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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이었어."
옆에 앉은 민에게 진호는 문득 그런 말을 뱉었다.
"나한텐 저게, 저 트로피가 첫사랑이고 짝사랑이었어."
그리고 그 사람은 파아란 눈으로 그 위, 무대 높은 곳에 놓인 트로피를 본다. 조명 아래서 찬란하게 빛나는 저 한 아름의 쇳덩어리. 기백의 프로게이머들을 홀리는 우승의 명예는 씁쓸할 뿐 아니라 참을 수 없이 달콤하다. 한때 저 트로피를 거머쥐어본 경험이 있는 강민은, 저도 모르게 웃고야 말았다.
"정작 차지해 보면 별거 아닌데."
"요환이 형도 그 소리 하더라. 놀리자는 수작이야, 그건."
"그래, 가서 우승해버려."
"이번에야말로――"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는 진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이 섰다.
"이번에야말로 저 도도한 여신을 돌아보게 만들어야지."
승리를 주관하는 여신 니케는 아직 누구에게도 웃어주지 않으신다.
새초롬 보일듯 말듯한 미소만 지으시며 여신께옵선 트로피 위에 앉아 양편을 번갈아 보고 계셨다. 더 지켜보실 작정인 양. 그 와중에 황제 임요환이 입장하고 있었다. 십년 세월을 넘어 그가 책봉을 받은 왕토에 돌아왔다. 왕의 귀환을 맞는 니케의 금빛 날개는 활개를 치고, 십만 인파의 환호성은 밀물처럼 무대에 몰려들었다.
"그러면 임요환 선수에 이어서! 돌아온 폭풍!"
전용준 캐스터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장중을 울렸다.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거머쥐려 군림한 무관의 제왕을! 여러분!"
얼른 일어서려는 홍진호를 도로 주저앉히고 강민은 툭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잘 해라, 하고. 폭풍 홍진호는 친구의 격려에 대답도 없이, 샐죽 웃음을 머금은 채 마침내 떨쳐 일어났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일시에 휘몰아쳤다.
"큰 박수와! 환호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키 작은 일등병은 오랜 한이 있다.
그를 응원하는 팬들에게도 가슴에 맺혀 사라지지 않는 한이 있다.
한 번도 저 위, 결승전서 승리해보지 않은 홍진호의 저그는 울음을 꾹 눌러 삼키고 고고하게 버텨왔다. 온갖 조롱도 협잡도 참고 견디며 마침내 돌아왔다. 그를 잊지 않던 십만의 팬들과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마침내 이 자리에 섰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폭풍처럼! 우렁차게 울리는 박수는 그래서 이토록 환희에 넘치고 장엄하다.
무대에 오른 홍진호는 참았던 숨을 뱉었다. 마이크가 다가왔다.
"꼭 우승하고 싶죠."
각오를 묻는 전용준에게 진호는 그렇게 답했다.
"아뇨, 우승하고야 말겠습니다."
듣던 임요환은 말도 없이 샐죽 웃었다. 코카콜라배 스타리그 2001, KPGA 투어 1차, 그때는 설마 우승하고 싶지 않아서 준우승에 주저앉았을까. 전부 모르는 수작이다. 전승준을 벌써 두 번이나 해먹은 홍진호에게는 특히나.
"우승자는 하늘이 내신다지요."
자기에게 돌아온 마이크에 대고 임요환은 그렇게 입을 열었다.
"모르긴 몰라도, 승리의 여신은 저를 더 좋아하는 것 같네요."
도끼눈을 뜬 홍진호는 설핏 임요환을 노려보았다. 그 헌칠한 서른 살의 황제는 눈을 피하지 않는다. 그리고 임요환의 뒤에선, 십년을 짝사랑해온 승리의 여신 니케께옵선 진호를 보며 비로소 예쁘게 웃으신다. 자길 믿으라는 양. 진호는 이윽고 몇 마디를 으르렁거렸다.
"해 봐야 알겠지요."
"그러게 말입니다."
임요환은 비로소 마주 이를 드러냈다.
"내 말이 바로 그 말이거든."
그리고 둘은 칼을 뽑았다.
하늘에는 낮게 구름이 끼고 거친 바람이 몰아쳤다. 경기장을 채운 십만 인파들의 고동이 빨라지고 거친 박동마다 끓는 피가 몸을 감돌았다. 경기 준비가 끝났다. 종족 선택이 마무리되었다. 황제는 테란을 고르고, 폭풍은 저그를 선택했다. 그들을 따르는 그들의 종족도 진군의 준비를 마쳤다. 전용준이 일어서고 관중들은 숨을 삼켰다.
"그러면 최고를 지향하는 삼성! 삼성전자배 스타리그! 임요환대 홍진호, 홍진호대 임요환!"
이스포츠를 휘어잡는 최고의 캐스터는 비로소 임진록을 선언했다. 결승!
"시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긴―― 샤우팅을 따라 사람들은 일어선다. 채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미리 박수를 친다. 환호를 한다.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이름을 연신 외친다. 들고 일어나는 목소리는 십만의 목청이 뿜고 백만의 피가 끓는 소리다. 스타판을 잊었던 사람들도, 이제는 직장에 들어가 임진록의 추억을 곱씹던 사람들도 이곳을 본다, 이곳에 왔다. 임진록이 다시 열렸다.
"――하겠습니다!"
그렇게 축제와 같은 전쟁은 시작되었다.
첫 경기는 임요환의 날카로운 벙커링으로 끝이 났다.
들고 일어나는 홍진호의 팬들은 당장이라도 무대에 올라가서 임요환을 때려눕힐 기세였다. "임요환 이 개새끼야!" 하는 쩌렁쩌렁한 고함이 홍진호의 팬 가운데서 쏟아졌다. 해설진은 뒤집어지고 관중들은 아우성쳤지만 홍진호는 침착했다. 그의 눈엔 새파랗게 날이 섰다.
다음 경기는 불꽃러쉬. 변길섭의 망령이 되살아나 맵을 휩쓸었다. 십여분만에 기지를 뛰쳐나온 임요환의 바이오닉은 성큰 일곱을 단숨에 뚫어버렸다. 크립을 짓밟고 헤쳐나가는 마린들의 위로, 임요환의 지휘봉은 맵을 가지고 놀았다. 다시 황제가 승리했다.
장중을 휩쓰는 삼연벙의 악몽을 외면한 채 니케는 활개를 쳐올려 홍진호의 옆에 섰다. 십 년 동안이나 자신만을 바라온 그 재주 있는 남자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자, 이제 이겨야지?
그리고 사상 최고의 리버스 스윕이 시작되었다.
"홍진호 선수, 간도 큽니다! 밀리는 상황에서 이런 승부수를 쓰다니요!"
저글링 쇼부를 친 홍진호는 그렇게 황제를 제압한다. 한 판을 따라잡고, 이제 다음 경기.
"이걸, 아니 무슨 이걸 잡아내나요!? 무슨 뮤탈이 캐리어도 아니고!"
"예, 예, 그렇습니다, 사실! 사실 뮤탈 하면 소싯적 홍진호였거든요!"
아무렴! 슬럼프 때야 콩탈 소리를 들었지, 어디 전성기적 그의 뮤탈 컨트롤에 흠을 잡는 자가 감히 있었던가! 임요환의 바이오닉을 희롱하는 홍진호의 뮤탈은 언덕을 거듭 돌고 추가병력을 끊어먹기를 거듭한다. 이를 악문 임요환은 베슬을 기다렸다. 그때까지 걸리는 수십 초가 흡사 영원처럼 길었다. 배럭까지 치받아온 뮤탈들은 이윽고 온 병력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불타오르는 배럭은 기어코 멎어버렸다.
와중 스타포트에선 드디어 뮤탈리스크의 천적이 등장한다.
"베슬 나옵니다! 임요환 선수, 드디어!"
"이레디 개발 됐나요!? 개발 됐나요!?"
"예, 아까, 아까 퍼실리티 반짝거리다가 멎었으니까――"
"됐으면!"
김태형은 흥분으로 그답지 않게 고함을 쳤다.
"됐으면 꽂아넣어야죠, 꽂아서 박살내야죠! 단숨에! 사그리!"
베슬을 보자마자 뮤탈리스크는 날개를 접고 임요환의 본진을 비잉 선회했다. 합치면 족히 수십 목숨을 빼앗았을 그 가공할 괴물들은 워포그 너머로 사라졌다. 활공하던 사이언스 베슬이 멍하니 멈춰선 순간, 반대편에선 스컬지가 등장한다. 그대로 베슬에 들이받는다. 쿠웅!
"임요환!"
엄전김이 놀라 뛰쳐일어나고, 임요환은 손을 떨기 시작했다.
"첫 베슬 잃으면! 이런 식으로 잃으면!"
그리고 워포그 너머선 뮤탈리스크가 다시 날았다. 그리고 몇 초 후 두 번째 뮤탈리스크 부대가 옆을 치고 들어왔다. 두 자루 칼을 뽑아든 홍진호는 힘든 기색도 없이 휘둘러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두 부대의 뮤탈리스크를 정교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이치고 빼며 그는 다시금 테란의 진영을 유린했다. 두 배의 병력을 거듭해 네 배의 속도로.
"어어!? 두 부대!? 두 부대로 컨트롤을!?"
"아니, 이거 참, 무슨 홍진호는 팔이 네 개 달렸나요?"
불타는 터렛을 내려보며 엄재경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마우스 두 개로 컨트롤 하는 겁니까, 지금?"
앞마당으로 도망치는 SCV들을 뮤탈들은 집요하게 쫓았다. 마린은 모일 틈이 없었다. GG를 때려박아 버리고 임요환은 눈을 치떴다. 쉴 틈도 없이, 폐하께옵선 이를 악물고 다시 지휘봉을 틀어쥐었다. 네 번째 전투는 끝났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악착같이 두 경기를 따라붙은 홍진호는 고개를 숙였다.
밖에선 팬들의 환호가 말갛게 들렸다. 우승까지는 이제 한 걸음이다. 여기까지 와놓고 이제사 겁이 난다. 십년을 짝사랑하고도 기어이 눈길을 주지 않은 승리의 여신이 여기서 그를 또 외면할까봐 무섭다. 아까 임요환이 내뱉은 수작질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귀에서 맴돈다. 우승자는 하늘이 낸다는 그 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입 안으로 그렇게 되뇌며 홍진호는 다시 칼자루를 틀어쥐었다. 휘영청 뽑아드는 검광의 뒤로, 오랜 세월 그를 기다려온 그의 저그가 도열하기 시작했다. 임진록의 마지막 전투는 막이 올랐다.
양 선수가 뽑아든 명검은 부딪히고 퉁겨 불꽃을 뿜었다. 그리고 전쟁은 절정에 올랐다.
"이 힘든 상황에서도!"
센터로 치고나오는 바이오닉의 대군을 목도하며 김태형은 탄식했다.
"이 힘든 상황에서도 병력을 모았습니다, 임요환! 정말 대단하달 밖에 할 말이 없어요!"
"예, 예, 이제 구름베슬도 모았고! SK테란으로서는 갖출 거 다 갖췄는데!"
뛰쳐나온 마린과 메딕들은 막막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다. 그렇게 스컬지로 들이박았는데도 다시 모인 베슬은 강철의 구름이 되어 맵의 한켠을 뒤덮었다. 꿇릴 것이 없었다. 마린은 싸다. 계속 나온다. 밑도끝도없이 나온다. 그러나 저그가 가져간 가스멀티가 바야흐로 다섯!
"SK체제는 태생부터 한계가 있습니다, 게다가! 상대해야 하는 울트라리스크가!"
홍진호의 울트라리스크 역시 미쳐서 쏟아진다. 불균형을 이룬 여분의 미네랄만큼은 저글링으로 돌아간다. 베슬의 마나가 채 차기도 전에 그만큼을 소모하고 다시 생산하는 일이 가능하다. 홍진호가 유리한 상황이다. 실수 없이 웅크리고만 있으면 테란은 말라죽는다.
이런 타이밍에 다른 선수들은 몸을 낮추고 기다린다, 그러나!
"그렇죠, 홍진호라면!"
쿠웅! 탁자를 내리치며 엄재경은 고함쳤다.
"홍진호라면 이럴 때 달립니다!"
미니맵엔 거대한 세 줄기의 물결이 굽이쳤다. 디파일러를 동반한 홍진호의 전 병력이 테란의 멀티로 치받아 달리고 있었다. 마린들을 피하고 센터를 에둘러 달리는 대부대를 목격하고 임요환은 선뜩 소름이 돋았다. 테란은 회군하기 시작했다.
"일단 디파일러부터 어떻게 해야 합니다! 스웜 치면 끝장이에요!"
"베슬이 디파일러 찾습니다! 얼른 찾아야 합니다! 어서 찾아서, 이레디에이트!"
그런데 없다. 디파일러가 없다. 울트라리스크에 족족 이레디에이트를 꽂으면서도 임요환의 눈은 핏줄이 서서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휘몰아치는 저그의 파도 속에는 분명히 디파일러가 섞여있을 일이다. 스웜이 뿌려지고 나면 끝장이다. 저 영리한 폭풍이 히드라까지 동반한 이상 커멘드를 띄워도 살아나지 못한다. 디파일러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딨습니까!? 홍진호 선수, 디파일러 어딨습니까!? 설마 디파일러 두고 가나요!?"
"예, 예, 임요환 선수 이제는 늦었어요, 이제는! 이제는 설사 이레디에이트 걸어도!"
그리고 비로소 저글링이 테란의 멀티 안으로 돌입한 순간,
기지서부터 떠오던 오버로드로부터 디파일러가 내렸다.
그리고 스웜! 순식간에 불타오르는 커멘드 앞에서 마린은 닭 쫓던 개꼴이 되었다. 멀티 셋이 순식간에 불타오르고, 임요환은 대번에 눈을 찌푸렸다. 플라잉 디파일러였다. 본좌 마재윤이 몇 번인가 써먹었던 수작인데, 하여 또 이렇게 당하고야 만다.
테란의 자원 채취가 이윽고 멈춘다. 그리고―― 말간 침묵 속에서 황제는 지휘봉을 들었다.
차게 얼어붙은 그의 눈은 떨지도 겁을 내지도 않는다. 팔을 휘둘러 내려 그는 저편 워포그 너머를 가리켰다. 임요환의 병력이 다시 진군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했습니다, 임요환 선수! 그렇죠! 이럴 때는 뒤도 돌아보지 말고 치고 나가야죠!"
끌고 나갔던 저그의 병력이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그것들이 돌아오는 동안에 디파일러는 이레디에이트로 끊어먹을 수 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밀고 들어가서 사그리 날려버려야 한다, 바로 지금! 본진이든 멀티든 저그의 기지란 기지는 전부 뭉게버릴 수 있는 화력이 아직 남아있다!
"어디든 택하여, 확실하게!"
몰려드는 바이오닉 부대는 SK테란의 정수이자 황제 임요환의 근위군이었다. 육중한 가우스 라이플을 굳게 쥐고 그들은 제국의 영광을 위하여 뛰었다. 본진 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디파일러에는 선물로 이레디에이트가 꽂혔다. 입구가 가까웠다.
"스웜 펼치기 전에 EMP 꽂아버리고! 그 즉시 쏜살같이 진입해야 합니다!"
절규하는 김태형의 말을 들었는지 일시에 베슬로부터 미사일이 날았다. 화면을 이지러뜨리며 퍼지는 충격파가 컨슘을 마친 디파일러의 마나를 일시에 날려버렸다.
아비규환의 혼란을 헤쳐 히드라 하나가 입구로 기어나왔다. 몸을 웅크린 히드라는 곧 에그로 변해 입구를 막는다. 그리고 위로 스웜이 펼쳐진다.
해설진은 뛰쳐일어났다.
"장판파!?"
부스 안에 든 임요환은, 기어이 설설 고개를 저으며 웃고 말았다.
홍진호는 웃지 않았다. 웃지 못했다. 칼을 뽑아든 그는 다시는 그 시퍼런 날을 칼집에 넣지 않을 작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짓밟은 테란의 멀티에서 돌아와 센터 아래에 군집한 그의 저그는, 이윽고 도열하여 몸을 낮췄다. 돌격의 진영을 갖추었다.
떨쳐 일어나려는 그의 저그 앞으로 승리의 여신 니케가 왔다.
"임요환이! 테란의 황제 임요환이! 마지막 맵 '제국의 황혼'에서!"
그 아름다운 여신께옵선 금빛 날개를 접고 내려앉았다.
"네, 황제의 무덤이 되기에 이보다 더 멋진 전장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한 손엔 월계관, 한 손엔 칼을 들고 그녀는 한 바퀴롤 돌아 설핏 웃었다.
"홍진호, 몰아칠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황제조차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을 보여주려고!"
"그렇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죠! 임요환이 잘했습니다, 다 잘했어요! 그런데!"
불어닥치는 폭풍의 일진광풍을 따라 니케의 머리칼은 길게 나부꼈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십년간 자신을 짝사랑해온 그 재주 있는 남자에게, 무관의 제왕 홍진호에게 비로소 승리의 여신은 웃어주시었다. 포위당한 황제의 진영을 가리켜 칼을 휘둘러 겨누고 그녀는 어여쁜 목소리로 신탁을 속삭였다.
당신이 승리하리라고.
"하지만 우승자는 하늘이 내린단 말입니다!"
바야흐로 어휘를 희롱하는 엄재경의 창성을 가르며 폭풍이 몰아닥쳤다.
홍진호는 망설이지 않았다. 굳게 버티어 선 임요환의 대부대를 상대로 그의 병력은 땅을 박차고 뛰었다. 포효와 절규도 잦아들고, 전장에 가득 찼던 근위병들은 바닥에 누웠다. 홀로 남은 황제는 빙그레 웃으며 양 손을 들어올리고 말았다.
패배를 시인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경기장을 가득 매웠던 팬들은 자리를 박찼다.
박수는 우레처럼 일었고 환호는 질풍처럼 휘몰아쳤다. 인파는 환희와 격정에 겨워 울먹이고 연거푸 그의 이름을 외쳤다. 홍진호를 부르짖었다. 십만 관중과 백만 시청자들은 젖은 눈으로 탄식과 경탄의 환성을 뱉었다. 온 스타판이 그의 한을 기억하고 있었다. 눈 있고 귀 있는 자라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을 삼키고 부스 밖으로 나왔던 홍진호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트로피를 보자마자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어깨를 떨며 흐느끼는 그에게 더 큰 박수가 쏟아졌다. 환호가 밀려들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그리고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불꽃처럼 뜨거운 눈물이 눈매에 맺혔다 떨어지고, 금빛 트로피 위에 아롱지어 맺혔다.
천명[天命]이 그에게 이 승리를 허락하기까지 십년. 팬들이 그의 우승을 기다리기까지 이렇게 흘러온 십년. 트로피를 들어올린 홍진호는 무대 아래서 환호하는 이들에게 젖은 눈으로 웃어보였다. 더 이상 준우승의 대명사로 불리지 않게 된 그의 위대한 이름은 담천을 배경으로 천리에 걸쳐져 아로새겨졌다.
박수. 환호. 열광. 그리고 다시 무궁토록 열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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