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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비잔티움 제국사 (27) - 라틴 제국 정복기
게시물ID : history_936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1
조회수 : 81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21 18:41:08

 

http://cafe.daum.net/shogun의 푸른 장미님이 쓰신 글입니다

 

이사키우스 2세 앙겔루스가 즉위했을 당시 노르만군이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키우스 2세는 1년 안에 침략자들을 물리쳐 도로 이탈리아로 돌아가도록 만들었고 노르만족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 끝과 시칠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이사키우스 2세는 황제가 되었을 때 딸 둘과 장차 알렉시우스 4세가 될 아들 하나를 둔 홀아비였다. 그의 딸 이레네는 1192년 시칠리아의 로제르 왕과 결혼했으나 식을 올리고 18개월 만에 남편을 잃었다. 그녀는 1197년 독일 황제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슈바벤의 필리프와 재혼했다.

 

이사키우스는 홀아비의 몸이었기에 서유럽 왕가에서 배우자감을 물색했으며 헝가리의 벨라 3세가 사신을 보내오자 벨라 3세의 딸 마르가레트와의 결혼을 위한 협상을 벌였다. 그 협상이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1186년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마르가레트 공주는 콘스탄티노플로 와서 이사키우스와 결혼하고 마리아로 개명했다.

 

이사키우스 2세는 즉위 2년 후 3차 십자군 원정에 대처해야 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이끄는 독일군은 아무 사건 없이 콘스탄티노플을 통과했으며 다른 십자군들은 바닷길로 소아시아 남쪽 해안으로 갔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190년 6울 10일 소아시아 남부에서 강을 건너다 익사하는 바람에 끝내 성지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한편 이사키우스 2세는 소아시아의 셀주크를 꼼짝 못하도록 묶어놓고 발칸 반도의 왈라키아(현재의 루마니아 남부 평원 지역), 불가르, 세르비아, 쿠만족과 싸웠다. 황실군이 1190년과 1194년 두 차례에 걸쳐 왈라키아와 불가르에 패하자 이사키우스 2세는 직접 전장으로 나섰다. 그러나 1195년 여름 그가 출정한 사이 그의 형 알렉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를 붙잡아 눈알을 뽑았다. 그후 이사키우스 2세는 아들 알렉시우스와 함께 궁전의 탑에 갇혔다. 그의 형은 하기아 소피아에서 알렉시우스 3세로 즉위했고 형수 에우프로시네는 황후가 되었다.

 

                               알렉시우스 3세            

 

알렉시우스 3세는 재위 첫 5년 동안 몸소 몇 차례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소아시아의 셀주크나 발칸 반도의 왈라키아와 싸웠다. 1201년 왈라키아와의 전투에서 그는 감옥에 가두었던 조카 알렉시우스를 동반했다. 알렉시우스는 전장에서 도망쳐 슈바벤의 필리프와 결혼한 누이 이레네를 찾아갔으며 서유럽 국가들에 자신의 부친 이사키우스 2세가 황권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청했다.

 

서유럽에서는 1198년 1월 인노겐티우스 3세가 교황 자리를 승계했고 그해 8월 그는 4차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다. 1199년 11월 다수의 프랑스 귀족들이 십자군에 가담하면서 원정대의 주축이 결성되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플랑드르의 보두앵 백작이었다. 프랑스 백작들의 대표단은 십자군을 수송할 배편을 구하기 위해 베네치아의 엔리코 단돌로 총독을 찾아갔다. 베네치아는 수송료를 정한 뒤 십자군이 원정 중에 정복을 통해 얻는 이익을 동등하게 나누다는 조건으로 군사를 가득 태운 전함 50척을 제공했다. 대표단이 돌아온 후 수아송에서 회의가 열렸고 몸페라토의 보니파키우스 후작이 십자군 원정 대장으로 선출되었다.   

  

                                                인노겐티우스 3세       

막상 십자군 지도자들이 이탈리아에서 병력을 모아보니 예상 인원의 3분의 1인 1만 1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베네치아에 약속한 수송료를 지불할 수 없었고 처음에는 원정 자체가 무산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단돌로 총독이 헝가리에 빼앗긴 달마치아(아드리아 해에 면한 현재의 크로아티아 지방)의 도시 자다르(현재 크로아티아 서쪽 달마치아 지방의 도시)를 되찾도록 도와주면 남은 수송료의 지불을 유예해주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십자군 기사들은 그 제안에 응했고 1202년 9월 8일 총독의 갤리선이 이끄는 480척의 전함으로 이루어진 베네치아 함대가 자다르를 향해 출격했다.

 

십자군을 선동하는 엔리코 단돌로

 

베네치아 함대는 11월 10일에 자다르에 도착하여 공격을 시작했고 두 주 동안의 포위 공격 끝에 도시를 점령했다. 라틴군은 자다르의 수비대와 주민들을 해치진 않았지만 그곳에서 운반 가능한 것은 모조리 약탈하여 나누어 가졌다. 그러다 보니 에게 해를 항해하기엔 너무 추워져서 원정대는 자다르에서 겨울을 났다.

 

보니파키우스는 12월 중순에 자다르에서 십자군에 합류했다. 두 주 후 알렉시우스 앙겔루스의 서신을 지닌 사절이 도착했는데 그 서신에는 만일 십자군이 자신의 부친 이사키우스의 복위를 도와주면 그리스정교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분열을 종식시키겠다는 약속이 들어 있었다. 또 십자군에 거금을 지불할 것이며 원정의 지체로 인해 발생되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겠다고도 했다. 십자군 지휘관들은 그 청을 수락했고 단돌로 총독 역시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리는 것에 합의했다.

 

1203년 6월 24일에 칼케돈에 닿은 라틴 함대는 해협의 아시아 쪽 해안에 상륙했다. 그들은 보스포루스를 건너 골든혼 입구에 쳐놓은 쇠사슬을 뚫고 골든혼의 요새 갈라타성을 쳤다. 그들은 배들로 다리를 만들어 골든혼을 건넌 뒤 성벽 바깥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 다음에 베네치아 함대가 항구 안쪽으로 들어가 골든혼을 따라 이어진 해안 성벽을 공격했다.

 

십자군은 열흘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친 뒤 7월 17일에 골든혼의 해안 성벽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단돌로 총독은 베네치아 국기인 성 마르코 깃발을 앞에 펼치고 기함 뱃머리에 우뚝 서 있다가 성벽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자 부하들에게 자신을 물가에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해안 성벽의 성탑 25개를 빼앗았고 성벽 안쪽으로 불이 붙은 나무 막대기를 던져 아래쪽 동네 전체를 불태웠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인 "성 마르코의 깃발"

 

알렉시우스 3세는 어둠이 내리자마자 금화 1만 개와 왕관 보석을 챙겨서 딸 이레네를 데리고 도망쳤다. 이날 밤 황제에게 버림받은 관료들은 궁전 탑에 갇힌 이사키우스 2세를 풀어주고 복위시켰다. 동이 트기 직전에 그들은 라틴군에게 전령을 보내 그런 사실을 알렸고 이사키우스 2세는 아들 알렉시우스가 십자군에게 한 약속을 지키겠노라고 맹세했다. 그런 뒤 도시의 문을 열어 그의 아들 알렉시우스를 동반한 라틴군이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게 했다. 다음날 라틴군은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의 폭동을 피하기 위해 군대를 도시 바깥으로 철수시켰다. 이사키우스의 아들은 1203년 8월 1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부친과 함께 공동 황제로 임명되어 알렉시우스 4세로 탄생했다.

 

                              알렉시우스 4세

 

알렉시우스 4세는 날마다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라틴군과 술잔치를 벌이며 흥청거렸기에 콘스탄티노플 주미들 사이에서 인기가 땅에 떨어졌다. 게다가 라틴군도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점점 안달이 나서 교회들의 금붙이와 은붙이를 강탈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8월 19일에 폭동이 일어났고 폭도들이 라틴인 거주지를 공격하면서 지른 불이 하기아 소피아 현관을 태웠으며 이로 인해 주민들의 좌절과 분노는 더욱 커졌다.

 

콘스탄티노플의 귀족들 역시 주민들과 라틴군 못잖게 알렉시우스 4세에게 불만이 많았다. 알렉시우스 4세의 반대 세력의 우두머리는 알렉시우스 두카스 무르츠프루스(검은 눈썹)였다. 무르츠플루스는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의 고손자였고 그의 지지자들은 앙겔루스 가문 사람보다 그가 훨씬 더 황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1204년 1월 하순, 주민들이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의 폐위를 주장하는 집회를 갖자 무르츠플루스는 겁에 질린 알렉시우스 4세에게 그를 죽이러 궁전으로 쳐들어오고 있는 폭도들로부터 몸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다. 무르츠플루스는 알렉시우스를 궁전에서 몰래 빠져나가게 한 후 도시 바깥의 은신처에 감금했다. 그리고 1204년 2월 5일 알렉시우스 5세로 등극했다. 이 시기쯤 이사키우스 2세는 자연사하여 무르츠플루스가 제거해야 할 적수에서 제외되었다. 무르츠플루스는 갇혀 있는 알렉시우스 4세를 독살하려고 했으나 두 차례나 실패하자 목매달아 죽였다.

 

무르츠플루스는 전권을 장악하자 즉시 십자군에게 일주일 내로 자시의 영토를 떠나라는 전갈을 보냈다. 단돌로와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라틴군의 공격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방어할 준비를 시작했다.

 

1204년 4월 9일에 공격을 개시한 라틴군은 궁전 바깥의 육지 성벽을 공략했다. 그러나 그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골든혼의 해안 성벽을 겨냥한 해상 공격 역시 남풍이 불어 배들이 해안에서 먼 바다 쪽으로 떠밀려 가는 바람에 실패했다. 그들은 사흘 후 공격을 재개했는데 이번에는 그들에게 유리한 북풍이 불어 공격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해안 성벽의 성문들이 열리자 말탄 기사들이 배에서 내려 도시 안으로 들어갔고 대병력이 운집했다. 독일인 백작 베르트홀트가 약탈을 하는 비잔틴 주민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몇 군데 불을 질렀는데 그 불길이 번져서 골든혼 해안의 건물들이 거의 파괴되었다. 그것이 콘스탄티노플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난 세 번째 대화재였고 이 세 차례의 대화재로 콘스탄티노플의 건물 절반이 파괴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는 제 4차 십자군

 

그날 밤 무르츠플루스는 지지자들을 모으려고 애썼지만 모두들 도망치거나 집에 숨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새벽이 밝아오기 전에 가족과 신하들을 데리고 도시를 빠져나가 알렉시우스 3세와 그의 지지자들이 숨어 있는 트라키아의 모시노폴리스로 갔다. 그러나 그를 적수로 여긴 알렉시우스 3세는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감금했다. 무르츠플루스는 그해에 라틴군에게 잡혀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기둥 꼭대기에서 던져졌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라틴군은 사흘 동안 도시를 약탈하며 2,000명 가량의 그리스인을 죽였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의 기록을 보면 라틴군이 어떤 식으로 하기아 소피아를 약탈하고 모독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황폐화시켰는지를 알 수 있다.

 

제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

 

그들은 전 세계가 감탄한 예술 작품인 중앙 제단을 파괴하고 귀중품들을 나누어 가졌다. …… 또한 옥좌와 설교단에서 떼어낸 조각 장식이 된 금붙이와 은붙이, 신성한 그릇들을 운반하기 위해 말들과 노새들을 교회 안으로 끌고 왔다. …… 매춘부를 총대주교의 의자에 앉혀놓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욕적인 말을 던지게 했고 그 매춘부는 음란한 노래를 불러 신성한 장소를 모독했다. …… 정숙하고 순결한 아가씨들과 하느님께 자신을 바친 처녀들(아마 수녀를 의미함)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 거리의 집들과 교회들에서는 비명과 탄식 소리만이 들려왔다. …… 여기서는 약탈품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고 저기서는 사람들이 끌려가고, 도처에 강간당한 여자들과 부상당한 사람들 사이에 시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라틴군은 1204년 5월 9일 저녁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 모였는데 열두 명의 위원들 중 절반이 베네치아인이었다. 첫 번째 투표 결과 플랑드르의 보두앵이 9표, 몸페라토의 보니파키우스가 3표를 얻었다. 보니파키우스의 지지자들이 백기를 들고 보두앵 편에 섰고 다음 투표에서 보두앵은 만장일치로 황제로 선출되었다. 다음날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로 즉위한 보두앵은 궁전으로 들어갔다.

 

라틴인들은 '파르티티토 로마눔'으로 알려진 협약에 의해 제국을 분할하였으며 협약의 최종적인 세부 사항은 1204년 10월에 제창되었다. 협약에 다라 제국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는데 라틴 황제가 4분의 1, 베네치아가 8분의 1, 그리고 나머지 십자군이 8분의 3을 가졌으며 각각의 몫은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땅과 콘스탄티노플에서 먼 땅으로 다시 나뉘었다. 그렇게 '로마인들의 왕국'이라는 뜻의 로마니아로 알려진 라틴 제국이 성립되었으며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8분의 3의 주인이자 전제군주'라 칭했던 단돌로 총독은 자신의 영토를 얼마 다스리지 못하고 1205년 3월에 죽어 하기아 소피아에 묻혔으며 그곳의 남쪽 회랑 바닥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석관 뚜껑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라틴 통치기에 하기아 소피아를 비롯한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교회들이 로마 카톨릭 의례를 택하게 되었다.

 

 

                                라틴 제국의 문장

 

"하기아 소피아" 남쪽 측랑 위 복도에 위치한 단돌로의 무덤

 

보두앵 황제의 통치기 역시 짧아 그는 1205년 4월 14일 트라키아에서 불가르의 칼로얀 황제에게 패한 뒤 얼마 못 가서 불가르 감옥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보두앵의 동생 앙리가 섭정 노릇을 하다가 1206년 8월 20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대관식은 콘스탄티노플의 새 총대주교로 선출된 베네치아인 토마소 모로시니가 맡았다. 한편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정교회 주교들 대부분은 모로시니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거나 비잔틴 제국의 망명 정부가 세워진 니케아로 도망쳤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세 군데에 비잔틴 국가가 생겨났는데 니케아 제국, 트라브존 공국, 에피루스 공국이 그것들이었다.

 

                                                       라틴 제국의 영역

 

니케아 제국은 알렉시우스 3세의 사위 테오도루스 1세 라스카리스에 의해 세워졌다. 테오도루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쳐 니케아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2년 후 그는 미카일 아우토레아누스를 총대주교로 임명하였고 미카일 총대주교는 니케아의 하기아 소피아에서 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그때부터 서부 소아시아의 그리스인들은 니케아를 비잔틴 제국 망명정부의 수도로 여기게 되었다.

 

         테오도루스 1세

 

새 제국의 가장 당면한 위협은 룸 셀주크로 그곳의 술탄 기야스 앗딘 케이 쿠스라우 1세는 테오도루스의 장인 알렉시우스 3세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있었다. 룸 셀주크의 술탄은 1211년 알렉시우스 3세를 동반하고 니케아을 향해 진군해 왔다. 그러나 테오도루스는 그들을 물리치고 술탄을 죽였으며 알렉시우스 3세는 생포하여 니케아의 수도원에 평생 감금하였다.

 

뒤이은 반세기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대여섯명의 무능한 라틴 통치자들이 연이어 황위에 오른 반면 니케아에서는 라스카리스 왕조가 뛰어난 통치력을 보이며 비잔틴 문화의 르네상스를 태동시켰다. 라스카리스 왕조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황제는 요하네스 4세로 1258년 8월 16일에 부친 테오도루스 2세가 서거했을 때 겨우 네 살 반이었다. 테오도루스 2세는 눈을 감기 직전에 게오르기오스 무잘란을 아들의 섭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9일 후 니케아의 귀족들은 무잘란을 암살하고 자신들의 대표인 미카일 팔라이올로구스 대공을 섭정 자리에 앉혔다. 석 달 후 팔라이올로구스는 전제군주로 임명되었고 12월 공동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초 총대주교는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구스와 요하네스 4세 라스카리스의 대관식을 함께 거행했다. 팔라이올로구스가 먼저 관을 썼는데 모두들 그가 황제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요하네스 4세는 곧 공동 통치자의 포로나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요하네스 4세

 

 

                                           미카일 8세

 

이듬해 미카일 8세는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라틴 연합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로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되찾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빼고 모두 제거되었다. 미카일은 베네치아의 오랜 숙적이었던 제노바에 협조를 청했다. 1261년 3월 13일 님파이움에서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에는 협조의 댓가로 제노바에 대대적인 상업적 특권을 제공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문장

 

결국 콘스탄티노플 탈환은 아주 우연하게, 용두사미처럼 이루어졌다. 1260년 8월 그리스인들과 라틴인들 사이에 1년간의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는데 이 휴전 기간이 끝나갈 무렵 미카일 8세는 알렉시우스 스트라테고풀루스에게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트라키아로 가서 콘스탄티노플의 동정을 살피도록 명령했다. 콘스탄티노플의 셀림브리아 문에 닿은 스트라테고풀루스는 베네치아 함대 대부분이 라틴 수비대를 태우고 흑해 급습에 나서서 콘스탄티노플이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는 첩보를 얻었다. 그는 야음을 틈타 콘스탄티노플로 접근했고 부하 몇 명을 성문 근처의 성벽 아래에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 안으로 잠입시켰다. 그들은 성문 안쪽의 보초들을 덮친 뒤 경보가 울리기 전에 성문을 열어 아군을 들여보냈다. 이튿날인 1261년 7월 25일 아침, 스트라테고풀루스는 도시에 남아 있던 라틴군과 시가전을 벌인 후 도시를 장악했다. 궁전에서 자고 있다가 소란에 깬 보두앵 2세는 처소에 황제의 관과 홀을 둔채로 허둥지둥 항구의 베네치아 배에 올라 어서 떠나라고 명령했다. 스트라테고풀루스는 그리스계 주민들의 권고에 따라 골든혼 해안의 베네치아인 거주지에 불을 놓았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라틴 함대의 베네치아인들은 자신들의 집과 창고가 화염에 휩싸여 있고 가족들이 한 연대기 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연기에 쫓겨 나온 벌 떼처럼” 골든혼 해변에서 배회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족들을 갤리선에 태워 떠나는 것뿐이었고 그렇게 라틴인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막을 내렸다.

 

미카일 8세가 그 소식을 들은 건 300킬로미터 떨어진 그리스에서였는데 그는 즉시 막사를 걷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그는 8월 14일에 성벽에 도착하여 황금문으로의 입성을 성모 몽소 승천 축일인 다음 날로 미루었다. 이튿날 아침 시지쿠스의 총대주교 게오르기오스 켈리다스가 황금문의 탑들 중 하나에 올라가 호데게트리아(길의 인도자이신 성모) 성화를 달았다. 그런 다음 그는 큰소리로 기도문을 읆었고 황제와 수행원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플을 보게 될 황제를 환영하러 나온 수많은 그리스인들은 무릎을 꿇었다. 기도가 끝나자 도시로 들어간 황제의 행렬은 먼저 세례 요한 교회에 들렀다가 하기아 소피아로 갔다. 그곳에서 황제는 아르세니우스 총대주교를 총대주교 자리로 안내했으며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아크로폴리테스가 그 광경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 황제는 총대주교에게 성당을 넘겨주기 위해 신성한 건물, 성 지혜의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곳에는 황제를 비롯하여 모든 명망있는 집정관들과 대중 전체가 모였다. 그러자 황제는 총대주교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가서 그대의 자리에 앉으시오. 너무도 오랫동안 빼앗겼던 그대의 자리를 즐기시오.”

 

그렇게 비잔틴 제국은 보스포루스의 옛 수도를 되찾고 그 유구한 역사의 마지막 두 세기의 발걸음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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