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0 중학생들도 투석전에 참가
- 하교중이던 중학생 3백여 명이 동명동에서 계엄군에 투석, 최루탄과 페퍼포그 난사로 해산.(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금남로 3가에 모였던 시민, 학생들이 '계엄철폐', '연행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전날에 이어 다시 농성을 시작. (월간조선, 1985. 7)
15:40
- 조흥은행 앞 시위대 2백 명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 7공수여단 33대대 계림동으로 출동. (특전사 전투상보)
15:50
- 금남로 2가에서 3가까지 5천 명의 시민을 주축으로 한 시위대가 금남로 입구까지 행진하여 연좌농성.
15:55 금남로 4가에 또다시 수천 명의 군중 결집
- 3천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은 1가 쪽으로 이동하면서 '공수부대원 물러가라', '우리를 죽여라', '계엄을 해제하라',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쳤다.
그 무렵 이곳에는 공수부대원 대신 1천여 명의 경찰이 나타났다. 학생과 시민들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연막탄을 터뜨리며 서서히 다가갔다. 군중들은 갖가지 구호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보도블럭을 깨서 던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며 대항했으나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자 1가 쪽으로 3개 소대 병력쯤 되는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진압에 나서는 바람에 군중들은 뒤로 후퇴하면서 밀려났다. 이 군중들은 충장로 쪽으로 빠져나가 구시청 부근인 우미여관 앞에 모였다. 이들 가운데는 고등학생들도 끼어 있었다. 삽시간에 2천여 명이 넘는 숫자로 불어났다. 이들은 도청 광장 쪽으로 밀고 들어갈 기세였고, 일부는 도청 광장까지 진출했으나 수가 적어 금방 쫓겨나기도 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16:00
- 도청앞 공수대 4백여 명이 최루탄을 발사하면서 진압 시작.
- 금남로 2-3가에 시민, 학생 모이기 시작. 4시에 3천여 명 '계엄철폐' 외치며 애국가 합창, 일부 연좌농성. 군인들 밀고 내려와 5시쯤 3백 미터 밀려 금남로 3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군과 대치, 철책. 토관. 드럼통으로 바리케이드, 곧 강제진압할 듯.(월간조선, 1985. 7)
- 광주은행 앞, 금남로, 전일빌딩, 가톨릭센터, 등지에서 1천 명 단위로 다발적으로 운집해서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16:00
- 한일은행 앞 시위대 2백 명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도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지하도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는 공수들의 동태를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지하도로 도망가는 여학생을 보고 공수 한 명이 쫓아가는 것이 보였다. 공수는 여학생을 끌고 지하도 위로 올라온 뒤 곤봉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여학생은 미친 듯이 소리쳤지만 공수는 더욱 악랄하게 굴었다. 대검을 들고 여학생의 옷을 갈기갈기 찢었다. 순식간에 옷은 모두 찢어져 흘러내렸고 팬티만 입혀져 있었다. 여학생의 몸은 이곳저곳을 대검에 긁혀 피투성이가 되었다. 공수는 여학생의 가슴에 대검을 들이대고 '찔러 죽여버려야 해, 너는 간첩이야!'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 여학생은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와 있었는데 공수는 한 손으로 여학생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젖혔다. 여학생은 반항도 못 하고 내팽겨쳐졌다. 이 광경을 본 나는 온몸이 부르르 떨려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세상에……. 세상에' 할말을 잃고 서 있는 나에게까지 공수들이 쫓아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어 전남대 정문까지 도망갔다." (구술 : 김연태, 현사연 조사)
16:05
- 금남로 5가 국민은행 앞에 1천여 명이 모여 도청을 향해 올라오다가 16:20에 계엄군의 가스 살포로 해산. (계엄사 상황일지)
- 이 시간 이후 시내 중심가는 최루탄가스로 꽉찼고 금남로 일대를 장악. 시위대는 금남로를 중심으로 각곳에서 시위.
16:18
- CBS 앞 시위대 1천 명으로 증가. (계엄사 상황일지)
* "나는 광주역에서 금남로로 내려와 화니백화점 쪽으로 갔다. 시민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 수는 아마도 몇만 명이 될 듯하였다. 동구청 쪽에서는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퇴근시간이 되자 사람들은 더욱 불어났으며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다. 학생 하나가 지하상가 공사장 한국은행 쪽 입구의 난간으로 올라서더니 구호를 외쳤고 시민들이 따라서 외쳤다. 시민들이 너무 많아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어떤 시민이 일어나 스피커를 준비할 수 있도 록 모금운동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후배 하나가 성금을 걷어 마이크를 하나 사왔다. 자동차용 밧데리에다 소형앰프를 달아 한 사람이 들고, 후배는 무등을 타고 시위대의 가운데로 들어가 확성기를 통해 선동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이 자리에서 먼저 가신 님들과 같이 죽읍시다' 시위대는 사기가 고양되어 투석이 치열해졌다. 시민들은 계속 불어났고 노소를 막론하고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 등의 노래를 불렀다. '공수들을 뚫자' 하는 소리와 함께 자연스럽게 대열이 편성되었다. 각목과 쇠파이프 하나씩을 든 건장한 청년들이 선두에 서고 공수부대의 저지선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갔다. 이제 구경만 하거나 방관하는 시민은 아무도 없었다. 도로 부근의 상점이나 주택가에서도 물통과 세수대야에 물을 가득 채워서 밖으로 내놓았고, 리어커와 자전거로는 공사장 주변의 돌과 자갈을 실어날랐다. 시민들은 최루탄가스가 터져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주머니들과 요식업소 아가씨들은 물수건과 치약을 준비하여 군중들 사이로 시위하는 사람들 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시민들은 얼굴과 코 밑에 치약을 바르기도 했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16:20
-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8백여 시민,학생들이 애국가 부르며 농성, '계엄해제' 외쳐. 계엄군 최루탄 발사, 일단 해산.
- 광주고 앞에서 4백여 명 계엄군과 대치.
- 번화가 충장로 등 교통차단. 골목길에서 계엄군과 경찰이 시민 접근 차단.
- 배명인 광주지검 검사장 말에 의하면 어제(19일)까지 9백8명 연행(고등학생 13명, 대학생 4백95명, 시민 4백 명). 이중 연행학생과 일반시민 중 1백67명은 오늘 오후 석방한다고. 계엄분소는 또 앞으로도 계속 주동자가 아닌 자는 선별 처리해서 석방한다고 밝히고 주동자는 엄히 다스린다고 발표했으며, 소요가담자 중 경상자는 군에서 치료하고 있고 중상자는 없다고 발표.
- 전남도 계엄분소, 전남 부지사, 검사장, 교육감, 목사, 신부 소집. 기관장 등이 "데모 진압방법 너무 지나치다. 이 때문에 시민, 학생들이 반발했다. 시민 선무가 급선무다. 석방할 사람을 빨리 가려 석방시키라"고 대책 건의. 계엄분소 대단히 고무적 반응. 실마리 조금씩 풀리는 듯. (월간조선, 1985. 7)
16:25
- 가톨릭센터 앞의 시민, 학생이 장갑차 1대와 군의 최루탄에 의하여 중앙극장까지 밀려 일부 고등학생 합세. (시청 상황일지)
16:50
- 해산된 군중이 국민은행 앞에 3백여 명 집결중. (계엄사 상황일지)
- 시위대는 도청으로 통하는 6개 방면의 모든 도로에서 물밀듯 밀어닥침. 대열 앞에 드럼통과 대형화분대 등을 굴리면서 경찰저지선에 다가섬. 일부 시위대는 쇠파이프, 식칼 등을 쥐고 '같이 죽자'고 외침. (현사연 조사 종합)
- 도청 분수대로 이어지는 6개 방향의 모든 도로에는 도청을 중심으로 이중, 삼중의 경찰저지선이 쳐졌고, 그 후방에는 군병력이 진주 시위군중과의 긴장 속에 대치를 계속.
17:00
- 도청 쪽에 있던 군인들이 최루탄을 쏘며 밀고 내려오자 3백여 미터쯤 후퇴, 금남로 4가 한국은행 광주지점 앞에서 2천여 명이 군과 대치. 이때부터 금남로는 다시 가스로 가득했고 군중들은 철책, 드럼통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구축. (월간조선, 1985. 7)
- 금남로 CBS, 광주은행 62대대가 투입되어 진압. (전교사 작전일지)
- 구시청 사거리에 칼을 든 시민,학생 4백여 명이 계엄군에 투석, 계엄군의 가스탄 발사로 분산.
- 영업용 택시기사 50여 명은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밀어버리겠다고 클랙슨을 누르면서 시위하던 중에 경찰 싸이드카 대원의 설득으로 해산. (계엄사 상황일지)
17:10
- 충금지하상가에서 3백여 명의 시민이 계엄해제를 외치고 있음(골목길에는 많은 인파가 서성거림). (시청 상황일지)
17:40
- 금남로 한국은행 앞 5백여 명 계엄군이 분산시키자 금남로 공안의원 통로 5백여 명, 구역전 3백여 명, 대한극장 앞 2백여 명, 현대극장 앞 6백여 명, 구시청 앞 1백 명, 계 1천7백여 명이 산발적으로 계엄군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7:50
- 충장로에 운집한 시위대,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육탄돌격 시도하여 경찰과 충돌. 이들은 대도호텔 앞에서 연좌 후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은 38선으로 복귀하라'는 구호를 외쳤고 대표자를 선출, 경찰저지선에 보내 "광주시민을 적으로 취급하는 군과 사생결단을 낼 테니 경찰은 비켜달라"는 협상을 시도.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광주민중항쟁 총일지]전면적인 민중항쟁 - 민주기사들의 봉기
제 5 절 민주기사들의 봉기(20일 18:00 - 21일 아침)
버스와 택시를 세워놓고 젊은이들을 무작정 끌고 가는 과정에서 기사들이 구타, 연행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기사들이 광주역과 무등경기장에서 모여 대형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일시에 금남로로 몰려왔다. 금남로를 가득 메운 이들의 경적과 헤드라이트 불빛은 시위대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주었다. 가공할 무력으로 인한 패배감이 강한 연대의식과 자신감으로 전환되어 계엄군을 몰아내고 광주를 해방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시위대는 도청을 지키는 군경을 포위하고 접전을 계속했으며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MBC 방송국, 노동청 그리고 세무서 등이 불탔다. 도청주변과 광주역 앞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인 시위대와 선무방송차를 따라 곳곳을 돌아 다니는 시위대로 밤이 깊은 줄 몰랐다. 도청과 광주역을 제외한 전지역이 시민의 손에 장악되었고 이날 밤으로 시외전화가 두절된다.
도청과 광주역 양쪽으로 몰린 공수부대는 급기야는 시위군중을 향해 집단발포하기에 이른다. 광주역 앞의 시위대는 날이 밝자 이때 사망한 두 구의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도청으로 도청으로 분노에 찬 발걸음을 재촉했다.
18:00
- 택시운전사 2백여 명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계엄군을 몰아내겠다고 결의.
- 30여 명의 군인들이 시위대 중간을 차단하려고 한국은행 맞은편 골목으로 진입했으나 이들은 '시민들을 때리지 말라', '평화적 시위는 제지하지 말라' 등 시민들의 집단항의를 받고 도청 쪽으로 되돌아 감. 시민들은 되돌아가는 군인들에게 박수를 보냄. (월간조선, 1985. 7)
- 충금지하상가 쪽에서 학생, 시민 5백여 명이 질서있게 연좌데모(시민들이 바리케이드 설치). '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사형하라'는 구호 제창. (시청 상황일지)
- 18시 현재 금남로의 학생, 시민 1천여 명은 계엄군에 의해 해산되었으나, 계엄군이 원상복귀하자 다시 국민은행 앞에 3백 명이 운집함. (계엄사 상황일지)
18:10
- 7여단 33대대 숙영지를 조선대로 이동 명령. (특전사 전투상보)
18:00 군사령부 작전지침 하달
- 군 사령부 지시사항 내용
1. 주민 계몽 담화문 31사단장에게 발표토록 지시
2. 유언비어 발생 및 유포과정 분석
3. 학생시위 구호 변천과정 분석
4. 유언비어 수집 및 분석
5. 군은 지역적인 구분이 없음을 천명
6. 계엄군의 사명 제시 (전교사 작전일지)
- 군사령부
1. 계엄군 자세 확립 지시
2. 총기피탈 방지
3. 민간인 적대행위 방지
4. 장기화 작전에 대비
5. 연행차 처리 (전교사 작전일지)
택시기사들의 시위 참여
18:20
- 산발적으로 무등경기장에 모인 택시 1백 대가 세 줄로 헤드라이트를 켜고 광주역 쪽으로 들어오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18:30
- 택시 2백 대가 계엄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택시에 돌멩이를 싣고 무등경기장에서 금남로 쪽으로 이동. (계엄사 상황일지)
18:30 - 21일 02:00 3여단의 광주역과 광주시청에서의 작전
- 부대가 광주역에 도착한 1시간 후(08:30분경) 31사단장이 도착, 현지서 작전 명령 하달.
- 조식과 중식은 특전식량으로 대용하고 18:30분경 21/2톤 2대로 본부대 요원이 작전부대 식사추진을 위해 전남대학교에서 약 5백 미터 전진하자 차량에 탑승한 폭도들에 의해 공격을 받아 차량은 유기하고 일단 긴급사항 통보.
- 여단은 16대대를 즉각 출동시켜 폭도를 제지시키고 설득을 했으나 최초 10여 대에서 1백여 대로 증가되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발전.
- 급기야 폭도는 대대장과 부여단장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차량으로 아군 병영에 돌진, 아군 1명 살해함.
- 이에 16대대는 가스탄 및 진압봉에 의한 타격작전으로 일단 폭도를 격퇴하고 광주역전으로 가는 도로를 차단, 폭도와 치열한 공방전을 수행.
- 한편 11대대는 금남로 일대에서 도청에 집결되는 시민과 폭도들에 포위되어 고립상태하에 자체방어에 치중.
- 13대대는 공영 주차장에서 폭도의 차량에 의한 공격을 받았으나 중과부족으로 일단 물리적 행동을 삼가고 정관상태로 꼿꼿이 대치.
- 한편 광주역 KBS에서 보병이 폭도와 대치중 돌파위기에 처해 긴급구호 요청을 보내옴으로써 광주시청에 차량과 집결중이던 12대대를 KBS로 급히 이동시켰으나 중간에서 폭도에 의해 저지되어 구조는 불가능.
- 이에 폭도의 위협이 없는 15대대를 KBS에 급파, 구조 지원토록 함.
- 이때 15대대는 KBS를 구출하고 전남대 쪽의 폭도와 12대대 쪽의 폭도를 동시 제압하며 12대대와 연결, 광주역전에서 합류, 2대 대대로 5차로를 방어.
- 12대대가 광주시청에서 이동하자 폭도 만여 명이 광주시청을 습격, 이에 긴급 구조 요청을 접수, 13대대를 돌파시켜 광주시청을 점거시키고 시청을 사수. 폭도 2인 이상의 파상공격을 저지.
- 11대대를 제외하고 4개 대대는 폭도의 차량화 특공대와 화염병 및 투석전으로 맞서는 폭도들과 계속 공방전을 실시.
- 22:30분경 광주역전 상황이 위급하자, 여단은 11대대와 12, 15대대를 구출하기 위한 2개 팀 정도의 특공대를 구성, 광주역전 뒷길로 과감히 돌파작전을 실시, 일단 12, 15대대와 역전에서 합류, 통합작전 지휘.
- 약 1시간 정도 광란하는 폭도와 대치하면서 가스탄(화염방사기, M203 방사기, E-8 발사통) 등으로 폭도를 제지. 이때 폭도는 약 20여 회나 차량으로 돌진(일부는 운전수 없이), 아군을 압사(10여 대의 고속버스가 주변을 파괴).
- 이러한 상황에서 11대대는 기회를 보아 화염방사기, CS의 기습사격에 의해 돌파구를 열고 광주시청 쪽으로 이동, 13대대와 합류에 성공(23:00경).
- 이에 11, 13대대의 합동작전으로 광주시청 쪽의 폭도를 제압하고 광주역전 쪽으로 합류하기 위해 이동(11:30분경).
- 12대대의 엄호로 01:00경에 4개 대대는 역전에 합류, 이때부터 조직적인 작전으로 폭도를 퇴치하며 철수준비.
- 11대대는 선발대로 통로를 개척하며 지원받은 차량을 인솔, KBS 기술자 5명과 무기고의 무기를 회수하여 전남대 입구의 16대대의 지원과 역전의 3개 대대의 엄호하에 철수하고, 부속하는 3개 대대는 축차진지를 점령하면서 무사히 전남대로 철수완료(02:00시경). (특전사 전투상보)
18:35
- 무등경기장에서 광주역-시외버스 공용터미널-금남로 쪽으로 택시 1백 대가 시가 행진중.
- 충금지하상가에서 4천-5천 명이 집결하여 '신현확 물러가라,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치며 마이크 설치를 위한 가두 모금운동 전개. (시청 상황일지)
18:40 전남대에서 5백 미터 전진지점, 계엄군 1명 사망
- 18:30분경 2 1/2톤 2대로 본부대요원이 작전부대 식사추진을 위해 전남대학교에서 약 5백 미터 전진하자 차량에 탑승한 폭도들의 공격을 받아 긴급사항 통보. 여단은 16대대를 현지에 출동시켜 폭도를 제지, 설득했으나 최초 10대에서 1백여 대로 차량이 증가되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발전, 급기야 대대장과 부여단장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아군 병영에 돌진하여 아군 1명 살해함. 16대대는 가스탄 및 진압봉에 의한 파격작전으로 폭도를 격퇴하고 광주역으로 가는 도로 차단, 폭도와 치열한 공방전.
* "이날 오후 전남대 정문 앞에서 공수대원을 장갑차로 깔아 죽였다는 사람이 들어왔다. 그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로 이름이 이금영(?)이었던 것 같다. 지휘관이 권총을 빼들고 '야, 이새끼 장갑차, 우리 부하를 죽인 놈, 너도 죽어야 해' 하면서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팼다. 들어오는 공수들마다 '야, 장갑차 나와! 니가 우리 동료를 죽여?' 하면서 개머리판과 워카발로 짓밟았다. 그가 확실히 장갑차로 공수를 깔아 죽였는지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그 청년은 공수들의 분풀이감이었다." (구술 : 황강주, 현사연 조사)
- 광주시내 2백여 명의 택시 운전사들이 무등경기장에 모여 '동료가 사상된 데 항의, 광진교통 소속 전남 5나 3706호 시외버스 등 5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헤드라이트를 켠 채 금남로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운전기사들은 데모군중을 헤집으며 군저지선을 뚫고 금남로 2가 광주관광호텔 앞(도청 앞에서 4백 미터 떨어짐)까지 돌진. 이곳까지 밀린 군인과 경찰은 차량에 페퍼포그와 최루탄을 터뜨리며 최후저지선을 확보. 도청앞 광장과 도청 청사까지 가스가 가득했고 시위가 극렬해지기 시작.( 월간조선, 1985. 7)
- 광주역 쪽에서 택시, 화물트럭을 앞세운 시위대 2천여 명이 대인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몰려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서 잡석을 싣고 온 경남 7다 6080호 트럭을 붙잡아 금남로 쪽으로 밀어붙인 뒤 불태움. (월간조선, 1985. 7)
18:50
- 차량 헤드라이트를 켠 채 돌진. CBS(가톨릭센터) 앞에서 군중 사이에 낀 채 정차. 학생을 태웠던 택시 운전사가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퍼짐.
* "유동 쪽에서 수많은 차량이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돌진해 오고 있었다. 맨 앞에는 택시 몇 대가 오고 바로 뒤에는 짐을 가득 실은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외버스가 따르고, 그 뒤로는 영업용 택시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뒤를 따랐다. 트럭 위에는 청년들이 가득가득 올라 서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면서 밀고 들어왔다. 이를 보고 있던 시위대 중 누군가가 '민주기사들이 드디어 봉기했다' 하면서 공수들을 밀어버리자고 소리쳤다. 갑자기 돌변한 사태에 놀란 계엄군은 엄청난 양의 최류탄을 쏘아댔고, 페퍼포그 차를 동원하여 가스를 뿜어댔다. 경찰이 쏘아대는 독한 가스탄이 진격하는 차량의 유리창을 부수고 차 안에 떨어졌다. 차를 멈춘 운전기사들은 방향감각을 잃고서 연기 속에서 사방을 헤맸다. 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침을 하고 구역질을 하면서 비틀거렸다. 이 틈을 타고 계엄군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곤봉으로 유리창을 깨고 기사들을 끌어내 군화발로 짓밟고 나서 연행해 갔다. 차량 주위에 서 있던 시민들은 계엄군들의 만행을 보면서 돌을 던졌으나 역부족이었다. 계엄군은 잡히는대로 연행해 갔다. 나는 이곳에서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와 광주우체국 앞으로 도망을 갔다. 우체국에는 1백여 명의 시민과 청년들이 모여 있었다."(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19:00
- 산수동 오거리에서 광주역으로 이동한 시위대 계엄군과 공방전.
* "오늘 밤 시내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예정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친구와 함께 산수동 오거리로 나갔다. 산수동 주민을 모아 시내로 나가기로 친구와 합의하고 그때부터 주민들을 규합했다. '시민 여러분, 우리의 형제자매가 공수의 총칼에 무참히 쓰러졌습니다. 저들의 만행을 저지합시다. 오늘 밤 시내에서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나 공수를 광주에서 몰아내기로 결의했습니다. 산수동민 여러분도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나오십시오. 오늘 밤에는 꼭 결판을 냅시다' 골목골목을 누비며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시민들이 각목, 쇠파이프, 식칼 등의 무기를 들고 하나둘씩 산수동 오거리로 나왔다. 1시간 이상을 외치고 다니자 거의 1천 명 정도의 시민들이 나왔다. 주로 청장년의 남자들이었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MBC 방송국을 거쳐 광주역으로 가면서 주변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 관공서의 유리창 등을 몽둥이로 깨부수면서 갔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그곳에 운집해 있던 1천여 명의 시민과 합류하여 광주역에서 그날 새벽까지 계엄군과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였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 무등경기장 앞 경상도 트럭 2대에 방화
* "광주역에서 공수들과 싸우던 시민들이 군용트럭 2대를 불태웠다. 헝겊에 불을 붙여 차바퀴에 붙였다. 그것을 보고 난 후 나는 청년들과 같이 시청 옆에 있는 광호교통 차고로 갔다. 그곳 직원에게 데모하는데 차가 필요하니 버스를 내달라고 요구하자 처음에는 거절하던 그가 나중에 버스 3대를 끌고 나왔다. 우리는 그 차를 타고 산수동, MBC 방송국 등 시내 곳곳을 돌며 '전두환 물러가라', '계엄령 철페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밤늦게 계림동파출소 앞을 지나면서 시위대들이 파출소 안으로 몰려가 기물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는 것을 목격했다. 계림극장 사거리에서는 군인과 시민, 학생들이 서로 최루탄과 돌로 대치하면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구술 : 김영민, 현사연 조사)
- 금남로 거리에 버스 8대, 대형트럭 1대, 택시 50대를 앞세우고 도청 앞(관광호텔)까지 진출, 구호(계엄해제) 외침. (월간조선, 1985. 7)
- 무등경기장에 집결한 택시기사, 신안동 롯데제과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
* "공설운동장에서 택시기사들이 모인다는 말을 듣고 나도 자가용을 몰고 그곳으로 갔다. 신안동 롯데제과 앞 6차선 도로에 광주역 쪽을 향한 자동차와 시민들로 꽉차 있었다. 시내로 나가려는 시민을 저지하기 위해 공수들은 착검한 M16을 '허리총' 자세로 들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었다. 양쪽 모두 한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이 대항하는 것을 보니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가용을 도로 옆 골목에 세워놓고 시민과 공수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중재에 나섰다. 일단 양쪽 다 뒤로 10보씩 물러서라는 것이었다. 간신히 내 의견이 먹혀들어 공수부대와 시민들이 10보씩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뒤쪽에 있던 시민들이 그 뜻을 모르고 공수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것과 동시에 공수들이 최루탄을 쏘아대며 곤봉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그곳에서 잡힌 사람들은 군용트럭에 짐짝처럼 차곡차곡 실렸다. 나도 그때 잡혀 전남대로 끌려갔다. 전남대 강의실에서 공수들은 '이 대검이 내가 월남에 가서 베트공 여자 유방을 40개 이상 자른 것이다' 하며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공수들이 내 옆에 있던 사람에게 주소를 묻자 그는 '양동구'라고 대답 했다. '양동이면 양동이지 양동구가 뭐야' 하고 악을 쓰면서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개머리판으로 내리치고 발로 밟아버리자 그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죽어버렸다. 4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이튿날 전남대로 붙잡혀온 사람들을 포승줄로 줄줄이 묶어서 밀폐된 트럭에다 실은 후 최루탄을 터트렸다. 나는 팔이 부러져서 포승줄에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스러웠다. 트럭 양쪽에 있는 작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보니 전남대 테니스장 부근 비탈에 여학생 두 명이 죽어 있었다. 그 여학생은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고 쓴 휘장을 가슴에 둘렀는데 온몸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트럭에 탔던 시민들이 최루탄 가스 때문에 코피를 흘리고 오줌을 싸는 등 그야말로 생지옥을 방불케 했다. 나는 숨이 막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자 머리로 유리창을 들이받아 유리파편이 머리에 박혔다. 교도소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저물었다. 우리가 탄 트럭에서만 서너 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그 외에도 최루탄에 화상을 입어 얼굴이 벌겋게 벗겨졌다. 공수들은 시체들을 옆에다 눕혀놓고 주전자의 물을 붓거나 오줌을 싸서 피로 얼룩진 시체의 얼굴을 군화발로 문질러 씻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시체의 가슴 위에 번호를 쓴 나무판을 놓았고 뒤따르던 공수는 카메라로 시체 하나하나의 사진을 찍었다. 그런 뒤 가마니로 덮어두었다." (구술 : 강길조, 현사연 조사)
- 도청 앞에는 고속버스 3대를 포함하여 차량 3백 대가 진출. (전교사 작전일지)
- 택시 15대, 노동청 앞에서 계엄군과 대치.
- 11대의 대한통운 소속 12톤 대형트럭, 고속버스, 시외버스와 2백여 대의 영업용 택시가 헤드라이트를 켠 채 금남로에 나타남. 시민들 환호하면서 차량을 따라 돌격 개시. 계엄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쏘아댐. 경찰의 가스탄이 차량의 유리문을 부수고 떨어짐. 저지선 20여 미터를 남기고 차량은 멈췄고,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는 청년들을 계엄군은 구타하여 연행해 감. (1980년대 민주화운동)
- 2천여 명의 시민, 차량의 뒤를 따라 현재 지하상가 공사장 앞을 통과, 도청으로 가고 있음.
- 계엄군은 장갑차 1대를 앞세우고 도청 앞에서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9:05
- 가톨릭센터 앞에서 계엄군이 가스탄 발사하자 대부분의 차량과 시민들은 분산 도주했으나, 계속 버스 3대, 택시 30대, 군중 1천여 명은 계엄군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9:15
- 광주고속 앞 택시 50여 대 집결중. (시청 상황일지)
19:18
- 광주은행 앞에 버스 3대, 트럭 1대를 앞세우고 택시와 군중 2천여 명이 시위 중.
- 노동청 앞의 2천여 시민, 도청으로 진격할 태세.
- 전남매일신문사 앞에서 1천여 명의 시위대, 군경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9:20
- 버스 6대 앞세우고 대학생들이 2열로 버스 앞에 서서 도청을 향해 진격하고, 후미에는 군중 1천여 명이 뒤따르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투석이 진행되는 동안 광전교통 전남 5아 3706 버스 한 대가 헤드라이트를 켜고 군저지선을 향해 돌진. 최루탄으로 시야가 막혀 가로수를 들이받고 멈춤. 공수대원이 몰려나와 운전사와 탑승했던 20대 청년 9명을 곤봉과 군화발로 난타. 이들을 구하려던 5백여 명의 시민들도 무차별 난타.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오후 6시경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가보니 7, 8대의 택시가 왔다. 그들은 도청 앞에 있는 계엄군을 밀어버리려는데 금남로 진입로에 공수들이 가로막고 있어 돌파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때 버스 앞 유리창에 '무안'이라고 씌어진 시외버스 한대가 공용터미널 배차실로 들어왔다. 빨간 잠바를 입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그 차를 세웠다. 그는 운전수를 붙들고 계엄군을 몰아내기 위해 차량시위를 시도하고 있는데 택시만 있어 불가능하니 차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운전사는 순순히 차를 줬다. 빨간 잠바의 청년이 차를 몰고 서서히 금남로 진입로를 향해 갔다. 점차 공수부대의 대치점과 가까워지자 속력을 냈다. 그 과정에서 공수들이 물러났다. 그렇게 해서 도로가 뚫리자 버스는 도청을 향해 쏟살같이 질주했고, 10여 대의 택시가 그 뒤를 이어 달려갔다. 나도 시민들과 함께 걸어서 도청으로 갔다. 15분쯤 후 금남로 관광호텔 앞에 당도해 보니 선두에 나섰던 시외버스가 가로수를 들이받아 불타고 있었다. 공수들이 최루탄을 쏘며 뛰어왔고 그곳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있었다." (구술 : 정홍섭, 현사연 조사)
19:25
- 전남대 정문 앞 사거리에서 4백 명의 학생들이 돌멩이 준비중.
- 무등경기장 앞에서 차량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며 택시들이 차도를 막고 전차량을 세우고 있음.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4, 5백 명의 군중과 군인이 투석전중이며, 경상도 트럭 1대를 방화.
- 시내버스 3대와 트럭 1대를 선두로 그 뒤에 수백 대의 차량(동구청-제일고등학교 입구까지 연장)이 도청 쪽으로 행진하고 있으며, 시민은 수만 명이 모여 있음. (시청 상황일지)
19:45 도청 광장에 있던 공수부대가 포위되다
- 가톨릭센터 앞까지 진출한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구호 외치며 도청 쪽 향함 .
- 오후 7시 40분부터 40분 동안 소강상태. (월간조선, 1985. 7)
- 공수부대는 전남일보 앞에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는 듯이 버티고 있었다. 차량행렬도, 시민들도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20미터쯤의 간격을 두고 대치했다. 그러나 시위군중은 금남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노동청 쪽과 학동 쪽, 충장로 입구에서도 길을 가득 메운 시위군중이 도청 광장으로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원은 금남로만 맡고 있었다. 다른 길은 경찰이 맡아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수없이 쏘아대면서 도청 광장으로의 전진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러니까 도청 광장을 둘러싼 네 길목에서 군경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어 도청 광장과 군경은 시민들에게 포위된 셈이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MBC 방송국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학생 5천 명, 시민 5천 명이 운집해 있으며 이들 중 3천 명은 소형 태극기를 휴대하고 있음.
- 시민관 앞에 정차중인 경남 7바 6083호 트럭에 불을 질러 연소중. (계엄사 상황일지)
19:50
- 충금동 예비군중대 사무소에 청년들이 침입하여 옥상방송을 하려함.
- 학생, 시민 4백여 명 유동 쪽에서 광주역 쪽으로 이동. (시청 상황일지)
20:00
- 정면공격이 불리하다고 여긴 시민들은 가톨릭센터 옆길을 빠져나와 MBC 방송국 점령. 시민들은 밖의 상황보도 요구, 거절하자 화염병을 던짐. 직원들이 소화, 군중들이 방송기재를 파괴해 방송중단.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광주 MBC 방송국(도청에서 1km), KBS(도청에서 2km, 광주역 앞)가 방송중단, 시민이 접수한 것 같다. 전일발송, CBS는 나와.
- 제봉로를 따라 MBC 방송국 건널목 쪽으로 전진했다. 일단의 과격파들은 이때 대인동 광주소방서를 점령, 소방차 3대를 끌어내 사이렌을 울리며 시가지를 질주. 시위대는 광주시청에 난입하며 20여 장의 유리창만 박살내자 철거반장 등 일부 시청직원들이 데모대원들을 설득, 위기를 모면.
- 검찰청과 법원에 시위대 진출했으나 일부 광주출신 검사들이 데모대를 설득, 돌아감.
- 도청과 같은 건물 안에 있는 도경은 완전히 포위상태.
- 금남로를 따라 택시, 버스를 앞세운 데모대는 도청에서 4백 미터쯤 떨어진 관광호텔 앞에 진출, 군경과 대치. 도청에서 오른쪽으로 불과 1백여 미터쯤 떨어진 노동청 앞, 도청에서 왼쪽으로 역시 1백 미터쯤 떨어진 충장로 입구에 각기 포진.
- 군인과 경찰은 삼면에서 협공당하고 있음. 도청을 제외한 외곽지대는 완전 치안부재 상태. 이때부터 금남로, 제봉로, 충장로를 비롯, 외곽지대는 시위대들이 닥치는 대로 차량을 탈취, 운전하거나 불태우기 시작했으며 낮에는 없었던 스피커가 나오기 시작. 첫 음성은 여자였다. MBC 방송국 쪽의 시위대는 이 여자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고 전시가가 온통 시위대의 함성으로 가득함. (월간조선, 1985. 7)
- 차량시위를 하던 시민,학생 도청으로 연행
* "전남일보사 앞에서 수백 대의 차량이 헤드라이트를 켠 채 질주해 오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경찰과 공수들이 일제히 최루탄을 쏘자 매워서 눈을 뜰 수 없어 친구와 나는 도청 쪽으로 오던 차를 세워 승차했다. 내가 택시에 탄지 채 5분도 안되었을 때 공수들의 무차별진압이 시작됐다. 나는 택시의 헤드라이트와 유리창을 깨고 덤벼든 공수들에게 붙잡혀 YMCA 앞으로 끌려갔다. 먼저 잡혀온 30여 명의 시민이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었다. 잠시 후 집으로 보내주겠다면서 우리를 미니버스에 가득 태웠다. 약속과 달리 그 차는 도청 앞 광장을 한 바퀴 돌더니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차량시위를 구경하던 시민, 안내양, 기사 등 수백 명이 도청 상황실로 잡혀왔다. 거의 한 시간 간격으로 들락거리는 공수들에게 죽도록 얻어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 얼굴이 퉁퉁 부어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구술 : 임재구 현사연 조사)
* "저녁 8시경 도청 앞에서 차량시위 행렬을 지켜보던 나는 공수에게 붙잡혀 도청으로 끌려갔다. 그곳에는 먼저 잡혀온 시민, 학생들이 3백여 명 정도 있었다." (구술 : 전고선, 현사연 조사)
- 시청에 대기중인 공수, 3대의 트럭에 분승 출동. (시청 상황일지)
- 시청건물은 시위군중의 총공세에 밀린 군과 경찰의 철수로 점거, 접수.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시외곽지대의 시위대들은 주유소를 점거하며 휘발유로 화염병을 만들었으며, 시내 전역의 파출소를 파괴함.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소방서가 시위대에게 접수됨. 2, 3대 소방차 탈취해 사이렌 울리며 도청 6백 미터 전방까지 돌진.
- 계림동 일대 시위군중 1만-3만 명으로 증가.
- 전남대병원 앞 1만 명 시위군중 도청으로 진격. (시청 상황일지)
20:10
- 광주역 로터리에서 군중 2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지 않는 영업용 택시 2대 파손. (시청 상황일지)
- 금남로에 버스 2대와 군중 1만여 명이 군경의 제지로 후퇴, 분산.
- 노동청 앞 3천여 명은 도청을 향하여 진입 시도중.
- 일부는 MBC 방송국 앞을 통과하면서 화염병을 MBC에 던지며 MBC 방송국 셔터 를 파괴.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의 5천여 명은 화학탄 발사로 분산.
- 전남매일 앞 2천 명은 애국가를 부르며 군경과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20:20 - 20:30
- 역전파출소를 점령한 군중은 역 유리창을 파손, 양동파출소 점령, 학동파출소 점령. (계엄사 상황일지)
* "밤 9시경 집 밖을 나와보니 양동파출소가 불타고 있었고 파출소 앞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나는 시위대를 따라 무등경기장으로 갔다. 그곳에 6, 7대의 차량이 있어 시위대가 나누어 타고 전남대 앞으로 갔다. 전남대 앞에서는 시위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구술 : 최현철, 현사연 조사)
20:30 소방서 점령
- 광주소방서 완전 점령, 기물 파괴, 소방차 4대 탈취하여 MBC 방송국 쪽으로 향하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2만-2만3천 도청 앞 집결. (특전사 전투상보)
20:33 도청과 광주역에 남은 공수대 공격
- 시위대의 포위로 경계중인 제31사 병력 고립. (전교사 작전일지)
20:50
- 데모군중이 시청에 침입, 점령(시청은 도청에서 6킬로미터 동북으로 떨어져 있음). (월간조선, 1985. 7)
- 군경의 진압에 밀려 시위군중 충금지하상가까지 후퇴. (시청 상황일지)
21:00
- 도청 차고 방화.
- 광주시내 외곽지역의 주유소를 점거하며 화염병 제작.
- 학동 파출소와 그 앞에 있던 사이드카 2대 전소. 노동청 앞에서 택시 1대 전소.
- 학동, 산수동, 계림동, 양동 파출소 등 대부분의 파출소 파괴, 방화. (1980년대 민주화운동)
* "밤늦게 시위군중과 함께 월산동 파출소로 갔다. 경찰은 이미 도망가고 한 명도 없었다. 이날 낮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데모를 했을 리 만무한 어린 아이의 손을 묶어 탱크의 총신에 매달아놓고 빙글빙글 돌리던 공수의 만행에 치를 떨었던 나는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 기물을 부수고 서류에 불을 질렀다." (구술 : 김결, 현사연 조사)
* "전남대 의과대학 부근에서 전경과 시위대들이 대치하던 중 시위대들에 의해 전경이 포위될 상태에 이르자 전경들이 철수했다. 1백여 명이 넘는 시위군중이 학동 파출소로 이동하여 파출소내 기물을 부수고 방화했다. 잠시 후 소방차 1대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그곳으로 왔다. 그러나 그 소방차에는 시민들이 타고 있었다." (구술 : 조인호, 현사연 조사)
- 목포, 9시 이후 KBS, MBC 방송국-TV 중계가 중단(광주에서 중계해 주는데 중계시설이 부서진 듯).
- 노동청 앞에서 1대의 버스가 전경대의 저지선을 돌파. (말, 1988. 5)
- 노동청 앞에서 불에 탄 차량 버스 2대, 택시 등 모두 12대. (월간조선, 1985. 7)
- 라디오 방송 중단. (전교사 작전일지)
21:00 노동청 앞, 시위진압 경찰 4명 사망
- 나는 전남 도경 기동대 소속으로 근무하던 중 광주사태를 맞이하게 됐다. 5월 20일 밤 여기저기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연기는 전쟁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4줄로 서서 수백 명의 군중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노동청 쪽에서 약 1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주유소가 시민들 수중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퍼내 차에 불을 질러 불타는 차를 우리쪽으로 계속 밀어붙였다. 밤 9시쯤 됐을까? 군중 쪽에서 버스 한 대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 버스는 불타고 있는 차 사이를 곡예하듯 빠져나와 우리 전경부대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아니가! 나는 '피하라!'고 소리치면서 버스를 향해 돌을 던졌다. 전경들은 양쪽으로 쫙 흩어졌 다. 버스는 속도를 늦추며 오른쪽으로 비켜 담벼락을 긁으면서 멈췄다. 버스 쪽 으로 달려가 보니 버스와 담벼락 사이에 경찰관들이 여러 명 깔려 있었다. 순간 울음소리, 신음소리가 뒤엉켰다. 그들을 끌어내려고 팔, 다리를 잡아당기자 이미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사고로 함평경찰서 소속 정춘길, 강정웅, 이세홍, 박기웅 등 4명이 숨졌고 4명이 중상을 입었다.(월간조선, 1985. 7)
* "나는 광주고속버스 운전기사로 5월 20일 오후 7시경 남원에서 승객을 싣고 광주로 왔다. 문화동에 도착하자 주위 사람들이 지금 시내에 난리가 나서 차를 운행할 수 없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승객을 문화동에 내려주고 안내원만 태운 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그때 회사버스 3, 4대가 터미널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터미널에는 회사중역들이 나와 서성거리고 있었는데 내 차를 본 상무가 차가 없어 걱정했는데 마침 잘됐다며 앞에 나가고 있는 차를 따라가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차를 따라나섰다. 도로에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 차가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차를 밀다시피 하여 시내 쪽으로 갔다. 밤 9시가 되었는데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회사에서 동원한 앞 차를 따라 광주경찰서 골목을 통해 MBC 방송국 쪽으로 빠졌다. 내 차에는 우리 회사 김갑진 기사와 시위대원 몇 사람이 타고 있었다.
노동청 앞에서 도청을 향해 차를 돌렸다. 도청과 상무관 앞에는 군인과 경찰들 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남도예술회관 앞의 군경저지선을 향해 서서히 갔다. 군인들이 계속해서 최루탄을 쏘아댔다. 군인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최루탄가스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운전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 운전대를 놓고 운전석 밑으로 몸을 움추렸다. 상무관 앞에서 버스는 도로 귀퉁이로 미끄러졌다.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최루탄가스 때문에 미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버스가 도로에 부딪혀 멈추자 나는 재빨리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버스 안에 있던 시위대와 함께 부근의 지하식당으로 들어갔다. 아주머니가 주는 밥을 먹고 난 뒤 밖이 조용해지자 그곳을 빠져나왔다.
다음날(21일) 아침 어제 저녁의 일이 궁금해 상무관 앞으로 가는 도중 우리 회사의 오석구 기사를 만났다. 그는 나를 붙잡고 큰일났다고 했다. 어제 저녁 내 차에 상무관 앞에 있던 경찰관 4명이 치어 죽었다는 것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날 내 차에 탔던 김갑진 기사는 현장에서 잡혀갔고, 다른 동료기사는 다리에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 사건으로 5월 29일 광주경찰서로 끌려갔다. 그 후 상무대와 보안대, 광주경찰서로 옮겨다니며 한 달 동안 조사를 받고 상무대에서 재판을 받았다. 결국 나는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하던 중 1982년 크리스마스 때 석방되었다. 5.18 관련자로는 마지막으로 석방된 것이다." (구술 : 배용주, 현사연 조사)
21:13
- 3여단 11대대 방어중 금남로 지역에 7만 명의 시위대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 군인 일부를 포함하여 경찰이 담양 방면으로 철수.
21:20
- 7여단 33대대 조선대에 무사히 도착(이동중 투석에 의해 2명 부상). (특전사 전투상보)
21:22
- 3여단 16대대, 투석중인 폭도 4명 체포.
- 항의하며 추적한 70여 명의 폭도들이 각목과 쇠파이프로 난동. (계엄사 상황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