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총일지]전면적인 민중항쟁 - 계엄확대 조치와 산발적인 학생시위
제1장 전면적인 민중항쟁
제1절 계엄확대 조치와 산발적인 학생시위
(17일 21:40 - 18일 13:00)
17일 자정을 기해 선포된 계엄령 전국확대 실시를 전후하여 전남대, 조선대를 포함, 광주시내 각 전문대 관공서 등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 조선대 학생 69명이 연행되었다.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앞에는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횃불시위 때 휴교령이 내리면 전남대 정문 앞에서 모이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귀가를 종용하는 계엄군과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 최초의 충돌로 인한 학생들의 시내진출이 광주항쟁의 첫 도화선이 된다. 흩어진 학생들은 광주역 앞에서 재집결, 시외버스 공용터미널과 금남로 일대에서 '김대중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파출소에 투석하는 등 경찰과 대치, 충돌하였다. 그런데 시위대열에 대한 경찰의 태도는 지난 16일까지의 시위진압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흩어지는 학생들을 골목까지 뒤쫓아가 곤봉으로 구타하고 차에 태워 어디론가 싣고 가버렸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학생들은 충장로, 한일은행 앞, 광주공원 등 곳곳에서 계엄확대와 계엄군의 잔인한 만행을 알리며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위대열의 숫자는 불어났다. 연도로 모여든 시민들은 감히 앞으로 나서거나 참여하지 않았지만 박수를 보내는 것으로써 호응했다.
17일 21:40 -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23:40 - 정부대변인 이규현 문공부장관, "비상계엄 선포지역을 17일 24시를 기해 전국 일원으로 변경한다"고 발표.
계엄포고령 제10호
1. 1979년 10월 27일에 선포한 비상계엄을 계엄법 규정에 의하여 1980년 5월 17일 24시를 기하여 그 시행지역을 대한민국 전지역으로 변경함에 따라 현재 발효중인 포고를 다음과 같이 변경한다.
2.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 모든 정치활동을 중지하며 정치 목적의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일절 금한다. 정치활동 목적이 아닌 옥내외 집회는 신고를 하여야 한다. 단, 관혼상제와 의례적인 비정치적 순수 종교행사의 경우는 예외로 하되 정치적 발언은 일절 불허한다.
나.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은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각 대학(전문대학 포함)은 당분간 휴교 조처한다.
라. 정당한 이유 없는 직장 이탈이나 태업 및 파업행위를 일절 금한다.
마. 유언비어의 날조 및 유포를 금한다. 유언비어가 아닐지라도 1)전, 현직 국가원수를 모독 비방하는 행위 2)북괴와 동일한 주장 및 용어를 사용, 선동하는 행위 3)공공집회에서 목적 이외의 선동적 발언 및 질서를 문란시키는 행위를 일절 불허한다.
바. 국민의 일상생활과 정상적 경제활동의 자유는 보장한다.
사. 외국인의 출입국과 국내여행 등 활동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한다.
본 포고를 위반한 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수색하며 엄중 처단한다.
1980. 5. 17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이희성
23:00 민주인사, 복적생 등 예비검속
- 복적생 일부, 각 대학 총학생회 간부 연행. 일부 피신. 연행대상자 22명중 8명 체포.
- 이 시간을 전후하여 서울에서도 김대중,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고은, 이영희, 김종필, 이후락, 박종규, 김치열, 김진만, 오원철, 김종락, 장동운, 이세호 등 26명 연행.
- 계엄사령부 김종필, 김대중 씨 등 26명 연행. 권력형 부정축재, 소요 조종 혐의,
권력형 부정축재자: 이후락, 김치열, 오원철, 장동운 등
소요조종자: 예춘호, 문익환, 김동길, 고은, 이영희 등 포함 (동아일보, 80. 5. 19)
18일 01:00 광주 일원 공수부대 투입
- 전북 금마에 주둔하던 특전사 제7여단(여단장 준장 신우식, 2군 배속) 제 33, 35대대 82/604(장교/사병 이하 생략), 전남대 도착. 도서관, 총학생회실 등에서 철야를 하던 학생들을 급습, 곤봉과 군화발로 구타 후 체포.
02:00
- 제33대대(대대장 권승만 중령) 45/321, 전남대와 광주교대 점령 완료. 교내에 있던 학생 69명 체포.
- 제35대대(대대장 김일옥 중령) 39/283, 조선대와 전남대 점령 완료. 학생 43명 체포.
*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데, 11시경에 군부대 트럭이 교내로 들어왔다. 그들은 통신 점검차 들렀다고 하면서 횡설수설했다. 자정이 되자 공수들이 정문과 후문으로 계속 밀어닥쳤다. 총학생회 사무실에 있던 7명 중 3명은 무사히 빠져나가고, 권창수, 오진수, 나 외에 1명이 새벽 1시경 공대 5호관에서 붙잡혔다." (구술 : 이승룡,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이하 현사연이라 약칭) 조사)
02:26
- 제33,35대대, 31사단 96연대에 배속. (31사단 전투상황보고, 이하 31사단 전투상보라 약칭)
02:29
- 31사단 96연대, 사단 잠정부대 배속 받아 전남대, 조선대를 제외한 각 대학 점령.
호남신학대 3/42
서원보건전문대 3/35
동신전문대 3/27
대건신학대 3/29
서강전문대 3/32
성인경상전문대 2/47
기독간호전문대 3/35
송원전문대 2/47
- 31사단 96연대, 광주시내 방송국 점령. KBS 2/40, MBC 1/20, CBS 1/10, VOC 1/10(전일방송). (31사단 전투상보)
00:05 광주지역 민주인사 등 연행
1. 정동년, 김상윤 등 복적생과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들에 대한 연행작전.
2. 도서관에서 철야하던 전남대, 조선대 학생들의 회의장, 농성장에 공수부대가 급습, 학생회 간부 및 복학생, 시위주동 혐의자들을 검거하여 운동장에 옷을 벗겨 꿇어앉히고 구타한 뒤 연행. 공수부대와 합수부(안기부, 경찰, 보안대)는 새벽 5시경까지 학교와 예비검속 대상자의 가택 등을 수색.
3. 예비검속자 명단 : 정동년(전남대 4년), 권창수(전남대), 오진수(전남대), 이승룡(전남대 3년), 유재도(조선대), 유소영(조선대). (현사연 조사 종합)
* "조선대 방송실에서 선후배들이 모여 철야 간담회를 하고 있는데, 31사단 소속 통신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학교 통신시설을 점검한다며 들어왔다. 형식적인 점검 후 그들이 나가자 나는 화장실에 갔다. 잠시 후 방송실에서 험한 욕설이 흘러나오고 무엇이 부서지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요란했다. 교내에 계엄군이 진입한 것이다. 그때가 밤 12시경이었다." (구술 : 진호림, 현사연 조사)
02:20 계엄포고문의 접수
- 포고문 접수 및 하달 / 전국 계엄령 확대 실시에 따른 조치사항 학교 병력배치
전북 14개 학교 52/660(01:29)
전남 20개 학교 114/1132(02:29)
주모자 검거 : 전북 46명 중 6명 전남 22명 중 8명
학교에서 체포인원 : 전남대 69명, 조선대 43명, 전북대 34명, 원광대 23명.
(전투병과 교육사령부 작전일지, 이하 전교사 작전일지라 약칭, 광주 치평동 소재, 흔히 상무대라 부름)
* "전남대 고용직에 근무했던 나는 5월 17일 밤 10시경 중앙도서관 문을 잠그고 숙직실로 와서 잠을 잤다. 새벽 2시쯤 되었을 것이다.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더니 문을 발로 쾅쾅 찼다. 공수부대가 전남대에 진입한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중앙도서관 열람실의 비상키를 요구하더니 도서관 열람실을 샅샅이 수색한 후 공과대학 본관으로 갔다." (구술 : 고광윤, 현사연 조사)
03:05 무기고 안전 지시
- 군사령부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 전 남북·계엄분소, 2군사령부의 지시를 받고 예하부대에 무기고 안전대책 강구 지시. (전교사 작전일지)
- 새벽 전남대 입구에 전투경찰 배치
- 제31사단, 전남대 앞에 경찰 7백24명 투입 배치. (전교사 작전일지)
09:00 전남대학생들 등교 시작 (전남대 정문앞 싸움)
1. 전남대 정문 앞에 학생들 모이기 시작.
2. 일찍 등교한 전남대생 6명, 팬티만 입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3. 전남대생 1백 명 가량이 학교에 들어가려다 기동경찰과 대치, 투석 전.
4. 휴교령으로 문이 닫힌 전남대 정문에서 학교에 들어가려던 교수 한 분이 계엄군에 의해 구타당하자 분개한 전남대생 2백여 명이 학교 정문에서 20분간 공수, 경찰과 투석전을 벌인 뒤 중흥동 금남로에 진출하여 연좌, '계엄령 해제'와 '전두환 사임'을 요구하며 가두농성을 시작했다. 40여 분간 요지부동으로 연좌데모를 하던 학생들이 한일은행과 YMCA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던 경찰의 최루탄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지자 사복형사들이 뛰쳐나와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에 연변의 시민들이 형사들에게 야유를 던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흩어졌다가 현대극장 앞에서 다시 일행을 규합. 이때 조선대학교 및 전문대 학생들이 가세하면서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상기 구호를 외치며 시위했다. (신동아, 1985. 10)
10:00
- 전남대 정문 앞에서 전남대생 50명(2백∼3백, 4백 명이라고도 함) 시위.
- 군용트럭의 시내 질주가 목격됨.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0:20
- 전남대 정문 앞에서 전남대생 5백여 명, 경계중인 공수부대와 충돌. '계엄철폐'를 외치며 도청 쪽으로 진출. (말, 1988.5)
- 제33대대, 전남대 정문 앞 2개 중대 투입. (특전사 전투상보)
- 제33대대 대대장 권성만 중령은 이와 같은 학생들의 시위에 대하여 즉시 2개 중대를 투입하여 시위학생을 해산시켰다.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섰고 계엄군은 M-16 자동소총을 어깨에 비켜 멘 채 위력시위만으로 대처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가 한 시간 이상 계속되자 거기에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말, 1988.5)
* "2백여 명의 학생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 있었다. 교내에서 마이크를 통해 '다리에 있는 학생에게 알린다. 즉시 귀가하라. 그렇지 않으면 강제 해산시킨다' 는 경고방송을 했다. 그 말을 듣고 흥분한 우리가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까지 끄떡도 않고 있던 공수들이 몽둥이를 들고 질주해 오자 순식간에 흩어졌다. 거리가 잠잠해지자 다시 모인 학생들이 여기에서 소모전을 하지 말고 시내로 나가자고 하여 우리는 대열을 이루고 광주역,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을 거쳐 YMCA 앞으로 갔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10:30 전남대 후문에서 시민 연행
* "전남대 후문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 공수 2명이 내 양쪽 팔을 잡고 전남대 수위실로 끌고 갔다. 왜 나를 잡아가느냐는 물음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군화발로 차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팼다. 수위실에는 먼저 잡혀온 몇몇 사람이 포승줄에 묶인 채 꿇어앉아 있었다." (구술 : 장천수, 현사연 조사)
* "오전 10시경 10번 시내버스를 타고 갔다. 전남대 후문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 한 명이 내리자 담벼락에 숨어 있던 공수가 달려와 버스를 세우더니 승객들에게 내리라고 했다. 아무도 내리지 않자 공수 2명이 승차하여 닥치는 대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20∼30명의 승객을 끌어내린 후 전남대 수위실 부근에 감금시켰다." (구술 : 범진염, 현사연 조사)
10:50
- 광주역 앞에서 전남대생 2백여 명이 집결하여 금남로 도청 앞까지 행진하다 경찰의 제지로 광주우체국 쪽으로 흩어짐. (5.18 당시 시청에서 정리한 일지로 경향신문 1988년 5월 18일자에 발표된 '5.18 사태 상황 및 조치사항'. 이하 시청 상황일지라 약칭)
11:00 금남로 연좌시위 '흔들리지 않게' 부르며
- 금남로 3가 가톨릭센터 앞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시내로 진출한 전남대생 5백 여명 연좌시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페퍼포그차를 앞세운 전경들이 도청을 등지고 있었다. 우리는 전경들과 10여 미터의 간격을 두고 연좌농성을 했다. '흔들리지 않게' 등의 노래를 부르며 구호를 외치는데, 어느 사이 우리 뒤쪽에도 전경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페퍼포그를 쏘고, 곤봉으로 학생들을 구타하면서 연행하기 시작했다." (구술 : 김한중, 현사연 조사)
* "동구청 앞에서 30여 명의 학생들이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대치 중이던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학생들을 연행하자 곧바로 진압되었다." (구술 : 임춘식, 현사연 조사)
- 한일은행 앞, YMCA 부근에서 전남대생 시위.
- 헬기로 시위대의 상황을 파악.
- 전남대생 2백여 명이 동대학 정문에서 계엄군과 투석전. 1백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 쪽으로 진출 중에 있음. (계엄사 상황일지)
- 극단 '광대'의 단원들은 YWCA에서 공연연습을 중단하고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일부는 계엄령 확대와 공수부대의 광주 진입에 관한 유인물 제작, 산수동, 학동 등의 주택가에 배포, 일부는 가두시위에 참가. (현사연 조사 종합)
* "금남로에서 후배를 만나 계엄군의 횡포에 대한 말을 전해 듣고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제작하기로 합의하고 즉시 유인물을 작성, 신안동과 서방의 주택가와 행인들에게 나눠줬다. 광주 일대의 통행금지 시간이 9시에서 8시로 앞당겨진다는 TV 뉴스를 듣고 김선출, 전용호와 함께 학운동 무등영아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유인물 작성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 끝에 정찰조와 유인물조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정찰조가 시내에 나가 목격하고 온 시위상황을 토대로 유인물을 작성하여 시내 주택가에 배포했다". (구술 : 김태종, 현사연 조사)
11:10
- 전남대 앞 시위대 해산.
- 충장로 파출소에서 대치. (육본 상황일지)
11:15
- 전남대생, 도청에서 집결하자고 하면서 분산. (계엄사 상황일지)
- 학생 1백여 명이 충장파출소에 투석, 유리창이 파손됨. (시청 상황일지)
11:25
- 광남로 진출 2백여 명의 학생, 공원 쪽으로 가면서 충장로 파출소 유리창 7개 돌로 파괴.(계엄사 상황일지)
11:30 가톨릭센타 앞에서 대치
- 학생들은 광주역을 거쳐 번화가인 금남로로 들어갔으며, 숫자는 2백 명쯤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농성하며 '김대중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기동경찰이 길 양쪽에서 다가서며 페퍼포그를 발사, 해산시킴. 학생들은 흩어지면서 충장, 계림, 동명, 산수 등 5개 파출소 파괴. (월간조선, 1985. 7)
11:49
- 공원 쪽에서 몰려오는 6백여 명은 손에 돌을 들고 '전두환 물러가라','계엄 해제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한일은행 앞으로 진출. 가톨릭센터 앞에 3백50여 명의 학생 운집. (계엄사 상황일지)
11:50
- 가톨릭센터 앞의 6백여 명, 한일은행 앞 시위대와 합류, '비상계엄 해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중, 경찰 최루탄 발사 해산시키며 주모자 체포중. (계엄사 상황일지)
- 금남로 충금동사무소 옆에서 학생 2백여 명이 시위 도중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해산되었으며 5명 정도가 연행됨. (시청 상황일지)
12:30
- 학생회관 앞, 금남로에서 해산된 학생 중 3백여 명 재집결, 불로동 다리 방면으로 진행하면서 계엄해제 등의 구호를 외침. (전교사 작전일지)
- 한일은행 앞, 2백여 명 재집결 가톨릭센터 쪽으로 이동하며 시위. 경찰 최루탄 쏘며 주동자 검거(6명). (계엄사 상황일지)
12:45
- 7공수 33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가톨릭센터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령. (특전사 전투상보)
- 산수동 파출소 피습, 전남대생 20여 명 산수동 파출소에 투석, 유리창 20여 개 깨고 도주. (계엄사 상황일지)
[광주민중항쟁 총일지]전면적인 민중항쟁 -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작전
제 2 절 공수부대의 무차별 진압작전
(18일 13:00 - 18일 밤)
수창초등학교에 집결한 공수부대가 조를 재편성해 시내 각 곳으로 배치된다. 이들은 모두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쓰고 등에는 총을 메었으며 대검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오전의 수동적이고 산발적인 시위와 달리 학생들은 적극적인 공격의 형태로 이들과 맞서게 된다.
광주공원 부근에 모인 시위대는 도청 쪽으로 진출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한 대를 불질렀으며 파출소를 파괴하였고 농장다리 부근에서는 버스에 탑승해 있는 경찰들을 무장해제시켜 인질로 잡기도 했다. 시위대의 가두투쟁이 적극적으로 변화함에 따라 7공수에 이어 11공수가 광주로 투입되었고, 여단병력으로 증강된 공수부대와의 충돌 또한 더욱 치열해진다. 공수부대는 집안까지 쫓아 들어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끌고 갔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곤봉과 대검을 닥치는 대로 휘둘러댔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가 시작된 것이다. 피로 얼룩진 시위는 밤까지 계속되었으며 시민들은 분노와 공포의 밤을 보냈다. 이날부터 '광대' '대학의 소리' 팀 외에도 개인별, 단체별로 시위 상황을 적은 유인물이 제작, 배포되었다. 이러한 분산적인 선전작업은 21일부터는 '투사회보'로 결집되어 언론이 통제된 항쟁기간동안 시민의 눈과 귀가 된다. 계엄사령부는 통금을 1시간 앞당겨 21:00 ∼ 04:00로 발표했으며 시내전역과 직장예비군의 무기 및 탄약을 회수하였다.
13:00 공수대의 시내 투입
- 수창초등학교에 공수부대 차량 20여 대 집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1시가 조금 넘어서 수창초등학교 앞에 당도하니 공수들이 5열 횡대로 차도를 막고 있었다. 그들은 총을 비스듬히 메고 곤봉을 총검술 자세로 받쳐든 채 지휘관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한발 한발 움직이고 있었다. 20-30명의 학생들이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그때였다. 지휘관의 긴 호루라기 소리를 신호로 공수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길가는 시민들을 붙잡아 무자비한 살상을 시작했다. 나는 데모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공무원인 신분을 믿고 계속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들리는 요란한 군화발 소리에 놀라 돌아다보았다. 수십 명의 공수들이 나를 향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오, 나는 공무원이오' 하고 황급히 외쳤으나 그들은 곤봉을 내리치고 발길질을 해댔다. 나는 그들의 곤봉에 머리를 맞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김정섭, 현사연 조사)
13:10
- 군사령부에 군사령관 작전지도차 내방.(말, 1988. 8)
13:20
- 학생들이 학생회관 앞에서 경찰과 충돌, 페퍼포그차 1대를 불지름. (시청 상황일지)
* "학생회관 정문에서 전경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학생들이 전경들 주변으로 접근해서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졌다. 기습을 당한 전경들은 허겁지겁 도청 쪽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버리고 간 페퍼포그차, 몽둥이, 방패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기세등등해진 학생들이 페퍼포그차를 뒤집어놓고 기름통에 불을 붙여 차를 전소시켰다." (구술 : 이광호, 현사연 조사)
14:15
- 유동 삼거리, 불로동 쪽에서 온 3백여 명 해산.
- 조흥은행 앞, 한일은행 쪽에서 해산되어 공원 쪽으로 이동중인 3백여 명을 추적 분산, 주동자 검거중(10명). (계엄사 상황일지)
14:42
- 또다시 도청 앞과 금남로 일대에서 1천5백여 명, 충장로 일대에서 1천6백여 명의 군중이 데모를 시작했다. 데모 군중들이 경찰관들을 향해 보도블록과 콜라, 사이다 병을 투척.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했으나 갈수록 과격해지는 데모대의 진압에는 실패. (말, 1988.5)
13:10
- 7공수 35대대, 31사 96연대로부터 도청 앞 데모대 진압 명령 수행. (특전사 전투상보)
15:00
- 계엄군 38/294명 투입, 시내 진압작전 실시(7공수).
가톨릭센타 : 33대대(35/367)
충 장 로 : 33대대(26/172)
- 시위군중 해산(체포 337명). (말, 1988. 8)
- 학생회관 부근, 페퍼포그 차량 1대 전소. (전교사 작전일지)
- 공중에서 헬기 3대 선회.
헬리콥터의 프로펠러를 이용해 시위진압
* "처음에는 헬기가 단지 작전을 지휘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전경들과의 투석전이 계속되면서 시위대들의 숫자가 계속 불어나자 헬기가 직접 시위진압에 투입됐다. 헬기가 저공비행을 하면서 프로펠러의 바람을 이용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헬기가 다가오면 세찬 바람과 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어 골목으로 재빨리 피신했다가 재집결하여 투석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구술 : 임낙평, 현사연 조사)
- 학생회관 부근 학생들이 두 팀으로 나누어짐. 이들은 외곽지역의 학생들을 동원할 목적으로 한 팀은 광주공원-한일은행 앞으로, 다른 한 팀은 광주천을 거슬러 올라가 전남공고 방면으로 진출. (현사연 조사 종합)
- 데모대는 충장로 파출소와 중소기업은행 앞에서 연좌시위를 시작, 오후 3시경 에는 2천여 명으로 증가.
-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 박승렬은 대인동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 노상에서 시위군중 1천여 명과 합세 하여 대인동, 금남로를 거쳐 도청 앞까지 가면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 가량 시위를 하고. (공소장)
- 차명석은 지원동 수정아파트 앞에서 박관현이 계엄법 위반으로 수배되어 있음을 알고 체포를 면하게 할 목적으로 빌려온 자가용 대여차에 박관현을 승차시켜 21시경 전남 여천군 돌산면 방죽포 임해연구소 앞에 있는 김철만의 집까지 가게함. (공소장)
- 한정만은 16시까지 광주우체국 앞에서 경찰과 대치중인 약 3백 명의 시위군중과 합세하여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 유동 삼거리를 경유하여 광주역까지 시위. (공소장)
15:30
- 충장로 광주공원 일대 3백-6백 명 단위로 운집 시위. (말, 1988. 8)
- 박철은 동명동 파출소 앞 노상에서 군중 약 2백 명과 시위를 하면서 돌과 빈 병을 파출소 유리창에 던져 유리창을 깨고 일부 시위군중 7,8명은 파출소 안에 들어가 책상, 전화기 등 기물을 파손하고 일부 시위군중은 파출소 옆의 오토바이에 방화. (공소장)
- 유동 삼거리, 수창국교 근처 등에 M16소총을 비껴맨 일군의 공수부대 출현.
시외버스공용터미널을 중심으로 시내 곳곳의 시위진압.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 "관광호텔 안의 이발관에 있는데 밖이 소란스러워 종업원들과 함께 나가봤다.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1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데모를 하다 공수들에게 밀려 도망가고 있었다. 뒤쫓아간 공수들이 30-40명의 시민, 학생을 동구청과 관광호텔 앞으로 붙잡아왔다. 공수들은 붙잡혀온 시민, 학생의 옷을 벗게 한 후 팬티만 입힌 채 구타와 기합을 주고 머리를 땅에 처박게 했다. 한국은행 부근에서 공수 2명이 여학생을 끌고 왔다.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공수들은 욕을 하며 더욱 거세게 발길질을 했다. 잠시 후 공수들이 다른 사람을 잡으러 간 사이 어떤 아저씨가 그곳에 잡혀있던 사람들을 모두 도망가게 했다. 30-40명의 시민,학생을 풀어준 사람은 도경 경비과장이라 했다. 그것을 보고 달려온 공수에 의해 그 아저씨는 초죽음이 되도록 얻어터지고 동구청 뒷골목으로 끌려갔다." (구술 : 김후식, 현사연 조사)
15:40
- 7공수 33대대 38/294,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 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
* "오전까지 시위진압을 하던 전경들이 3시가 되면서부터 점차 물러가고 금남로 요소요소에 공수부대가 투입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M16을 메고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구술 : 조일규, 현사연 조사)
15:45
- 금남로에서 군인들에게 쫓긴 대학생들이 북동 쪽 민가에 잠입하자 군인들이 가정집을 수색하여 대학생으로 보이는 장발 청년과 여자를 마구 때리고 차고 대검으로 찌르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한 후 차에 실어 연행해 감.(군인의 경상도 특유의 억양은 광주시민을 자극). (시청 상황일지)
시간미상<정호용 광주 와서 윤흥정 만나 광주 상황 점검하고 확고한 의지 보여야겠다며 돌아감.>
- 공수특전사령관(정호용 소장)은 광주일원의 사태가 격렬해져 심각하다는,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보고를 듣고, 제3공수 특전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지역에 계엄군을 출동시킬지 모르는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고 C-54 특별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육사동기인 노태우 장군과 함께 각각 제7공수, 제9공수 특전여단의 창설여단장으로 2년 반 동안 재임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특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약 1년여 간 근무함. 정호용 사령관이 제7여단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같은 육사동기인 전두환 장군은 최전방의 수도 방어부대인 제1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광주에 도착한 정호용 사령관은 제7여단장 신준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 전투병과 교육사령관(전교사) 윤흥정 장군과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윤흥정 장군은 정호용 장군의 육사 선배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 윤흥정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거 양상이 대단히 틀리게 돌아가는군."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엄확대 조치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계엄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옳지 않겠읍니까?" 정호용 장군이 다시 진언, "그런데 광주시내의 기관장들이 대책을 협의하는데 그걸 보니까 이번 광주시민이나 학생들의 데모가 오히려 정당한 것인 양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 현지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말, 1988.5)
시간미상<정호용, 전두환 등 군 수뇌에게 광주사태 보고하고 3공수 7공수 20사단 증파 결의>
- 서울 : 이때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계엄사령관,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정부장 서리 등 군수뇌부가 모여 광주사태에 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여기에서 정호용 사령관이 광주상황에 대한 자세한 브리핑을 하면서 제3공수여단과 제7공수여단을 동시에 증파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두환 장군은, "20사단도 함께 진입시키는게 좋겠어. 계엄군이 집중적으로 나서면 그만큼 이쪽의 시위가 위력적일 테니까."
이때 제9사단장인 백운택 소장이 전두환 장군에게 '제가 광주에서 희생하겠다'고 자기도 보내줄 것을 진언했으나 보류됐음. (제11공수여단(여단장 최웅 준장)은 정호용 사령관의 특별명령으로 이미 광주에 진주해, 제11여단의 4개 대대가 2개 대대씩 나뉘어 각각 전남대, 조선대에 배치되어 있었다.) (말, 1988.5)
- 이때 제35대대는 금남로 좌우측, 충장로 등을 차단, 군중을 해산시키고 데모 군중 2백73명을 체포, 연행. (말 1988.5)
- 7공수 33대대 38/294, 가톨릭센터 투입. 가두 데모대 강력저지 및 분산.(31사 전투상보, 특전사 전투상보)
15:50
- 7공수 35대대 26/196, 충장로 출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오후 4시경 충장로 1가에 있는 당구장에서 친구들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공수 2명이 곤봉을 들고 험악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손에 초크가 묻지 않은 사람을 분류하여 곤봉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런 후 광주우체국 앞으로 끌고 갔다. 우체국 앞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잡혀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잠시 후 공수들은 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 (구술 : 조훈철, 현사연 조사)
- 충장로 입구, 전남대생 1백여 명 경찰과 투석전. 공원에서 분산된 6백여 명 도청 쪽으로 이동중 경찰 분쇄, 주모자 검거중. (계엄사 상황일지)
16:00 파출소 파괴 등 적극공세로 시위양상 전환
- 전남공고 방면으로 진출한 학생들이 노동청 부근을 지나 동명파출소, 지산파출소, 산수파출소 등을 파괴.
- 광주공원으로 진출한 학생들은 태평극장 부근에서 경찰과 대치.
- 태평극장 부근의 시위대는 시외버스 공용터미널로 진출. 여기에서 공수부대와 충돌함.
- 계엄군이 시내에 나타나기 시작. 전시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을 연행하기 시작. 반항하면 구타. (월간조선, 1985. 7)
- 33대대 금남로 이동. 35대대 충장로 이동.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광주일고 입구 금남로상 횡단보도, 진압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해산 방송과 함께 무자비한 진압 개시. 체포명령과 함께 도망가는 행인까지 무차별 구타 체포. (김영택, 10일간의 취재수첩, 사계절(1988). 이하 10일간의 취재수첩이라 약칭)
16:20
- 3백여 명의 시위대 동명파출소 습격, 유리창 50여 장 파손, 시장관사 투석, 지산파출소 쪽으로 이동중(연행32명). (계엄사 상황일지)
16:25 수경사 계엄협의회의 결과보고
일시:1980. 5. 18 16:00 - 17:00
장소:수경사 계엄분소
대상:계엄사무소장, 참모장, 서울시장, 중앙정보부 서울지부장, 서울시 교육감,
서울시경국장, 지방병무청장, 서울체신청장, 합동수사단장, 문교부 대학교육국장, 서울지방 국세청장, 서울세관장, 보안사령부 정보처장, 보안사령부 치안처장
내용:전국 비상계엄 및 계엄업무 시행지침 하달
계엄분소장 훈시 요지
1. 비상계엄 선포의 배경(정치, 사회, 안보)
2. 비상계엄하의 과업
가. 정의로운 사회 구현
권력형 부조리의 척결
부정 정치인 및 범법자 처벌
나. 새로운 정치질서 확립
참신한 정치풍토 조성
용공주의 철저히 분쇄
다. 학원 정상화
면학 저해요소 과감히 제거
제도적 모순 개혁 단행
라. 안보태세 강화
안보논쟁 불가
3. 부처별 요망사항
가. 시청:부조리 척결, 공무원 기강 확립
나. 시경:사회기강 확립, 폭력 경제사범 적극 검거
다. 교육:학원 정상화 방안 연구
라. 합수단 및 검찰:포고령 위반자 즉각 구속, 부조리 척결 및 기강 확 립에 수사력 동원
마. 당부사항:군민 일체감으로 국가의 난국 타개
대국민 선도의 선봉
사회기풍 진작
(계엄사 상황일지)
16:30
- 금남로와 광남로 교차점인 중소기업은행 부근에서 공중전화 박스 등이 바리케이드로 이용됨.
-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앞에서 기타를 갖고 가던 학생, 기타로 머리를 얻어맞음. 헬기 3대 공중에서 비행(대학생 집결지 파악하는 듯). (월간조선, 1985.7)
- 최대통령 특별성명 발표, '국가 보위 등을 위해 계엄확대 등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고. (조선일보, 5.20.)
16:30.
- 33대대 작전종료(금남로 시위진압- 편집자주). 103명 체포, 31사 헌병대에 인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 특전사 11여단 (여단장 준장 최웅) 여단본부 260명 광주로 이동. C-123 수송기 5대에 분승, K-16기지 출발. 도착과 동시에 2군 작전통제하에. (계엄사 상황 일지)
* "광주은행 본점 앞에서 학생 50여 명이 데모를 하고 있었다. 공수들은 젊은 사람이면 무조건 잡아다 피투성이를 만든 후 중앙국민학교 돌담 밑에 꿇어앉혀 놓고 군화발로 짓이기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울컥 화가 치민 나는 죄가 있으면 법대로 처리하라고 항의했더니 곤봉으로 냅다 어깨를 후려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구술 : 이근재, 현사연 조사)
16:40
- 시위대 3백여 명 지산파출소에 투석, 기물파괴 및 방화. (전교사 작전일지)
16:48
- 전교사에 제11여단 선발대 도착(45/213). (말, 1988. 8)
16:55
- 한국은행 앞, 학생 2백여 명 공수 1개 중대와 대치, 투석. (전교사 작전일지)
17:00 경찰 20-30명이 시위대의 포로로 붙잡힘
* "농장다리 쪽에서 경찰차를 포위한 시위대가 30여 명의 경찰을 인질로 삼았다. 우리는 경찰의 허리끈, 방석모, 곤봉 등을 빼앗은 후 그들을 앞세우고 장동 로터리로 갔다. 경찰 인질을 연행학생들과 바꾸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장동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 공수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있었다. 그들은 인질과 연행학생을 교환하자는 우리의 제의에는 대꾸도 않고 곤봉을 휘두르며 진압에 나섰다. 도망 치기에 급급했던 우리는 그때 경찰 인질을 놓치고 말았다." (구술 : 이광호, 현사 연 조사)
- 전남공고 부근으로 진출한 시위대 중의 일부가 노동청-전신전화국-전남여고-계림극장 부근으로 진출.
- 트럭에 분승한 공수부대 MBC 앞으로 진출, 무차별 진압. 청년,학생 연행 (현사연 조사 종합)
- 상점, 다방, 이발관, 음식점 등을 뒤진 공수부대, 학생들을 연행.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17:05
- 1천여 명의 시위대, 노동청 앞에서 계엄군 및 경찰과 대치중.(계엄사 상황일지)
18:00 계림동 일대의 살륙
-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시민,학생 3백여 명이 운집, 공수부대와 충돌.
20-30분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공수부대가 산수동 방면으로 후퇴. 시위대가 계속 추격했으나 증강된 공수부대의 반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공포지대로 돌변. 밤새워 인근주택가를 뒤져 청년들 연행. (윤재걸,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실천문학사. 이하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로 약칭)
* "계림극장 앞을 지나다 보니 거리에 공수들이 쫙 깔려 있었다. 두려움을 느낀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등뒤에서 '저놈 잡아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처럼 달려든 공수들이 이렇다 할말 한마디 없이 곤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4군데나 찔렀다." (구술 : 이장의, 현사연 조사) - 김태종, 전용호, 김선출 등 문화팀은 무등영아원(이현철의 거주지)으로 가서 유인물 제작에 들어감. 프린트되는 대로 들고 나와 양림동, 사동, 구동, 월산동, 방림동, 학동 일대에 배포함. (현사연 조사종합)
19:00
- 한.미 연합군사령관, 18일 오후 7시 급거 귀임.
위컴사령관은 이날 오산 공군기지에 도착, 헬기편으로 유엔군 사령부로 돌아왔다. 주한유엔군 사령부는 위컴 사령관의 조기 귀임에 대해 '한국사태와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위컴 사령관은 최근 한반도 주변정세 및 한국내의 사태 등에 대해 워싱턴 당국과 협의하기 위해 귀국, 오는 27일에 귀임할 예정이었다. (조선일보, 5.20)
- 35대대 작전종료(충장로 일대 시위진압 - 편집자주). 173명 체포, 31사 헌병대에 인계. (특전사 충정작전 보고)
20:15
- 1백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은행 뒤쪽에 모였으나 별다른 상황 없음. 일부 계엄군은 시민들이 시위학생을 감싸면 '너는 뭐냐?'고 구타. (월간조선, 1985. 7)
- 가톨릭센터 앞, 6백여 명의 시위대 계엄군과 대치, 총검 진압(주모자 61명 검거). (전교사 작전일지)
20:20
- 노동청 앞 등 전시가지 2천여 명 산발적 시위. (전교사 작전일지)
20:30
- 계엄군은 여단 병력으로 증강. 광주시외 변두리와 대학가에 군인들 막사 쳐.
학교 정문에는 8명씩 무장하고 경계, 시가지 요소요소에 군인 배치. (월간조선,1985. 7)
20:40
- 가톨릭센터 앞 대치중인 1백여 명의 시위대, 경찰 투입 해산. (계엄사 상황일지)
21:00
- 계엄공고 제4호로 통행금지 시간 연장 조치. 21:00 - 익일 04:00까지. (말, 1988. 8)
- 31사단 작전회의, 5.18 04:00부로 7공수 33대대는 31사단에, 35대대는 공수여단에 배속, 중요지점에 거점 병력 배치. (특전사전투상보, 시청 상황일지)
시민동향
- 5.17 이전의 학생 가두시위에는 시민들이 냉담한 반응을 나타냈으나 - 5.18에는 군인들이 금남로 등 시내 중심가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이나 여자를 마구 때리고 짓밟고 찌르는 등의 잔인한 행동을 시민들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 일부 시민들은 군인들이 경상도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난동을 부린다고 격분하였고, 일부 부녀자는 '내 자식도 어디 가서 저렇게 맞고 다닐 것이다'하고 울면서 칼에 찔린 청년들을 노상에서 치료해 주려고 하였음(군인들이 방해).
- 특전대원들이 '전라도 새끼들 씨를 말려버려야한다''면서 청년들을 폭행한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음.
- 거부장 옥상에서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투석하자 군인들이 거부장으로 들어와 3명을 연행한 사례로 보아 일부 시민들이 학생 편에 가담할 우려가 있음. (시청 상황일지)
23:00
- 군사령부가 제11여단 작전통제 지시. (말, 198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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