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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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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지방공대생
추천 : 0
조회수 : 44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22 21:56:28

서재필은 갑신정변 당시 19살로 급진적인 개화가 필요하다고 여긴 개화당 인물 중 하나였다. 서재필은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 당시 군사 책임을 맡는 중책을 짊어졌으며, 3일 천하 이후 일본을 통해 미국으로 망명을 올랐다. 12년이 흐른 후 미국 시민권을 따 낸 서재필은 조선 왕실의 고문 자격으로 다시 귀국하게 되었다. 암살 위협을 대비해 선교사 아젠펠러 집에 묵기 시작한 서재필은 국왕의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그는 자신을 고용한 상관에 대한 접견을 핑계로 고종을 만나고자 하였고, 일본공사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만남은 성사되었다. 고종은 세월이 흘러 미국 시민이 되어 돌아온 서재필을 이용하여 유길준 일파를 견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종은 서재필에게 강연을 부탁하였고, 이 강연에서 서재필은 선 제도 제정 후 반포식의 기존의 개화 방식을 비판하고 최우선 과제로 근대식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론적 개화를 주장하였다. 이 강연으로 그는 청~장년 층의 관료들을 매료시킴으로써 당시 실권을 쥐고 있던 급진 개화파로 분류되던 친일 유길준 일파를 견제하고 고종의 신임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일본 공사관은 갑신정변의 주축을 이루었던 서재필에 대해 더욱 자세히 조사해 볼 필요를 느꼈다. 미국 유학파 출신 코무라 일본 공사는 서재필을 호출하여 그와 개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코무라 공사는 일본의 급진적 개화사건인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청년 장교들처럼 갑신정변을 이끌었던 서재필 또한 매우 국가적이라 예측하여 서재필을 견제하려던 참이였다. 그러나 코무라는 이 대화에서 서재필을 가장 병약해 보였던 박영효보다 더욱 이상주의적이고 적극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유길준은 서재필에게 자신이 쓴 <서유견문>을 건네주었다. 서재필은 이 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는데, 특히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하여 책을 간행했다는 사실을 특히 높이 샀다. 그들은 지나친 자본 없이도 손쉽게 개화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신문 창간을 생각해 내었다. 사실 유길준은 자신이 일본 유학생 시절 신문의 근대화에 대한 영향력을 몸소 체험 해 보았고, 귀국 후 박영효를 도와 신문 창간을 준비하던 경험이 있었다. 유길준은 한성신문이 일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서재필이 새 신문의 대표를 맡는다면 미국 시민권자인 서재필의 국적상 일제의 신문에 대한 영향을 차단 할 수 있을 것이라 설득하였다. 그들은 고종의 승인을 받고, 설비 기기와 설립 자금을 모두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일본 코무라 대사는 다시 서재필을 호출하였다. 서재필은 석유를 일본을 경유하지 않고 미국으로부터 직수입해 사용하자고 주장하여 일본 상인들에게 암살 위협을 당하던 때였다. 코무라는 일본 공사관과 협력을 하지 않고는 목숨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협박으로 신문 창간을 막으려 하였다. 또한 친일 계열의 유길준 또한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새 신문 창간 노력이 좌절되기 직전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고종은 친일 내각을 해산하고 친정체제로 돌입하여 일본 공사관의 영향력이 사라졌고, 친일 내각의 구성원들은 모두 암살당하거나 일본으로 망명을 오르게 되었다. 창간 자금과 인력을 모두 물려받고, 그 어떠한 방해세력도 사라진 서재필은 드디어 신문 창간의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개화파 내각의 정치적 선전 도구로써 기대를 받았던 이 새 신문 창간은 왕실뿐만이 아니라 배재학당의 헐버트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배재학당의 젊은 청년 주시경은 새 신문 창간에 국한문을 사용하기 보다는 순 우리 국문으로 제작하되, 알파벳처럼 문법적 띄어쓰기를 도입하자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서재필은 이 젊은 청년의 의견을 높게 사 그를 새 신문국의 조필로 임명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독립신문>은 기존의 <한성순보> <한성주보>와 다르게 빠른 우편 제도를 통해 수도 서울의 소식을 매우 빠르게 전국으로 전파하였다. 1~3면을 순 우리말 국문으로 제작하고 4번째 면은 영어로 주요 기사를 번역한 내용을 수록하였다. 영문판의 번역은 배재학당의 헐버트가 맡기로 하고 왕실의 전폭적 지지하에 첫 부수가 발행되었다. 여기에 서재필은 신문의 발행 목적은 외국의 소식과 개화정부의 소식을 알림을 목적으로 공표하였고, 국문으로만 제작한 이유, 띄어쓰기를 사용하는 이유 등을 함께 적었다. <독립신문>의 신문기자는 왕실의 지지 아래 왕궁을 출입 할 수 있었으며, 국민들은 소문이 아닌 정확한 출처를 가진 정보를 바탕으로 담소를 나누고 국가가 어떤 상황에 놓였는지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국민들은 기쁜 일에 국왕을 찬양하며 단결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고, 국가적 위기가 닥칠 때에는 자신의 의견을 적어 신문사에 투고 할 정도로 단일화 되기 시작했다. 신문의 도입으로 조선 지방 곳곳까지 하나의 국가로 비로소 통합을 이루게 되었다.


 

왜 조선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성공적인 개화를 거치지 못했을까하는 의혹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가지는 의혹일 것이다. 몇몇은 자연 지리적 이유로, 몇몇은 지도층의 차이와 당시 강대국들의 간섭 때문이라고 말한다. 혹자는 당시 조선에는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 처럼 뛰어나고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개화사상가가 존재하지 않아서였다 고도 말한다.

근대 조선을 보면 한 인물이 몇 년간 영향력을 끼치며 개화를 주도해 나아간 적이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막을 내렸고, 갑오개혁은 일년이라는 기간 동안 주체적 인물 없이 외세에 의해 진행된 개혁에 가깝다. 훗날 개화 정신으로 무장한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던 시기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뿔뿔히 흩어지는 결과를 겪기도 했다. 따라서 근대 위인들은 모두 단편적으로나마 개화를 추진했던 크고 작은 사람들로 이루어 진 것이 우리 한국의 현실이다. 서재필과 유길준 또한 이러한 예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메이지 유신처럼 개화를 단계적으로, 확실하게, 그러나 약간 더 빠르게 이루어 내었다면 근대 신문 창간은 피할 수도, 피해 가기에는 매우 매력적인 물건이다. 신문은 정보통신이 매우 미약했던 시절 값싸고 질 좋은 정보를 대량으로 퍼뜨리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였다. 신문을 통해 정보 전달 뿐만이 아니라, 논설 등을 통해 토론을 유도 할 수도 있고 자그마한 지면을 할애해 국민 계몽운동을 전개 할 수도 있다. 유일한 문제점은 문맹율 일 테지만, 당시 조선인 대다수는 한글을 읽을 수 있었다. , 무었이 문제랴!

이러한 신문의 위력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신문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일본인 그들과, 외국 선진 문물을 체험 해 본 유길준과 서재필 이였다. 개화 사상가들이 왜 그토록 대중이 읽을 수 있는 신문을 제작하려 했는지, 또 왜 일본이 신문을 장악하려 했는지 이해가 된다. 지금으로 치면 신문은 SNS이자, 인터넷이자, 소통의 창구가 되기 때문이다.

이에 신문을 모두 순수한 우리 한글 만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유길준이 자신의 <서유견문록>을 한자/한글 혼용으로 쓴 이유도 다양한 계층에서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 배웠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책에 사용된 모든 한자를 다 알아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어 일반 백성들이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었을 지 걱정이 된다. 이러한 국한문혼용체에 대한 까막눈 백성들의 마음은 나 스스로가 한문을 몇 자 알지 못하는 한자 문맹이기에 더욱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내가 선물로 받은 몇몇 책은 국한문혼용체로 작성되어 있었는데, 중요한 단어는 한자로 되어 있고 조사나 연결어미 등은 한글로 적힌 책이었다. , 핵심 단어를 이루는 한자를 알지 못하면 매우 중요한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어려운 기입 방식을 왜 사용할까? 옛날 신문이나 책으로 공부하신 아버지 세대는 한문을 어떻게서든 배우게 되셨단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는 필연적으로 많은 혼란과 낭비가 발생했을 것이다. 국한문혼용체 사용에 관한 논쟁에서는 사용 찬성 근거로 동음이의어가 항상 등장한다. 여권이라는 단어는 women power일 수도 있고, passport일 수도 있다. 불확실한 한글 표기보다는 한자 한자 뜻을 포함하는 상형문자인 한문의 사용은 이러한 혼란을 피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다른 장점으로는 처음보는 단어도 그 한자 낱말을 보고 그 뜻을 유추 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溫帶夏雨氣候의 경우 한자를 보고 여름에 비가 집중적으로 오는 기후라는 뜻을 알아 낼 수 있다는 요지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한자의 남발은 오히려 글을 어렵게 해 접근성을 떨어뜨린다. 한자는 거의 무한한 개수의 낱말로, 이를 다 배우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낭비를 일으키고 문자 사용의 계급화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사실 유길준이 당시 <서유견문록>을 국한문혼용체로 작성했을 때, 여러 관료들에게 그런 문장은 문장이 아니라고 비웃음 당한 것도 근본적으로는 한자 사용 계층이 한글과 한문의 융합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된 것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을 위한 신문을 오로직 한글로만 작성 한 것은 매우 뛰어나고 올바른 식견이었다. 조선은 일본보다 문맹율이 현저히 낮았기에 신문의 파괴력은 더욱 강했으리라. 조만식 선생과 서재필 등의 개화 사상가들은 이 신문 편찬 당시 한글을 연구하고 개량하는 일 또한 벌였는데, 한글을 더욱 쉽게 편찬하여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려는 노력일 것이다.

영어가 세계 언어로 널리 퍼진 이유는, 가장 중요하게도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이 사용하는 언어여서 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배우기 쉬운 장점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귀족들이 사용하던 불어와 달리 영어는 하층민들이 사용하던 단순한 언어였고, 이러한 장점으로 민간에 쉽게 퍼진 영어는 이민자들의 나라 미국의 제 1언어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화자의 생각을 담아 남에게 전달하는 역할이다. 문자는 남에게 의미를 쉽게 전달해야 한다. 세계화가 진행되며 영어는 매우 빠른 속도로 세계를 잠식해 나아가고 있다. 배우기 쉽고, 그래서 남들에게 알리기도 쉬운 한글은 이러한 세계화의 물결 속에 오랫동안 살아남을 것이다. 국한문혼용체는 그 복잡성으로 인해 일본어 처럼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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