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 원정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파는 대단했습니다, 비단 고려의 무너져가는 사회 기반과 나날히 급속하게 진행되어가는 재정 악화 뿐만 아니라 일본 역시 심각하게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지껏 외국의 침략을 받아본 경험이 단 한차례도 없었던 것이 사실 운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는 앞으로 또다시 닥쳐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사전에 제거하기 위하여 여몽연합군의 전초기지나 다름없었던 고려를 선제 타격하는 이른바 이국출격異國出擊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릅니다.
1276년 3월 가마쿠라 막부는 봉서행정 쇼니 스케츠케에게 계획의 총괄을 맡기는 한편 안예국 지금의 히로시마 현의 다케다 노부토키에게 관직이나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뱃사공과 노를 젓는 이들을 징용하여 쇼니 다카스케에게 연락이 오는 즉시 보내라고 하는 등 대규모 원정에 필요한 인력을 우선적으로 큐슈에서 모으고, 부족한 인력은 주고쿠와 시고쿠에서 보충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첫째로 해외의 사정에 대하여 아는게 없습니다. 당장 1271년 삼별초가 보내온 지원 요청 조차 이해하지 못하였을 정도로 외교적으로는 문맹에 가까웠습니다.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 묘사되는 일본측 군선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 묘사되는 여몽연합군측 군선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에서 묘사하는 양측의 사이즈 비교 (몽골군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사진인것은 눈의 착각...은 아니겠지요.)
두번째로 당시의 일본은 철저하게 농업 중심국가였습니다. 농업 이외의 산업들은 소외되고 또 천하게 여겨졌으며 바다에서 일한다는 말은 곧 해적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일본의 해군이나 군선이라는 것은 없다고 봐도 좋은 형편으로 약탈 수준이라면 모를까 대규모 군사 원정을 뒷받침할 여력이 전무한 형편이었습니다.
사실 어떻게든 고려땅에 상륙에 성공한다 할지라도 1차 원정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가망이 없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말이지요,
이러한 사정으로 가마쿠라 막부는 원정을 중단하고 대신에 하카타 만에 대규모 방벽을 쌓기로 결정합니다.
방벽의 길이는 약 20km로 사실상 해안선을 완전히 틀어막아놓은 형태이며 높이는 2m로 상시적으로 1백여명의 무사들이 주둔하는 것 외에도 유사시에는 규슈 내의 군사력을 집결시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둘수 있는 말 그대로 마지노선을 쌓는 것이었지요,
방벽은 나름 효과를 거두기는 합니다,
2차원정 당시 다카시마를 들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여몽 연합군은 동네북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바로 하카타로 향하지만 거기서 철저하게 벙커링 심시티 방비를 하고 있던 일본군을 보고 돌격하는 대신 다른 곳 부터 조지기로 마음을 먹게 되니 말이지요,
이 외에도 1차 원정 당시 전소된 팔번궁을 비릇하여 각지의 신사들이 증축되고 재건되는가 하면 종교행사가 급증했습니다만 사실상 큰 사건은 위의 두개라고 보시면 될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