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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앨리스
게시물ID : panic_935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sn
추천 : 16
조회수 : 220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5/15 21: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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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px-Alice-white-rabbit.jpg
 
앨리스
 
『잿빛의 무뚝뚝한 건물들 사이로 은은한 달빛이 흘러들어 온다.
 
각각의 벽에서 난반사되며 어지러이 하늘을 떠돌던 빛들은 곧 땅에 다다르며 그곳에 서 있는 사람들을 힘겹게 비춘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25명의 사람들이 길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다.
 
그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 한다.

한순간, 한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울리지 않는 고음의 목소리로 소리친다.
 
 
"여러분 저기를 보세요!!"
 
 
그러자 수십 개의 눈들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며 이내 어느 한 곳에 도달한다.
 
 
"뭐..뭐야 저게?!!"

 
25명의 사람들이 같은 표지판을 바라보고 있다. 그곳엔 간결한 기호들의 집합 대신 귀품있는 필기체의 문장들이 갈겨져 있었다.
 

[토끼를 잡는 사람은 나갈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 아래의 문장을 읽어 가던 사람들의 얼굴이 서서히 경직되기 시작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보시오들, 이게 도대체 뭐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니?"
 
 
한 중년 신사의 말을 시작으로 조용했던 도시가 한순간에 요란하게 울려 댔다.
둘씩 또는 셋씩 짝을 이루며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연아, 이게 뭐야... 나 무서워.."
 
"괜찮아 현아, 아무 일 없을 거야."
 
 
한 쌍의 연인이 두 손을 꼭 잡은 채 서로를 달래 주고 있다.
 
일행으로 보이는 그 옆의 남자는 무언가를 깊게 생각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야! 저게 뭐냐?!!"
 
"뭐..뭐가?"
 
 
준우의 다급한 목소리에 난 준우의 얼굴을 살폈다.
 
준우는 멍하니 하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다물지 못 하고 있었다.
 
난 그런 준우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왼쪽으로 돌렸다.
 
 
"뭐..뭐야 저게?!!"
 
 
그곳엔 웬 커다란 토까 인형이 서 있었다. 아니, 건물보다 더 큰 토끼 인형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경을 끼고 체크무늬 옷을 걸친 채 손엔 시계를 들고 있는 하얀 토끼, 그것은 완전한 동화의 산물이었다. 
 

〔 꺄아아악 〕
 
이어진 현이의 비명으로 하늘을 바라본 사람들이 뒤늦게 인형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뭐야 저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으아아앙 엄마~"
 
 
여자의 앙칼진 비명소리, 아이들의 울음소리, 남자들의 고함소리, 그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난잡하게 울려 대는 공포의 메아리를 만들어 냈다.
 
메아리는 맞부딪힐수록 더한 두려움을 가져오며 사람들의 이성을 빠르게 마비시켜 갔다.
 
허나, 모든 사람들이 패닉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한 남자가 이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큰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분 진정하십시오!"
 
 
훤칠한 키에 체격까지 좋은 그의 풍채는 영락없는 리더의 실루엣이었다.
 
 
"여러분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요동치던 메아리가 하나둘씩 사라지며 고요해지는 도시엔 곧 그의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일단 조를 나눠 주변을 살펴보고 저 토끼 인형을 조사하러 가봅시다."
 
 
사람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가 리더였다는 듯 아무런 반대 없이 그의 의견을 따랐고, 이어서 5명씩 5개의 조가 만들어졌다.
 
나와 현이와 준우는 리더 아저씨와 그의 부인으로 조를 이루게 되었다.
 
 
"연아, 나 진짜 무서워..."
 
"괜찮아 걱정하지마. 너한텐 아무런 일도 없을 거야."
 
 

난 내 옆의 현이와 주연이를 바라보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의 대부분의 여백은 너무나도 어두웠다.
그와 대조적으로 밝게 빛나는 보름달과 검은 푸른빛의 구름이 어쩐지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내 직관에 의존한 불안한 감이 온몸을 적셔왔다.
 
필연적으로 이것이 좋게 끝날 리는 없다.
 
 
 
 
 
"자, 1조와 2조는 여기에 머무르면서 베이스캠프를 지켜주십쇼. 그리고 나머지 조는 사거리를 따라 각각 동쪽, 북쪽 그리고 서쪽 일대에 다른 사람 또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무언가가 있나 살펴볼 것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곧 세 그룹이 서로에게서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사거리의 서쪽엔 상업지구가 있었고, 북쪽엔 높은 빌딩들, 그리고 동쪽엔 고급진 주택가가 펼쳐져 있었다.

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행렬엔 모두가 어두운 표정을 간직한 채 힘없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할 때쯤 문득 현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연아.. 너는 괜찮아..?"
 
"어, 나? 나야 당연히 괜찮지.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마 현아.. 부탁이야."
 
 
이렇게 말로라도 현이를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나조차도 지금의 상황을 받아드리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풍경이 공포스러웠다.
 
비록 아무도 말하고 있진 않지만 이 주택가는 뭔가 철저히 잘못됐다.
 
 
일단 주변의 풍경을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다.
 
직진으로 뻗쳐진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주택들이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것은 따로 있었다.
 
아까 사거리에서  본 대로라면 우리가 가는 길 정면엔 그 토끼 인형이 보여야 한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터 인형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가장 무서운 점은 그것이 언제부터인지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공허한 하늘과 흐릿한 지평선뿐, 그 이외엔 아무것도 없다.
 
뒤를 돌아봐도 우리가 출발한 사거리의 실루엣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똑같은 검은 공간과 수평선만이 일렁이고 있을 뿐이다.
 
이젠 우리가 앞으로 가는 건지 뒤로 가는 건지도 구분하기가 힘들다.
 
마치 나란 존재가 사라져 가는 기분이다. 그저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
 
 
 
"저..저기 뭔가 있어요!!"
 
 
준우의 다급한 외침에 우린 모두 준우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이..이게 도대체..."

"도대체.. 여긴 뭐하는 곳이야?!"
 
 
그곳엔 아까의 그 거대한 토끼 인형이 변함없이 서 있었다.
 
아니, 그것은 변해 있었다. 살짝 올라간 입고리와 처진 눈매, 그것은 웃고 있었다.
아까의 무표정했던 얼굴과 달리, 저 인형은 분명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우리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아래로 시야를 내리던 우리는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인형의 손엔 커다란 팻말이 들려 있었고 그곳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미로의 승자는 여러분입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아저씨였다.
 
 
"일단 돌아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와야겠어."
 
 
그 말에 우리는 모두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아주머니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우린 이제 여길 나갈 수 있다고요!"


그러자 아저씨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아주머니에게 답했다.

 
"당신이야말로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저기 우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가 그 사람들까지 신경쓸 여유가 어딨어요... 게다가 우리가 갔다 왔을 때 이 인형이 여기 계속 있을 거란 보장도 없고..."
 
"당신 그게 사람이 할 말이야?! 나 혼자라도 갈 거니까 당신은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해."
 
"아니, 여보!!!"
 
 
아저씨는 그대로 아주머니를 무시한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아저씨의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서로 눈을 마주쳤고 그 어색한 분위기에 곧이어 아저씨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아주머니가 우리를 따라 길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사거리에 도착하자 베이스를 지키던 조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어때요? 동쪽엔 뭐라도 있나요?" 
 
"네, 아무래도 저쪽이 길인 것 같아요. 그런데 다른 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요?"
 
"네..."
 
 
그 순간,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사거리의 북쪽에서부터 오는 소리였다.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봤고 그곳에 펼쳐진 모습에 모두 경악했다.

 
"뭐...뭐야.."
 
 
한 남자가 온몸이 시뻘겋게 타고 눈만 부릅뜬 채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엔 극한의 공포감이 서려 있었으며 마치 우리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연신 입을 오물거려 댔다.
 
흡사 좀비 같은 걸음걸이로 우리에게 걸어오던 남자는 이내 다리를 심하게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엎어졌다.
 
허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뭔가 미련이라도 남은 듯 이젠 양손을 이용해 기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그의 그런 처절한 움직임은 얼마 가지 못해 전부 멈춰 버렸다.
 
15명의 사람들의 시선이 고정된 그 산 송장의 모든 움직임이 갑작스레 끊기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끔찍한 비명을 질러 대기 시작했다.

온갖 울음과 비명이 섞인 완벽한 혼란의 도가니였다.
 
허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그 팻말의 내용을 도저히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어느정도 상황이 진정되자 아저씨가 조용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학생.. 이름이 뭐지?"

"주..주연이라고.. 합니다."
 
"그래 주연군, 난 지금 서쪽의 상황을 보러 갈 거야. 아마 한 시간쯤 걸리겠지. 그리고 말인데.. 우리가 봤던 것들은 저 사람들의 안정을 위해서 말하지 않아 줬으면 해. 무슨 말인지 알지?"
 
"예? 아, 네..."
 
"그래.. 그럼 갔다오마."
 
 
그렇게 아저씨가 길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우가 내게 다가왔다.
 
 
"야 괜찮냐..?"
 
"어? 어.. 괜찮아.."
 
 
내가 한 말과는 달리, 내 상태는 도저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까 그 팻말 있잖아..."
 
 
팻말이란 단어에 난 신경질적인 어조로 준우의 말을 끊었다.
 
 
"야, 그 얘긴 하지 말자."
 
 
그러자 준우가 한결 무거워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가 아까의 일에 대해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어. 왜냐면 우린 아무런 사실도 몰랐으니까."
 
 
난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하라고."

 
얼마간의 침묵이 끝나자 준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겠어. 그리고 가서 니 여친 좀 챙겨라. 쟤도 분명 생각이 많을 거다."
 
(맞아! 현이!!)
 
난 준우의 그 말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이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현이는 불안한 표정으로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엇인가를 깊게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 밝고 활기찬 현이에게 어울려 보이지는 않았다.
 
 
"현아, 좀 괜찮아..?"
 
 
그 소리에 현이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더니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연아... 우리 어떡해..."

 
난 현이를 감싸안으며 달래 줬다.
 
 
"괜찮아 현아... 아까 그건 우리의 책임이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아무런 사실도 몰랐을 뿐이야. 그게 다야 현아..."
 
 
난 그저 단순히 현이를 안아줄 뿐 그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나의 무력한 모습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을까, 순간 왼쪽에서 아저씨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는 한 시간 전에 길을 나섰을 때처럼 홀로 도로를 걸어오고 있었다.

난 그런 아저씨의 모습을 보며 걱정 반 두려움 반의 심정으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무도.. 없었나요..?"
 

그러자 아저씨는 고개를 들어 날 한 번 힐끗 보더니 이내 다시 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래... 상업지구엔 사람이 지나간 흔적조차 없더구나..."
 
 
그렇게 답하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불규칙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난 따로 말을 더 시키진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더 마음에 편했기 때문이다.
 
 
 
아저씨가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출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도중에 현이와 연이를 살펴보니 둘은 꽤나 큰 충격에 빠진 것 같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친구로서 저 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그렇긴 하다.
 
하지만 세 명이 정신을 못 차리는 것보단 한 명이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편이 훨씬 낫겠지.
 
나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으면 저 둘도 곧 힘을 낼 거고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용한 도시의 도로엔 십수 명의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다.
 
수많은 저벅거리는 소리들이 모여 이루어진 화음이 썩 듣기 좋지는 않다.
 
그러다 문득 한 남자가 한참을 이어가던 그 지루한 리듬에 지쳐 입을 열기 시작한다.
 
 
"이보시오, 도대체 그 토끼가 어디 있다는 거요?!"
 
 
그 말에 아저씨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분명 이쯤 걸으면 인형이 나타날 텐데..."

"거, 서쪽이 제대로 된 길이었던 거 아니오?!"
 
"아닙니다! 분명 거기엔..."

 
순간, 아주머니가 아저씨의 말을 가로채며 입을 열었다.
 
 
"분명 이 길이었다니까요! 그렇게 못 믿겠으면 그냥 가고 싶은 데로 가시던지."
 
 
나도 아저씨의 편을 들며 젊은 남자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걸어 봐요. 우린 분명히 이 길에서 그 인형을 봤어요."

"아니.. 그래, 알겠어... 그나저나 여기 진짜 빌어먹게 무섭네.."
 

 
오랫동안 걸어서 그런지 마음이 조금은 안정된 듯하였다.
 
현이도 이제 좀 가라앉았는지 내가 미소를 지어주면 따라서 웃어 주고 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아직도 인형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략 시간을 어림해 보면 우린 지금 인형이 보이던 지점에서 약 20분 정도를 더 걸어왔다.
 
하지만 인형은 실루엣도 보이지 않는다.

이 이상한 도시에 어느정도는 적응해 그것이 놀랍진 않지만, 이대로 이 안에 갇혀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상상 따위에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다.
 
어서 빨리 인형이 나타나야 할 텐데...
 

 
"저..저기를 보세요!"
 
 
한순간, 맨앞의 여자가 소리쳤다. 
 

"뭐야? 저 인형.."
 
"저거.. 왜 저러고 있어?"
 

그때처럼 갑자기 나타난 토끼 인형은 전과 달리 크기가 반으로 줄어든 채 하늘에 떠 있었다. 
아니, 그것은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바람에 날리듯 상하좌우로 요동치며 우리에게서 천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주위의 풍경은 어느새 복잡한 시가지로 변해 있었고 수많은 표지판엔 모두 똑같은 글귀가 적혀져 있었다.
 
 
[토끼가 낯선 이방인들을 피해 도망간다. 저 잽싼 토끼를 무슨 수로 따라잡을까.]
 

 
난 그 뒤의 상황을 바로잡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인형을 쫒아 달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엔 내 아내의 모습도 섞여 있었다.
 
난 아내를 따라잡으려 했다.
하지만 난 아내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니, 잡지 않았다.
 
아내는 작은 맨홀 위를 뛰어가고 있었고, 사람들이 미처 읽지 못 한 그 문장이 내 눈엔 아주 선명하게 들어왔기 때문에...
 
 
[동시에 땅밑의 하얀 뿌리들은 지나가는 이방인을 잡아가네.]
 
 
 
한순간, 땅에 있던 모든 맨홀 뚜껑이 날라가며 그 안에서 하얀 팔이 튀어나왔다.

성인 남성 3명 정도의 길이의 팔들은 곧바로 가까운 사람들을 낚아채더니 그대로 맨홀 안으로 사람들을 끌고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방향이 맞지 않아 땅에 머리를 부딪힌 사람들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모든 상황이 일어나는 데에는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고 뒤로 엎어진 채 맨홀에서부터 빠르게 물러섰다.

그렇게 한 시간 같던 몇 초가 지나자 그 팔들이 천천히 다시 올라왔다.


"꺄아아악!!"

"흐어어억!!"


그것들의 손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하얀 도화지 위에 빨간 잉크를 흩뿌려 놓은 듯한 그 참혹한 모습에, 사람들은 그저 자리에 얼어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허나, 피로 얼룩진 팔들은 남아있는 나약한 사냥감들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것들은 단지 손에 뭍은 피를 어떻게든 닦아 내고 싶어 했다.

이내 팔들은 마치 그들에게 끔찍한 오물이라도 뭍은 듯 격렬히 팔을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간 핏방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들에게 무력감을 새겨 줄 뿐이었다.
 
피가 조금 씻겨 나가자, 그 기괴한 살육의 팔들은 곧 자신의 맨홀 뚜껑을 찾아 땅을 더듬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자신의 방패를 찾은 팔들은 그대로 지하에 돌아가며, 그 어두운 공간에서 다시 찾아올 사냥감을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내가 몸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1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고개를 흔드며 천천히 시야를 내리자 앞으로 뻗쳐진 내 팔이 두 눈에 흐릿하게 들어왔다.

그 끝의 손은 다른 손을 잡기 위해 활짝 펼쳐져 있었지만 그곳에 다른 손은 없었다.
희미하게 떨려 대는 그 손은 결코 아내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잠시 멍했던 정신이 돌아오자 내 손에서부터 주변으로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주저앉은 채 하염없이 울어대는 사람들, 도로 곳곳을 넘어 근처 건물에까지 튀어 있는 붉은 액체와 덩어리들...
 
난 아내가 뛰어가던 길을 바라봤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 한 채 떠나간 아내의 자리엔 불꽃처럼 펼쳐진 핏자국만이 남겨져 있었다.
 
순간, 다리에서 힘이 빠지더니 이내 찌릿한 고통이 다리를 타고 가슴까지 올라왔다.
동시에 눈에선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며 입에선 어린애 같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용한 도시엔 남은 이들의 울음소리가 비탄의 하모니를 이루며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뿐이었다.
 

 
나와 현이와 연이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나였다.
 
차츰 시야가 선명해지며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내 앞에서 엎어진 채 흐느끼는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아저씨의 그런 처참한 모습에 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아저씨...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우린 가야 해요.."
 
 
그러자 아저씨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처량하게 말했다.
 
 
"우리 아내... 우리 아내..."

 
입을 뻐끔거리며 아내를 찾는 아저씨의 모습이 참으로 비참해 보였다.
 
 
"죄송해요 아저씨... 하지만 저 괴물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우린 몰라요. 분명 아주머니도 우리가 여기서 똑같이 죽길 원하진 않을 거예요."
 
 
엎드린 채로 계속 울던 아저씨는 그 말을 듣자 서서히 울음을 그치기 시작했다.
 
좌절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던 아저씨는 이내 표정을 굳히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학생 말이 맞아... 우리 아내,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꼭 살려서 내보내야 해.."


아저씨는 이어서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난 그런 아저씨의 모습을 바라보며 현이와 연이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아.. 현아..."
 
"어.. 어?"
 
 
둘의 표정은 극단적으로 경직되어 있었으며 동공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야! 정신들 차려! 여기 계속 있으면 저 괴물이 언제 다시 나올지 모른다고!"
 
 
괴물이라는 말에 둘은 정신을 차린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대답했다.
 
 
"마..맞아! 토끼는.. 토끼는 어디 갔어?"
 
"계속 날아가고 있어. 빨리 쫒아가지 않으면 놓칠 거야."
 
"그..그래 최대한 빨리 여길 나가자.."
 
 
그렇게 말하는 연이의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그런 연이를 그저 옆에서 지켜볼 뿐이었다.
 
 

내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았다.
한순간, 나와 현이 또는 준우가 죽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연아... 너.. 아까 죽을 뻔 했어..."
 
"어..어?"
 
 
현이의 그 말에 방금 전의 상황이 뇌리를 스쳤다.
 
내 옆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가는 현이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은 그 순간, 앞에 있던 아주머니가 사라졌다.
내게 핏분수를 뿜으며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눈앞에 선명한 그 광경이 머릿속을 가득 메어 오고 있는 와중에, 순간 얼굴을 쓰다듬는 여인의 손결이 느껴졌다.
 
 
"연아... 내가 얼굴 닦아줄게.."

 
현이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난 그대로 현이를 쎄게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현이도 곧 내 맘을 안 듯 날 껴안아 주었다.
 
그 순간 동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일한 사람은 현이뿐이었다.
그저 현이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내 잘못이다. 모두 내 잘못이다. 내 아내는 나 때문에 죽었다.
 
난 그 찰나의 순간 아내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잡지 않았다.
고작 그따위 글 한 문장이 무서워서 아내를 죽게 만들었단 말이다.
 
결코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 온몸을 옥죄여 왔다.

생각해보니 난 이 세상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악질이었다. 아니, 인간이라 불릴 자격도 없었다.

난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살인자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일부로 잊혀졌던 그 날의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폭풍우가 치는 밤의 드넓은 곡창지대, 그곳에서 절망적으로 버티는 군인들, 그리고 그들을 지위하는 나.


"김 대위님! 퇴각로가 모두 막혔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지원군이 오기도 전에 모두 몰살당합니다!!"
 
"이 중사, 저기 전방 우측에 있는 마을에 반군이 있나?!!"
 
"예, 하지만 무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좋아 저길 뚫고 여기서 빠져나간다!"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마을로 달려갔고 그곳에 있는 반군들을 처치하며 그 생지옥에서 무사히 벗어났다.
 
무장한 군인들의 수는 적었고 우리 측의 피해는 부상도 없었다.  
 
완벽한 작전이었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 마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민간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다음 날 아침이 지나서였다.
 
 
"이 중사, 절대 민간인에겐 발포하지 않도록 애들한테 전해!"
 
"예, 알겠습니다!!"
 
 
그날 우리가 죽인 반군들이 전부 민간인이었다는 말을 난 믿지 못 했다.
 
칼을 들고 우리에게 달려들던 그 사람들이 한낱 평범한 주민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아이들이 포로가 되어 어쩔 수 없이 반군의 명령을 따르게 된 선량한 아버지 또는 어머니였다.
 
우린 그런 사람들의 머리에, 가슴에, 다리에 총알을 박았다.
 
 
그 뒤로 군인을 그만두고 세계 어디선가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10년이란 세월 동안 봉사를 해왔는데 내 아내조차 살릴 수가 없다니.

참으로 허무했다.
 
아이들한텐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생명을 살리는 아빠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이들이 엄마가 죽었다는 말을 들으면 뭐라고 할까.

왜 엄마는 살리지 못 했냐면서 비난할까? 혼자 살아 돌아온 아빠를 증오할까?

그래, 아마도 그러겠지...
 
어쩌면 그냥 이곳에 갇혀 있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그냥 아무것도 모르겠다.
 
 
 
"아저씨... 저기.."
 
 
순간, 갑자기 들려온 학생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돌아왔다.

이어서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학생을 바라보니 그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그저 날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난 곧바로 시선을 올려 전방을 쳐다봤다.

내 시야가 향한 곳엔 또 다른 표지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
 
고속도로에서나 볼 법한 커다란 크기의 표지판에는 단 두 줄의 문장만이 담겨져 있었다.
 
 
[여왕님이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다리가 없는 것 중에 가장 쌘 것은 무엇일까요?]
 
 
"아저씨, 이게 도대체 뭐..."
 
 
어이가 없었다.

이딴 유치한 장난이나 하는 놈이 여기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미 떠나간 사람들의 목숨을 갖고 장난쳤다는 것이 너무나 분했다.


사실 서쪽의 상업지구엔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그 길의 끝엔 숨이 멎은 다섯 명의 사람들이 다섯 개의 어항에 각기 나뉘어 들어가 있었다.
 
모두 눈을 부릅 뜬 채 기괴한 자세로 물속에 떠 있는 그 광경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난 그저 어떻게든 이 분노를 표출해야만 했다.

 
"야 이 개XX야!! 사람 목숨 가지고 이딴 장난질하니까 좋냐?! 이 미친 싸이코 새끼야!!"
 
 
아저씨의 그런 갑작스런 태도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니까짓 놈이 맘대로 누가 살고 죽을지를 결정하냐?! 이 씨발 새끼야!!"
"아..아저씨..."
 
 
이어지는 짧은 정적 뒤에, 갑자기 표지판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앞뒤가 뒤집어졌다.
 
그렇게 드러난 표지판의 하얀 면엔 방정맞은 문장 한 줄만이 붉게 써져 있을 뿐이었다.
 
 
[땡~ 정답은 뱀입니다~]
 
 
그 뒤엔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아저씨의 욕지거리도, 빌딩을 타는 바람 소리도, 우리들의 심장 박동도 들리지 않았다.
 
그 마이너스의 데시벨은 분명 길진 않았지만 왜인지 우리의 지각은 그것을 선명하게 오랫동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한순간의 침묵이 사라지고 이어지는 첫 소리는 우리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뭐야, 뒤의 도로가 왜?!"
 
 
난 내 눈을 믿지 못 했다.
 
우리가 방금까지 걸어오던 도로가 한순간에 끊어지며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뒤로 가는 길이 막혔어..."

 
그것은 마치 무엇인가가 끌어당기듯 계속해서 회전했고, 이내 똑바로 서며 우리의 뒤에 벽을 만들었다.
 
그 어떤 손상도 없이 하늘의 끝을 향해 펼쳐진 도로의 모습에 우린 모두 정신이 아찔해졌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고 다시 그때처럼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현아, 내 손 꽉 잡아!!"
 
 
난 현이의 손을 잡은 채 준우의 옆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갑자기 양옆에서 스스슥거리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콘크리트가 통째로 갈리는 듯한 그 기괴한 소리에 난 몸만 앞으로 향한 채 고개를 돌려 왼쪽을 바라봤다.
 
 
"흐어어..흐악!!!"
 

난 그 이상 옆을 더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십수 채의 고층 건물들이 뱀처럼 흐물거리며 우리를 노려다 보는 모습을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괴이한 콘크리트의 뱀들은 이윽고 자신의 머리를 땅에 박아 대기 시작했다.

자신들 앞을 지나가는 먹이들을 겨냥하며 우리를 사냥하기 시작한 것이다.
 
 
"흐어어악!!"
 
 〔 콰광 〕
 
순간, 우리들 앞으로 한 놈의 머리가 떨어졌다.
 
놈은 마치 그곳에 있는 사람을 땅속으로 파묻으려는 듯 연신 터져 죽은 시신을 공격해 댔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에 한 손으로 귀를 막으며 우린 그 옆을 지나서 계속 달렸다.
 
발바닥 밑으로 물컹한 것들이 밟히며 질척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작게 맴돌았다.
 
난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지만 무시했다.
 
(지금 멈추면 우리가 저렇게 될 거야...)

난 우리 세 사람을 생각하며 그 고어한 감각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썼다.

그러면서 동시에 다리가 풀리지 않도록 허벅지와 종아리에 의식적으로 힘을 주며 계속 달렸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도 울음소리도 없이 굉음만이 울려 퍼지는 도로엔 어느새 우리들만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그런 걸 파악할 시간도 없었다.
우린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여유 따위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가슴에 숨이 한계로 차올랐을 때쯤 난 연이에게 멈춰 달라고 말했다.
 
 
"여..연아 잠깐만..."
 
"왜..왜 그래, 현아?"
 
"스...숨 좀.."
 
"어? 아..알겠어... 좀만 쉬자."
 
 
내가 힘들어하며 자리에 주저앉자 날 향한 연이의 걱정스런 시선이 느껴졌다.
 
 
"난 괜찮아. 그냥 조금 숨이 차서 그래."
 
 
그렇게 말하며 문득 팔을 내려다보니 연이가 잡고 있던 오른팔이 빨개진 것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내가 너무 쎄게 잡았지..?"
 
"아니야, 괜찮아. 고마워."
 
 
내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는지 연이도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준우야, 넌 안 힘들어?"
 
"어, 난 체력이 좋아서."
 
"그렇구나.."
 
 
준우는 그대로 서서 마치 잘 훈련된 군인처럼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너 진짜로 괜찮아..?"
 
 
그러자 준우가 조금은 풀린 표정으로 내게 답했다.
 
 
"난 걱정 안 해도 돼. 그냥 이 도시는 이상하고 위험하니까 주위를 살피고 있는 거야."
 
"아..알겠어."
 
 
 
하늘엔 이제 흘러가는 구름도 없이 그저 선명한 보름달만이 외롭게 떠 있었다.
 
그 둥근 은빛의 구 바로 아래엔 하늘에 닿을 듯 말 듯 높이 펼쳐진 첨탑이 지루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허나, 검은 하늘에 가려진 그 흐릿한 창의 끝엔 사람들이 그토록 쫒던 이 도시의 열쇠가 걸려 있다.
 
그곳이 바로 사람들의, 아니 우리들의 목표였다.
 
 
 
 
 
고작 세 명의 사람이 걷기엔 이 도시는 너무나 크고, 또 너무나 조용했다.
 
마치 거인의 세계에 온 듯한 거대한 건물들은 여타 그 어느 대도시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였지만, 왜인지 도시는 아무런 소리도 내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그 기분 나쁜 고요함 속에서도 계속해서 걸었고 마침내 첨탑 앞의 커다란 원형 공원에까지 도달했다.
 
난 그곳 중앙에 서 있는 한 여인의 조각상을 바라보다 문득 연이에게 말을 걸었다.
 
 
"연아, 아저씨는 죽었겠지..?"
 
"현아, 그런 것들은 이제 기억에서 잊어버려. 이곳엔 우리들만 있었던 거야, 그렇게 받아드려야만 해."
 
 
그렇게 말하는 연이의 표정은 지나칠 정도로 결연했다.
 
 
"어..."
 
 
준우는 우리 둘의 대화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준우가 원래 이렇게 과묵하진 않았는데..)
 
연이와 준우는 변해가고 있었다. 이 도시와 그 상황들에 적응하며 감정을 잃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 둘은 내가 알던 그들로부터 빠르게 멀어져 갔다.
이젠 마치 내가 전혀 알지 못 하는 그저 지나가는 남처럼 느껴졌다.
 
허나, 가장 두려운 존재는 내 안에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정체 모를 나 자신이 난 너무나 두려웠다.
 
우리가 사거리에서 동쪽 길로 가서, 팔들이 내가 아닌 내 옆의 사람들을 잡아가서, 뱀들이 아저씨와 나머지 사람들만 파묻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미치도록 두려웠다.

그 순간, 숨이 탁 막히는 듯한 느낌에 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혀..현아, 왜 그래? 어디 아파..?"
 
 
난 이성을 잃은 채 그저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얘들아, 지금 우리가 우리가 맞을까..?"
 
 
그 말에 연이가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현아,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는 우리를 잃었어.. 우리는 예전의 자신이 아니야."
 
"그..그게..."
 
 
연이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 했다. 준우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난 그런 둘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근원 모를 망언들을 쏟아 냈다.
 
 
"우리는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비록 우리의 몸은 이곳을 나가도 우리의 정신은 이곳에 갇혀 있을 뿐이야.."
 
 
그 뒤에 이어지는 말에 우리 셋은 한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우리는 이미.. 죽었어..."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웅장하면서도 구슬픈 그 멜로디는 우리를 알 수 없는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뭐..뭐야..."
 
 
노래가 시작되고 몇 초가 지나자, 갑자기 원형 공원의 가장 바깥쪽에서 신호등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신호등들이 빨간불과 파란불이 모두 켜진 채 땅속에서 솟아났다.
 
신호등이 모두 나타나자 이번엔 조각상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아주 기분 나쁜 여인의 웃음소리였다.
 
 
"조..조각상이 움직이고 있어.."
 
 
순간, 공원 중앙에 있던 조각상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우리를 향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그것의 입술이 빠르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갈라지는 고음의 목소리로 외쳐 대기 시작했다.


[감히 여왕의 정원에 들어와 이 땅의 정조를 더럽힌 저것을 찢어발겨라.]
 
 
그 순간, 모든 신호등에서 한 쌍의 사람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호등 속의 하얀 실루엣들이 마치 TV에서 기어나오는 링처럼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수백 마리의 그것들은 마치 군인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천천히 우리에게 다가왔다.


"현아, 내 손 잡아!!"
 
 
난 다시 현이의 손을 잡고 빠져나갈 출구를 찾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뭐야, 이거.. 어디로 가야 돼?!"
 
 
출구는 없었다. 저 괴물들은 원형의 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으며 우린 그저 그 원 안의 중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뒤에 있는 조각상은 어느새 음을 더욱 높여 고막을 찢는 듯한 고음으로 웃어 대기 시작했다.
 
 
"여..연아, 우리 이제 어떡해..."
 
"걱정 마 얘들아, 뭔가 방법이..방법이..."
 
(씨발!!)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는 하늘을 날 수도, 빽빽히 들어찬 저것들을 뚫고 나갈 수도 없었다.
 
우리가 당황하면 할수록 놈들은 그에 맞춰 가속이라도 하는 듯 점점 더 속도를 높이며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연아!! 준우야!!"
 
"여긴 그냥 막혔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씨발!!!"
 
입에선 연신 욕밖에 나오지 않았다. 허나, 그러는 와중에도 그것들은 계속해서 다가왔다.


"연아!!"
 
"틀렸어.. 연아, 현아... 이게 끝이야."
 
 
이젠 1m도 채 남지 않았다.

이렇게 끝난다. 우리 셋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저 허무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꺄아아악!!"
 
"흐어아악!!"
 
 
난 그저 현이를 내 품에 감싸고 한 손으론 준우의 팔을 잡은 채 눈을 감았다.
 
내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소한 이 둘과는 함께 하고 싶었다.
 
그렇게 놈들은 우리를 향해 손을 뻗쳤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런 순간이었다.
 
마치 자동차가 들이박는 듯한 엄청난 힘에 그대로 나가떨어지며 현이와 준우를 놓쳐 버린 것이다.

나와 준우는 동시에 땅바닥에 엎어지며 서로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쳐다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현이의 목소리가 들리는 뒤쪽을 바라봤다.


"허어어어억...'
 
"아아아..안돼, 연아!! 준우야!!"
 
 
놈들은 현이의 머리, 팔, 다리를 잡은 채 더 먼 곳으로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연아! 살려줘 제발, 연아!!!"
 
 
현이는 끌려갈수록 더 큰 소리로 외쳐 댔지만 난 현이를 쫒아갈 수가 없었다.


"현아!! 현아!!!"
 
"연아, 제발..."
 
 
마치 병풍처럼 서서 가로막는 놈들의 뒤로 들리는 현이의 목소리는 숨막힐 정도로 다급해져 있었다.

"아..안돼, 안돼!!!"
 
 
그것이 내가 들은 현이의 마지막 말이었다.
 
끔찍한 소리와 함께 하늘까지 튀어오른 핏방울들을 뒤로 현이의 목소리는 멈추어 버렸다.
 
난 그 이상 눈도 감지 못 하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그저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현이의 죽음과 동시에 조용해진 공원은 이내 깨끗해졌다.

하얀 괴물들은 파도가 빠지듯 사라지고 조각상은 어디로 간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현이가 끌려간 자리엔 꽃과 풀들을 흠뻑 적신 검붉은 피만이 생생하게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도저히 사람이었다곤 할 수 없는 그 액체만 남은 자리는 당연히 말이 없었다.
 
그런 현이를 바라보고 있는 우리도 결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우린 말없이 계단을 올랐다.
 
눈에선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으며 입에선 울음 비슷한 것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6년이란 시간 동안 함께 하며 추억을 쌓았던 친구, 연인을 잃는다는 것은 우리의 지각 능력을 무력화시킬 만큼 잔인한 일이었다.
 
머릿속은 완전한 공허 그 자체였다.
 
그렇게 다리의 고통도 느끼지 못 한 채 올라온 옥상엔 토끼 인형이 우리를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처음의 거대한 크기는 온데간데없고 그것은 이제 한 손에 잡힐 수 있을 만큼 작아져 있었다.
 
 
"흐으..흐어억..."
 
 
그 인형의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제서야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 모든 사람들, 그리고 현이의 죽음 뒤에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이제서야 터져 나온 것이다. 
 
내 옆에 서 있는 벗은 말이 없었다.
 
비록 그의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그 역시도 분명 눈물을 보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흐릿하게 번진 시야 저 멀리의 인형을 향해 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하지마.."
 
(뭐? 내가 잘못 들었나..?)

"뭐..뭐라고...?"
 
"하지마라고."
 
 
차갑고 결연한 그의 목소리에 난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야, 그게 뭔 소리야.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러니까 만지지 말라고. 여기서 나가야 하는 건 나야."
 
 
엄습해 오는 불안감에 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주위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기 시작했다.
 
 
"난 알 수 있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야. 미안하지만 친구야, 난 여기에 갇혀 있고 싶지 않아..."

서서히히 내게 다가오는 그를 경계하며 난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경고하는데 이 인형 건들이면 아무리 너라도 가만 안 둬!"
 
 
그는 나의 말을 계속 무시한 채 내게 다가오는 속도를 점점 높여 왔다.
 

"야, 이 새끼야! 오지 말라고!!!"
 
"미안하다..."
 
 
 
두 명의 남자가 차디찬 건물의 꼭대기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둘은 마치 중앙에 있는 인형이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검투사의 검이라도 되는 듯, 그것을 차지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참 비참하고도 우스운 광경이었다.
 
둘이 6년지기 친구 사이라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세히 보니 둘의 모습은 상당히 비슷하다. 입고 있는 옷도, 체격도, 그리고 얼굴까지.
 
누가 누구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참 어려울 정도이다.
 
그때, 갑자기 한 놈이 다른 놈을 순식간에 압도했다.
 
그는 거세게 저항하는 상대를 보기 좋게 제압하며 그를 바깥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엎어진 사내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그 위의 사내도 그를 필사적으로 짓눌렀다.
 
곧 끝에 도달하자, 머리맡에 보이는 풍경에 절망한 사내가 힘겹게 외쳐 댔다.
 
 
"제발 살려줘, 난 죽고 싶지 않아..제발..."
 
 
허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그를 바깥으로 밀어냈다.
 
길게 늘어지는 비명소리와 숨이 찬 호흡이 어우러진 괴이한 하모니가 어두운 창공에 울려 퍼졌다.
 
아마도 그 멜로디가 이 도시에서 연주된 마지막 노래였으리라.
 
 
 
 
 
난 변했다. 살기 위해 평범한 사람에서 살인자로 변해 버렸다.
 
어디서부터가 잘못이었을까.
 
맨홀 주위에 번진 핏자국들을 봤을 때부터?
아저씨와 사람들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부터?
아니면... 현이가 찢겨지는 걸 본 뒤로부터?
 
아니, 잘 모르겠다.
 
어쩌면 이것이 원래의 나, 원래의 '앨리스'였을지도...
 
 
 
 
 
하얀 방엔 두 명의 남자만이 앉아 있었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와 환자복을 걸친 남자.
 
좀 더 세련된 남자의 책상엔 의학 관련 서적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중 유난히 눈에 띄는 파란 파일은 이곳에선 흔한 정신질환자들의 프로필이었다.
 
그 명부에 써진 글들에 따르면 남자의 이름은 앨리스, 다중인격자였다.
 
그 순간, 의사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대기 시작했다.
 
그는 시끄럽게 진동하는 핸드폰이 못마땅한지 주머니에 손을 거칠게 넣으며 알람을 꺼 버렸다.
 
곧이어 그는 자신 앞의 남자를 한 번 힐끗 바라보더니 이내 서서히 눈을 뜨는 환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이 진짜 앨리스입니까?"
 
 
그로부터 이어진 침묵, 그 한참의 적막 뒤에 한순간 그가 허탈한 듯 웃으며 답했다.
 
 
"예.. 제가 진짜 앨리스입니다..."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입가엔 만족스런 미소가 희미하게 드러나 있을 뿐이었다.
 
 
 
 
 
-끝-
 
 
출처 그림 출처 https://ko.wikisource.org/wiki/%EC%9D%B4%EC%83%81%ED%95%9C_%EB%82%98%EB%9D%BC%EC%9D%98_%EC%95%A8%EB%A6%AC%EC%8A%A4/%EC%A0%9C1%EC%9E%A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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