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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56.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게시물ID : history_189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5
조회수 : 78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2/12 04:34:34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ㅡㅡ 팟캐스트를 들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

blog.daum.net/carilla


*위장군.표기열전(衛將軍.驃騎列傳)

 

전편에 이어 흉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나라 무제 시절은 여러차례 정벌로 인하여 국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하여 무제라는 칭호를 받은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수없이 소비된 군비 때문에 한나라 역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결국은 이 시기에 사이팔만을 크게 정벌하여 사방은 평화로웠고 만이들은 숨죽였다.

변방의 요새를 지키고 하남을 넓혔으며

기련산의 적을 무찌르고 서역으로의 길을 열었으며 북방의 흉노를 압도했다.

이제부터 무제때에 크나큰 군공으로 사이를 평정했던 위장군과 표기장군의 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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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봉법 준직이이(人臣奉法 遵職而已)

 

대장군 위청(衛靑)은 평양 출신이다.

부친의 이름은 정계 인데 관리시절 평양후의 집에서 일 하고 있다가

평양후의 비첩 위온과 밀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곧 청 이었다.

 

청의 동복형으로 위장자가 있으며 누나는 위자부 이다.

위자부는 평양공주를 모시다가 효무제의 총애를 받게 되었는데

그때 청도 위씨성을 사용하는것이 유리하겠다 싶어 위청이 된것이다.

 

위청의 자는 중경이며 형인 위장자의 자는 장군 이고

장자의 모친을 위부인,장녀를 위유,차녀를 위소아,삼녀를 위자부 라 하였다.

훗날 자부의 남동생 보광도 위씨성을 가졌다.

 

위청은 평양후의 집에서 종으로 일하다가 소년이 되어 부친의 집으로 돌아갔다.

부친은 아들에게 양을 치게 했다.

그러나 부친의 정실자식들은 모두 위청을 노예로 취급해

아예 형제의 수효에도 넣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구박을 받고 천대받으며 성장했다.

 

한때 위청이 누군가를 따라 감천궁의 감옥으로 갔는데

죄수 하나가 가만히 위청을 불렀다.

"그대의 관상이 매우 귀하니 장차 후의 작위에 봉해질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자중하라."

 

죄수의 몸으로 남의 관상을 보는것이 우스워서 위청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남의 노예로 태어났으니 매질이나 당하지 않고 욕지거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어찌 제가 후작의 위치에 오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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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청은 자라서 평양후 집안의 기사가 되었으며 평양공주를 모시게 되었다.

 

건원2년.

청의 누나 위자부가 효무제의 총애를 받아 궁중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대장공주의 딸로서 자식이 없었으며 그로인해 질투가 심했다.

더구나 위자부가 황제의 총애를 입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위자부의 아들이 태자가 되는것을 두고 볼수 없었던 대장공주는

사람을 시켜 위자부의 동생인 위청을 잡아 들였다.

 

위청은 건장궁의 말단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직 미미한 관직에 있던 위청은 대장공주의 무사들에게 속절없이 잡혀 끌려갔다.

대장공주는 위청에게 죄를 씌워 죽이려 했다.

 

그때 위청의 친구인 기랑 공손오 가 그 소식을 들었다.

여인들의 질투때문에 친구를 죽게 할수 없다고 생각한 공손오는

장사들을 이끌고 즉시 달려가서 옥을 부수고 위청을 탈옥 시켰다.

위청은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위자부가 눈물로 황제에게 호소했다.

"제 동생의 지위가 미미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 황제가 즉시로 위청을 불러 건장궁의 호위 겸 시종장으로 임명했다.

뿐만 아니라 위청의 동복형제들까지 모조리 고귀한 지위에 올려

며칠사이에 그들에게 내려진 하사금만도 수천금 이었다.

 

친정이 허약하면 자기가 위태롭다고 생각한 위자부는 황제에게 계속 청하여

위청의 맏누님 위유는 태복 공손하의 아내가 되게 했고

둘째누님 위소아는 본래 진장과 몰래 밀통하고 있었는데

그로인해 오히려 황제는 진장을 고위직에 오르게 했다.

 

위청을 구한 일등공신인 공손오는 더욱 존귀해졌고 위자부는 부인으로 올랐고

위청은 태중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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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5년. 

위청은 거기장군이 되어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상곡에서 출격하고

태복 공손하는 경거장군이 되어 운중에서 출격하고

태중대부 공손오는 기장군이 되어 대군에서 출격하고

위위 이광은 효기장군이 되어 안문군에서 출격했는데

각 군단은 1만기로 편성 되었다.

 

이 싸움에서 위청은 용성에서 수백의 적을 참수하고 많은 포로를 얻었다.

그러나 기장군 공손오는 7천기를 잃었으며

위위 이광은 사로잡혔다가 탈출해 돌아왔다.

두사람은 참형에 해당 되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공손하는 아무 군공이 없었다.

 

원삭 원년.

위부인이 아들을 낳아 황후가 되었다.

그해 가을 위청은 거기장군이 되어 안문군에서 3만기로 출격해 흉노 수천을 참수하고 또는 포로로 잡았다.

그 이듬해 흉노가 요서군으로 침입해 태수를 죽이고 어양군 백성2천명을 잡아갔으며

장군 한안국의 군대를 패전시켰다.

 

한나라가 반격의 군사를 일으켰다.

장군 이식은 대군에서 출격하고

거기장군 위청은 운중군에서 출격해 서쪽 고궐로 진격하여 드디어 하남땅 일대를 공략한뒤

농서군에 도달 했다.

 

참수한 적과 포로가 수천명.가축 또한 수십만 마리를 얻었다.

백양왕.누번왕을 패주시키고 드디어 하남땅에다가 삭방군을 설치했다.

황제는 위청이 돌아오자 3천8백호를 증봉해 장평후로 삼았다.

 

위청의 부하인 교위 소건도 군공이 커서 1천1백호를 받고 평릉후가 되었으며

그를 시켜 삭방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교위 장차공 역시 군공이 있어 봉을 받아 안두후가 되었다.

 

그 이듬해 흉노가 대군으로 침입해 태수 공우를 죽이고

안문군으로 침입해 백성 1천명을 사로잡아 갔다.

흉노는 또 그 이듬해에도 다시 대군.정양군.상군으로 침입하여 백성 수천인을 살해 또는 납치해 갔다.

 

한나라에서는 거기장군 위청에게 3만기를 주어 고궐에서 출격하게 했다.

위위 소건을 유격장군.

좌내사 이저를 강노장군.

태복 공손하를 기장군.

대국재상 이채를 경거장군으로 삼아 모두 거기장군의 휘하에 두어 일제히 삭방군에서 진발케 했다.

또 대행 이식과 안두후 장차공을 장군으로 삼아 우북평에서 진발케 하여 흉노 대공략에 들어갔다.

 

흉노의 우현왕은 위청의 군대가 설마 여기까지 오랴 싶어서 방비하지 않고

술에취해 잠들었다가 한군에게 포위되었다.

우현왕은 혼비백산하여 야음을 틈타 친위군 수백명 만을 데리고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다.

한군의 경기교위 곽성이 수백리나 뒤 쫓았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

한군은 우현왕 소속의 소왕10여인과 남여15000명,가축 수백만 마리를 획득해 요새로 돌아왔다.

 

황제가 그 소식을 듣고 사자에게 대장군의 인수를 진중까지 들려보내

장군 위청을 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여러 장수들은 군사를 인솔한채 대장군의 지휘하에 들어갔고

위청은 대장군 칭호를 달고 수도로 개선했다.

 

황제는 대장군 위청에게 6천호를 증봉하고

위청의 아들 강은 의춘후.

아들 불의는 음안후.

아들 등은 발간후에 봉하는 큰 상을 내렸다.

그러나 위청은 한사코 사양하여 말했다.

"신은 요행히 행오 사이에서 발탁 되어 오로지 폐하의 신령함에 힘입어

다행히 흉노와의 싸움에 이길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교위들의 역전분투 덕분이니 어찌 이것이 저의 공로이겠습니까?

그러함에도 폐하께서는 소신에게 땅을 봉해주시고

강보에 싸여 아무것도 모르며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의 자식들까지 땅을 갈라 봉하시니

이것은 지나친 은혜입니다.

이는 사졸들에게 힘써 싸우라고 권장하는 본뜻이 아닐것이오니

삼가 저의 세 아들에게 내리신 봉읍은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말했다.

"짐이 여러 교위들의 공을 잊은것은 아니다.

이제부터 그들에게도 행상을 할것이다."

 

황제는 어사대부에게 조칙을 내려

호군도위 공손오에게 1500호를 봉하고 합기후로 삼고

도위 한열에게 1300호를 봉하여 용액후로 삼고

기장군 공손하에게 1300호를 봉하여 남교후로 삼고

경거장군 이채에게 1600호를 봉하여 낙안후로 삼고

교위 이삭.교위 조불우.교위 공손융노에게 각각1300호를 봉하여

각각 섭지후.수성후.종평후로 삼고

장군 이저와 이식.교위 두여의 등을 관내후로 삼고 각각 식읍300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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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가을 흉노가 대군으로 침입해 도위 주영을 죽였다.

그 이듬해 봄 대장군 위청이 정양에서 출격할때

합기후 공손오는 중장군.

태복 공손하는 좌장군.

흡후 조신은 전장군.

위위 소건은 우장군.

낭중령 이광이 후장군.

좌내사 이저는 강노장군이 되어 모두 대장군에게 소속 되었다.

그때 출전하여 적의 수급 수천을 베고 귀환했다.

 

한달남짓 휴식한후 다시 정양에서 출격해 참수 혹은 포로1만여명을 얻었다.

그러나 우장군 소건과 전장군 조신의 군대 3000여기가 선우의 군대와 단독으로 만나게 되었다.

하루종일 교전한 끝에 한군은 거의 전멸하게 되었는데

본래 흉노인 이었던 전장군 조신은 한에 귀순해 흡후가 된 자였다.

조신이 위급하게 된 상황에서 흉노는 그에게 투항을 권유 했다.

조신은 결국 패잔병800을 이끌고 흉노에 투항했다.

 

우장군 소건은 군사를 완전히 잃고 단신으로 도망쳐 대장군에게로 돌아왔다.

대장군은 군정에게 소건의 죄를 자문했다.

 

군정이 대답했다.

"소건은 자신의 군사를 모두 잃고 돌아왔으니 그의 목을 베어 장군의 권위를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만류했다.

"병법에 적은 병력으로 굳게 지켜도 끝내 큰 군사에게 사로잡힌다<손자.모공편>

고 돼 있습니다.

소건은 수천의 병력으로 수만의 선우 병력과 하루종일 분투하다가

그의 사졸들은 비록 전멸했지만 두마음을 품지 않고 돌아 왔습니다.

자진해서 귀환 했는데도 그를 벤다면 이후로는 아무도 귀환하지 않고

모두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적에게 투항 할것이니

그를 베어서는 안됩니다."

 

대장군 위청이 깊이 생각한뒤에 말했다.

"나는 요행히 천자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장군이 되었다.

불초한 내가 군의 요직을 맡고 있음에 황공해 하고 있다.

그러니 위엄이 서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내 직책이 부장들의 목을 벨수는 있지만 내가 폐하의 은총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내맘대로 국경 밖에서 사형을 내리고 싶지 않다.

상세히 보고하여 천자께 책임을 돌리면 천자께서 스스로 결정하실것이니

이렇게 함으로써 신하된 자로 감히 권력을 맘대로 휘두르지 않는것을 보여드리게 되는것이니

그 또한 옳지 않는가?"

 

좌우 군관들이 모두 찬동하였다.

위청은 소건을 죄수로 만들어 수도로 보낸뒤 요새로 철수해 전투를 끝냈다.

소건은 압송되어 왔으나 사형 당하지 않고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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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위청의 누님아들 곽거병(去病)이 효무제의 총애를 받아 18세의 나이로 시중에 임명 되었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곽거병은 두차례 대장군을 따라 출전했다.

대장군은 조칙을 받고 곽거병에게 병사를 나눠주어 표요교위로 삼았다.

곽거병은 날래고 용감한 800기를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수많은 적의 목을 베고 또 포로로 잡아왔다.

황제는 기뻐하며 조칙을 내려 곽거병에게 1600호를 봉하여 관군후로 삼았다.

 

그런데 그 해에는 대장군 위청의 군공이 적은 해였다.

휘하의 두 장수가 많은 군사를 잃은데다가 조신까지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증봉은 없었다.

그렇지만 대장군의 군대가 귀환하자 황제는 1천금을 내렸다.

 

즈음에 황제의 총애를 받는 여인은 왕부인 이었다.

 

영승이라는 자가 위청에게 귀띔했다.

"장군께서는 이번에 큰 공을 세우지 못했음에도 만호의 식읍을 가지셨으며

세 아들마저 후작이 되었습니다.

그 까닭은 위황후가 계시기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왕부인께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족은 부귀하지 못합니다.

 

장군께서는 이번에 1천금을 하사 받으셨는데 그 돈으로 왕부인의 어머니의 장수를 축원 해 주신다면

왕부인은 대장군을 크게 감사히 생각을 할것입니다."

 

위청은 무릎을 치며 기뻐했다.

위청은 5백금으로 왕부인 모친의 장수를 축원했다.

 

황제가 그 소문을 듣고 위청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다.

위청은 사실대로 황제께 아뢰었다.

황제는 영승을 불러 동해군 도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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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건은 일찌기 대하로 사신 갔다가 흉노에게 억류되어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렀던  일이 있었다.

그러한 장건이 대장군을 따라 원정가서

예전의 경험을 살려 군대를 좋은 물과 초원이 있는곳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군사들과 말이 굶주리거나 목마르지 않았다.

황제는 그 공을 인정하여 박망후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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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후 곽거병이 후작이 된지 3년이 지나 표기장군으로 임명 되었다.

그는 1만기를 이끌고 농서에서 출격해 큰 군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연지산을 지나 천리를 더 전진해 단병접전으로 싸워 절란왕을 죽이고 노호왕을 베었으며

혼야왕과 그 아들 및 상국과 도위등을 참수하고

포로 8천여명과 함께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지낼때 쓰는 황금으로 된 사람의 상 까지 빼앗아 왔다.

황제는 곽거병에게 2000호를 증봉했다.

 

그해여름 곽거병은 합기후 공손오와 함께 북지군에서 출격하여 길을 달리해 가서 적을 쳤다.

박망후 장건과 낭중령 이광은 우북평으로 출격해서 역시 길을 달리하여 흉노를 쳤다.

이광은 4천기를 거느리고 먼저 떠났고 장건은 1만기를 이끌고 뒤에 출발 했다.

 

흉노의 좌현왕이 수만기를 이끌고 이광의 군을 포위했다.

어울려 싸우기를 이틀.

한군이 흉노1만명을 죽이면서도 이쪽 전사자 역시 절반이 넘고 있었다.

 

장건이 도착하자 흉노군도 퇴각했다.

장건은 후에 행군이 늦은 죄로 사형에 처해질뻔 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한편 곽거병은 북지군에서 출발해 적진 깊이 침입한 뒤로는 공손오와 길이 어긋나 서로 연락이 끊어졌다.

곽거병이 그대로 거연을 지나 기련산에 이르렀을때쯤에는

적을 참하고 포로로 얻은것이 대단히 많았다.

곽거병이 돌아오자 황제는 그를 칭송하고 5천호를 증봉했다.

응격사마 조파노에게는 1500호를 봉하고 종표후로 삼았다.

그러나 공손오는 곽거병과 합류하지 못해 그 죄가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한나라의 여러 노장들이 인솔한 부대는 언제나 그 공훈이 곽거병보다 못했다.

그것은 곽거병이 항상 정예병들만 골라 휘하에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용감했으므로 항상 선봉장이 되어 진격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언제나 천행이 따라 단 한번도 궁지에 몰린적이 없었다.

그에비해 노장들은 항상 행군이 지체되는 죄를 입어 불우했다.

이렇게 되니 표기장군 곽거병은 더더욱 황제의 신임을 입고 존중되어

대장군에 비견할 만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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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가을 선우는 표기장군에게 수만의 군사를 일은 혼야왕에게 분노한 나머지 잡아 주살하려 하였다.

이에 놀란 혼야왕은 휴도왕과 공모해 한나라에 투항하려 하였다.

그래서 몰래 사자를 보내 한나라의 의사를 타진했다.

 

이때 한나라의 대행 이식이 황하 가에서 요새를 구축하고 있다가 혼야왕의 사자를 만났다.

이식은 곧 역전마를 달려 혼야왕의 뜻을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회의끝에 곽거병에게 밀명을 내려 황하를 건너 혼야왕을 맞이해 오게 하였다.

곽거병이 혼야왕을 맞아 먼저 황제가 계시는 행재소로 보내고

혼야왕의 군사들을 수습하여 황하를 건너 돌아왔다.

그때 투항한 흉노군사는 수만명 이었으며

말하기를 10만 이라 하였다.

황제가 곽거병의 공로를 치하하고 1천7백호를 증봉하였다.

 

원수4년

수년간 흉노의 침략에 골머리를 앓던 한나라는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각각5만의 기병을 통솔케 하고 그 뒤에 수십만의 보병과 치중대를 따르게 하여

대군을 진발 시켰다.

이번에도 강병과 정예부대는 모두 표기장군의 소속 이었다.

 

그런데 선우는 모든 치중을 멀리 북쪽으로 옮기고 정예병만 거느린채 사막의 북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곽거병이 선우와 대결하려 하였으나 선우가 맞닥뜨린것은 위청의 부대였다.

양군은 서로 마주치자 진을 펴고 서로 돌진했다.

그순간 때마침 돌개바람이 불어 모래와 자갈이 얼굴을때렸다.

더구나 날이 저물어 양쪽군사들은 서로를 알아볼수 없었다.

위청은 군사들을 양쪽으로 벌려 선우를 추격하게 하였다.

난전속에 흉노가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자 선우는 불리함을 느끼고

근위병 수백명 만을 데리고 한군의 포위를 뚫고 돌파해 나갔다.

 

한군은 어둠때문에 선우를 놓쳤다.

피차간에 엉켜 싸우느라고 한군 역시 크게 지쳐 있었다.

 

한군의 교위가 포로를 다그쳐 흉노의 행방을 물으니 그 포로는 '선우가 북쪽으로 달아났다'고 실토했다.

위청이 경기병을 내어 200여리나 선우를 추격했지만

끝내 선우를 잡을수는 없었다.

 

그러나 위청은 참수와 포로1만여명의 전과를 거두고 기련산의 조신성에 당도했다.

위청은 흉노가 비축한 양식을 한군에게 먹게한후 남은 양곡을 거둔뒤

조신성을 불태우고 회군했다.

 

위청이 철수하여 사막지대 남쪽을 통과할때쯤 비로소 이광과 조이기를 만날수 있었다.

이광과 조이기는 본대와 떨어져 동쪽으로 진격했는데

길을 잃어 위청이 전투를 벌일때 합류하지 못했던 것이다.

 

위청은 장사를 시켜 이광에게 군대가 지체하게 된 사유서를 제출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자존심이 크게 상한 이광은 자결해 버리고 말았다.

조이기는 장안에 도착해 형리에게 넘겨졌으나

속전을 내고 서민이 되었다.

 

한편 이때에 곽거병도 5만기를 거느리고 우북평에서 1천리를 진격해 흉노의 좌익부대와 대결했다,

그때 참수하고 포로로 잡은 숫자가 이미 대장군의 그것보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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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이 모두 귀환하자 황제가 조칙을 내려 곽거병의 공로를 치하하고 5천8백호를 증봉했다.

표기장군의 휘하에서 큰 공을 세운 우북평 태수 노박덕은 1천6백호를 받고 부리후가 되었다.

북지도위 형산은 표기장군을 따라 흉노의 왕을 사로잡은 공로로

1200호를 상으로 받고 의양후로 봉해졌다.

그 외에도 표기장군의 휘하 장수들은 각각 공로에 따라 모두 큰 상을 받았다.

그러나 대장군 위청에게는 증봉도 없었고 그 부하들 역시 후작에 오른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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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군이 요새선에서 출발할때는 관마와 사마를 합쳐 대략 말이14만 필 이었는데

다시 요새로 돌아온것은 3만필도 되지 못했다.

이러한 책임도 모두 대장군 위청에게 지우려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황제는 이때 대사마의 관직을 신설하고 대장군 위청과 아래계급인 곽거병을 동시에 대사마로 임명했다.

그로인해 대장군과 표기장군의 서열과 봉록이 동등해져 버렸다.

이로부터 대장군의 권위는 날로 쇠퇴해 졌고

표기장군은 날로 더욱 존귀해졌다.

대장군의 친구와 문하인들은 속속 빠져나가 표기장군 휘하로 몰리게 되었고 그를 통해 벼슬을 얻는자가 많아졌다.

ㅡ그러나 임안 만은  그렇게 의리없지 않았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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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의 사람됨은 과묵하며 비밀을 흘리는일이 없고 기골이 있어 어려운일을 도맡아 과감히 실천했다.

황제가 일찌기 곽거병에게 손자.오자의 병법을 배워보라고 말한적이 있는데

곽거병은 그저 가볍게 대답 하였다.

"싸움에 당면하여 어떤 전략을 쓸것인지 결정하면 됩니다.

굳이 지난날의 병법을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황제가 그를 위해 저택을 마련하고는 가서 보도록 하였다.

곽거병은 역시 간략하게 대답 하였다.

"흉노가 아직 괴멸되지도 않았는데 집을 가져서 무얼 하겠습니까?"

그러한 일이 있고나서 황제는 더욱더 그를 중히 여기고 총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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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은 젊은 나이에 이미 시중이 되고 존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부하들의 어려운 처지를 살필줄 몰랐다.

그가 종군했을때 황제가 좋은 음식 수십 수레를 보내주었는데

사졸들은 밖에서 굶주리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줄 줄을 몰랐다.

군량이 떨어져 사졸들이 음식을 먹지 못하고 기력이 없어 일어서지도 못할지경이었지만

곽거병은 그런 군사들을 불러내어 땅에다가 줄을 긋고 공차기 놀이를 할정도로 무심했다.

 

개선하여 상을 받은 뒤에도 수레에 좋은 곡식과 고기가 남아 썪어서 땅에 묻을지경이었지만 그것을 사졸들에게 나누어줄 줄을 몰랐다.

그런 사례는 수없이 많았다.

 

대장군 위청의 인품은 사람됨이 인자하고 선량했으며

겸손하고 부드러웠다.

또한 양보심도 많았다.

그런 어진성품때문에 황제에게 환심을 샀다.

그런데도 천하에서는 그를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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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은 원수4년의 흉노 토벌이 있은지 3년뒤에 죽었다.

황제는 그를 애도하여 변경의 철갑군을 동원하여 행군하게 하였으며

기련산을 본뜬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그에게 시호를 내려 무용하다는 뜻의 경 자와 땅을 넓혔다는 뜻의 환 자를 합해 경환(景桓)후 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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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청의 아들 의춘후 위강은 법에 저촉되어 후작을 잃었다.

5년뒤 위강의 아우 음안후 위불의와 발간후 위등 두사람은 모두 주금의 법에 저촉되어 후작을 잃었다.

 

그후 6년뒤에 대장군 위청이 죽었다.

시호를 열후라 했다.

위청은 선우를 포위한지 14년 만에 죽은것이다.

 

그동안 한나라가 끝내 흉노를 치지 않은것은 군마가 모자랐기 때문이며

또 남쪽으로 동월,남월을 치고

동방으로 조선.강족과 남서방의 만족들을 치기에바빴기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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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위청이 평양공주를 아내로 맞이할수 있었기 때문에

큰아들 장평후 위강이 뒤를 이어 후작이 될수 있었지만 6년이 지나 법에 걸려 후작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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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에서 두 장군과 여러 비장들에 대해 기술한 것이 있다.

 

대장군 위청은 일곱차례 흉노로 출격하여 참수.포로가 5만이 넘고

한번은 선우와 싸워 하남 일대를 거둔뒤 삭방군을 두었다.

두차례 증봉되어 도합1만2천8백호이고

세 아들이 모두 후에 봉해져 각 후마다 1천3백호를 받았으니 모두 합해 1만5천7백호가 된다.

교위나 부장으로 대장군을 따라 출전하여 후 가 된사람이 9명.

비장이나 교위로서 장군이 된사람이 14명이었다.

그의 부하가운데 이광은 따로 열전이 있다.

그 이하 열전이 없는 많은 부하장수들의 군공을 적은것이 있으나 생략한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여섯차례 출정해 흉노를 쳤다.

그중 네차례는 장군으로 출격해 포로.참수 11만을 얻었으며

혼야왕과 그 무리를 이끌고 수만인과 함께 귀순 시켰다.

하서.주천 일대를 개척해 서방흉노의 침공을 크게 줄어들게 하였다.

네차레나 증봉되어 1만5천1백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그의 수하장수중에서 군공으로 후 가 된사람이 6명 장군이 된자가 2명 이었다.

그 이하 많은 수하 장수들의 군공을 적은것이 있으나 생략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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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소건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찌기 대장군께 충고한 적이 있는데

ㅡ지극히 존귀한 지위에 있으신 대장군을 천하의 현능한 대부들이 칭송하지 않으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옛날의 명장들이 현능한 자들을 초빙한 행위를 본받는데 힘쓰십시오.ㅡ

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대장군께서 말씀하시기를

 

ㅡ옛날 위기후 두영과 무안후 전분이 빈객들을 모아 후하게 대접하자

천자는 항상 그것을 절치부심하여 한을 품으셨소.

사대부들을 가까이 두고 현능한 자들을 초빙하고 불초한 자들을 쫓아내는 일은 황제의 권한이오.

남의 신하된 자는 법을 받들고 직책에 충실하면 그만이지

어찌 사대부들을 초빙하여 그들과 무리를 지을 수 있겠소?ㅡ

라고 대답했습니다."

표기장군 곽거병의 뜻도 역시 이와 같아 대장군의 행동을 본받았다. 장군으로써의 몸가짐이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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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보았다.

 

대장군 위청은 미천한 노복 출신이었다.

누이가 존귀해 졌지만 궁중의 질투를 받아 죽음의 위기를 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은택으로 하루아침에 부귀와 권세가 한몸에 가득하여

평양후 조시에게 시집갔던 평양공주가 재가할때 황제가 위청을 더욱 존귀하게 해주려고

두사람을 결혼시켰기 때문에 군공을 세우고 

한 나라의 군권을 오로지하는 대장군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위청은 재물에 욕심 부리지 않고 교만하지 않았으며 수하의 장졸들에게 부드럽게 대하는등

어질고 온화한 성품으로 황제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위청은 누님의 아들인 곽거병이 등장한 후에 점차 권세를 잃고 황제의 사랑도 식었다.

그러함에도 위청은 죽는날까지 권세에 영합하지 않고 본분을 지켰으며

끝까지 몸가짐을 바로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장수된자의 본보기를 보였다 할수 있겠다.

 

표기장군 곽거병은 그야말로 요즘시대에 흔히 말하는 은수저.

곧 부유한 집의 귀한 공자라 할수있다.

촌수로 따지면 황제의 조카뻘이 되고 대장군과도 숙질간의 관계이기도 하다.

곽거병은 비록 공이 높았다 하나 대장군을 비롯한 다른 장수들과 직접 비교하는것은 무리가 있다.

 

우선 황제의 총애를 받아 항상 정예병을 배속 받았고

항상 공을 세울수 있는 전장에는 그가 있었다.

그러하니 출발점 부터가 남들과는 사뭇 달랐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귀공자는 개념부터가 남과 달랐다.

자신의 배가 부르면 남의 배 곯는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음식이 썪으면 버릴지언정 남과 나눌줄 몰랐으니

그리하고도 백성의 신망을 얻은자는 역사이래로 찾아볼수 없다 하겠다.

 

그러나 그렇게 귀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본분을 알아

몸가짐을 조심한것 만큼은 높이 사 줄만 하니

그나마 장수로서의 자질은 어느정도 갖추었던 인물이라고 할수는 있을듯 하다.

 

요 근래의 궁중 잔혹사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저 오래전의 우습지도 않은 궁궐내 암투와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여인들의 끝없는 음모가 오버랩 되어 실소를 금할수 없다.

황제와 후궁들 및 권세를 탐하는 장수들의 성별만 바뀌었을뿐 무엇이 다른점이 있는가?

 

요즈음의 이 엄중한 일련의 사태를 보고 분노가 일어야 함에도

필자는 그저 웃음만 나온다.

 

수 없이 많은 집회와 시위.

촛불과 함성에도 끄덕 없던 이 정권이 궁중잔혹사에 의해 흔들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니

세상사 참으로 알수 없다는 생각에

ㅡ역사란 이러한가?ㅡ 하는 생각을 다시한번 곱씹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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