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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몽연합군의 2차 일본 원정 이야기입니다.(1)
게시물ID : history_94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etraisol
추천 : 7/4
조회수 : 86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5/24 14:02:06

여몽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벌일때 비록 태풍이 불어 큰 피해를 입고 회군했다고 하지만 나름 전리품은 많았던것 같습니다, 


1274년 12월 말에서 1275년 1월 초까지 원정군의 회군이 완료된 이후 흔도가 고려의 충렬왕에게 남녀 아동 2백여명을 바친것을 보면 말이지요, 그러나 싸우다 진것도 아니고 자연재해탓에 회군한 탓인지 어쨌거나 원사에는 1차원정에 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다만 원정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후하게 여긴것은 분명합니다, 


1276년 7월 쿠빌라이 칸의 생일 축하 문제로 고려의 김방경이 원나라에 방문했을때 2품이상의 벼슬을 하는 사람들만 공을 세웠을때 받을수 있다는 호두금패를 고려인중 유일하게 수여받았으며 태자와 남송의 황제 바로 다음의 자리에 앉게 하였던 것을 보면 일본 정벌은 분명 실패하였지만 어느정도 정벌에 대한 공과는 인정받은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러한 공과는 친원파이냐 아니냐와는 상관 없었던게 가령 1277년 대장군 위득유, 중랑 노진의 등이 앞장서 흔도에게 다루가치를 죽이고 역모를 꾀한다는 혐의로 김방경을 모함합니다.


매국노 홍다구가 앞장서 악랄하게 고문했는데 그 때의 기록을 보면 이렇습니다.


2월 중찬(中贊) 김방경을 국문하여 대청도(大靑島)에 귀양보냈다.홍다구가 우리 나라와 과거부터 감정이 나빠서 틈을 타서 문제를 일으키려 했는데,방경의 사건을 듣고 중서성(中書省)에서 와서 직접 국문하기를 청하고,흔도(忻都)도 위득유(韋得儒)의 말을 원나라에 알렸다.


원주(元主)는 왕과 공주에게 함께 심문하라는 조서를 내렸다.그리하여 왕은 흔도ㆍ다구와 함께 흥국사(興國寺)에 모여서 다시 방경 부자를 국문하였다.


다구는 쇠사슬로 그의 머리를 감고 못질을 할 것처럼 하며, 매질하는 자에게 그 머리를 치라고 소리쳤다.종일 알몸으로 서서 추운 날씨에 살이 얼어서 먹장빛처럼 되었다.


왕은 다구에게, “지난번에 흔도와 함께 국문을 끝냈으니 다시 물을 필요가 있는가?” 하였으나다구는 듣지 않았다.방경은,“우리 나라가 상국을 하늘처럼 받들고 부모처럼 사랑하는 터이니 어찌 하늘을 거역하고 부모를 배반해가며 스스로 멸망하려 들겠느냐? 나는 억울하게 죽을지언정 거짓말로 굴복하지는 못하겠다.” 하였다.


다구는 꼭 허위자백을 받으려 하여 지독한 고문을 실시하니,몸에는 성한 살이 한군데도 없었고 기절했다가 다시 소생하고는 하였다.다구는 비밀리에 왕의 측근을 꾀기를, “방경이 죄를 자백한다면 죄가 유배하는 데에 그칠 것이니, 당신네 나라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느냐?”하였다.


왕은 그 말을 믿고 또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방경에게, “그대로 인정하라.” 하니방경은,“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이 군졸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몸이 짓이겨 없어질지라도 국가에 보답하기에 부족합니다. 어떻게 저의 몸을 아껴서 허위로 자백하여 나라를 저버리겠습니까?” 하고,바로 다구에게,“나를 죽이려거든 바로 죽여라. 나는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너에게 굴복하지는 않겠다.” 하였다.


다구는 이에 ‘방경이 집에 무기를 간직했다.’는 것을 죄로 삼아서 대청도(大靑島)-장연현(長淵縣) 남쪽 30리에있다-에, 흔(忻)은 백령도(白翎島)에 유배시키고, 다른 사람은 모두 석방하였다.


방경이 유배의 길을 떠나는데 나라 사람들은 길을 막고 울면서 전송하였다.다구는 왕에게 청하여, 위득유(韋得儒)를 상장군, 노진의(盧進義)를 장군으로 삼았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2상.

무인년 충렬왕 4년(송 제(帝) 병(昺) 상흥(祥興) 원년, 세조 지원 15, 1278)



이 처럼 친원파인 홍다구와 흔도와 극렬하게 갈등을 빚는 것을 보면 분명히 김방경은 친원파는 아닌것 같습니다.


한가지 여기서 재밌는 것은 이 보고가 쿠빌라이에게 올라가자 충렬왕이 소환되는데 흔도와 홍다구가 그 때까지의 안하무인적인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충렬왕에게 잘 좀 말해달라고 간곡하게 빌었다는 겁니다.


물론 쿠빌라이 앞에서는 모함을 그칠줄을 몰랐으며 왕에 앞서 홍다구가 소환되었을때는 위득유와 노진의가 법회의 이름을 빌어 고려에서 원나라를 저주한다는 모함을 꼭 전해달라고 부탁하는등 전형적인 모리배의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5월 원에서 흔도(忻都)를 불러들였다.이때 원주는 김방경의 문제로 인하여 차츰 다구와 흔도가 나쁘다는 것을 깨닫고 왕과 방경을 불러들이면서다구와 흔도도 모두 소환하였다.


다구 등은 비로소 두려워하여 모두 왕을 뵙고,


“황제께서 김시중의 사건을 물으시면 왕이 말씀드리기에 달렸습니다.” 하고,흔도도 사람을 시켜서 왕에게 말하기를,“내가 왕의 나라에 7년간 있는 동안 잘한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나쁜 짓을 많이 했으니, 아무쪼록 잘 말씀드려 주십시오.”하였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2상. 

무인년 충렬왕 4년(송 제(帝) 병(昺) 상흥(祥興) 원년, 세조 지원 15, 1278)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1275년은 고려가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권문세족이라 일컬어지는 친원파가 득세를 하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지요, 


다만 고려의 위치는 비록 수탈의 대상이라고는 하나 원에 있어 지나치게 수탈을 하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직접 삼키기도 뭐한 상당히 계륵같은 위치였습니다.  


반대로 고려에게 원이라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무너진 나라를 유지 시켜주고 있었고 또 왕권을 일으켜주고 있었기에 역시나 손을 놓을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간의 절충안을 찾는 형편이었습니다,


물론 다루가치를 비릇하여 매국노 홍다구 등의 예외는 있었지만 일단 국가간의 관계는 그러했습니다. 실제로 홍다구 등이 쿠빌라이에게 조언한 것이 모두 이루어졌다면 고려라는 국가가 없어질 정도였었지만 원나라로서는 고려라는 과실수가 말라 비틀어지기를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국가간의 관계속에 김방경의 일로 쿠빌라이를 방문한 충렬왕은 쿠빌라이에게 충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일본은 섬 안에 있는 오랑캐로서 감히 대국을 대항하려 하옵니다. 신은 나라의 은덕을 보답할 것이 없사오니 돌아가서 배를 만들고 식량을 비축하여 그들을 토벌하여 죄를 응징할까 합니다.”


동사강목(東史綱目) 제12상. 

무인년 충렬왕 4년(송 제(帝) 병(昺) 상흥(祥興) 원년, 세조 지원 15, 1278)



바로 직접 일본 파병을 요청하는 것이었지요, 일단은 국가간에는 절충안을 찾는 다 하지만 권문세족들로 대표되는 친원파에 의해 나라가 무너져가자 이를 배제하고 최대한 고려의 가치를 알려 수탈을 줄여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7월에 다루가치와 왕경 유진군(王京留鎭軍), 합포 진수군(合浦鎭戍軍), 서해 둔전군(西海屯田軍) 등 원에서 파병시킨 병력들을 철수 시킬수 있었고 모든 권한을 되찾을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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