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수터에는 몇 가지 룰이 있다.
그중 하나는 한 말 이상의 물통을 가져오지 않는 것이다.
가뜩이나 물이 적게 나오는 여름, 한 말짜리 물통을 가득 채우려면 40분은 족히 걸리기 때문이다.
약수터에서 물을 뜰 때였다.
뒤에 한 말짜리 물통을 든 어르신이 등장했다. 오후 2시.
어정쩡한 시간이기에 본래 사람이 없는 타이밍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날은 붐볐다.
물통을 놓고 사라지는 어르신. 그 뒤로 온 사람들은 말없이 그 뒤에 물통을 내려놓고 기다렸다.
한데, 오늘이 날이었던가. 한 말짜리 통들의 행진이었다.
그렇게 다섯 사람. 서너 시간을 기다려야 여섯 번째 사람이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등장하는 한 어르신. 생수병 2개를 달랑달랑 들고 오다가 물통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더니
기겁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뒤이어 아줌마. 역시나 전번 어르신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며
돌아갔다. 그렇게 포기하고 돌아가는 사람의 수가 두 자리 수를 넘길 즈음이었다.
한 아주머니가 등장했다. 호안이다.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냉엄함이 보통 분이 아니라는 걸 방증했다.
일렬로 줄지어 선 물통을 본 아주머니가 노성을 질렀다.
"사람들이 양심이 있어야지!"
고즈넉하던 약수터가 그 일갈에 깨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아주머니에게 향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주머니는 응당 지켜야 할 것에 대해 토로하며, 한 말짜리 물통은 규칙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확실히 아주머니 말은 옳았다.
그 '한 말짜리 약수통' 룰은 약수터에 명시되어 있었다. 그것도 보란듯이 양각 된 쇠판에.
그 아주머니가 한 말짜리 물통을 뜨던 아저씨에게 쇠판에 쓰인 글자를 가리키며 룰을 지켜줄 것을 요구했다.
아저씨는 당황해했지만 받던 물통을 치우지 않았다.
아저씨의 변론은 이러했다.
"이전 사람들도 한 말짜리 떠갔습니다. 나도 기다렸고요."
한 말짜리 물통을 들고온 사람들이 아저씨 곁에 섰다. 그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방관자인 난 일 대 다수의 공방전에 들어간 아주머니를 지켜보았다.
아주머니는 거칠었다. 목청을 높이더니 욕 직전의 말을 꺼내며 지켜야할 규칙에 대해 설명해갔다.
"아줌마! 다들 기다렸다니까요!"
"거참, 성질머리 하고는."
"그거 좀 못 기다려서 쓰나!"
당황해 하던 아저씨는 사라져있었다.
더없이 당당한, 민중의 지지를 얻은 대변자가 그곳에 있었다.
아주머니는 다수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한 말짜리 통을 쓰면 안되는 이유를 설명했고,
반대편에서는 '정'과 '다들 기다렸다' 라는 이유를 들며 반박에 들어갔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싸움은 아주머니의 행동으로 끝을 맺었다.
거의 다 찬 한말짜리 물통을 번쩍 들어서 뒤집어 버린 것이다.
콸콸 쏟아지는 물.
아연실색한 아저씨가 욕지거리를 하며 달려들었지만 쌍심지를 돋운 아주머니의 용력은 범상치가 않았다.
결국 물을 다 토해낸 아저씨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면서도 종전과는 다르게 패배자의, 한마디로 '쫀' 듯한 얼굴로
물통을 챙겨 도망치듯 약수터를 떠났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저씨 주변에서 아저씨를 옹호하며, 한 말 물통을 받아도 된다고 주장하던
그 사람들이 대번 표정을 바꾸며 아줌마 곁으로 가 이렇게 말했다.
"방금 그 사람이 좀 너무했네."
"그러게."
"난 이거 반만 받아가려고 했어."
재미난 건 아줌마의 다음 행동이었다.
"지랄 염병들을 해요."
한 말 물통 아저씨들은 그대로 물통을 들고 줄행랑을 놓았다.
그렇게 한 말 물통 아저씨들을 물리친 아줌마는 당당하게 물을 뜨기 시작했다.
재미난 건, 그 아줌마 배낭에서 나온 물통의 리터를 합치면 한 말이 조금 넘는다는 것이었다.
보상심리가 연쇄되는 이유.
혁명이 피 냄새를 동반하는 이유.
혁명이 또 다른 혁명을 야기하는 이유.
약수터는 재미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