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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글] 1분을 주었다 (중)
게시물ID : panic_9209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속죄하세요
추천 : 23
조회수 : 128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1/10 19: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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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는 부장님이었다. 무언가 중얼거리며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아마도 나의 무례함에 자그맣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마주한 것은 당최 표정을 알 수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었다.

 

 

, 자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오는건가?”

 

 

부장님의 외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난 검은 그림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검은 형체가 더욱 일렁거렸다.

 

 

-누구...시죠?

 

 

그들 중 하나가 말을 꺼냈다.

 

 

, 죄송합니다. 저희 영업팀 사원인데... 무슨 급한 용무라도 있는 것 같네요. 하하.”

 

 

부장님이 연신 고개를 꾸벅이고는 나에게 다가왔다.

 

 

자네! 용건이 있으면 나중에 말하게나. 지금 회의 중 인거 안 보이나?”

 

 

나는 부장님의 물음에 응하지 않고 다시 그들에게 눈을 돌렸다. 영상에는 화물차를 마주하고 잔뜩 웅크린 여자와 아이의 모습이 멈춰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나의 팔을 힘껏 부여잡고 부장님은 나가라는 말과 함께 문 밖으로 이끌었다.

 

 

-, 잠깐만요. 혹시 저 분이 그... 담당인가요?

 

? , . 이 친구가 업무 담당이긴 합니다.”

 

 

부장님은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계속해서 나를 밀어냈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들 중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팔인지 모를 길고 검은 형체를 뻗어 흔들며 말했다.

 

-아 그렇군요. 그럼 이쪽으로 잠깐 같이 오실 수 있겠어요?

 

 

? , 이 친구 말입니까?”

 

 

검은 그림자의 말에 부장님은 부여잡은 팔을 내렸다. 그리고 나에게 저들이 있는 쪽으로 가라고 눈을 흘겼다.

 

다급한 숨을 짧게 내쉬며 나는 조용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온 탓에 머릿 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천천히 그들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며 빠르게 머릿 속을 헤집었다.

 

반대편에 놓인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머릿 속에 들어있던 생각들이 삽시간에 지워져 나갔다. 알 수 없는 중압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 뭐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만 해도 주체하지 못했던 온갖 감정들이 모두 흩어져나가고, 무언지 모를 공허함만이 내 몸을 가득 메웠다. 갑작스런 변화에 현기증과 함께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하하.

 

 

검은 그림자들 중 하나가 말을 꺼냈다. 불안한 두근거림을 겨우 부여잡고 나는 눈에 힘을 주었다.

 

 

, 잘 보고... 있다...니요...?”

 

-저 번 담당자도 일을 잘 했지만 그 쪽도 꽤나 하던데.

 

-그러게요. 호호. 매출도 꽤나 안정적이고.

 

 

조금 전 갑작스레 들어온 나의 무례함은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그 쪽 덕분에 우리도 마음 편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악마들이 얼마나 성질을 부리던지, 참나 진짜.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얼음장 마냥 굳게 닫힌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리에 찬 족쇄를 힘겹게 이끌고 걷는 기분이었다.

 

답답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희한한 욕구가 갑자기 솟구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길처럼 일던 그 분노와 층층이 쌓인 호기심들이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알 수 없는 중압감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무언가 그들이 계속해서 말을 걸었지만 들리지 않았다.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정신이 혼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그림자들은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고 부장님과 말을 이어나갔다. 끝내 그들에게 말을 잇지 못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

.

.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요.

 

아아, . 제가 밖에까지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알아서 가지요.

 

 

검은 그림자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흙빛 안개가 소회의실 안을 가득 메운 듯 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나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하나 둘씩 문 밖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과 함께 뜻 모를 웃음이 나왔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묻고자한 모든 것을 그들 앞에서 내뱉을 수 없었다. 누를 수 없었던 분노도 난파된 배처럼 바닷 속 깊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가라않지 않는 무언가가 아직은 남아 있었다.

 

 

...천국...이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문 밖으로 나가던 검은 그림자들 중 뒤에 있던 하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 천국이라고... 하셨...습니까

 

 

다시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 자네!”

 

 

부장님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리고 뒤에 서 있던 검은 그림자에게 어색하게 웃고는 문 밖을 향해 손짓했다.

 

 

-호호. 저 친구도 뭔가 아는 모양이죠?

 

죄송합니다. 아까 들어올 때 회의내용을 몰래 엿듣기라도 했나 봅니다. 제가 저 사원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징계를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뭐 이 일을 하는 사람 입장이면 그 정도는 알아둬도 괜찮을 테니까요.

 

 

그리고는 검은 그림자가 내게 몸을 돌려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금 목을 죄어오는 중압감이 느껴졌다.

 

 

-, 그 정도는 알아둬도 나쁠건 없지요. 뭐 물어보고 싶으신 거라도 있으신가요?

 

 

, 지옥이 아닌... 천국이 있는 겁니까...”

 

 

드디어 깊이 파묻혀 있던 물음 하나를 꺼냈다.

 

 

-호호. 그게 궁금하셨나 보군요.

 

 

검은 그림자가 짧게 웃고는 조용히 내 앞에 섰다. 얼굴 없는, 길고 검은 형체였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분명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맞습니다.

 

 

말을 마친 검은 그림자가 내게서 멀어지고는 이윽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소회의실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길고 무거운 침묵만이 멍하니 앉아 있는 내 곁을 함께했다.

 

 

 

 

*

부장님 방에서 나오자 복도에서 강 사원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크크. 내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니까.”

 

 

강 사원이 내게 커피를 건냈다. 말없이 받아들고 조용히 로비로 향했다. 강 사원은 장난칠 분위기가 아님을 금세 알아차리고는 천천히 뒤따라왔다.

 

다행히도 별도의 징계는 없었지만 30분동안 인성 문제를 시작으로 별의별 해괴한 쓴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VIP 고객들이 큰 아량으로 넘어가 주었으니 다른 직원들에게 일체 말하지 말라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의자에 걸터앉고 텁텁한 커피를 마시니 더욱 더 담배가 그리웠다. 마주 앉은 강 사원은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나가는 타 부서 사람들에게 능글맞은 눈웃음을 보이며 잡담을 나누었다.

 

구원의 기회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채 끊임없이 죽음을 당하는 자들을 그들은 그저 유희거리로 밖에 취급하지 않았다. 구원 받고자 1분을 되돌린 자들이 많을수록, 끝없는 죽음을 당한 수가 많을수록 매출이 올랐고 VIP, 그 검은 그림자들은 더욱 이 상황을 좋아했다.

인구현황. 잉여인력. 몰래 엿들은 얘기들 중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히 물어보지도 알아내지도 못했다. 오로지 한 가지. 지옥이 아닌 그들이 사는 천국이라는 세상이 존재함을 알아냈을 뿐이었다.

 

 

하아...”

 

 

바보 같았던 소회의실에서의 내 모습에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너무나 소름끼친 기억이었다.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중압감과 답답함.

다시 커피를 들이켰지만 갈증을 달랠 수 없었다. 강 사원이 웃으며 내게 말을 꺼냈다.

 

 

그래서. 대체 뭘 했기에 부장님 방에서 그렇게 욕을 드시고 오신거세요. 뭐 회의하는데 쳐들어가기라도 했나?”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커피를 들이키는 내 모습을 보고는 강 사원의 얼굴에도 웃음이 사라졌다.

 

 

뭐야! 진짜 그런거야? 너 진짜 미쳤구나!”

 

, 몰라... 그렇게 됐다.”

 

아니 그니까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오바하는건데.”

 

나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거지.”

 

 

강 사원이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고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서 부장님이 뭐라는데? 시말서 쓰래? 감봉이야? 아니면 딴 데로 보낸대? 아니면... , 너 설마...?”

 

아니야. 그냥 별 말 없었어. 그냥 조심하래.”

 

? 진짜?”

 

. 그냥 다른 징계 같은건 없었고 그냥 조용히 있으라네.”

 

...”

 

 

강 사원은 바짝 당긴 몸을 다시 의자에 걸치고는 머리를 흔들었다.

 

 

VIP 고객들 있는 곳에 쳐들어갔는데도 징계가 없었다라...”

 

 

한참을 고민하던 강 사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 별 일 없었으면 된 거지.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았다.”

 

 

내게 묻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아무렇지 않게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강 사원의 모습을 보니 뭔가 고마웠다.

생각해보면 알게 모르게 도움을 준 사람은 강 사원이 유일했다. 저 번 부장님 방에 몰래 들어갈 때나 주임님 이야기 건도, 모두 강 사원의 도움이 컸다.

어쩌면 강 사원에게는 이 기괴한 일에 대해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어렵게 입을 열자마자 부장님의 호통이 들려왔다.

 

 

뭣들 하는가. 오후 업무 시작이야!”

 

 

어느새 로비에 나타난 부장님이 마지막 점심 시간의 여유에 흠뻑 취했던 모든 이들의 꿈을 깨웠다. 부랴부랴 일어서는 타 직원들과 함께 우리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생글거리던 눈빛을 금새 죽인 강 사원은 내 말에 끄덕이고는 내게 가볍게 손짓했다.

 

 

다시 사무실로 들어온 나는 또 다시 지랄맞은 구원의 기회를 위해 어둠 속에 조용히 몸을 맡겼다. 그리고 오전에 작성한 리스트를 떠올랐다.

마주오는 음주운전 차량에 아내를 잃은 남편. 공사 현장을 지나가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어린 자매. 손자와 함께 리어카를 이끌고 언덕을 오르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트럭에 사고를 당한 할머니.

책상 위에 대고 손가락을 가볍게 두드렸다. 지옥이 아닌 다른 세상. 천국이라 불리는 곳. 죽은 이들은 모두 지옥으로 오는게 아니라 천국으로도 갈 수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고서는 이 기이한 구원의 기회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어떤 이들이 천국으로 가는 것일까. 이 둘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일까. 구원의 기회를 받은 이들은 혹시, 어쩌면 이 곳이 아닌 저 세상으로 갈 예정이지 않았을까.

 

 

‘1분의 거래 조건...’

 

 

고객은 사고 영상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의 제안에 대해 수긍하면 다시 사고가 일어나기 1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예정된 죽음을 피하기 위해 몇 번이고 1분을 되돌릴 수 있다. 어떠한 방법이나 수단을 통해서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옥의 노예로 살아가는 것. 구원의 기회에서 혼자서만 살아남는 것은 안되고 함께 죽음을 맞이한 이와 같이 구원해야 하는 것.

 

구원에 성공한 이들은 다시 원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단지 아직까지 성공한 이가 없었을 뿐. 모두가 구원에 실패하여 지옥에서 노예로 살아가게 되었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같이 죽은 다른 이들은 지옥에서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이 광활한 지옥 어딘가에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만약 구원의 기회를 포기한다면...?’

 

 

사실 영업에 실패했을 때, 즉 구원의 기회를 거부했을 때에 대해서는 전혀 매뉴얼에서도 주임님 이야기에서도 내 경험에서도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 어떤 고객 누구도 구원의 기회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야 그럴 것이 항상 영업을 할 최적의 고객을 찾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죽음을 그대로 보내지 않을 사람. 참혹한 사고를 감수하고 몇 번이고 1분을 되돌릴 사람.

 

다시 주임님이 남겨준 메모지를 꺼내들었다.

 

 

리스트의 정보를 꼼꼼히 읽을 것선하게 자라온 사람일수록 영업에 성공할 확률이 높음

 

 - 쉽게 넘어오지 않으면 영상을 한 번 더 보여줄 것

 

 - 1분을 계속 사용하도록 권유하고 용기를 북돋아줄 것

 

 - 환한 미소밝은 목소리친절한 응대

 

메모지 내용을 곱씹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한참의 생각을 지나고서야 깨달았다.

다른 퍼즐 조각을 가지고 정해진 퍼즐판에 끼워 맞추려 했던 지난 시간은, 사실 애초부터 퍼즐판 자체가 달랐다는 것을.

 

 

어쩌면...’

 

 

처음부터 이 틀 자체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 안에 갇혀 아무리 바둥거려도 결국은 우물 안 개구리일뿐이니까.

잠깐의 생각을 거치고나니 그제서야 복잡하게 얽매인 머릿 속이 아주 조금은 풀리는 듯 했다. 메마른 대지에 신선한 바람이 볼을 살짝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

악몽을 꾸는 횟수가 더 잦아졌다. 잠에서 깬 개운함은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고 머리가 지끈했다. 업무 시간에도 이따금씩 악몽 속의 여자가 떠올라 머리 속을 맴돌았다. 어차피 그렇게 될 운명이었음을 알면서도 몰래나마 미련을 갖고 있던 나에게 주는 신의 벌인 것일까.

신 얘기가 나오자 피식- 웃음이 돌았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이런 거지같은 업무 또한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오후 근무를 위해 사무실로 들어와 겸허히 때를 기다렸다. 오전에 작성해둔 리스트에는 오로지 한 사람. 태풍을 버티지 못한 채 힘 잃고 쓰러진 낡은 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와 아들. 다른 모든 이들을 제쳐두고 오늘의 영업 고객은 아버지 단 한 사람 뿐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폭우와 함께 귀를 찢는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메웠다.

 

 

 

 

 

아이고, 이게 무슨일이야.”

 

아빠아.. 너무 무서워...”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밤새 창문 틀에 붙여놓은 테이프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집이 흔들렸다. 몇 번이고 꿰매어 놓은 흔적이 역력한 누런 이불 속에서 아이가 남자의 손을 꼬옥 잡고 몸을 추스렸다.

 

 

괜찮아, 괜찮아. 오늘 새벽이면 잠잠해진다더니. 태풍이 멎을 생각을 안 하네.”

 

 

남자가 말을 마치고 아이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하지만 아이의 칭얼거림은 계속되었다.

 

 

아빠, 무서워. 무섭단 말이야.”

 

잠깐만 이불 속에 숨어 있으려무나. 어디 물 새는데 없나 아빠가 보고 올게.”

 

싫어어! 무섭단 말이야. 어디 가지마!”

 

하하 거 참. 이불 다 젖으면 내일 밤엔 덮구 자지도 못해. 그래도 괜찮겠어?”

 

, 그건...”

 

 

아이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가 다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방 확인하고 올 거니까 이불 속에서 나오지 말고.”

 

, 빨리 와야 돼.”

 

 

흙먼지로 뒤덮힌 파란 점퍼를 대충 두르고서는 남자는 집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어찌나 매몰차게 불던지 처마 밑에 있어도 남자의 바지는 이미 물을 가득 먹어 처량하게 남자의 몸에 매달려 있었다.

 

 

이번 태풍은 꽤 심하네...”

 

 

짧은 신음을 내뱉고 난 남자는 처마 밑을 따라 집 옆 쪽으로 넘어갔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는 창문을 눈 앞에 두고 남자는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이미 낡을 대로 낡은 창문 틀은 군데군데 썩어 문드러진 상처를 안고 힙겹게 버티고 있었다.

 

일단 신문지라도 가져가야...”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굉음과 함께 무거운 바람이 남자의 얼굴을 스쳐갔다. 남자는 벽에 손을 기대어 휘청이는 몸을 겨우 잡았다. 창문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울어댔다.

 

 

이거 정말 큰일 나겠는데.”

 

 

남자의 말이 마법이라도 부린 듯 다시 새차게 비바람이 엄습했다. 이번에는 남자도 미처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추접하게 젖은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남자는 일어서려 했지만 꽤 충격이 컸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남자의 귓가에 쉼 없이 울어대는 창문소리가 가득 메웠다, 그리고 뒤이어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정신을 잃은 남자의 귀에는그 소리가 매섭게 찾아온 바람 소리인지 힘없이 무너지는 그의 집이 낸 아우성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낡은 집의 잔해가 그를 이불처럼 덮어주었다.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감았다.

 

.

.

.

 

 

 

“...그렇습니다.”

 

, 그런... , 말도 안 되는...”

 

 

내 앞에 마주한 남자는 영상이 끝나고 나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축 처진 그의 어깨를 보고 있자니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남자의 슬픔이 밀려들어왔다. 매 번 느꼈던 그 감정.

 

 

, 그럼 제 아들은...?”

 

아드님은 아마도 어딘가 좋은 곳에 가셨겠지요.”

 

...흐흑...”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남자의 얼굴에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굽어진 몸뚱아리로 눈물을 삼키며 몸을 흔들어대는 모습에 잠깐의 연민이 찾아왔다. 하지만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미 짜여진 시나리오. 거짓된 구원의 기회.

 

남자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추스러지기를 말없이 기다렸다. 어차피 오늘 고객은 이 사람 한 명 뿐. 업무 시간은 충분했다.

점차 울음소리가 멎어들고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모두 똑같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지요.”

 

이 세상이라면... 저는 지옥이겠지요?”

 

 

한참이나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남자가 말했다.

 

 

자식 하나 제대로 키우지도 못한 아비란 사람이... 죽고 갈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

 

암요, 그렇지요... 저 같은 놈이 좋은 곳 갈 리가 있겠습니까...”

 

 

밤새 생각해둔 멘트를 꺼내기도 전에 남자는 이미 체념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저는 우리 아들 못나게 키우려 한 건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예쁜 아들이에요...”

 

 

울음섞인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머금은 내 귓가에 이따금씩 유혹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라고. 1분을 되돌리라고. 편두통이라도 온 듯 머리 한 쪽이 지끈거렸다.

 

 

이제 괜찮습니다. 제 아들이 좋은 곳에 갔다면 그걸로 된거에요... 그걸로 된 거지요...”

 

 

남자의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였다. 그저 연민의 감정과 이성적인 생각 사이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할 뿐이었다.

 

 

천국... 이겠지요? 제 아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남자는 나지막히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제서야 남자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심하게 뭉개진 귀 뭉치와 누렇게 변해버린 그의 이빨. 퉁퉁 부어버려 핏줄까지 선명하게 드러난 작은 눈동자.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자그마하고 수줍게 올라가 있었다. 아들은 좋은 곳에 갔을 거라는 안도감이라도 든 듯.

복잡한 심정을 겨우겨우 잡아가며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천국에 갔을 겁니다...”

 

 

 

 

 

*

하아 나 참.”

 

 

상사의 긴 한숨이 면전에 들려왔다.

 

 

아니. 그동안 열심히 일해 왔으면서 어제는 대체 왜 그런거야.”

 

 

어제 일일보고를 뒤늦게야 확인한 상사가 나를 불러내 큰 소리를 치고 있었다.

 

 

자네 일하기 싫어? 일하기 싫으면 나한테 무슨 말이라도 하던가. 꼴랑 1명한테 지랄하는거면서. 그것 조차도 못해?”

 

 

상사의 목에 핏대가 서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 속으로 소녀시대의 노래를 불렀다. 살아 생전 내가 좋아했던 걸그룹. 지금은 결혼을 했는지 뭐 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사후세계와 저 쪽 세계를 잇는 무언가가 발명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아보는 맛에 지옥에 사는 것도 꽤나 지겹지 않을텐데.

 

 

어이, 자네! 내 말 듣고 있는건가?”

 

사실 이런 상황은 예상하고 있었다. 주임님 적부터 어제 전까지 단 한 번도 영업에 실패해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매출그래프가 좋다고 칭찬 하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한순간에 불같이 소리를 지르며 돌변한 상사의 모습을 보니 아차 싶기도 했다.

 

, 듣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짜 기가 막혀서...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는건가?”

 

그런건 아닙니다. 요 며칠 동안 악몽도 꾸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어제 조금 실수를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나 이거 진짜.”

 

 

더 이상의 다그침이 소용이 없었는지 상사는 그저 서류를 꽉 쥐어 잡고는 씩-- 댈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은 실수가 있지 않도록 근무에 열중하겠습니다.”

 

, 몰라. 일단 나가!”

 

 

상사가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숨소리가 많이 거칠었다. 나는 그의 등에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하아 진짜. 부장님한테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되지...”

 

 

혼잣말 하는 상사를 뒤로 한 채 나는 방 문을 열고 서둘러 나왔다.

 

 

이걸로 되었다. 그동안 부여잡던 퍼즐판을 버리고 다른 퍼즐판을 가져왔다. 그리고 흩어진 조각들을 쥐고 이 새로운 퍼즐판에 맞추어야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작은 결단이었다. 혹시 만에 하나 잘못된 것이라 할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나는, 아니 우리는 그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으니까. 두려움보다 사명감이 앞장섰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회사 시스템을 실행시켰다. 빠르게, 하지만 성급하지 않게 두근대는 가슴에 손을 살짝 얹고 조심히 고객정보 메뉴에 마우스를 갖다 대었다.

 

일전에 내가 영업했던 모든 고객들. 손 위에 올려놓은 모래더미 마냥 흘러내려 사라진 수많은 구원의 기회들. 지옥에서의 노예생활이 아닌 어쩌면 더 나은 세상에서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를 순간들.

영업 고객들의 리스트를 조회하고 하나하나씩 그들의 정보를 열람하였다. 그들 모두 출신지는 지옥으로 등록 되어 있었고, 나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지옥에서의 생을 받아들였다.

생각해보면, 어쩌면 시들지 않았을지도 모를 꽃들이었다. 건조하고 황폐한 바람이 부는 지옥이 아닌, 정말 검은 그림자들이 말하는 천국에서 영위와 따스함을 안고 살아갔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씩 고객 정보를 확인하면서 나도 모르게 가슴이 더욱 두근거렸다. 내가 알아야할 사람의 정보가 점차 다가오자 숨이 가빠졌다.

 

 

, 없다...’

 

 

어제 만난 남자의 고객정보를 들여다보았지만 있어야 할 정보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출신지 항목에는 공허하게도 아무런 정보도 기록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잘못 본 것일까 하여 몇 번이고 새로고침을 눌렀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채워줄 어떤 단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안한 마음을 먹어 삼키며 쉬지 않고 다시, 또 다시 새로 고침을 눌렀다.

그리고 수 분 후에, 리스트에 기록된 그의 명단조차도 사라져버렸다.

 

 

 

 

*

, 뭐라고!?”

 

 

그 동안의 일들을 얘기해주고 나자 강 사원은 미동도 없이 놀란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미안하다. 미리 얘기해줄려고 했는데.”

 

, 그니까.. 그 너 말이... 하아.”

 

 

자리에 일어섰던 강 사원은 의자에 풀썩 주저 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니까... 그게 그...”

 

내가 말한 그대로야.”

 

, 그 그게... 참 진짜...”

 

 

강 사원은 들고 있던 종이컵을 자꾸만 구겼다.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물론, 내가 처음에 엿들은걸 너한테 말해줬긴했지만... 근데 진짜로 그럴 줄은...”

 

나도 이상하다 했지만 뭐 아직 전부 아는건 아니야.”

 

임마! 그건 둘째치고 천국이 진짜로 있었다니...”

 

 

강 사원은 이내 종이컵을 옆에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자판기로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커피가 채 나오기도 전에 받아들고는 다시 내게로 다가와 앉았다.

 

 

,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건데.”

 

나야 모르지.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는 가봐야 되지 않을까...”

 

하아... 말이 안 나온다... 이거는 진짜. 나 지금 부장님 방 가서 맥주라도 몰래 훔쳐올까?”

 

뭔 소리야. 됐어. 그러다 또 걸리면 어떡할려고.”

 

지금 이 얘기를 맨정신으로 들어도 괜찮을 사람은 나밖에 없을거다. 맥주라도 좀 마셔야 진정하지. 지금 나 엄청 놀란 거 안 보이냐?”

 

 

강 사원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헐떡였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어쨌든 됐고. 그래서 니네 상사가, 그 실장은 이미 부장님한테 보고 올라갔겠네?”

 

아마 그러지 않을까.”

 

얌마 안 그래도 너 저번에 VIP 고객들한테 쳐들어가서 한 소리 들었는데 이번엔 어떡할려고 그래!”

 

글쎄다.”

 

허허 이 놈 봐라.”

 

 

사실 생각해 둔 게 있긴 했다. 어쩌면 이번 일로 다시 한 번 그 검은 그림자들과 마주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이 들었다. 바보같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 소회의실에서의 사건 이후로 몇 번이고 자기 전에 마음속으로 반복했다.

이 지랄맞은 업무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그들이 사는 천국이란 곳은 대체 어떤 곳이며 이 지옥과는 무슨 관계인지 반드시 물어보겠노라고 다짐했다. 아니 무조건 물어야했다.

형언할 수 없는 그들의 무거운 중압감이 다시 떠올랐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겨를이 없었다. 거짓된 구원에 씻을 수 없는 상처만을 몇 번이고 가슴에 새겼던 그들을 위해 이대로 안주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매일같이 쉬지 않고.

 

그리고 그 오랜 기다림은 얼마 가지 않았다. 로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부장님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그 뒤는 검은 그림자들이 조용히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순간 부장님과 눈이 마주치자 부장님은 나에게 따라오라는 작은 제스쳐를 취했다. 달콤하고도 쌉싸름한 손길이었다.

 

 

나 가야겠다.”

 

,... 그래. 가서 잘 말씀드리고 와. ,아니지. 뭐 뭔가 알아내고 오라고 말을 해야되나...”

 

 

강 사원은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그에게 싱긋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갔다 오마.”

 

 

복도 저만치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들을 따라 걸어나갔다. 몹시도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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