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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스압,약사이다?] 고등학교 시절 이상한 애 이야기
게시물ID : soda_9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비설당주
추천 : 14
조회수 : 229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5/08/25 12:49:15
할 일이 많아서 시간이 없는데 이러고 있으므로 어이 없음 음슴체
 
고등학교 때 일임.
요즘도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가끔 한 동네에서 다른 학군으로 배정되어 떼로 한강을 건너 있는 학교에 가는 사태가 발생했음.
지금은 노선이 새로 생겨서 지하철로도 갈 수 있지만 그땐 버스 밖에 없었고, 그래서 아침 시간에 버스 타면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하루 종일 쓸 기력을 다 쓴 상태라 그 핑계로 공부 안 함.
이 꼴을 보다 못한 동네 학부형들이 작은 마이크로 버스를 섭외, 아침 시간에만 그 버스로 통학을 했음.
 
그 버스에 타는 애 중에 삐리리(가명 맞음)라는 애가 있음.
다른 애들이랑 수준이 안 맞는다며 (어디가?) 혼자 노는.. 자진해서 따가 되었던 아이임.
그렇다고 그 아이가 외모가 수준급이라거나 성적이 썩 좋지도 않았음. 오히려 외모는 음.. 좀 그랬음.
당시 우리반 반장은 그 동네 시장에서 쌀집하는 집 딸이었는데 참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뻤으나
걔가 뭐라도 하면 꼭 혼자 구시렁구시렁, 하지만 주위엔 다 들리게  "쌀집 딸 주제에..."하며 무시하는 애였음.
하지만 학교 애들이 거의 다 착해서 삐리리를 딱히 왕따를 시키거나 괴롭히거나 하지도 않음.
그냥 '쟤는 좀... 자기만의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애구나'하는 정도? 나 역시 그랬음.
 
혼자 노는 것도 한계가 있는지, 걔가 날 만만하게 봤는지 가끔 나한테 들러붙어서 속닥속닥하며 이런저런 말을 걸었음. 심지어 같은 반 됨.
나도 그냥 저냥 대꾸해줬더니 아침마다 오는 순서대로 자기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데 같은 버스로 오는 걔는 늘 내 옆에 앉으려고 함.
나라도 걔랑 안 놀아주면 안 될 것 같은 불쌍한 생각이 들어 딱히 말리지는 않았음.
그런데 나는 다른 반 친구도 자주 오고, 좀 떨어진 자리에 있는 애도 쉬는 시간에 자주 찾아오는데 (내가 움직이는 걸 싫어하다보이..)
그때마다 좀 조용히 하라고 짜증냄. 자기 공부한다고... ㅠㅠ
왜 걸어가면서도 공부하고, 쉬는 시간에도, 밥 먹을 때도 공부하는데 성적 안 나오는 애가 하나쯤은 있잖음?
걔가 딱 그런 애였음.
그래놓고서는 수업 시간엔 나한테 말 걸음ㅠㅠ 자기 아빠가 무슨 기업에서 부장이었다가 이사가 됐다는 둥.
평소엔 '이따 얘기하자'고 딱 끊으면 쉬는 시간엔 또 공부한다고 말 안 거는데 그 날은 정말 기뻤는지 쉬는 시간에 물어봄.
 
삐리리: 우리 아빠 이사됐다니까. 너 이사가 뭔지 알아?
나: 응. 우리 아빠 전무거든.
삐리리: 전무가 뭔데?
나: 집에 가서 아빠한테 여쭤봐.
 
(혹시나 해서 첨언하자면 조금 지나 울 아부지는 퇴사하시고, 사업하시다 우리집 망테크 탐. 쫄딱 망함. 이 기회를 빌어 자랑하는 거 아님)
 
그날 이후 며칠을 말 걸지 않았음 ㅋㅋㅋㅋㅋㅋㅋㅋ 내 옆에도 앉지 않음. 매우 편했음.
그리고 '쌀집 딸 주제에..'같은 말도 내 옆에선 하지 않았음.
 
그러던 중, 내가 입원을 하게 됨. 신장결석이었음. 평소에도 몸이 좀 약한 편이라 체육시간에도 잊을만 하면 쓰러지고 했었고
입원할 당시엔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 물만 마셔도 토하고 혼이 반쯤 빠져 있었는데 엄마가 학교에도 그렇게 얘길 했나봄.
담임쌤이 '작성자가 매우 아프단다. 물도 못 마신다'고 해서 애들은 내가 중병에 걸린 줄 알았다고 함. 학교 전체에 소문 퍼졌다고;;;
친한 친구가 대표로 문병을 왔는데 반 아이들이 다 롤링페이퍼에 빨리 나아서 꼭 돌아와야한다고 ㅠㅠ 눈물의 메시지를 절절하게 씀.
따로 보낸 편지와 책, 초콜릿, 사탕, 거울과 빗 세트 등등 작은 선물들도 많았음. 삐리리는 메시지도 안 적음.
문병대표로 온 친구는 나름 멀쩡한 내 상태를 보고 배신감을 느꼈다며 ㅋㅋ 좋아하면서 갔음.
열흘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을 했는데.. 아뿔싸. 학교 가자마자 기말고사였음-_-
물론 선생님과 부모님이 모의하신 '시험은 봐야지'의 결과물이었고, 나는 짜증났지만 당황하진 않았음.
평소에도 공부를 성실하게 하는 편이 아니라; 평소 시험을 맞는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 어차피 찍거나 벼락치거나.
 
 
퇴원하자마자 시험 본 거고, 아직 후유증이 남아서 아침이면 마지막 라운드를 뛰고 있는 권투선수처럼 부은 얼굴로 나타나서 친구들이 많이 걱정함.
시험이 끝나고 성적표가 나왔는데 평소처럼 나왔음. 앞으로도 공부를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함.
그때 삐리리가 갑자기 내 성적표를 낚아채듯 뺏어감. 얜 평소에 지 성적표는 아예 화장실 가서 문 걸어잠그고 보는 애였는데.. 왜째서 내껀;
"야!!" 소리 지르니 친구들이 다 쳐다봄.
기가 막혀 하고 있는데 내 성적표를 보더니 "넌 왜 공부 안 했는데도 성적이 잘 나와?"하며 짜증내며 돌려줌. 딱히 잘 나온 것도 아닌데;;
그때 삐리리는 인상적인 대사를 날렸음.
 
"뭐... 괜찮아. 너는 몸이 약해서 일찍 죽을 거니까"
 
 
주위에 잠시 정적이 흘렀음. 나도 그랬음. 내가 뭘 잘못들었나 시공간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했음.
 
그 정적은 바로 뒤에 앉아 있던 친구가 "뭐? 이런 쓰앙녀니!"하며 삐리리의 머리끄덩이를 잡으면서 깨짐.
 
평소 같으면 말렸을 다른 친구들도 "저게 미쳤나", "야!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지!", "니가 오늘 나한테 죽어봐라"고 막 욕함.
 
하지만 그렇다고 집단구타를 하거나 한 건 아니고 모여들어 무섭게 째려보고 있는 게 전부.
그런데 제일 열받은, 삐리리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있는 친구는 당장 밖으로 나오라며 일어서려 하고 있었음.
 
"야.. 그냥 놔줘. 나 일찍 안 죽어. 억울해서 안 죽어. 그거랑 상대하지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저게 전부였음. '그래.. 오늘은 삐리리를 묻기에 좋은 날이지. 소각장으로 가자'고 할 수는 없잖음.
하지만 난 누가 날 위해 그렇게 화내고 편 들어주는 게 너무 고마웠음.
그리고 1시간 뒤, 전 학년에 소문이 퍼져서 그 삐리리는 '사람도 아닌 것'이 되었음.
뭐 그렇다고.. 딱히 삐리리를 괴롭히거나 할 애들도 아니었지만 걔는 졸업할 때까지 친구 없이 혼자 다른 사람들을 다 따돌리며 지냈음.
하지만 아침엔 같은 버스를 탔으므로 걔의 구시렁대는 혼잣말은 계속 들을 수 있었음.
"예술계 주제에..."
"집도 못 사는 주제에..."
"나보다도 공부 못 하는게..."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여대를 갔다는 소문과 살을 많이 빼서 쪼글쪼글 할머니가 되어 버스정거장에서 마주친 다른 친구에게 20키로 뺐다고 자랑하더란 얘기였는데 (안 친하던 애가 갑자기 붙잡고 자랑해서 당황했지만 되게 늙어보인다고 대답해줬다고ㅠㅠ)
 
 
보고 있냐? 나 아직도 안 죽었다. 몸도 건강해져서 이젠 감기도 잘 안 걸린다. 너는 니 말대로 키 크고 잘 생긴 대기업 다니는 남자 만나서, 아침 저녁 밥 안 하고 딱 국만 끓여서 먹고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여전히 머리끄덩이 잡힐 일 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싶지만 내 알 바 아니구나. 알아서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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