리는 것 뿐. 현일은 괴수가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카타나를 내려놓곤 아무 벽에나 기대어 앉는다.
"씨발…… 씨발."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어 핀다. 방금 죽을 뻔 했어도 담배는 피게 되는 게 흡연자의 마음 아니겠는가. 라이터로 불을 지핀 담배에서 하얀 연개가 풀풀 피어나오니 이제야 제대로 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설마 또 한 마리 튀어나오진 않겠지.
그나저나 이렇게 보니 스스로가 우습다. 한시라도 빨리 소현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군부대에서도 탈영한 주제에 괴수 한 마리에 쫄아서 허덕대는 꼴이라니. 내일 아침, 점호를 맡던 담당관 녀석의 파랗게 질린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하게 됐군.
"내일은, 무슨 말을 할까."
내일 안에 평양까지 도착해야한다. 그곳에서 소현을 만난다. 그리고…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소현을 탓할까? 아니면 괴수들을 멈추라고 말할까? 모르겠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소현이와 함께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것이 유일한 바램이다. 그런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수십억의 사람을 죽인 여동생과 돌아갈 수 있을까?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용납할까?
현일이 잠시 내버려 두었던 카타나를 다시 집었다. 날이 선 카타나를 옆쪽에 대충 기대어두고, 현일은 눈을 감는다. 일단 지금 자두지 않으면 내일 안에 평양까지 도착하겠다는 생각은 전부 허사가 된다. 그래, 일단 만나서 생각하는 거야. 만나서.
# 4
모래바람이 불었다. 파괴된 도로 위로 풍파된 시멘트 가루들이 난자하다. 드문드문 썩어가는 시체들도 보이고, 부서진 건물들의 파편도 보인다. 현일이 그 길을 걷는다.
아무도 없는 고속도로란 참으로 고요하기 짝이 없다. 그 흔한 새소리도 하나 들리질 않으니, 그가 있는 땅은 죽음의 땅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거기에 하늘마저 우중충한 먹구름으로 가득 차,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공허한 땅은 어찌나 황량한지, 괴수 한 마리 나타나질 않는다. 작전 브리핑때 보았던 사진엔 시커먼 괴수들이 북한 땅에 한가득 메워있었건만 이렇게 한 마리도 없는 것을 보니 속은 기분도 든다. 현일이 차라리 괴수라도 좋으니 뭐라도 나타나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한다. 침묵이란 이렇게나 무서운 것이었던가.
현일은 앞으로 걸어 나간다. 잠에서 깨자마자 걸어가 폐허에서 먹을 만한 음식을 찾고, 또다시 걷는다. 벌써 만 하루간 현일이 한 일의 전부였다. 괴수 전을 대비해 챙겨왔던 총탄은 장전된 것만 남기고 어디엔가 버려뒀다. 낌새를 보아 하니 괴수들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을 심산인가보다.
"소현이가 손을 쓴 건가."
평양직할시(平壤直轄市), 앞으로 30km.
머지않았다. 머지않았어. 머릿속에 소영이의 얼굴이 그려진다. 아무거나 주워 먹다 탈 난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도 들었다. 귓가엔 벌써부터 '오빠!' 하고 부르는 소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빠."
현일이 화들짝 놀랐다. 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까와 같은 누런 모래바람이 도로 위를 거닐고 있을 뿐이었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라도 정신병원에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현일의 등가에 소름이 돋았다.
"그쪽 말고, 이쪽."
현일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눈에 확 뜨이는 미인은 아니었지만, 차분해 보이는 인상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소녀는 1년 동안 자라난 머리가 자연스럽게 자라난 머리가 허리까지 늘어져있고, 어디서 주워 입었는지 새하얀 와이셔츠 하나만 입고 있다. 현일은 소녀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이소현."
"응. 오랜만이야."
"……."
소현은 싱긋, 웃었다. 마치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그저 오랜 외출을 하고 만났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걸까.
"너는……."
"오빠라면 여기까지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역시 괴수들은 미리 소현이 물려뒀던건가. 현일이 씁쓸히 웃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할까. 격한 현기증이 머릿속으로 침투해온다. 한순간 적막이 흘렀다. 결국 소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내 마음대로 이런 짓을 해서."
"넌 대체!"
결국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 감정만 앞서고 만다. 목적어도, 서술어도 하나 없는 말에 분노라는 감정만이 섞여 나왔다. 소현의 미소는 그녀답지 않은 생기 없는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전부 설명해줄게. 조금 걷자."
"후우, 그래."
이렇게 나란히 걷게 된 것이 얼마만일까. 영겁처럼 길었던 1년이란 시간. 소현이 없었던 1년 동안 익숙해져버린 고독이 자취를 감췄다. 분명 소현은 몇 십억을 죽인 희대의 살인마다. 그런데 어째서, 대체 어째서 자신은 그런 소현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하는가.
"오빠, 기억해? 나 처음으로 밖에 나갔던 날."
"기억해."
"다행이네. 난 그날 정말 행복했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그리고 넌 그 다음날 세상을 멸망시켰지.
"사과하고 싶었어. 줄곧. 오빠의 세계를 부숴버려서 미안하다고. 하지만 그만큼 오빠가 이해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어."
이해? 무엇을.
"곧 눈이 올 거야. 그날 오빠가 말했었지? 다시 한 번 함께 눈을 보자고. 오빠가 없는 동안 홀로 눈을 본적도 있었어. 그런데 오빠랑 같이 있었을 때처럼 감동적이진 않더라. 난 결국 오빠가 같이 있어준게 좋았던 걸지도 몰라."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 대답을 하기 전에, 오빠에게 물어볼게. 오빠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고 이곳까지 온 거야?"
현일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그러던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확신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원했던 말이라고.
"대답하기 어려우면 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내가 먼저 말할게. 내가 왜 이렇게 했는지. 오빠에게만은 미움 받고 싶지 않아."
# 5
소현은 하늘을 향해 손을 내질렀다. 무언가를 갈구하기라도 하듯 곧게 뻗은 손이 눈송이 하나를 잡아채자, 눈송이는 온기를 못 이겨 녹아내린다. 그 차가움과 촉촉함마저도 기분이 좋은 걸까? 소녀는 어느 샌가 싱글벙글 웃음꽃을 피우는 행복한 소녀로 변해있었다. 환희에 찬 눈동자가 먼 하늘 끝을 내다보더니, 그 시선의 끝은 검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얀 축복을 마주한다.
아름답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행복을 품고 살아가고 있고, 차가운 눈이 머리 위로 내려오는 감촉이 참을 수 없이 짜릿하다. 언젠가 책에서 본적이 있었다. 대기 중의 구름으로부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얼음의 결정. 그저 작은 얼음이 내려오는 것이라고만 상상했는데, 눈이라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니.
세상이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소현이 방긋 웃음을 지으려 할 때였다. 번개가 내리치기라도 했는지 온몸이 찌릿, 떨린다. 머릿속에 무언가 믿기 힘든 사실이 쓰여진다. 소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것은 소현이 감옥 같은 실험실에 갇혀 지내는 이유, 초월적인 이능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의미의 '초능력'의 발현임은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소현에겐 때때로 이렇게 미래가 보이곤 했다. 거리를 오다니던 사람들이 흐려져가고, 그 대신 실험실에서 몇 번 봤던 것 같은 복잡한 기계들이 가득한 공간이 드러났다. 시간이 멈추고, 미래를 보게 된 소현의 시야에 몇 번 본적 있던 한반도의 지도가 모니터와 현일이 서있는 모습이 비쳤다.
현일은 검 한 자루를 지팡이 삼아 기계장치의 앞으로 다가갔다. 이것만 부수면. 짧은 말을 읊조리며 검을 휘둘러 기계를 베어낸다.
소현이 현일이 부순 기계가 무엇인지 알리는 만무한 일. 하지만 소현은 그 기계가 무엇인지 그녀도 모르게 알게 된다. 그것이 그녀의 운명예지였으니까. 현일이 부순 기계는 핵미사일의 발사장치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각인됐다. 미국을 향해 발사되어 세계 전쟁을 일으킬 방아쇠. 세계는, 현일에 의해 구해지게 된다.
그때, 갑자기 현일의 몸이 춤을 추듯 흔들리더니 풀썩 쓰러진다. 그 자리에 흘러가는 붉은 피는 그가 죽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저 뒤에서 공허히 돌아가는 기관총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예지가 끝난다.
세상을 구하고 죽는다. 이 바보 같은 결말이 현일의 운명이다. 소현은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충격을 느꼈다. 뜨거운 눈물이 눈망울에 맺혔다.
"있지, 난 이런 건 처음 봤어."
"……다음에도 또 보여줄게. 내년에도 보러오자."
다음? 다음 언제? 오빠는 죽잖아. 죽게 된다고. 나랑 다시 이곳에 올 수 없어. 이번이 오빠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야. 오빠는 죽어. 죽는다고. 난 체념해야해. 운명은 바꿀 수 없어.
소현이 현일의 팔을 껴안았다. 언뜻 보기엔 무뚝뚝해 보여도 너무나 다정한 오빠. 허황된 다음을 말하는 오빠. 그 '다음'이라는 말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소현은 홀린 듯이 그 말을 되풀이하며, 소리 없이 울었다.
"다음… 다음에……. 다음에도 한번 더……."
현일은 세계를 구한다. 세계는 현일에게 구해진다. 따라서 현일은 죽고,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현일이 세계를 구하지 않는다. 세계가 현일에게 구해지지 못한다. 따라서 현일은 살고, 세계는 멸망한다.
소현이 눈을 감았다. 수십억의 인구가 살아가는 세계. 그리고 단 한사람에 불과한 현일. 소현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일의 죽음을 좌시하고 수십억의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세계의 멸망을 내버려두고 현일을 살릴 것인가.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다. 처음엔 답을 내지 못했다. 어느 순간엔가 소현은 망설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망설임이 끝나는 순간, 소현은 결정을 내렸다.
어떻게 해야 현일이 세상을 구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전쟁이 발발하고 현일이 북한으로 파견되면 끝이다. 현일은 그곳에서 죽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을까. 기다리기만 해서는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직접 움직여야 한다. 소현이 직접 세상을 멸망시켜야 한다.
먼저 연구소를 탈출했다. 애초부터 그녀는 힘이 없어 실험실에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각 대륙에 '씨앗'을 뿌렸다. 씨앗에선 검은 뿌리가 돋아나 괴수들을 끝도 없이 만들어낼 것이었다. 가장 신경 쓴 것은 전쟁을 일으키는 북한이었다. 북한은 그녀가 직접 파괴하기로 했다.
마침내, 북한이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소현 역시 준비했던 대로 북한 전역에 괴수들을 퍼뜨리고, 그녀 스스로도 폭발의 이능을 이용해 북한을 무너뜨렸다. 몇 시간 뒤, 국군은 황폐화된 북한을 보게 되리라.
현일이 있는 남한은 함부로 공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소현은 다른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부터 정리해나갔다. 한국이 1년 뒤까지도 피해 없이 잘 살아남은 이유는 그저 그녀가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세계의 대부분을 그녀의 괴수들이 점거했다. 미국 지역에선 핵폭발에 피해가 조금 있긴 했지만, 조만간 미국도 버티지 못하리라. 한국에서 준비하는 한반도 정화계획 역시 그녀의 예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한국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소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개인적인 바람이 있었다. 수십억의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가장 비참한 최후, 역사에 최악의 악녀로 이름을 남길 것을 각오한 그녀였지만, 현일의 목숨만큼이나 원하는 다른 하나가 있었다.
눈.
새하얀 눈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오빠와 함께.
소현은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 10개월의 시간동안 시원찮은 전투를 벌여대며 현일이 이곳까지 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현일이 소현에게로 걸음을 옮겼을 때, 소현은 눈물을 흘렸다. 이제, 끝을 맞이할 수 있어.
땅 몇개 정도는 남겨놔도 괜찮겠지. 현일에게도 돌아갈 곳이 필요할 테니. 그래, 이미 세계는 멸망했어. 이제 남은 건 오빠를 위해 내가 죽는 것뿐이야.
# 6
"……."
하얀 눈이 내린다. 주변은 그날처럼 아름답지 않아도 눈만은 아름답다.
소현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현일은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소현은 마지막 소원을 이뤘으니 이제 해야 할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현일이 눈치 챈 것일까? 현일이 갑자기 소현의 손을 낚아챘다.
"같이 도망치자. 어디던간에 도망쳐서, 둘이 같이 살자. 좋아하던 케이크도 먹고, 여기 저기 여행도 다니면서 살자."
"미안. 미안……. 난 이제 괜찮아. 처음부터 각오 했었어. 가장 비참하게 죽기로, 가장 최악인 악녀라고 손가락질 당하기로. 난 죽어도 좋아. 난 어떤 끔찍한 꼴을 당해도 좋아. 난 평생 실험실에 갇혀 지내도 좋아. 하지만 오빠는 아니야. 그날 본 눈, 그 눈을 보여준 오빠만은 죽어선 안 돼. 오빠만은……!"
소현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너무 멀리 왔다. 되돌릴 수 없다. 소현은 죗값을 치러야한다. 그리고 그 죗값에, 현일의 죽음은 없었다. 현일만큼은 살아남아야한다.
"내가 죽으면 괴수들은 모두 사라질 거야. 그럼 이제 사람들도 죽지 않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가 죽긴 왜 죽어. 차라리 살아. 양심을 팔아서라도 살라고.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살아! 도망치면 돼. 아무도 없는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아니, 그럴 수는 없어."
소현의 눈이 감긴다. 그녀의 그림자로부터 시커먼 괴수가 올라왔다. 괴수는 날카로운 손톱을 곧게 펴더니, 아무런 주저 없이 소현의 심장을 찌른다. 현일의 절규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울렸고, 소현의 몸이 무너졌다.
"미…안. 미안해……."
소현은 입에서 피를 왈칵 쏟아내며, 현일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바람에, 현일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현에게 그것을 안타까워할 시간은 남아있지 않았다.
얼굴 언저리를 만지던 여린 손이 땅으로 떨어졌다. 눈물을 글썽이던 눈은 초점을 잃고 흐리멍텅하게 변한다. 공허한 바람소리만이 가득하던 공간에 한 남자의 통곡 소리로 메워졌다.
- 아, 아. 여기는 찰스. 여기는 찰스. 브라보 나와라. 당측은 평양 인근에 도착. 평양으로부터 약 30km 떨어진 곳이다. 당측은 괴수 무리의 완전 소멸을 확인했다.
- 여기는 브라보. 괴수 여왕은 어떻게 되었나.
- 괴수 여왕은 심장 인근의 관통상으로 사망했음을 확인. 그리고…
무전병이 말을 흐렸다. 역대 급의 폭설이 흩뿌려진 대설원에는 죽은지 얼마 안 된 시체만이 남아있었다. 한구의 시체는 심장부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건 정황상 보면 이쪽이 이소현이리라. 그리고……
- 권총으로 자살한 듯 보이는 시체가 한구 더 발견됐다. 20대 정도로 추측되는 남성의 시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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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확인하긴 했는데 워낙 급하게 썼던데다 적은 분량에 스토리를 우겨넣으려니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린 감이 있네요
그래도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