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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군사반란과 5·17쿠데타
게시물ID : history_92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임시보관함
추천 : 0
조회수 : 28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5/17 07:11:00

사건으로 보는 한국의 정치변동

전두환의 12·12와 5·17



5·16이라든가 다른 제3세계의 쿠데타와 비교할 때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은 2단계의 정변을 거쳤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피살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들의 광범위한 기대를 무너뜨리고 1981년 3월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서 전두환이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의 사이에 일어났던 1979년 12·12 하극상과 1980년 5·17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실시가 그것이다. 전두환이 집권하기까지 두 단계를 거친 이유는 신군부의 등장을 가져온 결정적 계기가 박정희의 갑작스런 피살에 있는 만큼이나 신군부세력의 권력 장악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2·12 하극상이 일차적으로는 박정희 피살에 연루되어 있는 군 내부의 관련자를 체포·조사한다는 명분 하에 움직였기에 그 이상의 정변을 꾀해나갈 정치적 명분이 부족했다. 그래서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결속과 제도로서의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 다음에 비로소 정부로서의 군부의 직접적인 정치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1980년 서울의 봄을 전후한 시기의 위기 조작과 그 절정으로서의 5·18 광주학살이 전개된 것이었다.

박정희가 피살된 이후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를 연장해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는 과도기적으로 출범한 최규하 정부의 안정과 외형적 중립을 도모함으로써 야당정치인들과 국민들의 불신·의혹을 씻어내는 것이 요구되었다. 동시에 신군부에게 있어 군부권위주의의 재강화를 위해 더욱 중요하게 요구되는 것은 군부의 물리력을 독점하여 이를 권력 획득·유지를 위한 최종 담보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1979년의 12·12 사건이란 이러한 전략적 고려 속에서 박정희 피살사건을 수사한다는 것을 빌미로 전두환 소장이 주축이 되고 〈하나회〉와 〈보안사〉 요원들이 합세하여 군의 통수권자인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사전허가 없이 전후방의 부대를 불법으로 동원하여 그들의 직속상관인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장을 납치 구금함으로써 야기된 하극상 성격의 쿠데타였다.

여기서 하극상 쿠데타란 권력 중심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향후 정치적 진출이 불투명한 기성의 군장성과 박정희에 의해서 육성된 신진 군장성 간의 갈등이 박정희의 피살로 인해 전면에 표출되어 종내에는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막을 내렸던 군부 내 군권 찬탈을 지칭한다.

1979년 말 당시 유신 과거를 청산하고 문민정부를 세워야 할 것으로 소망되는 강력한 국민적 압력과 미국의 초기 기대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가 이러한 소망과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격인 12·12 하극상을 통해 군부권력을 독점해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신군부세력은 군부 전체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회〉라는 군부 내 사조직을 통해 일부 군부 실력자들의 조직화된 단합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보다 조직적인 군 동원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또한 쿠데타를 조직한 신군부 세력들은 군 동원에 따른 불상사를 감당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갖고서 기꺼이 전투에 임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미국은 물론이고 12·12 하극상을 반대하는 국내의 어떤 세력들도 이들 신군부 세력들과 사생결단을 할 때 따르는 위험부담과 예상외의 사태전개를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다. 12·12 하극상의 성공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 된 전두환 등 신군부가 박정희 피살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갖고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명목으로 군부 내 반대파를 제거하는 것이 가능했던 특수한 정치적 상황으로부터 힘입은 바가 컸다.

1979년 12·12에 이어 1980년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실시를 통해 일종의 집정관체제로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의 갑작스런 피살로 인해 주어진 권력 장악의 기회를 포착하여 이를 실현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1980년의 시점에서 볼 때 군사정권이 들어서기가 어려울 만큼 정치적으로 성숙되어 있는 한국에서 유신체제의 붕괴가 민주정권의 등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군부권위주의의 재강화로 귀결되어 나간 데에는 여러 가지 국내외의 정치·경제적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여기서 1987년에는 민주주의 이행이 성공을 거두는 데 반해 불과 7년 전인 1980년에는 민주화가 좌절을 면치 못하게 된 점에 주목하면서 비교론적으로 요인을 규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북한 대결과 동북아시아의 냉전구도가 상시적인 안보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는 1980년의 상황에서는 여전히 반공이데올로기가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군부의 물리력을 기반으로 한 총력안보체제의 자기 지속이 상대적으로 용이했다. 이에 반해 1987년의 민주주의 이행에서는 구소련의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사실상 세계 공산주의의 실패가 자명했기 때문에 그만큼 공산주의로부터의 위협이라는 안보상의 위기의식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둘째, 1980년에는 박정희의 피살이라는 정치적 불안에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경제위기까지 겹치면서 자본주의체제의 위기로까지 비화되어 나가지 않을 것인가 하는 우려가 팽배해 있었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은 박정희식 군부통치를 거부하면서도 동시에 정치·경제적 불안정이 조기에 해소되기를 바라는 이른바 '안정속의 변화'라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신군부의 정치적 안정화 논리를 편들어 주었다.

이에 반해 1987년의 한국은 전두환정부 치하에서 저유가 등 3저호황을 거치면서 국제수지 흑자까지 낼 정도로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자신감과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피부로 절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국민들은 고도성장을 가져온 경제적 자유경쟁 논리에 걸맞게 개발독재 방식의 정치에서 벗어나 정치적 자유경쟁과 민주화를 통해 한국이 명실상부하게 선진국 대열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셋째, 1979~1980년의 안개정국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미국의 대한정책은 민주정부의 창출보다는 친미정부의 옹호에 있었다. 1980년 레이건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공식화된 미국의 신냉전 전략은 한국정부가 반공·친미인 한 그것을 용인한다는 입장을 취함에 따라 전두환정부의 등장에 일조하였다. 이에 반해 1987년에 이르면 미국은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와 탈냉전 추세에 발맞춰 동아시아 정책에 있어서도 기존의 반공제일 노선보다는 권위주의적 정부를 친미적 민주정부로 개량화해나가는 민주화 정책이 미국의 장·단기적 국익에 더 유용할 것으로 입장을 바꾸어가고 있었다.

넷째, 1980년의 안개정국 상황에서 여전히 국가의 노동통제와 기존의 친자본적 경제정책의 유지를 바라는 독점자본의 이해관계는 제도로서 군부의 이익을 확보해나가려는 군부권위주의와의 제휴를 선호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1987년에 이르면 한국의 기업들은 여전히 권위주의적 노동통제를 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두환정부의 부패와 권위주의적 전횡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박정희식 지배연합에 균열이 나타나게 된다.

박정희의 피살 이후 1980년의 안개정국 상황이 1987년의 제도화된 안정 국면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12·12의 하극상이 이미 저질러졌다면 그 이후 전개된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실시는 불가피한 정치적 수순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서 5·17은 군부의 정치개입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계기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신군부세력이 사느냐 죽느냐의 막다른 골목에서 직면한 선택의 여지없는 밀어붙이기라고 볼 것이다.

이처럼 12·12와 5·17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두 개의 단계가 하나의 연쇄 고리로 묶여 있는 불법적 쿠데타임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전두환 등 신군부세력은 광주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그리고 부당한 권력쟁취에 대한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 국가의 탄압수준을 극도로 높일 수밖에 없는 자기부정에 빠지게 된다.

동시에 광주의 유혈사태 기억과 높은 수준의 탄압은 전두환정부의 부당성을 전면에 내걸면서 반정부운동의 광범한 확산과 함께 운동의 격렬성과 전투성을 극도로 고양시켜나가는 에스컬레이터 현상을 낳게 된다. 그리하여 전두환정부의 원초적 정당성 결여와 광주학살의 피의 대가는 그 이후 전두환정부가 퇴진할 때까지 한국의 정치과정과 민주화운동에 있어 거의 절대적 변수로 작용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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