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부터 포스팅하는 내용은 '국방부 과거사위 12.12 5.17. 5.18 사건 보고서'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우리 위원회는 자료들을 검토하여 다음의 몇 가지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첫째,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결정되기 전부터 군대의 동원이 구체적으로 계획됐다. 육군본부, 보안사, 중정 등은 경쟁적으로 ‘사회혼란’과 ‘국가위기’가 초래되기 전에 군이 나서야 한다는 인식 아래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계획을 수립했다.
이러한 계획은 계엄사의 긴급계엄위원회에서 토의됐고, 또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결정되기 전부터 ‘충정작전’에 동원될 군대의 이동과 배치가 이루졌다. 보안사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결정되기 전부터 ‘정치활동 규제, 언론통제, 예비검속’ 등을 계획하고 실행했다. 이러한 계획 아래 충정부대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시행되기 전부터 공수부대의 충정훈련을 계속했다.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한 5. 17. 전군주요지휘관 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조치를 골자로 하는 신군부의 결의안이 통과됐다.
둘째, 당시 보안사는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에 반대한 광주지역 학생 시위가 발생한 직후부터 광주지역의 상황을 파악했다. 과격진압의 사례 및 5. 21. 전남도청 앞 발포가 있기 전에 이루어졌던 발포, 5. 20. 3공수여단의 실탄분배와 발포 등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이것은 다양한 계통의 정보를 보고받았던 계엄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계엄사는 군뿐 아니라 경찰, 검찰, 행정조직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보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완화시키고 시민들의 희생을 줄이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셋째, 군의 지휘계통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상부의 지시가 하부에 제대로 전달되거나 지켜지지 않았고, 하급 부대의 작전활동이 상부에 정확하게 보고되지도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5. 20. 밤에 내려진 2군사령부의 발포금지와 실탄통제 지시였다. 이 지시가 내려간 뒤에도 11공수여단은 실탄을 분배했다. 오히려 5. 21. 13:00 이후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었다. 우리 위원회는 발포와 관련한 직접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위권 발동을 비롯한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군 상층부의 논의구조 및 이 논의에서 자위권 발동문제가 토의됐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자료를 발굴했다.
넷째, 사후 수습과정에서 시신처리와 관련한 문서를 발굴했다. 당시 광주지검에서 작성한 동향 보고가 그것이다. 광주지검에서는 검시 현장에 검사들을 파견했다. 전남도청 앞 상무관뿐 아니라 국군 광주통합병원 등에 검사를 파견했다. 또 지원동과 광주교도소 등지에서와 같이 공수부대원들이 민간인들을 죽이고 가매장했던 지역의 시신들을 수습하는 과정에도 검사들이 참여했다. 이 자료를 통해 외곽봉쇄 이후 광주교도소와 지원동 등지에서 가매장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다섯째, 입수 자료들 중에는 ;부상자 명단;, ;훈방자 명단;, ;부상자들 중 조사자 명단;,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 등의 자료가 있다(부록 참조). 이 자료들은 대개 전남합수단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 ;훈방자 명단;이나 ;부상자들 중 조사자 명단;은 최초 발굴된 것이다. ;사망자 검시결과 보고;는 사망자들의 사망 장소 및 사망 당시의 정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이렇듯 새롭게 발굴된 광범위한 자료의 검토와 면담조사를 진행한 결과, 우리 위원회는 ‘12;12’, ‘5;17’, ‘5;18’에 대해 다음과 같은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고자 한다.
‘12;12’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자신들을 견제하려 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하극상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군 지휘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자신들에 반대했던 인사들을 구속하거나 강제 전역시켰으며,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세력은 인사법 등을 무시하고 진급을 했으며, 이 사건이 전시나 국가비상사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2;12’에 공이 있는 인사들에게는 상훈법을 무시하고 법에 근거하지 않는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군 지휘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 5. 초순경부터 사회불안을 이유로 내세우며 군의 정치개입을 계획했다. 특히 중앙정보부는 4단계 학원대책방향을 마련하여 5. 7. 이전 학원시위가 불순분자들에 의한 반정부 시위로 전환되고 있다며 5. 17. 특단의 대책을 수립하고자 했으며, 신군부세력도 이와 유사한 대책을 마련하여 5. 17. 군의 투입을 시사했다.
신군부세력은 이러한 계획을 바탕으로 5월 초순부터 11공수여단 등 군대를 이동시켰다. 신군부와 중정은 남북 대치상황을 이용하여, 북한군의 특별한 움직임이나 남침 징후에 관한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첩보를 바탕으로, 북한의 남침이 예상된다면 심야 국무회의까지 개최했다.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이 첩보들이 신빙성이 없으며 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신군부는 이 첩보를 비상계엄 확대조치 단행에 이용했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는 계엄확대 조치를 예상하며 군대 이동을 단행했다. 보안사도 ‘시국수습안’을 작성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예비검속자 명단을 작성했다. 5. 17.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는 ‘국가위기’라는 명분 아래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통한 군의 정치개입이 결정됐다. 주영복 국방부장관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 등은 국무회의 소집을 요구했고, 이날 21:00경 열린 국무회의에서는 찬반 토론 없이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결정됐다.
5. 18.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실시되자 광주에서는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군 지휘부는 시위 현장에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런데, 원래 공수부대는 시위진압에 동원해서는 안 될 특수부대였다. 1980.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야전교범인 ;특전부대작전;에서는, 특전부대의 주 임무를 “적 지역 내에서 유격전, 도피 및 탈출, 전복 활동과 야전군 작전을 지원하는 특수임무를 수행함으로써 정규전을 지원하여 우군 지배 지역 내에서는 제한된 대비정규전 임무를 수행한다”고 했다. ‘5;18’ 진압이 끝난 뒤 7공수여단은 “특전부대의 작전 투입은 신중한 고려 후 결정 요망”이라고 하여 공수부대의 시위진압 동원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표출했다.
하지만, 특전부대는 국내의 반정부 시위를 진압하는 치안유지 활동에 동원됐다. 이것은 특전부대가 한미연합사의 통제를 받지 않는 가운데 동원 가능한 중앙기동대였기 때문이다. 5. 18 직후 만들어진 ;특전부대사;에는 평시의 임무를 ‘육군 중앙기동예비로서 명령에 따라 대침투작전을 실시하고, 또 명령에 따라 충정작전을 실시한다’고 규정했다. 특전사에서도 “사령부는 육군의 중앙기동예비로써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하면서 최근 국내의 정세변화에 따라 예상되는 소요사태에 대비 의명, 특전여단 충정임무 수행 준비”라고 하여 시위진압을 임무의 한 가지로 규정했다.
공수부대를 국내 시위진압에 동원한 것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였다.
1964. 6. 3. 전국에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6. 3.부터 7. 29.까지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이 때 1공수여단 병력이 동원됐다. 1972. 10. 17.부터 12. 13.까지 유신헌법 선포를 위한 목적에서 전국에 계엄이 선포됐다. 1공수여단(고려대, 서울상대), 3공수여단(경희대, 외국어대, 한양대, 서울사대), 5공수여단(연세대, 서강대, 홍익대) 등 3개 공수여단이 계엄군으로 서울 시내 각 학교에 배치됐다.
1979. 10. 18. 00:01.부로 부산 일원에 선포된 계엄령에는 총 6,615명의 군 병력 중 특전사 2개 여단(1, 5여단) 2,604명의 병력이 시위진압에 동원됐다. 1980. ‘5. 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실행되기 전에도 공수부대의 동원을 대비했다. 4. 19. 사북사건이 발생하자 강원도지사의 요청으로 정부에서는 군 투입을 준비했고, 당시 훈련 중이던 11공수여단은 원주의 육군 제1하사관학교에서 출동 대기했다. 11공수여단은 4. 22.부터 4. 29.까지 8일간 부대로 복귀하지 않은 채 대기했다. 이처럼 군부대가 정치적 목적으로 동원된 것은 불행한 전통이었다.
광주 시내 시위진압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과격진압을 전개했다.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과격하게 진압한 배경은 상부의 강경진압 지시가 있었던 데다 광주 시민들의 시위가 ‘불순분자’의 소행이라는 왜곡된 인식이 전달됐기 때문이다.
공수부대원들은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고, 연행자들의 옷을 벗긴 채 기합을 주거나, 일부는 대검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위는 광주 시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시위는 시민들의 저항으로 확대됐다. 시민들의 저항에 직면해 공수부대원들은 5. 21. 13:00.경 집단 발포했다. 공수부대의 집단발포가 있자 일부 광주 시민들은 인근 지역의 지서나 직장 예비군 무기고의 총기와 실탄으로 무장하고 계엄군에 저항했다. 시민들의 적극적인 저항에 직면한 군 지휘부는 일시 계엄군을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시켰다.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와 인근 지역을 잇는 주요 지점에 배치됐다. 이들에게 내려진 명령은 ‘발포하는 한이 있어도 차량이나 사람의 통행을 봉쇄하라’는 것이었다. 자위권 발동은 계엄군의 발포로 이어졌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광주 외곽지역에서는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다.
군 지휘부는 5. 23.경부터 최종 진압작전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군 지휘부는 사실을 왜곡하고, 시민들의 수습방안을 거부하며, 미국의 협조를 기다리며 작전에 대비했다. 5. 27. 새벽 공수부대의 특공조가 주요 거점을 점령한 뒤 진압작전은 끝이 났다.
결론적으로 ‘12. 12 군사반란’은 일부 정치군인들이 군 지휘권을 장악하기 위해 일으킨 ‘하극상 쿠데타’였고, 이 과정에서 군 인사권과 서훈제도를 왜곡시켰다. 또 이를 계기로 신군부 세력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신군부 세력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통해 정권장악 의도를 구체화했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5. 30.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상임위원장 : 전두환)를 구성하여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군을 사조직처럼 이용했다. 12;12 당시 상관을 체포하는 작전에 병사들을 동원하면서 충성을 맹세케 했고, 병사들은 작전 내용도 모른 채 사지로 동원되어 사상당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러 내려온 공수부대원들은 특수훈련을 받은 병력이었다. 이들은 출동 전에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서 불순분자의 소요를 진압하는 것이라고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과격한 진압방식을 무차별적으로 적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