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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상황일지Part3
게시물ID : history_927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wHat
추천 : 0
조회수 : 61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18 14:49:47

15:55

- 35대대 도청에서 금남로 쪽으로 시위진압.

- 33대대 30/250명 출동. 계속 기동하면서 시위진압. (특전사 전투상보)

- 계엄군 1명(거점 배치자)이 양림동 적십자병원 앞에서 수명의 학생으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총기를 피탈당했음.(계엄사 상황일지)

- 불로교 옆에서 군인 1명이 학생을 붸다가 놓치고 인근시민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함. 적십자병원에 입원중. (현사연 조사 종합)

* "광주공원 앞에 모인 시민들은 '시민들을 구타하는 계엄군을 그대로 둬서는 안된다'는 한 청년의 분노어린 절규에 시민들의 함성소리가 들끓었다. 시위대들이 '계엄령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투석하자 계엄군들이 최루탄을 쏘며 진압했다. 시위대들이 흩어지지 않고 몰려가자 계엄군이 후퇴했다. 그런 와중에서 끝까지 곤봉을 휘두르던 공수 한 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시위대에게 포위당할 지경에 이르자 광주천으로 뛰어내려 도망가는 광경을 목격했다.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쫓아가 그 공수에게 돌을 던졌다. 시위대가 천변을 따라 달려가며 돌을 던지고 있는 사이에 양림동 쪽에서 수백 명의 공수들이 진압봉을 들고 돌진해 왔다. 시위대들은 일시에 흩어져 도망갔다. 공수들은 이리처럼 달려들어 뒤처진 시민을 향해 미친 듯이 진압봉을 휘두르며 살인적인 구타를 했다."(구술 : 최동복, 현사연 조사)


15:58

- 금남로 시위군중 3천여 명을 계엄군이 분산 조치중. (계엄사 상황일지)


16:00 고등학생들까지 투쟁의 대열에 합류

- 광주일고, 대동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교내집회 후 시내진출 시도함.

- 금남로에 있던 학생들이 현대극장, 전남의대,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계림파출소 등 4개소에 분산하여 대치 투석전.

* "양동 복개상가 앞에서였다. 계엄군이 흰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를 입은 여고생의 가슴을 대검으로 그으며 희롱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시민들이 '그러지 마라'고 항의하였고, 할머니 한 분이 '내 새끼를 왜 이러느냐'고 하자 군화발로 할머니를 걷어차고 여고생 가슴 위로 대검을 그어내렸다. 그것을 본 시민들이 짐승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며 돌을 던지자 놈들은 대검을 들고 쫓아왔다." (구술 : 박남선, 현사연 조사)

- 계엄군 2명 구타 당함. (전교사 작전일지)

- 3천여 명의 시위대를 진압부대가 전후에서 협공하자 시위대가 산발적으로 골목길로 분산 도주 잠적중. (계엄사 상황일지)

- 관광호텔 쪽으로 이동중인 학생 및 민간인은 계엄군에 의해 해산. 소수인원이 산발적으로 소요중. (육본 상황일지)


16:10

- 전남도교욱위원회에서 5월 20일부터 광주시 중.고등학교 가정학습시킬 방침 (계엄사 상황일지)


16:15

- 장동 전신전화국 앞 김정형외과 앞 사거리에서 잠적중이던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재집결중이며 1천여 명의 민간인들이 관망중임. (계엄사 상황일지)

* "전남여고와 전신전화국 사이에 시민들이 모여 데모를 하고 있었다. 아들을 찾기 위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는데 공수들이 곤봉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닥치는 대로 때리고 짓밟더니 우리를 트럭에 태웠다. 트럭이 어딘가를 향해 움직이다 간간이 멈출 때마다 피투성이가 된 시민들이 트럭에 던져졌다. 우리는 조선대 강당으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서너 시간 이상 그들의 명령에 따라 '낮은포복', '원산폭격' 등의 기합을 받았더니 양쪽 팔꿈치가 벗겨져 피가 흘렀다. 몇 차례의 매 타작과 기합이 끝나자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있으라고 했다. 그날 밤 닭장차에 실려 계림동파출소 앞을 지날때 5, 6명의 공수들이 승차해 '니놈들 때문에 우리가 잠도 못 자고 죽을 고생을 한다'면서 닥치는 대로 몽둥이를 휘두르고 차에서 내렸다. 몇 차례의 몽둥이 세례를 받고 31사단으로 끌려갔다. 그곳은 먼저 잡혀온 시민들로 꽉차 있어 차를 돌려 상무대로 갔다." (구술 : 허현, 현사연 조사)


16:20

- 조선대 정문 앞에서 학생 5백여 명 소요중, 시민 1천여 명 구경. (육본 상황 일지)

- 35대대, 도청 방향으로 재배치. (특전사 전투상보)

- 김정형외과 앞 사거리, 시위군중 3천여 명 강력진압으로 해산, 분산된 군중 1천여 명이 관망. 재집결한 학생 5백여 명이 가드레일과 공중전화 파괴.(전교사 작전일지)


16:30

- 유동삼거리에 경찰이 5겹으로 배치되어 경계근무를 서고 있으며, 금남로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도로를 차단중. (시청 상황일지)

- 북동사무소 앞에서 계엄군 3백여 명이 가택을 수색하며 학생을 구타.(시청 상황일지)

- 소방서 앞 구역 사거리에서 전옥주 씨는 시민들이 참여를 호소하는 가두방송을 함.

- 소방서 앞, 2, 3천 명의 시민 운집. 계엄군과 충돌. 부상자를 실어나르던 택시 기사 3명 사망설. (신동아, 1985. 10)

- 교내시위중이던 광주 대동고생 1천여 명 현재 전원 귀가. (상황 끝)

- 적십자병원에 계엄군 2명 치료중.

명단 : 제31사단 일병 용의섭, 제11특전단 하사 김병수. (계엄사 상황일지)


16:4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학생 2천여 명 소요중. 제11공수 제61대대 (27/172), 진압중. 전교사 11병참 정비대대(11/360, 방위병), 노동청, 수협도지부, 대성학원, 전신전화국, 대인슈퍼체인 부근 4차로에 배치 완료. (육본 상황일지)


16:45

- 진압작전을 위한 병력배치

11특전여단 61특전대대 : 시외버스터미널

11특전여단 62특전대대 : 한일은행 앞

11특전여단 63특전대대 : 광주고교 앞

7특전여단 35특전대대 : 광주소방서 (전교사 교훈집)


16:50 최초의 발포

-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 동원빌딩 앞에 고장난 장갑차 1대에 학생 150명이 접근하자 장갑차에서 발포. 초중고생 4명 중상. 일부는 계엄군이 싣고 감.(시청 상황일지)

* "전신전화국 앞에서 계엄군 진압에 밀려 계림극장 앞으로 갔다. 장갑차 한 대가 시민들 사이에 포위되어 있었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장갑차의 눈 역할을 하는 양옆의 감시경이 깨져 있었다. 한 시민이 볏단에 불을 붙여 장갑차 바퀴에 던졌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주어 다시 불을 붙이고 장갑차 뚜껑에 올려놓았다. 그때 뚜껑이 열리더니 총을 쏘아댔다. 총소리에 놀란 시민들이 순식간에 흩어지자 '공포탄이니 놀라지 말고 모이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귀청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나고 옆에 있던 조선대부속고생이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총에 맞은 학생을 보고 시민들이 당황해 있는 틈을 타서 장갑차는 총을 겨눈 채 사라졌다." (구술 : 위성삼, 현사연 조사)

* "군용 장갑차 한 대가 계림동 동원예식장 건너편 도로에 정지해 있었다. 시민군들이 지푸라기에 불을 붙여 장갑차에 올려놓자 갑자기 해치가 열리더니 M16 총구가 나왔다. 그와 동시에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 놀란 나는 도망치다, '시민 여러분! 공포탄입니다. 속지 말고 다시 모입시다' 하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아스팔트 위에 불꽃이 파다닥 튀었다. 나는 도망가려고 애를 썼으나 하체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총알이 복부를 통해 좌측 엉덩이를 뚫고 나갔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계림파출소 부근의 병원으로 나를 옮겨줬다. 그때 밀려온 공수들이 우리가 병원으로 들어간 것을 보고 병원으로 최루탄을 쏘아댔다. 나는 배가 끊어지는 듯한 통증과 최루탄가스 때문에 실신해 버렸다." (구술 : 김영찬, 현사연 조사)

- 신원미상의 남자 1명이 북동 삼화약국 앞에서 공수부대원에게 구타당하여 기절했으나 생사여부가 불확실함.

- 35세 가량의 남자 1명이 7, 8명의 특전대원에게 쫓기다 인근 주점에 대피하였으나 뒤쫓아온 공수대원들이 주점을 부순 후 남자 1명을 붙잡아 구타. 김엽외과 병원으로 후송됨. (시청 상황일지)

동료기사의 부상에 격분한 택시기사

* "청년 3명을 태우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을 지나는데 공수들이 달려들어 차를 세웠다. 그들은 청년들을 차에서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나를 향해 '이 자식도 데모하고 다니는 놈들을 실어다주니 똑같은 놈이다'면서 상스런 욕을 내뱉고 곤봉으로 후려쳤다. 나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병원이었다. 상처를 치료받은 후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갔다. 동료기사들이 한쪽에 모여 공수들의 만행을 이대로 보아넘길 수 없으니 우리들도 힘을 합쳐 시위를 하자고 했다. '내일 무등경기장에서 기사들이 모여 대대적으로 차량시위를 벌이기로 약속했으니 모두 참석하자'고 말했다." (구술 : 정영동, 현사연 조사)


17:15

- 광주은행 앞에 시위군중 2백여 명 재집결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17:30

- 광주일고 앞 광주공과기술학원에서 2층 유리창 밖으로 내다보는 학원생, 교사, 사무원 등 40명을 특전대원들이 연행.

- 현재 5백여 명이 대인동 소재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모여서 군병력과 대치중(민간인 1천여 명 관망).

-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재운집한 시위군중 2백여 명의 강력한 저항으로 장갑차 2대 출동하여 분산시키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에 있는 소방서 앞에서 5백∼1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여 시내 진출을 시도하다 최루탄을 뿌리며 저지하는 계엄군에 밀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로터리까지 밀려났다. 공수 중대병력이 소방서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우리는 공중전화 박스와 가드레일을 부수고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후문 쪽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우리는 보도블럭을 깨서 공수들을 향해 무수히 던졌다. 몇몇 청년들이 공중전화 박스 뒤에 몸을 숨기고 서서히 공수들을 향해 접근하자 최루탄이 날아왔다. 다시 시내를 향해 전진하자 공수들 뒤쪽에서 장갑차가 정면으로 돌진해 와서 바리케이드를 부숴버렸다. 이런 진압과정에서도 물러나지 않고 시위 군중이 점차 불어나자 광남로에서 군용트럭 10여 대가 들이닥쳤다. 공수들이 시위대의 앞뒤에서 포위하면서 최루탄을 수없이 발사했다. 완강히 버티던 우리는 거의 질식상태에 이르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구술 : 이재의, 현사연 조사)

- 광주역 앞에서 시위군중 5백여 명 군경과 대치.

- 학강국민학교 부근에서 시위대 체포. 군 중상 2명, 총 1정 분실.

- 가톨릭센터 부근에서 시위대 2백 명 군경에 강경히 대치. 장갑차 2대를 출동 시켜 강력대치.

- 금남로에서 시위군중 1천5백-2천여 명 재결집. (전교사 작전일지)


17:4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민간인 1천여 명 완전히 분산시킴. (계엄사 상황일지)


18:00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시체 쌓여

-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주차장에는 7, 8구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무등경기장 스탠드 아래쪽에는 10여 구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날 공수대원의 대검에 찔리거나 몽둥이에 맞아죽은 사람들이었다.

특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주차장의 시체는 시외버스 공용버스터미널 로터리 광장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이 차량으로 수송된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같은 시체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부녀자나 노인들에게까지 무차별 난타해서 많은 사람을 죽였다', '머리통을 때려 즉사시켰다', '임신부를 죽였다'는 풍문들을 사실로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된 셈이다.

K씨(40)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는 이날 낮 시골에서 올라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러 공용터미널에 갔었읍니다.

그러나 시외버스들이 제대로 운행되지 않아 돌아오려고 광남로 쪽으로 나 있는 문을 나와 걸어오는데 시외에서 버스가 들어오는 입구 안쪽에 시체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어요. 아마 7, 8구는 되었을 것입니다. 더욱 제가 놀란 것은 맨 위 시체가 엎어져 있었는데 등에 X표로 칼자국이 나 있더군요.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금남로 2가 가톨릭센터 앞에 운집한 시위군중 2백여 명은 장갑차 2대와 완강한 군경의 진압으로 분산되었음. (계엄사 상황일지)

- 전남기계공고 앞에 50여 명의 시민, 계엄군과 대치, 투석전.

* "오후 6시경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봤다. 전남기계공고와 조선대 입구 사이에 계엄군과 시위대가 대치한 상태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각목과 돌을 던졌고 계엄군이 최루탄을 난사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내가 느낀 것은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최루탄을 발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을 살상할 목적으로 쏘아대는 것 같았다. 구경하는 시민들을 향해서 어찌나 최루탄을 던지는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구술 : 이순자 현사연 조사)


18:00 어두워져도 시위는 계속되고

- 광주공원에 수천 명의 시민 집결, '전두환 타도'를 외침.


18:30

- 광주공원 광장에서 특전대원들이 대학생 8명을 팬티만 입힌 채 '원산폭격'이라는 기합을 주고 있음. (시청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1천여 명 운집, 제11공수 61대대와 대치. 19:30 완전 해산(육본 상황일지)

- 33대대, 35대대 전남대 복귀 완료.

전과 : 35대대는 없음, 33대대는 9명 체포하여 31사에 인계. (특전사 전투상보)


19:00

- 2군사령부는 잠정부대(17/283)를 제31사에 배속토록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19:20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2천 명의 학생 해산. (육본 상황일지)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시위군중 5백 명 군경과 대치. (전교사 작전일지)


19:40

- 광주고속터미널 앞에서 시위군중 1천여 명이 대형아치를 불태우며 공중전화 박스와 대형화분을 부숴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남 넘버를 단 화물트럭에 방화. (월간조선, 1985. 7)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시위중이던 학생, 시민 5백여 명은 군경의 강력한 진압으로 완전 분산. (계엄사 상황일지)

- 대인슈퍼마켓 앞에 군중(학생, 민간인) 1백여 명 운집. (육본 상황일지)


19:45

- 시민들, 유동에 세워진 대형아치에 불질렀다. 시민들이 몽둥이와 곡괭이를 들고 군경과 대치하다가 군이 증원되자 흩어져. (월간조선, 1985. 7)

* "저녁 8시경 금남로 2가에서 시민과 계엄군 사이의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는 계엄군과 그에 맞서 돌을 던지는 시민의 싸움이 쌍방간에 밀고 밀리는 접전을 거듭할 때였다. 공수들이 한국은행 건물의 담을 타고 투입돼 시민을 살벌하게 때리고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동네 아주머니와 구경하고 있던 나는 공수의 곤봉에 뒤통수를 맞아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최영옥, 현사연 조사)


20:00 밤이 깊어지면서 파출소에 방화

- 60여 명의 시위대에 의해 누문동파출소 점거.

- 임동파출소 방화로 현재 불타고 있음.

- 광주고속버스터미널 부근 청과물시장 옆에 세워둔 경남 번호미상 화물차량을 1백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방화하면서 경상도 군인이 와서 광주를 쑥대밭으로 만든다고 외침. (계엄사 상황일지)

- 제7특전여단, 31사에서 작전회의. 출동준비 재점검. (특전사 전투상보)

- 중흥동 원예공판장 부근에서 시위군중 1백여 명 경남 화물트럭 방화. (전교사 작전일지)


20:20

- 특전대원들이 광주실내체육관에 있던 운동선수들을 귀가조치하고 10명이 수색을 하면서 유리창 5장을 파손. '죽기 싫으면 가만있으라'면서 운동중인 역도 선수 5, 6명 중 2명을 연행해 감. (시청 상황일지)

- UH-1H 헬기 1대 광주 도착, 임무:예비역 장성의 광주 도착. (육본 상황일지)

- 시위군중 5백여 명이 북구청 유리창을 파손, 군경이 출동하여 저지.

- 시위군중 2백여 명이 역전파출소에 들어와 투석, 유리창이 깨짐.

- 시위대 3백여 명이 도청 앞 꽃상자로 도로를 차단하고 선전탑에 방화. (전교사 작전일지)


20:05

- 시위대 1백여 명이 역전 파출소 점거했다가 퇴각. (전교사 작전일지)


20:25

- 시민, 학생 5백여 명이 북구청사 유리창 파손. (시청 상황일지)


20:30

- 시민,학생 2백여 명이 역전파출소와 누문동 파출소를 점거 기물 파괴, 직원들은 무사히 피신하였고, 무기와 서류는 미리 지출. (계엄사 상황일지)

- 시위중이던 학생, 시민 40여 명이 북구청에 돌을 던져 유리창 10개를 파손.(계엄사 상황일지)

- 누문동 파출소에 서부경찰서에서 2/25의 경찰이 출동, 군중 퇴진. (육본 상황일지)


20:40

- 북동 김엽병원 앞 노상에서 데모대원이 군지프를 빼앗으려하자 도망을 하면서 안성준(16세, 세차장 종업원)을 치어 중상(김엽병원 입원). (시청 상황일지)

- 임동 파출소 파괴 전소. (전교사 작전일지)

- 이 고장 출신 박경원, 고재필, 전부일, 김재명 등과 예비역 장성들 광주도착, 광주 유지들과의 화합 후 계엄분소 방문, 윤흥정 중장에게 강경진압 완화 요청. (10일간의 취재수첩)


20:45

- 시민 4백여 명이 유동삼거리 선전탑을 불태우고 각종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끄게 한 후 꽃상자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시위중. (시청 상황일지)

- 광주 역전파출소에 1백여 명의 시위대가 몰려와 유리창이 파괴되고 퇴각하였으며, 누문동 파출소는 60여 명의 시위대에 의해 점거되었음(21:05 누문동파출소 퇴진). (계엄사 상황일지)


20:50

- 양동파출소 파괴. (전교사 작전일지)

- 양동파출소를 점거하여 유리창과 싸이카 1대를 파손 후 약 7백미터 위에 있는 임동 파출소로 진출. (계엄사 상황일지)


21:00

- 거리에 인적 끊김. (월간조선, 1985. 7)

- 33대대 광주역 점령 (특전사 전투상보)


21:20

- 시민 50여 명이 누문동파출소에 투석 후 기물파손. (시청 상황일지)

- 35대대 광주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점령. (특전사 전투상보)


21:25

- 31사단 96연대 1대대(2/50) 출동, 기동경찰 4/179명 출동. (육본 상황일지)


21:40

- 소방분소 소속 소방차 1대 출동하여 임동파출소 인근 가옥 진화중. 분소 소속 소방차 2대 출동중이나 시민, 학생 약 30여 명의 제지로 되돌아가고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21:50

- 데모대원들이 동양고속에서 기물을 부수는 소리가 나고 북구청 앞으로 함성을 지르자 계엄군 1개 소대가 페퍼포그를 터뜨림. (시청 상황일지)


21:55

- 시위군중 60여 명 역전파출소 재점거. (계엄사 상황일지)


22:00

- KBS 광주방송국에 1백여 명이 들어가 기물을 파괴.


22:25

- 역전파출소에 들어온 시위대 60여 명 기물파괴. 군경 출동으로 퇴진. (전교사 작전일지)

- 33대대 역전대기 기동타격대 임무 수행. (31사단 전투상보)


22:30

- 계엄군 3개 소대가 북구청 주변 고층빌딩과 여관, 다방, 주택가 등을 수색하고 있음. (시청 상황일지)


22:40

- 임동 파출소 방화 관련자 13명을 검거, 기타는 잠적. 상황종료. 진압병력 철수. 민간가옥 피해 없는 것으로 판단됨. 소방차에 의거 민간가옥 진화. (계엄사 상황일지)


22:50

- 33대대 전남대 복귀. (특전사 전투상보)


23:00

- 제31사단은 시내에 투입된 병력은 조선대 주둔지로 복귀토록 지시.

- 누문동 파출소에 서부서 소속 경찰(2/52) 출동하여 진압.

- 양동 파출소에 경찰기동대(4/179) 96-1(2/56) 출동하여 진압.

- 체포인원 277명(여자1명). (전교사 작전일지)


23:08 3특전여단 광주에 투입

- 제3특전여단 부대이동 명령 하달

부대 : 제3특전여단

일시 : 5.19 23:00 - 5.20. 07:00

인원 : 265/1,212

차량 : 2 1/2 : 63대, 5/4 : 2대, 버스 : 2대, 1/4 : 9

이동로 : 3공수 - 천호대교 - 마장동 - 청량리

열차출발 : 1차 20일 01:00 청량리 출발, 06:50 광주 도착(131/589),

2차 20일 01:10 - 07:00 (134/623)

객차 20량, 화물 3량, 계 23량

인솔자:준장 최세창(여단장)

* 2군 작전통제- 육작명 20-80호

< 추가사항 >

* 도착지 : 광주 전남대학

* 거리 : 광주역에서 2Km

* 차량 : 2 1/2 : 40, 버스 : 20, 1/4 : 66대

* 도착과 동시에 제31사 작전통제. (육본 상황일지)


23:40

1. 2군사령부에서 충정작전 지침 하달.

(1) 도시 게릴라식 소요 및 난동 형태에는 소규모로 편성한 다수 진압부대를 융통성있게 운용한다.

(2) 전작전 가용병력은 최대로 운용한다.

(3) 바둑판식 분할 점령을 실시한다.

(4) 대대단위로 기동타격대를 보유하여 시위대를 조기에 분할, 타격하여 체포 한다.

(5) 소요군중의 도피 방지책을 강구한다(상점은 셔터를 내리도록 한다).

(6) 군중들이 10인 이상 집결하지 못하도록 방지한다.

(7) 다수의 편의대를 운용한다.

(8) 과감한 타격을 실시한다.

(9) 통금시간을 대폭 연장한다.

(10) 총기피탈을 사전에 방지한다.(피탈자는 엄중문책).

(11) 주민에 대한 선무활동을 강화한다.(전단, 방송).

2. 전남북계엄분소, 2군사령관 훈시문 접수

(1) 계엄군의 이상적 행동을 강구할 것

(2) 이적 행위자는 단호히 조치할 것

(3) 선량 학생 및 시민은 보호할 것

(4) 군인의 기본자세를 견지할 것

(5) 정부재산을 보호할 것 (전교사 작전일지)


23:50

- 광주역 분수대에서 여학생을 발가벗겨 놓고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는 소문으로 시민들은 더욱 훙분했다. 나중에 계엄분소 부사령관도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시인함. (현사연 조사 종합)


20일 01:10

- 제7여단 계엄군은 서로의 지역대를 편성하여 제11, 12, 17지역대로 구분 제11지역대는 충장로에 배치

제12지역대는 광주공원에 배치

제17지역대는 광주대교에 배치하여 작전을 수행케 함. (말, 1988.5) - 31사단

광주 시내무기 탄약 회수 : 6,508정, 42만 발

최루탄 신청 건의 : 1천 발 표시

미회수 총기, 탄약 긴급조치, 총기는 공이 및 노리쇠 제거 진압작전 병력운용. (전교사 작전일지)


04:00 시민궐기 호소문이 살포됨

- 시민궐기 호소문 3, 4만 매가 살포됨. (전교사 작전일지)


05:00 헬기 지원 요청

- 전교사, 5백 MD 3대의 헬기 요청. (전교사 작전일지)


06:20

- 계엄군 금남로 청소작업 실시(6/137명, 차량 19대). (전교사 작전일지)


07:00 광주지역에 재배치된 특전여단

- 제3공수여단 254/1,189명 광주역에 도착. 전남대 교정에 주둔. (전교사 작전일지)

제16대대(대대장 김길수 중령)가 전남대 입구 경계 임무.

제15대대(대대장 변길남 중령)와 제12대대(대대장 김완배 중령)를 광주역에 배치.

제11대대(대대장 임수원 중령)을 금남로를 경계하게 했다. (말, 1988.5)


07:20 변사체로 발견된 시민

- 광주시 서구 서2동 전남주조장 공터에서 대검으로 난자당해 피투성이가 된 월산 2동 김행부 씨(36) 변시체로 발견됨. (1980년대 민주화운동)


아침, 신임 소준열 계엄분소장과 정호용 특전여단장

- 정호용 장군은 국군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인 최애섭 준장과 함께 광주에 와서 장형태 지사와 안병학 도경국장 경무관에게, "폭도의 총에 맞아 죽더라도 자리를 지키라"

고 지시하였다(그러나 자리를 이탈하여 시외로 도피하였다). 이날 소준열 중장이 전남북지역 계엄분소장 겸 육군전투병과 교육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현지의 정호용 장군과 상의하였다. 소준열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대로 방치하다간 큰일나겠소. 하루라도 빨리 평정을 시켜야 되겠소." 정호용 장군이 소준열 장군에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말, 1988.5)


오전, 대체로 소강상태

- 아침 라디오에서는 "광주시민 여러분, 공수부대는 이미 철수했읍니다"는 방송 이 한 차례 있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전날의 공수부대는 철수하고 새로운 공수 부대로 교체되었다. 오전의 시 중심가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그런대로 평온했으며 거리를 경비하고 있는 새 공수대들에게 이틀간의 참상을 설명하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많은 시민들은 전날 집에 들어오지 않은 가족을 찾아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등지를 수소문하고 다녔다.

- 지난밤의 유인물을 본 시민들 분노

<유인물 내용>

시내 죽은 인원 수십 명이다.

공산당도 이렇게 무자비하지 않았다.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다.

특정인 물러가라. (전교사 작전일지)


09:30

- 광주고속터미널 앞에서 택시 1대 대파.

- 소강상태에서 계엄군이 증원 배치되었고 상가는 절반 가량 철시.


10:00

- 대인시장 앞 1천여 명의 시민 집결. 광주고교를 돌아 시민관 사거리로 진입.

금남로에 도착하기도 전에 탱크를 앞세운 공수부대에 의해 사방으로 흩어짐. (1980년대 민주화운동)

- 요소요소에 집총 군인들 경계.

- 치안본부 발표 : 5월18, 19일 이틀간 광주에서 연행자 5백17명, 부상자 경찰 6명, 중상 1명.

- 임동 파출소 전소.

- 파악된 사망자 3명 : 적십자병원에 김종철, 김형렬(29. 백운동) 두 명. 한 명은 신원 밝혀지지 않고 19일 오후 6시 사망했다는 것만 알려져.

- 부상자는 전남대 부속병원에 23명, 기독병원 4명, 조선대 부속병원 2명. 전남대 부속병원에 있는 김영찬(19. 조대부고 3년)은 19일 오후 4시 30분 계림파출소 앞에서 총격받고 왼쪽 배 관통상을 입었다고 함. 시민, 학생들에 의하면 중태인 사람은 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사망자 늘어날 듯하다고 함. (월간조선, 1985. 7)


10:20 팬티만 입힌 채 기합

-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바로 앞이었다.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30명이 넘는 젊은 남녀가 팬티와 브래지어만 걸친 알몸으로 붙잡혀 기합을 받고 있었다. 4열로 줄지어 선 젊은이들. 나중에 필자가 좀더 가까이 다가가 세어보니 어떤 줄은 7명, 어떤 줄은 6명, 어떤 줄은 8명이었다. 정확하게 세어보지 못했으나 이 가운데 여자는 10여 명쯤으로 짐작되었다.

거의가 20대의 젊은 사람이었고 두어 명쯤 30대로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여자들의 신발은 굽높은 하이힐이 많았다.

10여 명의 공수부대원들이 손에 방망이를 들고 이 무리를 빙 둘러서서 지키고 있는 가운데 하사관인 듯한 군인이 줄 가운데서 구령을 하고 있었다.

'엎드려 뻗쳐, 뒤로 누워, 옆으로 누워, 다섯 번 굴러, 쭈그리고 앉아, 손을 귀에 대고 뛰어, 엎드려 기어, 한발 들고 서' 등 수없는 갖가지 동작을 강제로 하게 했다.

만약 구령에 조금이라도 따라하지 않거나 느리게 할 경우 몽둥이가 가차없이 날아갔다.

특히 여성들의 곤욕스러움은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내가 당하고 말지 눈으로 보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숙녀가 팬티와 브래지어 바람으로 길 복판에서 봉변을 당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 광경은 많은 시민들에 의해 목격되었다. 특히 가톨릭센터 6층에 있는 천주교 광주교구 주교관에서 윤공희 대주교와 조비오 신부가 내려다보고 있었고, 교구 사무실에서는 수녀와 일반직원들이 보고 있었다. 이때 조신부는 '내가 비록 성직자이지만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버리고 싶었던 심정이었다'고 뒤에 군법회의 법정에서 진술했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 윤대주교는 이렇게 술회했다.

"내가 그 광경을 보고 난 후 옆길을 보니까 어떤 젊은이가 두 군인에게 붙들려 수없이 두들겨맞고 있었어요. 머리는 무엇으로 찍어버렸는지 모르지만 피가 낭자했어요. 내가 보기에도 그대로 놔두면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나 자신 무서움이 들어 감히 쫓아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어요. 그 뒤 그 사람의 생사가 궁금했지만 왜 내가 내려가 만류하지 못했을까. 성직자로서 지금도 가슴 아프고 또 두고두고 가슴이 메이게 하는 광경이었지요. 나는 그때의 일을 두고 수없이 참회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10일간의 취재수첩)

* "일반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미치광이짓을 하고 있었다. 남녀청년 10여 명을 붙잡아놓고 남자는 팬티만 입히고 여자는 브래지어와 팬티만 입힌 채 옆으로 굴러, 뒤로 굴러 등 기상천외한 기합을 줬다. 동작이 조금만 느려도 곤봉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도시복판에서 젊은이들을 반나로 만든 채 기합을 주다니……짐승한테도 그렇게 잔인하게 대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옆에서 지켜보던 많은 시민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짓을 계속했다. 한쪽에서는 7, 8명, 다른 한쪽에서는 2, 3명의 남녀가 그런 기합을 받고 있었다." (구술 : 서명원, 현사연 조사)


11:30 광주에 특전여단 병력을 3개 여단 투입하여 경계 - 31사단 병력 배치현황

61대대 : 광주우체국

63대대 : 광주은행

35대대 : 한일은행

33대대 : 계림파출소(전교사 작전일지)

12:00 어제와는 다른 진압양상

- 제일은행 앞에서 시민 2백 명이 계엄군의 폭력에 항의하자 진압병력이 특전사 (공수부대)에서 일반군인으로 바뀌었다고 밝힘. 19일의 병력과는 다른 공수대가 남아서 페퍼포그를 사용.


12:15

- 7공수여단 35대대, 조선대 경비임무 11여단에 인계. (특전사 전투상보)


12:50 계엄군의 출동대기

- 계엄군 2백50여 명이 10대의 차량에 분승, 시청에 대기 (계엄군이 교체되었다고도 함). (시청 상황일지)


12:55

- 방송용 헬기 1대 지원. (전교사 작전일지)

- 신현확내각 일괄사표. 최근의 소요사태 인책, 출범 5개월 6일 만에 퇴진. (조선일보, 5.21)


오후, 다시 시작되는 시민들의 시위

- 31사단의 시민, 학생 1천여 명 연행설.

- 19일 오후부터 전남북에 걸쳐 내리던 비 오늘 오전에 멈춰. 시민들 '내 아들, 내 동생 어떻게 됐나' 신문사, 방송국, 경찰서 찾아다녀. 시민들 의견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야 하지 않으냐. 가면 갈수록 희생만 커진다', '계엄군을 교체해야 할 것인가'. 시민과 군인, 서로 적대감 느끼는 듯. '계엄군이 경상도 출신이었는데 타도 사람으로 바꿨다'는 소문도 나돌아. 시민들이 어제 집단적, 무차별적으로 당해 거리에는 나오지 않고 있음. 오늘밤 게릴라식으로 군과 붙을 우려.

- 오후엔 상가 3분의 2 철시. 현재 중흥동지역에 군인들 가택수색(대학생)한다는 소문. 광주에 유학보낸 서울 학부모들 사태 궁금해 광주에 내려와. (월간조선, 1985. 7)

- 광주 상업은행 앞에서 군중 2백 명을 확성기로 해산 권유(경찰). (계엄사 상황일지)


14:20 시위진압에 화염방사기 사용

- 서방 삼거리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 충돌. 공수대 화염방사기 발사하여 까맣게 그을린 시체 및 부상자는 군용트럭에 싣고 감.(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서방 삼거리의 시민과 공수부대 사이에 충돌.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로 20개의 불길을 뿜어댔고, 시위대 선두에 섰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불에 타죽음. 공수부대는 시체 및 부상자를 군용트럭에 싣고 감.

- 광주역 부근 20여 대의 택시가 모여 동료기사들의 죽음에 분노, 조직적인 대응책으로 전환시키는 논의 활발. (1980년대 민주화운동)

- 금남로일대를 경계하던 제3공수여단의 11대대는 15만여 군중들에게 포위당하여 위기에 처함. (말, 1988.5)


14:40

- 계림동 동문교(계림극장 옆) 일대에 중고생 2백여 명이 집합. 가스탄 발사하여 분산, 계림파출소 부근 차단중. (계엄사 상황일지)


14:45

- 계림파출소 앞에서 7백 명의 시민이 군과 대치. (시청 상황일지)

- 무등경기장에 영업용 택시 집결 차량시위 계획. (말, 1988.5)

- 병력 배치현황

3공수여단 11대대: 황금동 주변

12대대: 광주시청

13대대: 광주일고

15대대: 누문동

16대대: 광주역 로터리

7공수여단 33대대: 계림파출소, 광주고

35대대: 한일은행 주변

11공수여단 61대대: 도청

62대대: 광주우체국 주변

63대대: 대인동 파출소 부근(전교사 작전일지)

- 시위군중 금남로 공사장 부근에서 연좌농성.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 구호를 선창하며 유인물을 낭독.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정의가', '아리랑'을 합창하며 시민들을 규합. 학생들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스피커가 필요하게 되자 순식간에 40여만 원 모금. (신동아, 198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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