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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게시물ID : panic_927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elody♪
추천 : 23
조회수 : 38327회
댓글수 : 28개
등록시간 : 2017/03/11 15: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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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14일 밤 10시 강남구 역삼동 서진회관(서진룸살롱)에 모두 모인 그들의 운명은 ..... 그들은 이 20분간의 액션으로
삶과 죽음을 결정 짖게 된다. 화려한 룸에서 술을 마시는 그들에게 과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들은 이순간 알고 있었을까
자신들에게 닥쳐올앞날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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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당시 강남 역삼동의 서진빌딩의 서진회관 모습
암울했던 80년대 그당시 조폭간의 칼부림 사건은 흔한일이었을 정도로 유흥가 주변에는 칼부림 사건이 많았고 조폭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어려운 삶에 칼을 휘두르고 살인을 저지르는 등 칼로인한 살인사건이 연일 신문에 안나올 때가 없을 정도로 사회의 질서도
문란 했었다.
폭력조직 간의 조직의 칼부림 뿐만 아니라 인근 고등학교 중학교등 학원가에서도 패싸움으로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심지어는 칼로 상대를 죽이는 사건들도 많았고 동내에서 이러한 학생들의 조폭을 흉내낸 패싸움은 자주 일어났고 많이 보았던 시절이었다.
이당시의 사회관념은 말그대로 폭력이라는게 곧 힘이다는 식의 사고가 만연했었다. 우리나라이딜가도 사람을 안패는 곳은 드물었다.
군대는 더 말할 나위 없고학교의 선생들도 마찮가지였다. 일선 초중고의 학교 선생들도 죽도나 당구 큐대를 들고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체벌 이상의 폭력을 휘들러 학생에게 상해를 입히는 경우는 아주 너무나 흔한 일들이었다.
말그대로 폭력 지상주의 대한민국이 된 것이다. 군사정권의 잔혹한 폭력에 억눌렸던 감정이 국민들에게 "위도 그런데 우리가 좀 폭력 좀 쓰면 어떠냐"는 식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사회의 정의가 되버린 시절이었다.
그당시 폭력수준을 현재와 비교한다면 그당시는 그래도 현재의 학원에서단체 폭행,괴롭힘 같은비굴한 짖거리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이당시의 사회의 폭력 수위는 현재의 10배 이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생각해 보아라 일반적인 거리에서 학생들이 패싸움해서 도망가고 쫒아오는 패거리들이 차도를 넘어서 쓰러진 상대 고등학생을 4차선 도로 위에서 야구방망이로 치는 광경을 이런 광경은 그 당시 너무도흔했다.
정말 이런일은 너무 흔했던 시절이라 파출소 가서도 훈방 정도로 끝날 정도였다. 이게 비정상적인 사회상을 단편적으로 드러내주는 하나의 예일 것이다.
선생은 학생의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학생을 주먹과 발로 패서 이빨이 부러지고 뼈가 부러지는 상해는 지금 처럼 신고도 못했다.
이런 폭력 지상만능주의 사회가 그 당시 80년대 전두환 군사폭력 정권시절의 사회 상황이었다.
이렇게 혼란의 시기에......
그날밤 이곳에서 일어난 칼부림 살인사건은 그 수위가 극에 달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시작
1986년 강남 역삼동 서진빌딩(현재는 영남빌딩으로 개칭) 지하의 서진회관에서는 여름밤의 흥을 돋구기 위해 한가로이 술꾼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다음날이 8.15광복절 이기에 손님들은 많았다.
그날밤 목포파 일당들은 8시30분경에 조직원 전체가 서진룸살롱에서 2개의 룸을 얻어 술을 마시고 있었다.
12호실에는 목포파의 큰형님이라는 정요섭과 3명이 옆 호실에는 20호실에는 장진석외 8명이 자리를 잡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서방파 계열의 오재홍(별명 맘보)이 이끄는 맘보파는고용수 출소 축하를 위해 총 7명이 9시 40분경에 서진회관 17호실로 들어왔었다. 이들은 이미 1차를 다른곳에서 하고 2차로 이 룸살롱으로 들어왔다. 조직의 재건과 단합을 위해 모인자리이기도 하였다.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경 서진룸살롱 20호실에서는 정요섭, 장진석, 고금석, 김동술 등 일명 ‘서울목포파’ 12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은 시각 17호실에서는 조원섭, 고용수, 송재익 등 이른바 ‘목포맘보파’ 7명이 동료의 출감을 축하하며 술잔을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다른 룸에서 술자리를 갖던 이들은 모두 전남 목포 출신으로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화장실을 오가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양측 일행 간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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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쳐다보냐.” “똘마니 주제에….” “너 많이 컸다.”
17호실의 맘보파 중 오재홍은 들어와서 잠시있다가 강남근방에 서방파 두목 김태춘을 만나기 위해 다시 서진룸살롱을 나갔다.
이후 17호실에선 6명이 남아서 있던중에
20분이 지나도 술이 나오지 안자 이왕규가 카운터로 가보겠다고하면서 17호실을 빠져나와 카운터로 갔고 조원섭도 화장실에 같이 가자면서 나가는중에 웨이터를 불러서 룸이 좁으니 다른호실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웨이터는 자리가 없다며양해를 구했으나 조원섭은 자신을 무시한다며 웨이터를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순간 웨이터는 얼굴이 피투성이가되어 평소 자신과 안면이 있던 장진석 패거리가있는 16호실로 들어가서 구원을 청했다.
이에 김승길 고금석이 어떤놈이야 하면서 달려나갔고당시 목포중학교 선배 조원섭이 김승길을 알아보고는 김승길도 인사하고 좋게 끝날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는데
문제는 조원섭의 안하무인격의성격으로 김승길 옆에 식씩거리고 서있던고금석을 향해
"뭘쌍아지없게 쳐다보야 똘마니주제에 놈아"
하면서 주먹으로 고금석의 얼굴을 후려치며 따귀를 서너대 날린다. 이소리를 듣고 17호실에 있던 맘보파 일행들이 나오면서 고금석을 단체로 구타하자 이에 김승길도 16호살로 달려가서일행들에게 알리고 장진석은 콜라병을 들고 목포파 전체에게 다 죽여버려하고 소리질렀습니다.
이때 상황은 밤 10시가 좀 못된 시간으로 두패들은 서로 복도에서 대치하고 있었고 인원은 목포파의 인원이 수적으로 훨씬 많았었다.
앞에있던 김동술과 김승길은 발목에 차고 있던 생선회칼과 대검을 뽑아들었고 조원섭을 향해 씩씩거렸습니다.
이에 조원섭은 "그래 그럼 어디한번 찔러봐 "하고 소리 치자마자
김동술이 잽싸게 달려들어 조원섭의 왼팔을 잡고 대검으로 아래로 내려치자 조원섭의 팔복이 거의잘려 나갈 지경이 되어 덜렁거렸고조원섭은 비명을 질렀다.이때 옆에 있던 고금석은 지니고 있던 대검으로 조원섭의 허벅지를 찔렀다.
이광경에 놀란 맘보파 차권은 미리 17호실 앞의 악사대기실로 미리 들어가 숨었고 나마지 송재익,고용수,장경식 등 3명은 조원섭을 데리고같이 17호실로 황급히 들어가 문을 잠궛다.
문밖에서 문열어 하면서 소리치면서 서진룸살롱은 말그대로 죽음의 공포의 장소로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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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15일 촬영된 서진룸살롱17호실의 처참한모습
(당시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피로인하여 마치 지옥에 온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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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직후 기자들이 촬영한 서진회관 17호실 앞복도 피가 바닥에 낭자해 있다.
이때 밖에 있던 김동술은 막내였던 권모군에게 차에서 칼과 야구방망이등을 가져오라 지시 합니다.
권군은 차에서 야구방망이와 칼을 2자루 더 가져오고 목포파 이들은 `17호실 문을 박살내고 들어가자마자 겁에질린 그들을 향해서 김동술 고금석 김승길이 중심이 되어 칼로 4명의 다리와 팔 등을 난자하고 뒤에 있던 일당들도 야구방망이 쇠파이프 등으로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가격했다.
회칼과 흉기를 이용한 이 살인적 폭력은 10여분 동안 계속 되었다.말그대로 쓰러져 정신을 잃은 사람을 계속적으로 찌르고 야구방망이로 가격하는 잔인무도한 살인행각을 벌인 것이다.
1986년 8월 14일 여름밤 장마철이 시작 된 그 시기에 서진회관에서 벌어진 회칼에 의해서 피의 살육을 저지른 이 대형범죄 사건은....
향후 25년 동안 우리나라의
10대 강력사건으로 그 기록을 남기게 된다.
이때 장진석은 마대자루를 들고 상대가 도망을 못가게 문앞 복도에서 지키고 있었다고 신문상과 진술상에는 전해진다.
카운터에서 흥정을 하고있던 이왕규는 이광경을 목격하고 바로 도망치고 20분이 흘러서야 17호실에서의 칼부림과 흉기질은 끝이나고 4명은 말그대로 피범벅이되어 문앞 화장실 바닥 쇼파 바닥에 모두 쓰러진 시체가 되어 있었다. 말그대로 홀안과 복도는 사방이 피로 지옥과도 같은 장소가 되버렸다.
잠깐 여기서 조원섭과 맘보파 조직원의 애기를하자면
조원섭은 전국에서 주먹으로 당할 자가 없었던 싸움꾼이라는 말이있을 정도로 싸움실력이 출중했고 같이 피살당한 고용수,송재익도 서방파에서 알아주는 주먹으로 그 이름을 새긴 자들이지만 좁은 룸에서 칼과 야구방망이로 죽일려고 달려드는 그들 앞에서는 손쓸겨를도 없이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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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스틸컷은 영화의 한장면 사건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이때 까지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장진석 일당들은 이들을 어깨에 둘러매고 룸싸롱 뒷문에 있는 로얄살롱 승용차와 프라이드에 피해자들을 트렁크 등에 나누어실고 김동술은 이때 온몸이 피가 튀어 피법벅이된 손에 피가 떨어지는 회칼을 든채로 나오더니 칼을 들이데면서 가게안 종업원과 영업전무를 불러서 신고하면 다시와 죽여버린다고 협박한 뒤에 피가 흐르는 칼을 들이데며 협박했다. 홀안의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할것 없이 너무도 큰 충격에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17호실에 있었던 7명중3명은 화를 면하고송재익씨,고용수씨,조원섭씨,장경식씨는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당시 피해자였던 이들의 사진은 유족들을 위해 올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사당동 정정형외과에 시체를 버리고 달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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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석, 김동술 등은 4구의 시체를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싣고 현장으로부터 약 8㎞ 떨어진 사당동의 정정형외과에 버리고 달아났다.
이들의 일당인 홍성규라는 조직원이 당시 이병원에 입원해 있었기에 이들은 이병원으로 왔었다고 한다. 이들은 호성규에게도 도망가라고 애기 한뒤 서둘러 뛰어 나갔다고 한다. 홍성규는 목발을 짚고 택시를 타고 병원에서 나왔다.
당시 목격자와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이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 4명을 들쳐업고 정형외과에 뛰어들어와 2명은 1층 계단에, 나머지 2명은 2층 수술실 앞에 던져놓고 “교통사고 환자”라고 외친 뒤 사라졌다고 한다.
(이당시 부검 결과 한명은 40회 이상을 찔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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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동 서진룸살롱 집단살인사건 당시 조직폭력배 4명의 피살체를 운반한 승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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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동 서진룸살롱 집단살인사건 당시 조직폭력배 4명의 피살체를 운반한
승용차 뒤 트렁크에서 발견된 피묻은 와이셔츠ㆍ양복등 물증들. 1986년 8월 장충동
특히 젊은 혈기에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그들...
사건 발생상황을 다시정리하자면 이렇다.
유독 목소리가 큰 서울목포파 고금석이 목포맘보파 조원섭의 측근들과 욕을 하며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20호실 문 너머로 들려왔다. 방에 있던 김동술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김동술이 돌아오지 않자 또 다른 몇몇이 따라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일행이 돌아오지 않자 서울목포파의 선임자 격인 장진석이 밖으로 나섰고 일행으로부터 “별 일 아니다. 원섭이 애들이 먼저 때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순간 분노한 장진석은 룸으로 돌아와 콜라병 두 개를 쥐고 복도로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싸움은 양측간 집단 난투극으로 번지며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만들어내게 된다. 

특히 젊은 혈기에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김동술과 고금석 등이 흉기를 휘두르면서 사건은 유혈사태로 번지고 만다. 이들은 평소 지니고 다니던 회칼로 상대방의 하체 부위를 찔렀고 다른 일행들도 차량에 싣고 다니던 야구 방망이 등을 가져와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조원섭 등 목포맘보파 일행은 흉기를 갖고 있던 이들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목포맘보파의 조원섭, 고용수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사건 다음날 모두 자수하였지만
사건의 주범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김동술은 도망쳤다.
이들은 다음날 장진석,김동술을 제외하고 자칭 큰형닙이라 불리는 정요섭등 모두 자수하였고
이틀 뒤 서진룸살롱에 없었던 홍성규,유회룡도 자수하였고,주범인 김승길도 자수하였다.
강정휴는 위장자수로 들통이 낫다. (강정휴는 위장자수 협위로 3년간의 형을 살았다.)
유회룡은 직접적인 사건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고나머지 사관과 관련된 인물들은 모두 경찰에 출두하였다.
서진룸살롱 지배인 종업원 까지 모두 출두한 마당에 정작 사건의 핵심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김동술은 보이지 않고 행방이 묘연하였다.하지만 이틀후 그들의 친구나 주변사람들을 심문하여 그들의 제보에 의하여 어디에 숨어있는지 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건 당시 브리핑 자료로 작성한건데 천종갑이라는 사람은 별 관련이 없고 오재홍이라는 서방파 직계의 맘보파 두목이 관련인물로서 얼마전 한화 이승연회장의 청부폭력에도 관련됬던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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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피해자측 맘보파의 두목은 오재홍이라는 자로서 감옥에 수감되어 옥살이를 마치고 나온지 얼마안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조직원들의 출감을 계기로 조직의 재건을 위해서 모인 장소가 우연찮게 조직을 파멸로 이끈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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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음날 자수한 정요섭, 고금석,강정휴(위장자수),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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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한 김승길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 서진 룸싸롱 살인 사건 | 인스티즈
체포되어 오는 유회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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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 자수한 홍성규
 핵심 인물인 장진석과 김동술은 잡히지 않은체
서진룸살인사건은치인과의 마약조직과의 관계등등 수사는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사건당시 목포출신 정치인과 관련설도 나돌았고 세월이지나 전두환 정권이 물러나고 나온 소문이 당시전경환이 유도대생들 뒤를 봐주고 자신의 경호원으로 많이 대동하고 공식석상에 나타났는데 서진룸살롱의 목포파 유도대생들도 연관이 있지않았나 하는 관련설들도 돌았으나
확실히 검증된 사실이 아닌 추측에 불과하고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이날 목포파 이들이 누군가에게 잘보이기위해서 믿는 구석이 있어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등의 소문도 있으나
좀 설득력이 떨어지는 추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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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룸살롱의 주범들 주변인물들은 모두 잡아들였지만
정작 사건의 핵심인물이었던 두목 장진석과 부두목 동술은 잡히지 않았다.
생의 막장으로 치닫던 그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했다. (장진석,김동술)
장진석 김동술은 사건 발생 4일 만에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용리 산속의 섬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그들을 체포할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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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석 김동술이 마자막으로 숨었던 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용리 산속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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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석 김동술은 낚시꾼으로 위장해 헛간에 숨어서 지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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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들이 은신했던 헛간. 범인들은 경찰의 현상수배망을 뚫고 벼룩호수 가운데 섬까지 숨어들었다.
장진석 김동술이 숨은 위치를 파악한 형사 9명은 출동하여 낮은 포복으로 목표지점까지 기어가서 공포탄을 쏘며 자수할 것을 소리쳤으나
범인들은 회칼로 위협했고 급기야는 총성에 놀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에 형사들은 재빨리 달려들어 권총으로 머리를 쳐서 쓰러트린 뒤 완력으로 이들 2명을 제압했다.
장진석 김동술은 경찰차에 타고 서울로 오면서 긴장해 있었고 장진석은 이제 속이다 후련하다며.. 포기의사를 내비쳤고
형사들에게 우린이제 끝난거죠..하면서 물어보고 김동술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거지요물어보면서 불안감을 감추지는 못햇다고 한다.
이들은 오는 중에 차에서 빵과 캔맥주를 형사들이 사줘서 먹기도했다.
체포차량은 이제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서초경찰서에 도착했다.
이들이 서울서초경찰서에 이르러 차에서 내린 순간 수많은 기자들과 취재진들을 보고 신경질 적인 반응을 보이면서도
비웃는 듯한 웃음을 보이면서 애써 긴장된 모습을 보이려 하지않았다.
 
 
【임실=이덕령·김석현기자】결정적인 주민제보가 흉악범을 잡았다.
일본밀항을 꿈꾸던 영동 서진룸살롱 주범인 장진석씨와 칼잡이 김동술씨는 서울로 압송된 후에도 뉘우치는 빛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뻔뻔스럽고 당당한 표정이었다.
사무라이 처럼 살다 간다|뉘우치는 기색없어
이들은 형사대가 덮치자 과도를 들고 대항, 10여분간 격투를 벌이기도 했으며 뒤로 수갑을 찬 후에도 계속 반항해 공포를 쏜 후 묶어야 했다.
이들은 서울로 압송되는 차속에서도 경찰관을 향해 『형님들 5명만 온 줄 알았으면 승부를 걸었을텐데 적어도 전경 30여명은 우리를 포위한 줄 알았다』 고 말하고 『사무라이처럼 살다 간다. 이젠 우린 끝났다』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검거=제보를 받은 서울서초경찰서 김옥식경장(40)등 형사 5명은 19일하오3시30분쯤 전북 임실군영암면옥정호 마근댐의 선착장에 도착했다.
김경장등은 제보자인 안내인과 동행하고 있었다.
김경장등은 도선 「마암 6호 사공 박병옥씨(22) 에게『유람왔으니 돈은 걱정말고 서너시간만 타자』며 배를 탄 뒤 북동쪽으로 40분쯤 달려 섬 한가운데에 있는 임동하씨(45) 집에서 2km쯤 떨어진 수수밭 부근에 배를 대게 했다.
김경장등이 갈대밭을 통해 임씨집으로 접근하고 있을 때 임씨집에선 부인 송순내씨(49)가 마당에서 빨래를 널고 있었으며 범인들은 안채로부터 10m쯤 떨어진 초가헛간에 누워 있었다.
당시 임씨와 임씨의 동생 동원씨(33)는 마침 이날 영암장터에 나가고 없었고 세아들도 근처 강가에 나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형사대는 발소리를 죽여 범인들이 누워있는 헛간으로 접근, 장씨등이 헛간안에 누워있는것을 확인한 뒤 한꺼번에 덮쳤다.
◇반항·격투=이때 두목 장씨가 바닥에 있던 길이 15cm쯤의 과도를 오른손에 들려고 하자 형사대는 『꼼짝마라. 그대로 엎드려』 라고 소리치며 장씨의 오른손을 쳐 칼을 빼앗았다.
장씨등이 형사대에 저항할 자세를 취하자 김경장과 이지운순경등 2명이 공포를2발씩 쏘며 범인들을 동시에 덮쳤고 범인들은 형사들을 떼밀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1·5평 헛간에서 벌어진 격투로 헛간은 피가 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범인들을 덮친 형사대는 이들을 바닥에 엎드리게 한 뒤 권총손잡이로 장씨의 왼쪽머리와 김씨의 오른쪽 이마를 한차례씩 내리쳤다.
형사대가 장씨등에게 뒷수갑을 채우고 밖으로 나오자 범인들이 마당에서 또 다시 반항, 공포3발을 쏜 뒤 범인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고 나일론줄로 묶었다.
◇소지품=형사대는 범인들이 은신했던 헛간에서 소형라디오 2대, 이불 1채, 야외용 비닐돗자리 1장, 낚시용모자1개, 슬리퍼 2켤레,트레이닝복 2벌등을 압수했다.
◇범인잠입=범인들은 18일 하오8시30분쯤 옥정호수 남쪽 영암면소재지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외얏날 섬에 도착, 임씨집 헛간을 빌어 은신했다.
임씨에 따르면 이날 안방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장씨등이 찾아와 『몸이 아픈데 낚시나 하며 쉬었다 가고싶다』고 말해 방2개를 식구들이 모두 쓰고 있어 헛간밖에 없다고 하자 헛간을 보여줄것을 요청, 어망들을 쌓아놓은 헛간을 확인한 뒤 『이만하면 됐다. 사흘쯤 쉬고 가겠다』 며 헛간을 사용했다는것.
임씨는 장씨등이 트레이닝복을 입고 낚시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있어 흔히 찾아오는 낚시꾼인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
장씨는 외얏날섬에 잠입하기전 도피중이던 유원희씨의 형집에서 봉고트럭을 몰고 선착장으로 가던중 기름이 모두 떨어지자 선착장에서 11km쯤 떨어진 전북임실군신평면원천리산60 산길에 봉고 트럭을 버리고 버스편으로 선착장까지 왔었다.
장씨등은 임씨집에서 하룻밤을 잔 뒤 19일 아침8시쯤 임씨가족들과 함께 아침식사를하고 방안에 계속 머물다가 점심때쯤 임씨의 2남 용섭군(15·중2)에게 점심을 차려줄 것을 요구, 용섭군 형제들이 차려준 점심을 먹었다.
장씨등은 식사도 서둘러 하는 등 임씨집 가족들과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장씨등이 산길에 버린 봉고트럭안에서는 길이20cm가량의 신품 과도 1개와 휴대용 가스레인지· 버너· 코헤르·텐트·방울낚시 3개등이 발견됐다.
장씨등이 은신했던 외얏날섬에는 임씨가족 이외에 2가구가 더 살고 있는데 다른 집 사람들은 장씨등이 섬에 들어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제보=범인일당중 한사람의 형이 공범인 동생이 18일 서울에서 검거된 사실을 알고 장씨등이 옥정호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것으로 판단, 장씨등이 섬에 잠입한 18일 하오11시쯤 친척을 시켜 장씨등이 외얏날섬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제보자는 19일 상오 평소 알고 지내던 서울동부경찰서 김복균순경(39)에게 장씨등의 정확한 도피장소등을 제보했다.
◇도피=장씨등은 사건직후 함께 합숙훈련을 했던 서울암사동 강동아파트 81동508호로 피신했다가 15일상오 훔친 서울4나1313호 레코드로열승용차를 타고 용인 유도대앞에서 식당을 운영, 평소 알고 지내던 경기도구리시 송화영씨(35) 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들은 16일 상오 송씨에게 칼 19자루를 맡긴 뒤 택시를 타고 경기도과천시 주공아파트313동406호 유원희씨의 애인 박모양(21)집으로 가 하룻밤을 새우고 17일 상오 유씨의 친구인 윤일규씨 (26·트럭행상·서울천호동325의12)의 서울8다9506호 봉고트럭을 타고 전주 운암낚시터에 도착, 하룻밤을 야영했다.
장씨등은 18일 상오 전북완주군이서면이문리645 유씨의 형 근희씨 (35) 집에 도착, 휴식을 취하다 이날하오 근희씨로 부터 낚싯대와 텐트를 빌어 근희씨 집에서 15km 쯤 떨어진 임씨집 근처 저수지에서 낚시꾼을 가장, 행동하다 경찰에 붙잡혔다.

[출처: 중앙일보] 너무 뻔뻔스러웠다|쇠고랑찬 「칼잡이」 장진석·김동술


 
체포하여 경찰청으로 들어가던 중에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자>현재의 심경이 어떤가
장진석> 후련하다 이제 다 끝났다.
MBC기자가 김동술에게도 질문한다.
 자> 이번일에 후회하지 안나
김동술> 부모에게 불효를 저질러서 후회되고 애초에 애들이랑 같이 논 우리가 잘못이다.(피식 웃는다.)
 정의롭게 살고 사무라이처럼 죽고 싶었는데이제는 다 틀려버렷다.
 형님들(형사들)만 온줄 알았으면 한번 붙어봐도 승산이 있었는데....
  숨어있을 때 형사들과 전경들이 다 둘러 싼줄 착각했다.(다시 피식웃는다.)
참으로 번뻔한 대답이었고 한편으로는 아직도 힘 자랑 할 생각을 하다니...(실제로 장진석 김동술은 그리 큰 체격이 아니었다)
이러하듯 김동술은 자신이 얼마나 큰 사건을 저질렀고 자신이 이제는 어떻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23살의 순진함이 이제나 보이는 것도 같았다.이렇듯 횡성수설해 주위 사람들을 황당하게 하였고 "애들이랑 논 우리가 잘못이지요"는 전국적으로 유행어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국민들이 받은 충격은 상당히 컷다. 깡패들 끼리의 싸움이라 하지만 아무 목적 없이 단순한 시비 끝에 4명을 죽인사건 그것도 회칼로 사람을 수십군데를 찔러서 죽인 정말 이 어이없고도 잔인한 사건에 전국은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이때 기자들이 계속 밀려오자
장진석이 기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장진석> (자들을 향해 큰소리로 호통을 친다.)
 " 이 사람들이 뭐 그거 큰 구경났소 사람 처음 봐"
이렇듯 이두명은 아직까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또한 뻔뻔한 자세로 일관했다.
장차 자신들이 저지른 일들이 20년이 넘게 역사의 강력범죄 10대 사건으로 기록될 일을......
기자들은 게속적으로 질문공세를 펼쳤으나 그둘은 잠시후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체포되어 서초경찰서 앞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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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경찰서 취조실로 들어가기 전의 모습은 니름 여유로와 보였으나
취조실에서의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조사내내 울기만 했다고 전해진다.
아래 2명은 왼쪽의 장진석은 교도소에 무기로 현재에 수감중이고 오른쪽 김동술은 구속후 1년10개월 만에 사형 당했다. 나이 23세에 살인범죄를 저질러 체포되어 25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적 인물이기도 하다. 죄값을 죽음으로 치룬 샘이 된거다.
부디 후생에서는 선한자로 다시 태어나길 빌겠다.
이사건은 발생된 동기와 결과도 끔찍했지만 그 결과도 너무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20대 젊은이들이 4명이 살해 당하고 2명이 사형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2명이 무기징역으로 현재 까지 수감중이다.
이들의 범행에 말들이 말이 많았지만 이유는 없었다 젊은 혈기에 우발적으로 저질러진 범행으로 먼저 모욕적인 시비를 걸어온 상대를 8명이서 살해해 병원에 던저놓고 도망가버린 실로 어이없는 사건이 아닐수가 없었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현장검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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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검증을 위해 버스에 태워진 칼잡이들. 범인들은 뒤늦게 후회하는듯 고개를 깊게 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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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 14일 밤 10시 - 서진 룸싸롱 살인 사건 | 인스티즈
범인들이 서진룸살롱 살해 현장의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체포시와는 반대로 김동술 장진석등은 많이 살이빠져 수척해 있었다.
서진회관 입구에서는 피해자들의 유족들이 항의 소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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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최종 수사발표
서진룸살롱의 피의자 목포파는 조직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우발적 상황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라고 경찰은 최종 발표했다.
맘보파는 서방파 직계의 계보가 있었던 조직이었던 반면에 장진석이 이끄는 목포파는 계보없이 일정 수입원을 청부폭력으로 채우는
폭력조직으로서 정요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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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서 발견된 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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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차량에서 등에서 압수한 흉기들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재판과정과 죽은자들의 삶에 대한 후회..... 공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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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강남 서진룸살롱 집단살인사건의 주범 장진석등의 칼잡이들이 서울구치소로 송치되고 있다.
1986년 9월 3일
고개를 숙이며 들어가는 김동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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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돌리는 장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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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공판을 받기위해 법정으로 들어서는 서울 영동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칼잡이들.
검거당시의 뻔뻔스런 모습과는 달리 모두 고개를 숙인채 카메라를 피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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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판결을 받고 나오는 고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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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판결을 받고 돌아가는 장진석 피고인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김동술과 고금석씨는 사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만26세의 나이로 죄값을 치렀습니다.
이들은 유도대(현재의 용인대학교)출신으로선배들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신의 영혼을 팔아 악행을 저지른 그댓가를 처절히 받았습니다.
이들의 죄를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선배인 장진석의 지시에 따라 흉악 무도한 일을 저질렀고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재판초기에는 이들은 장진석을 보호하고 자신들이 죄과를 다 뒤집어 썼습니다.
이들은 원래 부터 악한자들이었을까요 시건 종결후 이들의 동창과 지인들의 말에 따르면 덩치만 크고 힘만셌지 마음은 무척 여린 사람들이었다 하더군요
이들이 조직폭력배의 길에 들어서게 된건 가난한 집안 환경과 더불어 가난한 이들의 약점을 유혹하는 조폭 선배들이라는 이들의 감언이설에 의해서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됬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렇지 않은 자들도 간혹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의 영혼을 판 그 댓가를 죽음으로 치렀습니다.
2명이 사형수가 되기 까지에는그들 스스로의 죄가 너무도 잔학무도 했던것이기에 당연하지만 선배라고하는 장진석(당시 26세)과 큰형님으로 통했던 정요섭(당시41세)은 자신들은 그런지시를 한적이 없었다. 그렇게 죽이라고 시키지 않았다 나는 모른다는 식으로 발뺌하기 바빴습니다.
결국 장진석은 무기수로 감형되었고 정요섭(당시41세)은 15년을 판결 받았습니다.
심지어 장진석은 자신은 죄가 없고 옆에만있었지 아무짖도 안했다 내가만약에 사형으 받는다면
재판장에서 개판을 칠것이라고 오히려 교도관들을에게 엄포를했다고 신문기사에도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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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에서도 사형판결을 받고 돌아가는장진석 체포시와는
반대로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김동술과 고금석씨는 죽을 죄를 저지른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한 죽음으로 그 무거운 업보를 값았습니다.
이미 죄값을 치르고 죽은 그들에게 더 이상의 욕하고 싶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흉악한 그들에게 연민의 슬픔이 아련하게 느껴지는건 왜일까요
그들은 너무도 단순했고 무지몽매한 자들이었기에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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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 2번째가 고금석씨
김동술과 고금석은 자신들이 사형판결을 확정 받고서야 최후 진술에서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재판장에서 눈물반 진술반으로 하염없이 울면서 재판장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하더군요
서진룸살롱 살인범들 중에 유독 덩치가 컷던 김동술 고금석씨 그들은 자신만의 안위만을 지킬려는 선배들에 대한 원망과 실망감도 같이 애기했습니다.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 서진 룸싸롱 살인 사건 | 인스티즈
1986년 8월 14일 밤 10시 - 서진 룸싸롱 살인 사건 | 인스티즈
이 사건으로 사형당한 김동술 고금석씨는 부디 후생에서는 이러한 악한 삶을 살지 않기를 빌어 봅니다.
장진석은 현재 공주교도소에서 그 죄업을 진심으로 뉘우치면서 무기수로 복역중이고
 장진석과 같이 무기형을 받은 김승길도 옥중결혼식을 치르고 무기수로 아직도 자신의 죄과를 치르고 있습니다.
소동이 났던 서진회관은 아직도 역삼동에 그 건물이 그대로 있고요(영남빌딩) 시체를버렸던 사당동 그병원도 그당시
 원장님이 그대로 운영하고 계십니다.사건의 주범이었고 당시 이병원에 입원해있던 홍모씨가
출소하고 원장 선생을 한번 찾아와서 뵈었다고 하더군요
고금석과 김동술씨는 자신들의 죄과를 땅을 치며 반성하고 후회했지만 이들은 판결후 3년이 좀 안되
1989년 서울구치소 사형장에서 그 죄값을 치렀습니다. 김동술씨는 발판이 내려가지않아 45분후에 다시 사형이 집행됬다고 하더군요 그 공포가 온몸으로 그의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게 했다고 하더군요.....
김동술,고금석 이두명은 남은기간동안 많은 선행을 배풀었고 마지막엔 자신의 몸을 모두 기증하였다고 하더군요 과연 무었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아래는 수사반장 안경식 경위가 화고하는 서진룸살롱 사건이야기
수사반장의 잊혀지지않는 사건 서진룸살롱 사건
1986년 8월 14일 밤 서울 강남의 한 룸살롱에서는 마치 조폭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잔인한 장면이 펼쳐졌다. 일단의 건장한 20대 청년들이 야구방망이와 회칼을 휘두르며 또 다른 한 무리의 청년들과 집단 난투극을 벌였던 것. 룸살롱 내부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해버렸고 이 와중에 4명이 끔찍하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5공화국 말 우리 사회를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넣었던 일명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은 ‘조직폭력배들의 치열한 이권다툼’ ‘복수와 응징으로 점철된 어두운 조직세계의 단면’ 등의 제목으로 연일 매스컴을 장식했다. 탈법적인 삼청교육을 강행할 만큼 ‘민생치안’을 정권의 특장으로 삼으려 했던 5공 정권에겐 곤혹스러운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사건 직후 정부는 전국 경찰에 폭력배 일제 소탕령을 내렸고 주먹세계에는 거대한 검거 회오리가 치기도 했다.

‘집단탈주범 인질사건’ ‘원혜준 양 유괴살인사건’ 등과 함께 80년대를 뒤흔들었던 대표적인 대형 사건으로 꼽히는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과연 20여 년 전 활자화된 ‘사실’ 뒤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지난 1월 16일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안석호 경위(53·광진경찰서 수사폭력 2팀장)를 만나 기억의 편린을 들춰봤다.

안석호 경위는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바로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이따금 역삼동 그곳을 지나갈 때면 여전히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듯하다”는 말로 서진룸살롱 사건의 ‘추억’을 떠올렸다. 안 경위는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근무하던 시절 이 사건을 담당했다. 

당시 언론 등이 전한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86년 8월 14일 밤 10시 30분경 서진룸살롱 20호실에서는 정요섭, 장진석, 고금석, 김동술 등 일명 ‘서울목포파’ 12명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같은 시각 17호실에서는 조원섭, 고용수, 송재익 등 이른바 ‘목포맘보파’ 7명이 동료의 출감을 축하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서로 다른 룸에서 술자리를 갖던 이들은 모두 전남 목포 출신으로 평소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하지만 화장실을 오가며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양측 일행 간에 사소한 시비가 벌어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유독 목소리가 큰 서울목포파 고금석이 목포맘보파 조원섭의 측근들과 욕을 하며 시끄럽게 싸우는 소리가 20호실 문 너머로 들려왔다. 방에 있던 김동술이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김동술이 돌아오지 않자 또 다른 몇몇이 따라나갔다. 시간이 지나도 일행이 돌아오지 않자 서울목포파의 선임자 격인 장진석이 밖으로 나섰고 일행으로부터 “별 일 아니다. 원섭이 애들이 먼저 때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순간 분노한 장진석은 룸으로 돌아와 콜라병 두 개를 쥐고 복도로 나갔다. 이렇게 시작된 싸움은 양측간 집단 난투극으로 번지며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을 만들어내게 된다. 

특히 젊은 혈기에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던 김동술과 고금석 등이 흉기를 휘두르면서 사건은 유혈사태로 번지고 만다. 이들은 평소 지니고 다니던 회칼로 상대방의 하체 부위를 찔렀고 다른 일행들도 차량에 싣고 다니던 야구 방망이 등을 가져와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다. 조원섭 등 목포맘보파 일행은 흉기를 갖고 있던 이들의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목포맘보파의 조원섭, 고용수 등 4명이 그 자리에서 살해되는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김동술 등은 4구의 시체를 승용차 두 대에 나누어 싣고 현장으로부터 약 8㎞ 떨어진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에 버리고 달아났다. 당시 목격자와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이들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남자 4명을 들쳐업고 정형외과에 뛰어들어와 2명은 1층 계단에, 나머지 2명은 2층 수술실 앞에 던져놓고 “교통사고 환자”라고 외친 뒤 사라졌다고 한다.

피살된 4명의 상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특히 하체 부위를 집중적으로 난자당했고 워낙 많은 피를 흘려 온몸이 피로 뒤범벅돼 있었다고 한다. 갖가지 강력사건을 맡아온 안 경위조차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강력반 형사들 중에서도 그렇게 피가 낭자하고 끔찍한 사체를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라고 밝혔을 정도. 안 경위는 당시를 회상하며 “상처는 생명에 지장을 주는 급소와는 거리가 있는 하체 부위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어찌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 피비린내는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며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수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사건 이틀 후 조직의 우두머리 격이던 정요섭 등 7명이 자수를 해왔고 주범인 장진석과 김동술 등 나머지는 전북 임실군 운암면의 작은 섬에 숨어 있다가 경찰에 검거됐다. 유혈 참극이 벌어진 지 4일 만에 사건이 해결된 것이다. 8월 22일 경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고, 관련자 12명은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당시 이 사건은 장진석 등이 중심이 된 서울목포파와 조원섭 등이 중심이 된 목포맘보파 두 조직 간의 이권다툼 끝에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또 숱한 루머들과 뒷얘기들을 낳으며 오랫동안 세간에 오르내렸다. 


하지만 안 경위는 가해자인 김동술 등을 조직폭력배로 지칭한 당시 매스컴의 보도는 과장된 면이 있다며 이 사건이 전문 조직폭력집단 간의 세력싸움은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경찰의 감시를 받는 폭력조직의 일원이 아니었고 조직의 명칭 역시 수사과정에서 편의상 붙여진 것일 뿐 실제로는 그런 조직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동향 출신으로 대학 때 상경해 합숙생활을 하며 뭉쳐다니던 패거리였을 뿐이라는 것. 당시 가해자인 김동술 등은 대부분 유도대학 재학생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주었는데 이 사건으로 한때 유도대학은 ‘깡패양성소’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하지만 안 경위에 따르면 가해자인 김동술 등은 사실 덩치만 컸지 전문 싸움꾼도 조직원도 아니었다. 이들은 체격이 큰 데다가 운동을 하면서 생긴 객기로 거들먹거리고, 조폭세계의 ‘의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품고 조직의 생리를 추앙하던 인물들이었다고 한다. 즉 김동술 등은 소위 ‘운동 좀 했다’는 객기로 똘똘 뭉친 선후배 체대생들이었을 뿐 계보가 있는 폭력조직의 일원이 아니었다는 것. 

안 경위는 “김동술 등은 당시 다른 무리들로부터 공격받을 것을 우려해 각자 생선회칼 등을 몸에 지니고 야구방망이 등을 차에 싣고 다녔는데, 이것도 애초 살인을 계획해서가 아니라 ‘섣불리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식의 한낱 객기성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운명의 그날 순간적인 분을 이기지 못한 김동술 등이 지니고 있던 흉기와 야구방망이를 이용해 상대편 일행에게 무차별적인 가격을 가했고 이것이 예기치 못한 살인으로 이어졌다는 게 안 경위의 설명이다. 

실제로는 야구방망이와 회칼 앞에 속수무책으로 살해당한 조원섭 측이 오히려 훨씬 더 강한 상대였다는 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 중 하나. 뜨내기 체대생들은 흉기만 없었다면 사실 조원섭 측에 상대가 안 됐다는 것. 특히 조원섭은 당시 지방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으며 뒤를 봐주는 비호세력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회칼 앞에서는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 사건은 검사조차 논고에서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당시 사회를 충격 속으로 넣기에 충분했다. 특히 김동술 등은 검거 후 카메라를 빤히 쳐다보며 웃음을 짓거나 욕설을 하는 등의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여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이들을 직접 대면해 취조했던 안 경위는 이들에 대해 여지껏 알려진 것과는 사뭇 다른 증언을 하고 있다. 

안 경위는 주범인 김동술 등에 대해 “운동을 한 애들답게 체격이 크고 훤칠하게 생긴 건장한 청년들로 기억된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이들은 검거 직후 매스컴 앞에서는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객기를 부려 여론의 질타를 받았지만 막상 조사를 받을 때에는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죽일 생각은 절대 없었다”며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영웅심리’에 빠져 한순간의 실수로 인생을 망쳐버렸다며 후회하더라는 것. 

하지만 법의 심판은 냉정했다. 1987년 10월 주범 김동술·고금석은 사형, 김승길·장진석은 무기징역 등의 확정판결을 받았고, 사건 발생 3년 만인 1989년 8월 14일 김동술과 고금석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어지는 안 경위의 술회.

“그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들은 분명 살인을 했으니 비난받아 마땅하고 그래서 이미 법정 최고형의 죄 값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우발적이었다는 말이다. 요즘도 운동을 하거나 힘 좀 쓴다는 사람들 중에는 욱하는 성질과 객기에 크고 작은 사고를 치는 이들이 종종 있다. 나도 젊을 적에 운동을 해서 잘 안다.
그들도 그런 생각에 몰려다니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만 것이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그들이 꼭 그런 꼴이었다. 폭력조직에 정식으로 몸담은 적이 없었던 그들은 ‘의리’를 운운하고 몰려다녔을 뿐 조직의 생리를 몰랐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습니다. 피를 보게 되니 눈이 뒤집혀서 그만…’이라던 그들의 절규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4명을 무참히 살해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김동술과 고금석에 대한 뒷이야기는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앞날이 창창한 20대의 젊은 나이에 사형수가 된 두 사람은 모두 종교에 귀의, 자신의 과오를 뼈저리게 뉘우치다 죽음을 맞았다. 

고금석은 법정 사실심리에서 모든 범행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진술, 선배인 장진석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구치소 내에서 불교에 귀의해 27세에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자신의 영치금과 사역비를 불우한 재소자나 나병환자 등에게 내줄 정도로 거듭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후에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안구와 콩팥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한 교도관을 통해 알려지면서 잔잔한 감동을 던졌다. 

또 다른 주범 김동술도 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검찰 조서에는 ‘김동술이 피해자 정 아무개를 야구방망이로 머리와 몸통을 10여 회 강타하고 생선회칼로 팔을 2회 찌르는 등 가장 주도적인 행위를 하였고… 고 아무개의 이마, 팔, 허벅지 등을 11회나 찔러 살해하는 등 무자비하고 잔혹한 가해행위를 하였다’고 나와 있다. 사건 당시 그의 범행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동술 역시 옥중에서 가톨릭에 귀의, 짧지만 새로운 인생을 살았다. 그는 참회의 나날을 보내다가 “주여, 이 몸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외치며 26세의 나이에 사형대에 올랐다. 

안 경위는 “사형 소식을 듣고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착잡했다”며 “그렇게 후회할 것을 왜 좀 더 일찍 어둠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안 경위는 “언론에서는 조직폭력배와 회칼 등을 들먹이며 떠들어댔지만 정작 수사를 진행한 우리들에게는 한창 피끓는 젊은이들의 객기와 영웅심리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986년 8월 14일 서진룸살롱 사건과 고금석 


"교통사고 환자요!" 1986년 8월 14일 밤, 사당동의 한 정형외과 앞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 4명이 업혀 왔다. 그런데 환자를 업고 온 보호자(?)들의 행동은 그렇게 얌전하지 못했다. 마치 쌀가마를 부리듯 계단 앞에 내쳐 버리고는 총총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교통사고 환자가 아니었다. 사정없는 칼질을 당한 채 널부러져 있는 그들은 목포 맘보파 조직원 4명이었다. (예전에 김승연 한화 회장의 보복폭행시 대동했던 조폭이 이 조직 출신) 그리고 '교통사고'를 일으킨 이들은 역시 목포가 고향들이었던 서울목포파 조직원들이었다. 

서진룸살롱에서 각각 다른 방에서 술을 먹다가 일부가 복도에서 시비가 붙었다 "뭘 보냐?" 에서 "어쭈 많이 컸다."로 시작한 언쟁은 주먹을 불렀고, "우리 애들이 좀 맞았다."는 말을 들은 서울목포파 두목 장진석이 콜라병을 거꾸로 들고 나서면서 사태가 커졌다. 서울목포파 조직원들이 트렁크에 넣고 다니던 칼을 들고 나타났고 1대1 싸움에서는 "김두한 이후에 최고"라던 조원섭 등 4명은 그날로 제삿날을 잡게 된다. 


이른바 서진룸살롱 사건이다. 무슨 공이라도 세운 듯이 고개 빳빳이 들고 증거물로 놓인 칼과 방망이들 앞에서 태연하게 섰던 깡패들은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뭐 저런 새끼들이 다 있나. 이때 사형을 선고받은 두 명 가운데 하나가 고금석었다. 


그는 의외로 평판이 좋은 청년이었다. 사형 언도 이후 고향 마을 사람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을 정도. 오늘날 용인대가 된 유도대학교에서 악연의 실타래와 엮임으로서 그는 회칼을 휘둘러 4명의 목숨을 앗아간 사형수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는 놀라운 수형 생활을 한다. 독실한 불자로 살면서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해산한 여자 재소자를 돕기도 하고, 불우한 재소자의 사연을 들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도움을 주었다. 


그런 그를 사랑한 소꿉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사형수 고금석에게 그녀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바쳤다. 옥중결혼을 원했지만 사형수는 '미결수'이기에 '기결수'에게 허용되는 결혼도 불가능했다. 기독교인이었던 그녀는 고금석을 돌보던 박삼중 스님에게 불교로 개종하여 비구니가 되겠다고 말한다. 평생 고금석의 명복을 빌며 살아가겠다는 것이다. 이후 고금석은 면회를 거부한다. "나 때문에 비구니가 된다니 더 이상 그 사람 보지 않겠습니다." 정히 자기를 버리지 못하겠다면 내가 그녀를 버려서라도 슬픈 인연을 끊겠다는 뜻이었다. 


사랑을 끊어버린 그에게 또 하나의 따뜻한 마음의 통로가 뚫린다. 그 길이 닿은 곳은 강원도 오지의 용소분교였다. 동료 사형수가 후원해 오던 곳을 이어받아 고금석은 자신의 영치금을 털어 학용품을 보내고 정성스런 편지도 부친다. 그는 아이들에게 '키다리 아저씨'로 불리웠다.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알 리 없는 한 꼬마가 자신의 소망을 적어 보낸다. "한 번도 바다에 가 본 적이 없어요. 바다에서 물장구를 쳐 보고 싶어요." 


이 편지를 읽고 고금석은 조금은 성미 급하게 자신이 그 꿈을 이뤄주겠노라 약속을 해 버린다. 자신의 영치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다 사형 집행이 수시로 있던 시기, 약속을 지킬 수 없을 수도 있다 여긴 고금석은 그때까지의 의연함을 버리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당황한 박삼중 스님은 그 앞에서 자신이 약속을 이행해 주겠다며 철석같이 다짐을 해야 했고, 인연이 있는 부산의 절 신도들과 의논하여 해운대 해수욕장에 분교생 전원을 초대하기로 했다. 

한창 물놀이 준비에 바쁘던 1989년 8월 3일 박삼중 스님에게 뜻밖의 전화가 왔다. 8월 4일 사형을 집행하니 올 수 있으면 빨리 올라오시오. 이때 박삼중 스님은 양주 두 병을 병나발을 분 후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고 한다. "권총 가지고 와. 내 노태우를 쏘아 죽일 거다." 


그래도 마지막 모습은 봐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스님은 평정을 찾지 못했고 엉엉 울었다. 그를 위로한 것은 사형수 고금석이었다. "스님 저 가기 편치 않습니다. 웃어 주세요." 고금석은 침착하게 바다 잔치를 잘 마무리해 달라고 부탁하며 사형대에 오른다. 그는 안구와 콩팥을 비밀리에 기증해 놓고 있었다. 그렇게 그가 죽은 열흘 뒤 강원도 오지 아이들의 바다 잔치는 즐겁게 열렸다. 

그가 아이들에게 남긴 것은 그의 전 재산 20만원이었다. 교장에게서 박삼중 스님에게 연락이 왔다. 도저히 무엇에 이 돈을 써야 할지 모르겠으니 돌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은 그 돈에다가 자신이 보태어 아이들을 위한 교실을 증축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보낸 20만원은 새 교실의 초석이 되었다. 지금도 하늘 아래 첫 학교 강원도 용소분교에는 그의 법명 금송을 딴 교실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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