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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빈 성씨 죽음의 미스테리
게시물ID : mystery_941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쁜공주
추천 : 4
조회수 : 600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22/01/02 09: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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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 : 정조와 의빈 성씨의 사랑 이야기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정조 이산과 의빈 성덕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끝은 비극이죠. 제가 「한국사 리뷰」에서 쓴 글의 일부를 소개합니다.


드라마 「이산」의 여자 주인공은 ‘성송연’으로 도화서에서 일하는 다모였다가 정조의 후궁이 된 인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 인물의 실존 인물은 ‘의빈 성씨’입니다. 의빈 성씨는 실제로도 정조의 첫사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정조가 쓴 「어제의빈묘지명」의 일부를 봅시다.


처음 승은을 내렸을 때 내전이 아직 귀한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리고 울면서, 이에 감히 명을 따를 수 없다며 죽음을 맹세했다. 나는 마음을 느끼고 더는 다그치지 못했다. 15년 뒤에 널리 후궁을 간택하고 다시 명을 내렸으나 빈은 또 거절했다. 이에 빈의 노비를 꾸짖고 벌을 내렸고 그러한 뒤에 비로소 내 명을 받들어 당석했다. 그 달에 임신함으로써 임인(1782) 9월에 세자를 낳았다. 이 해 소용으로 봉해졌고 귀한 아들로 하여금 빠르게 품계가 올라 의빈이 되었다.


위 글은 정조가 직접 자신의 후궁이었던 의빈 성씨의 묘지명을 쓴 글이죠. 이에 따르면 정조는 세손 시절인 15세에 의빈 성씨에게 사랑을 고백하였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아마도 정조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만난 궁녀 성씨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궁녀 성씨는 내전, 즉 세손빈이었던 효의왕후가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를 들어 정조의 사랑 고백을 거절하였습니다. 이후 15년 뒤 30세가 된 정조는 다시 궁녀 성씨를 후궁으로 삼고자 했으나 또 거절당하였죠. 이에 정조는 궁녀 성씨의 아랫사람들을 혼내는 유치한 방법까지 써서 결국 후궁으로 삼는데 성공합니다. 즉 의빈 성씨는 정조가 15세에 만난 첫사랑이자 30세에 사랑을 이룬 거의 유일한 연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조가 의빈 성씨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들은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너 또한 내가 슬픔을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슬퍼할 것이다.”- 정조, 「어제의빈치제제문」 중에서 발췌 -

“살아있는 나와 죽은 네가 끝없이 오랜 세월동안 영원히 이별하니, 나는 못 견딜 정도로 근심과 걱정이 많다.”- 정조, 「어제의빈삼년내각제축문」 중에서 발췌 -

소용 성씨의 이름은 덕임이다. 아버지가 홍봉한의 청지기였던 까닭으로 혜경궁 홍씨 처소의 궁녀로 입궁했다. 혜경궁이 그녀가 복스러운 관상이라고 칭찬하였고 그리고 임금 역시 덕임을 사랑했다. (중략) 어머니(의빈 성씨)와 태아 모두 세상을 떠났다. 임금이 슬피 울부짖었고 조정에서는 임금을 위로했다.”- 황윤석, 『이재난고』 중에서 발췌 -​​


위 기록들 중 『이재난고』에 따르면 의빈 성씨의 이름은 덕임입니다. 즉 드라마 「이산」의 ‘성송연’이 아니라 ‘성덕임’이 실제 이름이죠. 말 그대로 정조는 성덕임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의빈 성씨와 뱃속의 아이가 죽자 정조는 슬피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정조 때 인물인 황윤석이 쓴 『이재난고』에는 의빈 성씨의 죽음에 대한 이상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먼저 그 기록을 보시죠.


대개 화빈 윤씨가 독을 썼다고 했다. 윤씨에게 심히 죄를 물어 내쫓았다.


위 기록에 따르면 같은 후궁이었던 화빈 윤씨가 의빈 성씨를 독살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이와 같은 소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조실록』의 다음 기록을 봅시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부터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게 되었다.” 하였다. 이는 대체로 의빈의 병 증세가 심상치 않았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무슨 빌미가 있는가 의심하였다고 하였다.


위 내용은 『정조실록』 정조 10년 9월 14일 의빈 성씨에 대한 졸기(돌아가신 분에 대한 평가)에 나오는 기록으로 사람들이 의빈 성씨의 병 증세에 대해 심상치 않게 여기고 그 빌미를 의심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의빈 성씨가 걸린 병의 증세가 무언가 의심스러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다시 『정조실록』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그런데 천만 뜻밖에 5월에 원자가 죽는 변고를 만나 성상이 다시 더욱 위태로워졌으나 그래도 조금은 기대할 수 있는 소지가 있었는데, 또 9월에 상의 변고를 당하였다. 궁빈(宮嬪)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반드시 이처럼 놀라고 마음 아파할 것은 없지만, 나라에 관계됨이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 상의 변고에 온갖 병증세가 나타났으므로 처음부터 이상하게 여기었는데 필경에 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위 내용은 『정조실록』 정조 10년 12월 1일 정순왕후가 한글로 써서 내린 언문교지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정순왕후의 말에 따르면 정조 10년 5월에 문효 세자가 죽고, 9월에 의빈 성씨가 죽었는데, 두 죽음의 병증세가 이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다시 『정조실록』에 나옵니다.


대제학 김종수가 뵙기를 청하여 아뢰기를, “어떤 인사가 찾아와서 이 종이쪽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종이쪽지에 ‘동내에 있는 손가(孫哥)란 놈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9월에 병환을 앓을 때에 내관 이지사(李知事)가 약물을 살펴보았는데, 약국의 약을 쓰지 않고 그의 약을 다려서 올렸으므로 그것을 먹고 그 즉시 죽었다. 비록 이런 일이 있으나 아는 자가 없었다. 왕대비께서 이를 알아차리고 상감(上監)에게 【나라의 풍속에 주상을 상감이라고 일컬었다.】 고하자, 상감이 이 말을 듣고 매우 놀라 바로 성빈(成嬪)의 치상소(治喪所)에서 이 지사를 붙잡아다 그 즉시 내보내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런데 중간에서 만류한 자가 있어서 그 자리에서 칼을 씌워서 멀리 귀양을 보냈다가 11월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대체로 이 내시는 일찍이 홍국영과 마음을 통해 체결하였는데 지극히 요악스러워서 옛날 조고(趙高)라도 그보다 더할 수 없었다. 그의 양자 양대의(梁大宜)도 임금의 총애를 받아 품계가 높았는데, 그의 생부가 처벌을 받았을 때 그의 품계를 삭탈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 일은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약을 사용한 일에 있어서, 약을 조제하고 약을 다릴 때 내가 직접 살피었으니, 이는 궁중 안팎에서 다 같이 알고 있는 바이다. 더구나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에 두고 사용하였으니, 사실이 대체로 이와 같다. 이는 중관(中官)이 궁방을 주관하였으므로 자기들끼리 시기한 것도 없지 않을 것이니, 지난해에도 이처럼 터무니없는 말이 있었다. 그 단서의 유무를 기다려 문안(文案)을 내보여 주겠다.” 하였다.


위 내용은 『정조실록』 정조 10년 12월 27일 대제학 김종수가 어떤 인사가 가져온 종이쪽지의 내용을 정조에게 묻고 정조가 이에 대해 답하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종이쪽지에는 내관 이지사(이윤묵)가 의빈 성씨에게 약국의 약이 아닌 자신의 약을 올려서 먹게 하였는데, 그 직후 의빈 성씨가 죽었다는 것을 왕대비, 즉 정순왕후가 정조에게 고하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의빈 성씨의 치상소, 즉 장례식장에서 이 소식을 들은 정조는 이윤묵을 붙잡아 와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주변의 만류에 귀양을 보냈다가 곧 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이쪽지의 내용에 정조는 ‘약을 사용하고, 조제하고, 다릴 때 내가 직접 살피었으며, 약봉지와 약그릇은 모두 침실에 두고 사용하였다.’며 의빈 성씨는 독살당한 것이 아니라는 대답을 합니다.


위에서 살펴본 정순왕후의 언문교지와 대제학 김종수가 물은 종이쪽지의 공통점은 정순왕후가 의빈 성씨의 독살설을 주장하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순왕후가 장례식장에서 정조에게 독살설을 알리자 정조는 범인으로 지목된 내관의 목을 베려고 할 정도로 분노하였습니다. 정조 역시 의심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독살범으로 지목된 내관을 죽이려 했던 것이죠. 이러한 상황은 의빈 성씨가 실제로 독살 당했을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독살의 배후는 정순왕후의 언문교지에 따르면 은언군(정조의 배다른 동생)이고, 대제학 김종수가 물은 종이쪽지에 따르면 내관 이윤묵이며, 『이재난고』에 따르면 화빈 윤씨입니다. 그러나 이들 중 죽임을 당한 경우는 없습니다. 즉 이들은 범인이 아니었다는 반증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범인은 누구였을까요? 정조의 아들을 죽이고, 사랑하는 여인과 뱃속의 아이를 죽이면 가장 이로워지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정순왕후였습니다. 실제로 정조가 39세에 다시 얻은 순조는 11세에 즉위하게 되었고,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을 차지하였죠. 만약 문효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정조가 죽은 1801년 20세에 즉위하였을 것입니다. 당연히 성인이었기 때문에 수렴청정도 없었을 것이고, 정순왕후는 권력을 잡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정순왕후가 내관 이윤묵을 독살범으로 몰고 언문교지를 통해 은언군을 독살범으로 몬 이유도 자신의 범행을 숨기려는 목적이었을 수 있죠. 그러나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으니 의빈 성씨의 독살설은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https://m.blog.naver.com/gulliber/222568584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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