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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단 하나 기억나는 것은
피어오르는 불꽃들과 번쩍이는 빛조각들 뿐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었다.
몇명이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것은 족쇄가 되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고향에는 1년만이다.
군데군데 부서진 아스팔트 위엔 아직도 고철덩어리들이 남아있었다.
심지어, 그 속에는 여전히 불타죽은 누군가가 앉아있기도 했다.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저 불타버리고 짓물린 눈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황급히 도망갔다.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 도착도 안했는데 말이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혼잣말이라.
그러고보니 그 일이 있고난 뒤 난 혼잣말이 늘었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 같이 그렇게.
잠깐 그 아는 사람 하나 없던 벙커가 떠올랐다.
아이의 울음 소리.
소리가 새나간다고 소리치는 아저씨.
음식을 나누자고 말하던 남자와
음식을 숨기던 아줌마.
얼굴 한 쪽이 붉게 찢어진 꼬마와
그 모습에 한쪽 팔도 없이 오열하던 아가씨.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고개를 휙 저으며 다시 길을 걷는다.
고철들과 시체들, 포탄 찌꺼기와 불탄 나무들만이 있는 길을.
그 날.
불꽃이 피어오른 날.
나는 공교롭게도 고향에 있지 않았다.
일하러 부산에 간 사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그 때, 고민을 하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의, 친구들과 함께 해야할까.
아니면 비교적 안전한 이 곳에서 도피해야할까.
나는 후자를 택했고
평생의 후회가 되었다.
전쟁은 이겼다.
피해는 크지 않았다.
20만명 정도가 희생되었다고 했다.
주로 피해를 입은 지역에는 전선과 가깝던 우리 동네도 포함되었다.
피해는 별로 없다며 승전보를 울리며 나라를 찬양하는 뉴스는 잡음일 뿐이었다.
전쟁에 이기고 웃는 사람들은 없었다.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뿐.
잠깐 쉴까.
버스 정류장이었던 것에 걸터 앉는다.
복구가 진행중이라 해도 아직 멀고 먼 일이다.
당연히 버스같은 것은 다니지 않는다.
조금 숨을 돌리며 물 한모금을 마셨다.
눈 앞에서 파삭 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칼을 빼들었다.
작은 강아지가 쏜살같이 달려갔다.
후.
한숨을 쉬며 칼을 집어 넣는다.
전쟁은 이겼지만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살인이든 강도짓이건 끊이지 않는다.
게다가 이쪽 지대는 아직 복구중인 무법지대이다.
평화는 언제오는걸까.
아니 평화란 정말 있을 수 있는 걸까.
얽히고 설킨 세상사에서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또 누군가는 우리들 처럼 희생되는 걸까.
물을 한모금 마신다.
그런걸 생각해 봤자야.
이미 모든 건 끝났는걸.
중얼거리다 이내 일어난다.
부서진 차들과 죽은 무언가.
폭탄 파편들을 지나서 끊어진 다리를 지나서
드디어 꺾인 표지판이 보였다.
고향까지 300m.
나는 지도를 꺼낸다.
우리 동네에도 분명 벙커가 있었을 것이다.
벙커까진 살짝 거리가 있지만
그래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저벅저벅 걷는다.
봄바람은 차가웠고
어디에선가 철가루의 냄새가 났다.
지독한 냄새가 흘러퍼진다.
저기 저 너머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가 보였다.
물론 산산조각이 난 학교가.
부서진 육교를 건너가 학교에 들렸다.
모든 것이 부서져 있었다.
교실이었던 곳은 무너져내린 돌덩이들만이 가득했고
강당이었던 곳은 검붉은 무언가가 흘러내린채 굳어있었다.
회색 벽이 붉게 물들정도로 수많은 무언가는 이곳에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말자.
몇개의 폭탄을 맞은 것일까.
저기에 벽 하나만 덩그러니 서있을 뿐 모든 것이 부서진 학교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벽으로 걸어갔다.
조금 남은 벽에는 하얀 새가 그려져 있었다.
그건 옛날에 우리가 그렸던 새였다.
평화의 상징인 그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저 너머에 우리 집이었던 곳이 있었다.
지금은 단순히 돌덩이들일 뿐이지만.
누군가가 파낸 흔적이 있었다.
옆집사람일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 끝엔 손 하나가 있었다.
반짝이는 반지가 약지에 끼워진 손 하나만이 덩그러니.
그것 뿐이었다.
우리집 부근은 아무리 퍼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옛날에 내가 그렸던 그림쪼가리나 책들 정도만 나올 뿐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벙커로 뛰어갔다.
벙커는 있었다.
무언가 잔해가 쌓여있었지만
그래도 사람 하나가 드나들 공간이 있었다.
다들 이쪽으로 탈출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떠났으면 좋았다.
나는 그 벙커에 들어갔다.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던 그 곳에 들어가고 말았다.
희미하게 풍기는 철가루의 냄새 때문이었는지.
돌무더기 사이로 삐죽 보이는 저 손가락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엔 모두가 있었고
모두가 없었다.
검붉은 것들에 친구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누나도, 동생도 있었다.
그 누구도 평온한 모습이 아니었다.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는 그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초점 없는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곳 없는 손은 나를 향해 뻗고 있었다.
크게 벌린 입은 나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한사람이 오고 갈 만한 구멍은 막지 않았다.
누군가를 부르는 개미지옥같은 그 구멍을
내가 막을 자격은 없다.
조금 떨어진 동산에 올라갔다.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지고 모든 것이 부서진 이 동네에서
단 하나 커다란 나무가 남아있었다.
이상한 나무가 남아있었다.
수십 명의 열매들이 맺힌 나무가 있었다.
스윽 훑어보았다.
그 모두가 평온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할 곳에 돌아 갔다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문득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별 것은 아니지만
저 왼손 약지에 반짝이는 것은 분명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 또한 평온한 모습이다.
고개를 돌렸다.
줄 하나가 내려와 있었다.
나도 저렇게 평온해질 수 있을까.
나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차가운 줄이 목에 닿았다.
순간 고요해졌다.
텅빈 눈들도.
찢어지는 비명도.
부여잡는 손들도.
나는 이 동네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편안하다고 느꼈다.
평화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이곳은 평화롭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야 돌아가는 것이다.
이제야.
그 날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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