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원이 이끄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일본 도쿄 시내에서 김대중을 납치하여 오사카에서 중정 공작선 용금호에 실어 서울로 보내버렸다. 그렇다면 김대중 ‘납치’ 사건은 성공한 공작일까? 사건의 피해자인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직전인 1998년 2월19일 동아일보가 특종 보도한 ‘KT공작요원 실태조사보고’를 보면, 이 사건에 깊게 관련된 인물이 모두 다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현직에 있었지만, 유독 윤진원만은 옷을 벗었고 명예회복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경찰의 추적을 완벽하게 따돌리고 김대중을 서울로 실어 보낸 윤진원은 왜 물을 먹어야 했던 것일까?
토막살인 할 충분한 시간은 있었으나
원래 윤진원은 도쿄에서 김대중을 납치하여 오사카로 이동하면서 시가현 오쓰(大津)에서 오사카 총영사관에 나와 있는 중정 요원들에게 김대중을 인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들과 길이 엇갈려 버렸다. 오사카 요원들에게 김대중을 넘기는 데 실패한 윤진원은 할 수 없이 오사카의 중정 요원들이 운영하는 안가로 김대중을 데려갔다. 윤진원은 이 무렵 마음속으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처음 그는 김대중을 오사카 요원들에게 넘기고 오사카항에 대기중인 중정 공작선 용금호를 타고 일본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오사카 요원들이 나타나지 않아 자신이 김대중을 데리고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불안해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처리해야 한다면 토막 살인을 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오사카 요원들에게 넘겨 그들이 김대중을 처리한다면 자신은 ‘납치’만 한 것으로 먼 훗날에라도 제한적인 책임만 져도 되지만, 자기 손으로 김대중을 살해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윤진원은 김대중을 자신이 일본을 빠져나올 때 쓰려고 대기시켜 놓았던 용금호에 실어 보내고 자신은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 용금호에 실린 김대중이 한국 영해로 들어가는 순간 김대중에 대한 관리책임은 ‘해외공작단장’인 자신의 관할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윤진원은 김대중을 죽이든 살리든 그 책임을 이후락이나 박정희에게 떠넘긴 것이다.
박정희도 이후락도 명시적으로 윤진원에게 김대중을 죽여버리라고 지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는 그저 중앙정보부는 뭐하고 있느냐고, 김대중 하나 떠들지 못하게 못 하느냐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 공작단장인 윤진원 차원에서 알아서 ‘처리’해줘야 하는데 윤진원은 김대중이 도쿄에서 더 이상 떠들지 못하게 하는, 딱 거기까지만 하고 골칫덩어리를 산 채로 ‘진상’하는, 박정희나 이후락이 보기에 정말 ‘진상’을 떨어버렸다.
윤진원은 김대중을 납치한 흉악범이지만, 동시에 김대중이 살아남을 수 있는 묘책을 만들어낸 것이다. 김대중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윤진원도 이후락도 박정희도 모두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김대중이 ‘숨 쉰 채’ 부산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박정희나 이후락이 지었을 표정은 가히 예술작품이었을 것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고양이가 쥐를 잡아다 주인에게 나 잘했지 하고 가져다주어 기겁하는 일이 가끔 있다고 한다. 윤진원은 이런 멍청한 고양이가 아니었다. 그는 용금호에 김대중과 같이 타지 않고 일본에서 잠적해버렸다가 김대중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야 중앙정보부에 연락을 취했다. 윤진원이 취한 행동은 사실상 자신을 처벌한다면 그냥 일본에 망명해버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본부에서는 하태준 국장을 일본에 보내 윤진원에게 직접 신변 안전을 보장하여 귀국시켰다.
자신들이 김대중을 납치했다고 주장한 ‘애국청년구국대’가 남긴 협박문. |
납치엔 성공, 살해엔 실패하자
중정은 김대중을 풀어줬다
한·일은 짜고 현장에 지문을 남긴
김동운을 단독범인으로 몰고
그마저 끝내 무혐의 처분했다
그 뒤 북은 남북대화를 중단했고
학생 반유신시위가 번졌으며
재일동포 사회의 반박정희 정서는
육영수 피격사건을 불러왔다
김대중을 일본에 도로 갖다놓으라고?
김대중 납치로 한-일 관계가 꼬여가자 박정희는 연일 짜증을 냈다. 중앙정보부 일각에서는 “납치 때와 마찬가지로 김대중을 도쿄로 갖다놓으면 될 게 아닌가 하는 아이디어가 나왔다”고 한다. 이철희 등 납치사건 책임자가 윤진원에게 “도로 갖다놓을 수 없느냐”고 말을 꺼냈다가 윤진원이 “권총을 빼들고 ‘너 죽고 나 죽자’고 대들기도 했다”고 한다. 특수공작부대(HID·육군첩보부대) 출신의 현역 육군대령으로 당시 대북공작에서 맹활약했던 윤진원은 결국 장성 진급에 실패했고, 그가 이끌던 해외공작단도 해체되었으며 그 역시 중앙정보부에서 물러나야 했다. 김대중 납치사건
의 목표가 ‘납치’가 아니었으며, 김대중을 납치해 서울로 데려온 것이 ‘성공’한 공작이 아니었음을 이보다 더 잘 보여줄 수는 없다.
김대중은 눈은 테이프로 가리고 손발은 묶이고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용금호의 화물창에 감금되었다. 김대중은 이때 중앙정보부원들이 자신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려 했는데 미국 비행기가 나타나 중정 요원들이 자신을 죽일 수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원회에서도 이 문제를 조사했지만,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나 일본 경시청 등에서 김대중을 구하기 위해 비행기를 파견했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용금호에 실려 납치 다음날인 8월9일 오사카를 떠난 김대중은 8월10일 밤 부산항 외곽에 도착하여 하루를 보내고 11일 밤 하선하여 의사의 간단한 진찰을 받은 뒤 구급차를 타고 서울 모처의 중앙정보부 안가로 옮겨졌다.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을 살려서 집으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8월13일 밤 저들은 김대중을 동교동 자택 앞에 풀어주었다. 1972년 10월11일 집을 떠난 지 10개월 만에, 납치된 지 엿새 만에 김대중은 자기 손으로 자택의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자서전)
김대중은 돌아왔지만,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한국은 1967년 동백림 사건 당시 독일과 프랑스에서 한국 지식인과 유학생들을 납치하여 국내로 이송했다가 국교 단절 일보직전까지 가는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도 중앙정보부가 일본에서 또다시 납치사건을 저지른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박정희가 얼마나 심하게 김대중 문제로 중앙정보부를 압박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관계에서 특별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총책임자인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이 되기 전 1년 남짓 짧은 기간이지만 주일대사를 지낸 일본통이었다. 만약 주일한국대사관 일등서기관 김동운이 김대중 납치 현장에 지문을 남기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일본 정부는 자국의 수도 도쿄에서 일어난 납치사건이라는 엄청난 주권 침해에 대해 모르는 척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본 정부는 김동운의 지문을 확인하고도 이를 곧바로 발표하지 않았다. 김동운은 사건 직후인 8월10일 홍콩을 거쳐 귀국했다가 8월17일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일본 경찰이 공항에서부터 미행하는 등 수사망이 좁혀오자 이틀 후 다시 귀국했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8월23일 김동운이 납치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 소식통이 처음으로 인정했다고 보도했다가 서울지국이 폐쇄되었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김동운의 출두를 요청한 것은 그의 이름이 언론에 보도되고도 보름 가까이 지난 9월5일에 가서였다.
박정희 친일 정권이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저지른 전대미문의 주권 침해 사건을 두고 일본의 ‘친한파’ 보수정치인들은 사건의 무마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양국 정부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김동운 서기관 개인의 범행으로 매듭지었다. 현장에 김동운 1인만이 아니라 여러 명의 한국 기관원들이 있었고,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김대중을 태우고 황급히 빠져나간 차량(品川 55もも 2077)의 소유자가 요코하마 총영사관 부영사 유영복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대중이 일본에서 끌려간 안가가 고베시에 있는 오사카 총영사관 영사 박종화 명의로 된 집으로 지목되었는데도 일본 경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김동운이 “일본 경찰 당국의 혐의를 받는 등 국가 공무원으로서 자질을 상실하고 품위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공무원에서 해임시켰다”, “해임 후 계속 수사를 했으나 혐의를 입증할 확증을 얻지 못해 불기소 처분했다”고 일본에 통보했다.
납치한 김대중을 오사카항에서 부산항으로 실어보낸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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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에게 머리숙이고 4억엔을 안기다
11월2일 국무총리 김종필은 박정희의 친서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총리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사죄했다. 김종필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 영접 나온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는 뻣뻣하게 악수하고 총리 김종필은 머리 숙여 인사해야 할 만큼 한국 정부는 일본의 선처를 바라야 할 형편이었다. 한진그룹의 조중훈은 따로 다나카를 방문해 박정희가 보내는 4억엔이라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전달했다. 일본에서는 김대중의 원상복원, 즉 김대중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라는 요구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다나카는 “김대중이 들어오면 시끄러우니 보내지 말라”고 한국 쪽에 얘기했다는 소문도 파다하게 돌았다. 식민지 시대부터 맺어진 한국과 일본 보수정치인들 간의 끈끈한 유착에 기대어 그들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렇게 처리하면서 한-일 간의 모든 문제가 ‘결착’되었다고 주장했다.
박정희와 함께 사건을 은폐한 일본의 태도는 2007년 10월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를 마무리하면서 김대중 납치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려 했을 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일본 쪽은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다는 것을 한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일본으로서는 수사를 재개하여 김동운의 송환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며 조사 결과를 발표하지 말 것을 여러 경로를 통해 요구해 왔다. 민주적 정권교체에 의해 한국 정부는 1973년의 냄새나는 ‘한-일 결착’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반면, 일본 정부는 두 나라 간의 부끄러운 거래가 드러나는 것을 여전히 원치 않고 있었다.
사건의 시작과 끝은 역시 박정희였다. 박정희가 진실로 김대중 납치사건과 무관하다면 그는 납치범들을 처벌해야 했다. 김대중을 납치한 흉악범들은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한-일 결착’이 이뤄진 뒤인 1973년 연말 개각에서 이후락이 3년 만에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물러났을 뿐이다
. 1976년 말이나 1977년 초에 중앙정보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KT사건 관여인사 일람표’를 보면, 윤진원에 대해서는 사후관리 방안으로 ‘복직 또는 취직 알선’이라고 한 반면, 김동운에 대해서는 본인이 보직 변경을 희망하므로 상응한 보직을 부여할 것을 건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김동운은 형식적인 해임 후 바로 복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동운은 해직 1년 후에 복직되어 8국 부단장에 임명되었으나 두 달 후 일본이 이 사실을 알고 항의해 와 원남동에 사무실을 얻어 직책도 없이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으며 8년 동안 근무하다가 1982년 말 퇴직했다.
위의 일람표가 작성될 당시 김기완은 8국의 해외공작관으로 로스앤젤레스(LA) 주재 흑색요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윤형로와 홍성채는 각각 7국과 2국의 부국장, 한춘은 차장 보좌관으로 있는 등 전원이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납치범들을 철저히 비호했던 것이다. 김대중을 살려 보내 장성 진급에 실패한 윤진원은 1975년 말 용금호 선원들의 밀수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퇴직되었다가 1977년 8월 박정희의 지시로 관리관에 재임용되었다. 박정희는 일본의 보수정객들과 손잡고 사건을 은폐하였을 뿐 아니라 납치범들의 뒤를 철저히 봐준 것이다.
김대중 납치사건의 여파는 심각했다. 8월28일 이북은 김일성의 동생인 남북조절위원회 평양측 공동위원장 김영주의 명의로 김대중 납치사건의 주범인 서울측 공동위원장 이후락과는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다며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했다.
10월2일에는 유신 선포 1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대 문리대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의 시위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중앙정보부는 학생들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간첩사건을 만들어내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일본에서 한국은 납치국가, 깡패국가가 되어버렸고, 재일동포 젊은이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문세광이라는 과격한 재일동포 청년이 박정희를 저격하려다가 육영수 여사가 피격당한 비극적인 사건 역시 김대중 납치사건의 결과였다. 김대중 납치사건과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의 인과관계를 지적한 것은 박정희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