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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의 전방 후원분..(2)
게시물ID : history_94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풍림화산2
추천 : 3/6
조회수 : 153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5/23 12:05:00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9408&s_no=9408&page=1

 

나주의 전방 후원분에 대해서 위의 글에 이어서 씁니다..

 

한국 강단 사학계가 (라고쓰고 신식민주의 사학계라고 읽는다) 마한의 유물이라고 서기 5세기까지 마한이 반도 남부에 있었다고 하는..

황당한 가설 위에서 억지를 부리고 있고..

 

그에 호응하듯 일본 학자들은 송서 倭 5 왕이 마한의 영유권을 주장했다는 사료와 연결시키며 반도 남부에 있던

왜인의 흔적 운운하고 있습니다만..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위에 이덕일씨가 쓴 것처럼 일제 시대에 이것을 발굴한 일인 학자들이

도굴을 방조했을까요?  

 

일제시대 식민사학자들은 점제현 신사비 같은 것들을 조작해서라도 식민사관..즉 조선은 고대에도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했는데 .. 만일에 위의 주장들이 맞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위의 이덕일씨 주장처럼

도굴을 방조했을까요? 필사적으로 보존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덕일씨는 도굴을 방치했다고 적었지만 내 느낌에는 도굴을 빙자해서 유물을 빼돌렸다. 라고까지 생각이 됩니다만

그런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은 접어두고 주어진 사료를 가지고 저 고분 주인의 정체를 고민해보면

 

역시 백제 동성왕이 제일 가능성이 높지 않나 싶습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고분이 발굴된 지역에 말통대왕(末通大王) 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 동성왕은 이름이 모대( 牟大) 였고 일본서기에는 末多王으로 기록되어 있어 동국 여지승람의 말통대왕과

동일인물로 추정할 수 있는데요

 

도굴당한 유물의 목록을 보면 금동관 금동신발 곡옥 등.. 백제계 고분의 부장품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은 남습니다. 백제계열 고분에서 옹관을 사용했다..? 라고 하는 의문입니다.

백제의 여러 고분들이 있지만 옹관을 사용한 예는 없으니까요

 

그것은 백제 동성왕이 순수하게 백제 내부에서 왕위를 승계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백제 왕위를

승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고민해야 풀 수 있는 의문이 아닐까 합니다.

 

1. 백제왕들이 중국 남조와 외교할 때에 부여의 후손이라는 의미의 여(餘)씨 성을 사용한 것에 반해서

   모(牟) 씨 성을 사용했다는 점

 

2. 백제 개로왕이 478년 왕과 왕자 왕비 모두 장수왕에게 척살당할 정도로 실질적으로 왕조가 멸망했는데도

   동성왕은 484~ 488 년에 북위와 전쟁해서 승리할 정도의 국력을 유지하였다는 점은  한반도 백제 이외에

   예를 들어 열도와 같은 곳에 외부의 기반이 있었던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

 

3. 백제왕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신라 왕족과 혼인을 했고 동성왕이 사망시 신라에서는 마치 종족의 어른이 돌아가신 것

   처럼 예를 표했다..

 

기타등등...

 

일본 신식민주의 사학자들과 한국 강단사학계에서는 단지 고분의 형태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니혼 반자이를 외치지만 글쎄요..

 

일본에게 유리한 실증만 선택하고 그 이외는 무시한다는 일본식 실증주의(라고 쓰고 신식민주의 사관이라고 읽는다)

를 벗어나려면 이 당시 열도에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봐야겠지요

 

백제 동성왕이 백제를 다스리던 시기 그러니까 5세기 말 그리고 6세기초까지  열도에서는 한반도의 횡혈식 석실분..

즉 돌방 무덤이라고 하는 것이 열도 전체로 확산이 됩니다. 흔히들 백제의 문화가 열도로 건너갔다고 표현하는데 글쎄요 ?

장례나 매장 풍습은 그 집단의 종교하고도 관련이 있는데 저게 무슨 유행처럼 급격히 바뀌었을까요 예를 들어

 

백제인들은 무덤에 돌방을 만들어서 고인이 죽은 후에도 계속 제사를 지내는데 우리 왜인도 저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

하면서 단기간에 열도 전체로 확산이 되었을까요.. 한국에도 기독교가 전파된지 150년이 넘어가고 있지만 매장이나

장례 풍습은 잘 변하지 않고 있고..여전히 제사 이런 문제로 싸우지 않나요..

 

현실적인 이야기는 이 시기에 열도 안에서 백제 세력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열도에서 반도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은 백제 동성왕은 그러한 열도의 변화를 기반으로 한 세력을 기초로 백제의

왕을 이었다고 보는데요.

 

열도안의 신라 세력과 백제 세력의 중간혹은 양쪽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동성왕의 친 신라적인

정책은 그런 것을 배경으로 했겠지요. 실제로 혈통 자체도 순수한 백제 왕족이 아니라 신라와 백제의 혼혈..

하지만 본인은 신라인이라는 의식이 더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 일본서기에는 백제 동성왕의 아들인 마나가 백제왕의 골족이 아니다.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사료 성격을 파악하면 어째서 이런 표현이 나오는지 알게 됩니다만 )

 

 

한반도 남부의 전방후원분이라고 하는 것은 저런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기부터는 제 추측입니다만.. 일제시대 초기 일인 학자들이 임나 일본부의 결정적 증거라고

열심히 발굴했던 나주 고분군.. 어째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혹시 거기에는 백제 동성대왕이 열도 백제의

통치자의 후손이었다라고 기록된 금석문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없어진 유물... 참 꿀꿀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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