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0
- 야간배치 완료
.경찰서 파출소 및 도로 교차지점 : 36개 지점
.계엄군 1개 지대(1/10)와 경찰 2개 분대(24명)로 합동배치(30명 규모) (말, 1988. 8)
23:40
- 31사단 작전회의 재개최, 33대대 광주역 점령 임무부여. (특전사 전투상보)
시간미상
- 광주시내 전역과 직장예비군 무기 및 탄약 회수, 군부대에 보관 : 무기 4,717정, 탄약 115만 발.
- 분산 무기고 탄약, 군부대 및 경찰서에 보관 : 55만 발 - 무기고 접근자 발포 승인 건의. (31사 지시 80-1)
- 복무규율에 의거 지휘관 재량 실시토록 지시. (말 1988. 8)
[광주민중항쟁 총일지]전면적인 민중항쟁 - 일시적 소강상태
제 3 절 일시적 소강상태 (19일 오전)
분노와 공포의 밤을 지새운 시민들은 시내상황을 살피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금남로로 모여들었다. 초.중.고등학교와 관공서, 일반기업체는 정상근무를 계속했으나 시내의 상가들은 대부분 철시했다. 대동고와 중앙여고 등 일부 고등학생들이 교내시위를 주도하게 되고, 오후로 접어들수록 사태가 심각해지자 이날 오후 시내 중.고등학생들을 귀가조치시켰다. 7공수여단이 11공수여단에 배속되고 31사단 병력을 재배치시키는 등 전열을 정비하고 탱크까지 동원한 공수들의 잔인한 진압에 시위군중은 방화와 투석, 화염병 투척으로 맞섰다. 녹두서점을 비롯한 시내 곳곳에서 화염병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화염병은 투석이나 도로변의 대형화분을 바리케이드로 이용하는 소극적 방어와는 달리 공격용으로 등장한 새로운 무기였다. 이처럼 심각하게 진행되는 시위상황은 11 공수여단장으로 하여금 현장 점검에 나서게 했고, 현지 지휘관은 시위진압을 위해 1개 공수특전단을 증원해 주도록 요청했다.
00:05 - 05:00 11특전여단의 광주 도착과 진압군의 재편성
19일 0:05
-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 병력규모 102/696) 제31사단에 도착.
- 작지 80-3호에 의거, 11공수여단 도착과 동시에 31사단의 작전통제 받음. (전교사 작전일지)
02:10
- 제31사단에 도착한 제11공수 조선대로 이동 완료.(전교사 작전일지)
04:00
- 35대대는 11특전여단의 작전통제하. (전교사 교훈집)
- 11여단 61대대에게 33대대 및 35대대의 거점 인계. (특전사 전투상보)
- 제31사단 병력의 재편성
1) 제7공수여단의 임무를 제11공수여단이 맡는다.
2) 제7공수 제33대대는 사단 예비병력으로 운용한다.
3) 제7공수 제35대대는 제11공수에 배속시켜 진압작전에 출동시킨다.
4) 제11공수여단의 시내배치 내용
가. 제11공수여단 제61연대:공용터미널
나. 제11공수여단 제62연대:장동지역
다. 제11공수여단 제63연대:계림동지역
라. 제7공수여단 제35대대:고속터미널 (전교사 작전일지)
05:00
- 11특전여단을 31사단이 작전통제(7공수 33, 35대대는 재배치). (전교사 교훈집)
08:00 계엄사, 민주인사 및 학생 549명 검거
- 소요주동자 검거현황
관악경찰서 19명(대상 27명)
노량경찰서 9명(대상 10명)
강서경찰서 4명(대상 12명)
강남경찰서 5명(대상 8명)
강동경찰서 2명(대상 2명)
남부경찰서 14명(대상 14명)
영등포경찰서 2명(대상 5명)
강원대 27명(대상 41명)
관동대학교 24명(대상 30명)
상지대학교 12명(대상 18명)
상지실전 3명(대상 3명)
연세의대 2명(대상 2명)
경북지역 31명
충남지역 41명
전교사지역 학생 227명, 민간인 250명, 소계 477명
전국 총계 549명(계엄사 상황일지)
시간미상
- 태평양지역 미공군사령관, 전술공군기 출동 대기중이라고 발표.
이날 태평양지구 미공군사령관 휴즈 중장은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전술공군기가 매우 빠른 시간 안에 한국전선으로 출동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또 '한미 공군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으며 전술공군기를 24시간 출동대기 상태에 두고 있다'고 말했다.(조선일보, 5.21)
아침상황, 금남로 교통 완전차단
1. 금남로는 교통이 완전히 차단된 상태
2. 도청 앞에 기동경찰대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으며 군병력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경계근무중.
3. 포고령 위반자에 대해서는 집중적으로 단속을 실시.
4. 금남로에서 몇 명씩 모여 있는 시민들을 해산시키자 시민들은 골목으로 피신함. 경찰이 청년 10여 명을 해산시키자 계엄군이 경찰관을 윽박지르고 나서 이들 청년들을 길 한복판에 앉혀놓고 구타. (월간조선, 1985. 7)
* "금남로에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모였다. 상무관 골목에서 계엄군에게 쫓기던 청년들을 경찰이 저지하지 않고 그냥 보내자, 공수들이 경찰 경위를 구타하는 일이 발생했다. '경찰이 왜 시위진압에 앞장서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공수에게 야유를 보내고 항의하면서 경찰에게는 박수를 쳐주었다." (구술 : 김결, 현사연 조사)
09:00 금남로에 군중들 모여들기 시작
- 금남로에 시위군중 집결 시작.
- 북동성당에서 가톨릭농민회의 농민대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모인 농민들을 주최측에서 해산시킴.
- 가톨릭센터에서는 호남전기 노동자들과 학생운동 세력 사이의 연대투쟁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질 예정.
- 계엄군 수십 명 가톨릭센타 뒤 미도호텔 난입, 종업원 연행. (현사연 조사 종합)
* "오전 9시경 나는 미도호텔 지하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비명소리에 놀라 문을 열고 나가보니 우리 직원들이 공수들에게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었다. 순간 두려운 생각이 든 나는 지하실로 뛰어내려와 일을 열심히 하는 척했다.
잠시 후 여섯 명의 공수가 지하실로 내려와 대검을 들이대면서 데모하다 쫓겨온 놈들을 어디다 숨겼느냐며 다그쳤다. 모른다고 하자 공수들이 달려들어 발길질을 했다. 그때 나를 포함한 직원 7명과 호텔 투숙객 다수가 상무대로 끌려갔고, 실신한 동료 한 명은 병원으로 실려갔다." (구술 : 박필호 외 손병섭,김영대,김병렬, 현사연 조사)
09:50 예비대인 33연대를 시위진압에 투입
- 사단 예비대로 편성된 제7공수여단 제33대대(병력: 59/253, 장비: 차량 15대)에 시내에서 소요 발생시 진압작전에 투입토록 지시.
- 시위진압을 위한 병력으로 1개 공수특전여단을 증원해 주도록 요청.
- 목포지역에는 공수특전단 1개 지역대 편성. (전교사 작전일지)
10:00 헬기 동원하여 수천 명의 시위군중에게 해산 종용
- 이른 아침부터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는 무조건 연행.
- 차량통행이 금지되었던 금남로 일대에 청년, 학생 등 시위대가 모이기 시작.
- 시민이 수천 명에 이르자 경찰 헬기를 동원하여 해산을 종용. (신동아, 1985.
10)
- 광주 중앙여고 1천4백 명이 교내에 집결, 경찰 4/179명 교문에서 대기. (계엄사 상황일지,시청 상황일지)
- 김상윤이 운영하는 녹두서점에서는 윤상원을 중심으로 시민,학생이 모여 화염병 제작.(현사연 조사종합)
10:00 대동고생 교내시위
* "1교시 수업을 위해 교실에 들어갔더니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선생님, 공수들에게 맞아죽은 형님, 누나들의 원수를 우리가 갚아야 합니다' 하고 울부짖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맞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비극의 역사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고 말하고 울었다. 순식간에 교실은 울음바다가 되었고, 격분한 학생들이 의자를 부숴들고 교실을 뛰쳐나갔다. 학생들은 그때부터 운동장을 돌며 '민주교사 합세하라, 민주학생 동참하라, 광주시민 학살한 공수들을 때려죽이자'고 외치며 교내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공수들이 학교 앞에 몰려와 진을 쳤고 헬기가 계속 학교 상공을 돌며 학생들의 동태를 살폈다." (구술 : 박행삼, 현사연 조사)
* "우리들은 등교하자 전날 시내에서 행해졌던 공수들의 만행에 대한 목격담을 주고받으며 웅성거렸다. 1교시 수업을 전후로 3학년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뛰쳐나갔다. 일부 학생은 저지하는 선생님을 밀치고 1,2학년 교실을 돌아다니며 '우리의 형님, 누나들이 공수들의 총칼에 맞아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고등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공수들을 물리칩시다'하고 호소했다. 그러자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몰려나갔다. 우리는 스크럼을 짜고 운동장을 돌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목청껏 외쳤다. 11시경 교문 진출을 시도하는데 공수들이 몰려와서 학교 주변을 포위하고 정문을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단체로는 학교를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서 시내로 나가 시위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구술 : 이덕준, 현사연 조사)
10:20 경찰 및 공수부대의 진압에 화염병으로 맞서
- 계엄군이 학생을 붙잡아 구타하자 금남로에 있던 시민 1천여 명이 야유를 보냄. (시청 상황일지)
10:25
- 미국 CBS 기자 3명이 시내 상황을 취재중. (시청 상황일지)
10:30
- 광주 CBS 방송국 앞에 다수의 학생과 소수의 시민 등 약 2천여 명이 운집, 6백 명의 계엄군과 대치. 500 MD 헬기 지원중. (계엄사 상황일지)
- 35특전대대를 CBS 방송국에 투입하여 경계배치. (전교사 교훈집)
10:40
- 충장로 일대 군중 2천여 명 투석전. 11특전여단 62, 63대대의 진압으로 해산.
(특전사 전투상보)
- 광주은행 앞에서 시위학생 2백 명이 군경과 대치하며 투석. 최루탄 발사하여 분산(경찰 중상 1, 경상 5). (전교사 작전일지)
10:50
- 무력시위를 감행중이던 군용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서 장갑차 4대씩을 앞세우고 금남로 시위대를 포위 압축.
- 학생, 시민 등이 금남로 사거리에서 5백여 명의 경찰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위. 시위군중 5천 명으로 늘어남.
- 광주은행 본점과 광주관광호텔 앞, 각 3백여 명의 시위대, 경찰과 투석전(화염병 투척). (신동아, 1985. 10)
- 일부 시민 및 고교생 가담, 다발적 소요 발생.(전교사 작전일지)
- 학생 2백여 명이 관광호텔 앞에서 경찰과 대치. 학생 1백여 명이 경찰 쪽으로 화염병을 투척 후 도주.
- 수미다방 앞(충장로 1가) 학생 1백여 명이 돌과 각목을 들고 시위대에 가세.
(계엄사 상황일지)
10:52
- 군용트럭 1대가 학생들을 연행, 조선대로 가면서 차내에서 구타. (시청 상황일지)
10:55
- 시민과 학생 4백여 명이 합세하여 충금지하상가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불을 질러 밀면서 도청 쪽으로 가다 경찰, 군인과 대치. 공수부대가 무차별 시민을 구타 해산시키고 있음. 충금지하상가 공사현장의 기름탱크 2개 폭파. (시청 상황 일지)
- 광주 중앙여고 앞에서 학생회장 박찬숙 외 6백여 명은 '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학생이 많이 죽었다'고 외치며 교내시위를 기도, 학교당국의 자체적인 제지로 좌절. 12:00 이후 귀가조치. (전교사 작전일지)
* "학도호국단 연대장이 교실을 돌아다니며 '대학생 언니, 오빠들이 데모를 하다 다치고 죽었다. 조의를 표하기 위해 교복의 칼라를 떼자'고 말했다. 우리들은 연대장의 말대로 교복의 흰 칼라를 떼어냈다. 한두 시간 수업을 받은 후 다시 연대장이 우리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한 후 30여 분 동안 시위를 주도했다. 의식있는 몇 분 선생님이 동참하셨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시위를 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며 만류했다. 결국 시위를 중단하고 오후 2시쯤 하교했다." (구술 : 박안숙, 현사연 조사)
- 광주은행 옆에서 학생 및 일반인 3백여 명이 화염병을 투척하며 도청 방향으로 진출중. 화염병 투척으로 금남로 거리가 연소되고 있음. 경찰 2 /56이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11:00 시위진압에 탱크까지 동원
- 시내에 투입된 공수대원들이 지역대 단위로 시위대 뒤를 추적하며 살상.
- 금남로 충장로 일대의 다방, 여관, 건물, 민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여 구타, 연행. 때로는 총검으로 난자질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쫓기던 시위대 7, 8명이 세종장호텔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자 공수대원들이 샅샅이 수색하여 끌어낸 뒤 주차장에 세워놓고 한 사람씩 발가벗겨 무릎를 꿇게 한 뒤 서너 명씩 달라붙어 머리를 땅에 처박게 하고 구둣발로 등, 안면, 복부를 구타. (현사연 조사 종합)
- 이때부터 금남로에 탱크 진입, 30명의 청년을 금남로에 무릎꿇려 앉혀둠.
(월간조선, 1985.7)
- 탱크 2대와 군용트럭 16대에 타고 온 무장군인들이 가톨릭센터 앞에서 하차하여 시위진압. (시청 상황일지)
- 제7공수여단의 제35대대가 금남로에 투입됨. 김일옥 중령의 진두지휘 과정에서 군중들은 더욱 악화. (말, 1988.5)
- 가톨릭센터 앞에서 군병력과 대치중인 학생 2천여 명 해산. 주동학생 2백여 명을 체포하여 경찰에 인계. (계엄사 상황일지)
- 7특전여단 33대대 1개 중대 광주일고 앞 출동. 그러나 첩보불량으로 즉시 복귀.
- 31사단장 35대대 방문.
- 금남로 3, 4천 명 시위중, 출동준비. (특전사 전투상보)
- 시내 48개 국민학교 수업중단 조치, 22일부터 임시휴교. (전교사 작전일지)
- 시내 중.고등학생 귀가조치.
11:10
- 관광호텔 앞에서 시위학생 3백여 명, 돌과 각목으로 군경과 대치, 장갑차 2대로 군경이 방어(107명 검거, 외신기자 5, 6명이 취재). (전교사 작전일지)
11:15
- 공수대가 지프차에 탑재한 확성기로 밖을 내다보는 시민들을 향하여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리라"고 고함을 침. (신동아, 1985. 10)
- 광주 대동고등학교 제2학년 3반 60여 명이 교실에서 수업을 거부하고 노래를 부르며 농성중, 계엄해제를 요구. (계엄사 상황일지)
11:20
- 금남로 지역 1백여 명, 충장로 거리 2백여 명 모여 있던 학생 전원 해산. (계엄사 상황일지)
- 11특전여단 6백명을 CBS 지역에 투입. (전교사 교훈집)
11:25
- 무장군인 7, 8명이 동구청 민원실에 침입, 민원업무를 보러 온 청년 2명을 잡아 구청 변소 앞에서 무수히 구타한 후 연행해 감. (시청 상황일지)
- 신민당, 긴급 정무회의 갖고 민주화투쟁 계속하기로 결의 10:30 - 11:50까지 긴급 정무회의를 김영삼 총재 자택에서 개최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음.
1. 신민당은 비상계엄과 상관없이 기본목표인 민주화 실천을 위하여 계속 투쟁할 것을 확인한다.
2. 국회는 공고된 대로 개최되어야 하며, 국회를 통하여 계엄령 해제 및 현안문제에 대하여 최대한 투쟁한다.
3.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인사 또는 소속의원의 연행 및 구속사태에 대하여 모든 방법을 동원 투쟁한다.
4. 회의참석자:김영삼, 이기택, 이민우, 노승환, 최형우, 이상진, 고흥문, 박용만, 정운갑, 김운자, 성남주, 김동영, 홍영기, 고한상, 최문식 (계엄사 상황일지)
- 12시를 전후해서 충장로, 금남로, 광남로 일대의 관공서와 공공건물 문을 닫고 직원들은 피신. (신동아, 1985. 10)
- 광주공원 앞에서 여학생 발가벗기고 진압봉으로 구타.(이세영 증언, 전남일보, 1989. 1. 24)
* "도청 앞 상무관 골목에서 공수들이 아가씨를 붙잡아놓고 팬티와 브래지어만 입힌 채 손으로 당겨보는 등 온갖 희롱을 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온몸의 피가 정지되는 것 같았다. 저런 금수만도 못한 놈들을 보고도 항의할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기만 했다." (구술 : 천순남, 현사연 조사)
12:00 수업받던 학원생까지 연행
- YWCA 건너편 무등고시학원에 계엄군이 난입하여 공부하던 학원생들 구타.
* "도청 주변에서 시위하던 학생들이 공수에게 쫓겨 YWCA로 들어왔다. 학생 약 10여 명이 들어오자 우리는 재빨리 셔터를 내리고 직원을 가장하여 자리에 앉혔다. 뒤쫓아온 공수들이 셔터를 올리고 들어와 곤봉을 휘두르며 학생뿐만 아니라 신용협동조합 직원들까지 끌어내 YWCA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무등고시학원생(건너편 건물 4층)들이 '때리지 마라. 끌어 내지 마라!'고 소리치자 공수들이 무등고시학원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몽둥이로 학생들을 후려친 뒤 밖으로 끌어내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김영철, 현사연 조사)
* "무등고시학원에서 4교시 수업을 받고 있는데 공수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공수들은 밖으로 나가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우리들을 몽둥이와 개머리판으로 두들겨팼다.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맨 앞줄에 앉아 있던 나는 빠져나갈 수 없어 뒤쳐졌다. 순식간에 달려든 공수들의 군화발에 짓밟히고 개머리판에 얻어터지며 YWCA 앞 도로로 끌려나갔다. 그곳에는 1백 명이 넘는 시민, 학생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있었고 10여명씩 무리지은 공수들이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트럭에 싣고 상무대로 갔다." (구술 : 정방남, 현사연 조사)
- 수창국민학교 정문 부근에서는 공수부대가 젊은이를 전봇대에 거꾸로 매달았음.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거리는 완전히 통행이 끓기고 계엄군은 도시의 블록마다 차단. (월간조선, 1985. 7)
* "금남로 양쪽 인도에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운집해 있었고, 차도에 선 공수대가 이끄는 장갑차가 서서히 운행하고 있었다. 갑자기 '밀어버려!' 하는 지휘관의 외침이 들렸다. 순간 공수들이 인도의 시민들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거리에 서 구경하던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공수들은 도망치다 넘어진 사람을 붙잡아 곤봉으로 실신할 때까지 때렸고 골목으로 도망친 시민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피투성이를 만들어 끌고 갔다." (구술 : 장막동, 현사연 조사)
12:10
- 11특전여단장 최웅 준장은 시가지의 도로사정을 잘 아는 경찰관 3명의 안내로 현장에 출동하여 상황점검에 나섬. 이때 제35대대는 도청 앞에서 중소기업은행 쪽으로 시위대를 밀어붙이기 시작. 제11여단 병력은 중소기업은행 쪽에서 시위대를 압축해 가기 시작, 이 과정에서 시위군중(370명)을 포고령 위반혐의로 연행. (말, 1988. 5)
12:20
- 광주일고생 2천여 명 교내시위 기도, 학교당국 자체 제지, 시차별 귀가조치. (전교사 작전일지)
12:30
-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의 초청으로 12:30에 정동 소재 미대사관에 도착한 유진오 박사와 김상협 고려대 총장은 글라이스틴 대사와의 오찬을 마치고 14:30에 돌아갔음. (계엄사 상황일지)
[광주민중항쟁 총일지]전면적인 민중항쟁 -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항거
제 4절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항거
(19일 오후- 20일 오전)
공수부대의 살륙전에 치를 떨던 시민들은 이제는 공포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하게 된다. 시민들의 이러한 참여와 투쟁은 학생시위에서 민중항쟁으로 질적인 변화를 함과 동시에 지금까지보다 훨씬 치열하고 공세적인 국면으로 상황이 변화된다. 개머리판과 대검을 휘둘러대며 점점 더 포악해지는 공수부대에 맞서 일부 고등학생까지 합세한 시위대는 비가 오는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계속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뒤처진 공수를 공격하거나 고립된 차량을 포위하기도 했다. 가톨릭센터에서는 경계가 허술한 틈을 이용해 총과 방패를 빼앗았으며 광주고 앞에서는 시민들에게 포위당한 장갑차에서 최초의 발포가 있었다. 이날 밤 시내 중.고등학교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계엄군이 3특전여단으로 교체되고 20일 오전부터는 시위진압의 양상이 달라진다.
13:00 - 15:00 가톨릭센타 앞 시위
- 금남로에 진주해 있던 공수부대 병력이 조선대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빠져 나간 오후 1시 반경부터 시민, 학생이 시위에 나서기 시작했다.
가톨릭센터 앞에 모인 시위군중은 4, 5천 명에 달했다. 이들은 금남로를 차단하고 있는 경찰을 향해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몰아붙였다. 청년들은 금남로 2가 제일교회 신축공사장에서 사용하는 두 개의 기름통에 불을 붙여 군경저지선에 힘껏 굴려보냈다. 군과 경찰은 갑자기 시위대로 접근, 곤봉과 총, 대검을 휘둘렀다. 흩어졌던 시위대는 다시 모여 도로변의 대형 화분과 공중전화 박스 등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계속 돌을 던졌다. 오후 3시쯤 군경저지대는 진압화기가 바닥난 듯 방패를 앞세우고 곤봉을 손에 쥔 채 긴장된 모습으로 제자리를 고수했다.
이때 갑자기 가톨릭센터 앞에서 함성이 터지면서 2백여 명의 청년들이 가톨릭 센터 안으로 들어갔다. 7층 옥상에서 6명의 무장공수대원이 시민들의 시위상황을 무전기로 연락하는 것이 목격된 직후였다. 빌딩 안으로 올라간 청년들 중 몇몇은 공수부대원의 대검에 찔려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수많은 청년들이 집중적으로 돌세례를 퍼붓자 공수부대원들이 비틀거렸다. 그러자 청년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때려눕혔다. 한 청년은 그들로부터 빼앗은 M16 소총 한 자루를 치켜올리자 도로의 시위대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을 인질로 삼는 것도 잠시였다. 오후 3시 20분경 점심을 끝낸 공수병력이 도청 앞과 광남로 사거리에서 점차 포위망을 좁혀왔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캐리버 60 기관총으로 무장한 장갑차가 무서운 속력으로 시위대를 향해 돌진해 왔다. 바로 이 순간 가톨릭센터 안으로 올라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하고 인질로 잡은 공수부대원을 지키고 있던 청년들은 일시에 들이닥친 공수대에 의해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다. 이곳에서 수많은 살상자가 생겼다. (신동아, 1985. 10)
- 가톨릭센터 차고에서 전남 1사 5236호 승용차 등 4대를 끌고 나와 화염병으로 차에 불을 붙여 도청 앞 공수대 쪽으로 몰아붙임. (신동아, 1985. 10)
- 11:30 - 13:00 광주은행 앞 등에서 소요자 연행
전남대 4, 조선대 26, 동신전문 4, 한국체대 1, 광주보건전문 1, 공원 8, 조대공전 1, 안양공전 1, 노동자 1, 목포대 1, 시내고교 1, 상업 1, 한양대 1, 전도사 1, 재수생 20, 농업 1, 농원공전 1, 회사원 9, 종업원 10, 전자공 1, 건축가 1, 운전사 1, 기타 11(계 107명). (계엄사 상황일지)
- 가톨릭센터 앞에 시민,학생들이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대치중이며 광주은행 앞의 아치 파괴.
- 군중 7, 8천 명이 드럼통에 기름을 부어 노상에서 불을 지름. (시청 상황일지)
* "많은 시민들이 가톨릭센터 앞에 모여 화단으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가톨릭센터 옆 골목에 세워둔 승용차를 끄집어내 불을 질렀다. 그때 몇 명의 시위대가 가톨릭센터 안으로 뛰어가자 곧바로 공수 6, 7명이 후다닥 쫓아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많은 시민들이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몰려갔다. 상황의 전개가 궁금하던 우리는 숨을 죽이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옥상과 5층에서 시민들이 M16과 철모를 높이 쳐들자 밑에서 지켜보던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것도 잠시, 관광호텔 앞에서 공수 1개 대대병력 정도가 4개 중대로 나뉘어서 줄을 맞춰 달려왔다. 종대로 달려오던 그들은 대열을 횡대로 바꾸더니 주변의 시민을 향해 달려들어 미친 듯이 진압봉을 휘둘렀다." (구술 : 박남규, 현사연 조사)
* "점심 무렵 금남로 3가 광주은행 앞으로 갔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몇 사람만 모여도 최루탄을 쏘며 난폭한 진압을 하던 공수들이 웬일인지 그날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우-' 하는 함성과 함께 시민들이 가톨릭센터 건물로 도망치는 공수들을 뒤쫓아갔다. 나도 재빨리 건물 안으로 뛰어갔다. 우리는 옥상까지 그들을 쫓아갔다. 공수 한 명에 시민 여러 사람이 붙어서 그들이 갖고 있던 M16을 세 자루 빼앗았다. 우리는 총을 높이 쳐들어 흔들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총 한 자루를 가지고 옥상을 내려와 총을 분해했다. 실탄은 없었다.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에게 총을 건네주고 나는 밖으로 나와 가톨릭센터 뒤쪽으로 갔다. 시민들이 공수가 몰려온다고 소리치면서 발을 구르며 옥상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까맣게 몰려드는 공수들을 보고 다급해진 사람들은 미처 계단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그곳은 차고라서 위에 천막이 쳐져 있었다. 뛰어내린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밀려드는 공수를 피해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달아났다." (구술 : 김영남, 현사연 조사)
- 가톨릭센터 건물 안에서 시체 6구가 발견됨.(KSCF, 아! 광주여, 민족의 십자가여)
- 금남로 2가에 운집한 시민, 관광호텔 앞에 있는 계엄군에 맞서 투석.
* "나는 가톨릭센터 상황을 지켜보다 금남로 2가 상업은행 앞으로 갔다. 관광호텔 앞에는 페퍼포그차를 앞세운 공수들이 도열해 있었다. 상업은행 앞에 있던 시민들이 돌을 던지자 공수들이 쫓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의 기세에 눌려 곧바로 도망쳤다. 시민들 틈에 끼여 달려가다 내 앞 사람이 넘어진 바람에 나도 넘어지고 말았다. 연속해서 여러사람이 넘어졌다. 우리가 미쳐 일어서기도 전에 밀어닥친 공수들이 발길질을 해댔다. 곤봉으로 내리치는 소리, 신음소리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공수들의 구타가 멎자 주위를 살펴봤다. 쓰러진 시민들이 끙끙 거리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착검한 공수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때 트럭 1대가 왔다. 공수들은 2인 1조가 되어 쓰러진 사람들을 양쪽에서 붙잡고 트럭으로 던졌다. '트럭에 실리면 영영 죽겠구나' 생각이 들어 나는 상업은행 쪽으로 기어갔다. 은행 앞에는 한 여자가 눈알이 빠진 채 죽어 있었다. 나는 공수들의 눈에서 벗어났다 싶자 재빨리 일어서 도망쳤다." (구술 : 이희승, 현사연 조사)
13:40 무차별 살륙에 방화로 맞서
- 트럭 18대분의 병력 진입, 그 뒤 후속부대 진입. 진입과정에서 학생, 시민 4,5 천 명이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에 모여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전(14시 30분까지).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도로변의 화분대(길이 1.5m ,폭 40cm ), 공중전화 박스, 버스 정류장 입간판 등으로 길 가운데 바리케이드 설치. 제일교회 공사장에 있던 기름 2드럼에 불질렀는데, 하나는 폭발함. (월간조선, 1985. 7)
14:00
- 시위학생 조선대와 전남대 운동장으로 연행.
* "조선대학교 수도공사를 급히 해야 한다는 사장의 말을 듣고 동료 5명과 함께 갔다. 조선대 정문을 지키고 있던 7, 8명의 공수에게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출입증을 받았다. 점심을 먹은 후 잠시 쉬고 있는데, 군용트럭 1대가 30-40명 청년들을 싣고 운동장으로 들어왔다. 그들 중에는 팬티만 입은 사람도 있었다. 트럭에 있던 청년을 끌어내린 후 낮은 포복으로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리고 무자비한 구타를 했다. 그런 다음 체육관으로 끌고 갔다. 그후로도 계속 군용트럭에 청년들을 싣고와 같은 방법으로 기합을 주고 구타하기를 되풀이했다. 그날 내가 확인한 것만해도 여덟 차례나 청년들을 싣고 왔다." (구술 : 황강주, 현사연 조사)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2백 명의 시민 투석전.
14:00 - 17:00
- 군사령관 전투교육사령부 및 제31사단에 작전지도차 내방. (전교사 작전일지 )
14:25
- 3천여 명의 학생, 시민들이 금남로 가톨릭센터의 유리창을 파손시키며, 전시민은 나오라고 외치고 있음. (시청 상황일지)
14:30
- 금남로에서 일반인이 합류하여 1천여 명이 투석하면서 관광호텔 방향으로 진행중. (계엄사 상황일지)
14:35
- 송정리 광산여고 학생회장 3학년 김영란(18)은 정광고 학생회장과 점심시간에 만나 5교시가 끝나면(14:35), 교외로 뛰어나가자고 합의하고 김영란은 동교 실장 5명을 소집하여 행동 통일토록 결의함.(계엄사 상황일지)
- 시내는 거의 철시하고 있으며, 차량이 완전히 통제되고 있음. 일반건물, 독서실, 식당 등도 뒤져 젊은이는 트럭으로 실어가고 있음.
- CBS 승용차 1대, MBC 승용차 3대, 일반승용차 2대에 방화. 시민,학생 바리케이드 쌓고 MBC(시내 중심가에 위치) 앞, 금남로 지역 등 3개소에서 군인들과 대치중(오후 2시 현재)에 있음. 한 곳에 시민 학생 2천 명 정도씩.
- 대동고, 중앙여고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를 시작할 기미를 보이자 군인들이 출동하였고, 이들이 학교를 포위해 학생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음 .
- 군인들이 일부 웅성거리는 시민들에게 들이닥치면 시민들은 가정집이나 가게 등에 뛰어들어 숨고 있음. (월간조선, 1985. 7)
14:50 일반시민들의 합류로 불어나는 시위대
- 한일은행 앞 사거리에 학생 및 군중이 증가되어 현재 2천여 명이 도청 앞으로 진출. 관광호텔 옆 성결교회 공사장에서 각목을 들고 바리케이드를 치는 한편, 건축에 소요되는 인화물질에 불을 지르면서 전진하며 군경과 투석 대치. (계엄사 상황일지)
- 11여단 61, 62, 63대대, 7여단 35대대가 한일은행 앞 군중 2천 명 해산. (특전사 전투상보)
화염방사기를 시위진압에 사용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소방서 부근에 진을 치고 있던 공수들에게 돌을 던졌다. 계엄군들이 달려오면서 화염방사기를 공중을 향해 쏘아 댔다. 총구에서 불이 뿜어나오는 살상용 화염방사기를 쏘아대는 것을 보자 한편 두렵기도 했지만 공수들의 잔악함에 치가 떨렸다. 소방서 뒤쪽에는 장갑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 공수들과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이 욕설을 퍼붓고 야유를 보내도 처음에는 반응을 보이지 않던 놈들의 태도가 돌변했다. 갑자기 최루탄을 쏘며 시민들을 무작위로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 민가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그곳으로 들이닥친 공수들에게 온몸을 구타당하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보니 그들이 나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우리는 트럭에 실려 조선대학교 체육관으로 갔다. 오후 3시경이었다. 몇 시간 동안 그곳에서 살인적인 구타와 기합을 받은 후 저녁 6시경 전경버스에 실려 상무대로 갔다." (구술 : 최충용, 현사연 조사)
- 한일은행 ∼ 관광호텔 부근에서 시민 학생 2천여 명이 합류하여 시위. 성결교회 공사장 각목으로 바리케이드 설치. 인화물질을 불태우고 군경과 대치. CBS 건물에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5:00
- 금남로에 있던 경찰은 이미 최루탄이 소진되어 저지선에서 몸으로 막고 서 있음.
- 상공에서는 헬기가 날면서 해산을 종용하는 선무방송을 계속함.
- 광주공원 부근에서 공수대와 시위대의 충돌.
- 시위대가 문화방송에 진입하여 화염병을 던졌으나 불은 나지 않았다. 문화방송 차고에서 승용차 5대를 끌어내어 방화중. (신동아, 1985. 10)
- 헬리콥터 3대가 시위군중에게 해산하라고 방송. 시위대는 CBS에 몰려가 방송 기재 등을 파괴했고, 전남체신청 앞에서 시민 학생 8백여 명 계엄군과 투석전.
- 광주 유지들 도청에 모여 부지사에게 무차별 구타에 항의, 이런일 다시 없도록 건의해 달라고 요청. (월간조선, 1985. 7)
- 시민들이 가톨릭센터 6, 7층을 완전 점령하여 유리창을 파손하였으며, 동구청 앞 자가용차 1대에 방화. (시청 상황일지)
- 권승만 중령이 이끄는 제33대대 병력이 계림동으로 출동. 그러나 33대대는 계림극장 앞에서 곤봉과 대검을 난자질하는 살육전을 벌이다 오히려 군중들 에게 포위당하여 많은 군인들이 부상당하였고, 결국 밤 10시 20분 조대 교정으로 겨우 철수. (말, 1988. 5)
15:04
- 계엄군 1개 대대의 증원군이 도청 앞 광장에 도착하여 7공수여단 제35대대와 합류. 이때 5분간 경고문이 방송됨. (말, 1988.5)
15:08
- 가톨릭센터 앞에서 승용차 3대가 불탔으며, 1대는 시민들이 불을 질러서 밀고 도청 쪽으로 향함. (시청 상황일지)
- 광주 대동고등학교는 15:00를 기하여 무기한 가정학습에 들어갔으며, 학생들은 2개 파트로 나뉘어 1개 파트 5백 명씩 짝을 지어 스크럼을 짜고 정의가를 부르며 운동장에서 시위중. (계엄사 상황일지)
15:14
- 조선대에서 전차 1대, 장갑차 1대, 트럭 22대에 병력을 싣고 도청 쪽으로 내려옴. (시청상황일지)
15:15
- CBS 방송국 건물이 점거되어 파괴되고 있으며, CBS에서 M16 1정, 실탄 15발 분 실. 방송국 앞에 있던 포니차량 4대 방화됨. (전교사 작전일지)
- 금남로에 시민 및 학생 3천여 명으로 증가, 민간인 승용차(포니) 2대 방화. (육본 상황일지)
- 35대대 충장로, 금남로로 출동. (특전사 전투상보)
15:25
- 군인의 투입으로 시민들은 해산되었고, 제일은행 앞에서 남학생 1명이 사망.
(시청 상황일지)
15:30 격렬해지는 시위대
- 광주지역 학생, 시민 합류하여 1천여 명이 투석하면서 관광호텔 방향으로 진행중에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관광호텔 앞에서 시위군중 3천여 명 군경에 강력히 대항.(전교사 작전일지)
- MBC 방송국 앞에서 분산된 시위군중 2백여 명이 MBC 앞에 세워둔 승용차 등 8대를 방화 및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5:42
- 33특전대대 MBC 방송국 경계병 1/9명 구출작전 실시. (전교사 분석집)
15:45
- 시민들이 한일은행 앞과 중앙극장 앞에 바리케이드를 쳐놓고 있으며, 현대극장 쪽에서 계엄군 1개 중대, 유동 쪽에서 1개 중대가 금남로 쪽으로 밀고 올라오다 충금지하상가에서 시민과 충돌. (시청 상황일지)
15:50
- 가톨릭센터에서 CBS 보도부 차장과 미국인 1명이 부상한 남자를 들것에 싣고 관광호텔 쪽으로 감. (시청 상황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