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2권, 6년(1406 병술 / 명 영락(永樂) 4년) 7월 16일(계묘) 2번째기사
황엄이 진원현의 큰 나무에 구리 못을 몰래 박자 사람들이 압승술을 쓰는 것으로 믿다
진원현(珍原縣)의 길가에 큰 나무가 있었는데, 세속(世俗)에서 ‘백지수(百枝樹)’라 하였다. 황엄(黃儼)이 이곳을 지나다가 비밀히 구리못[銅釘]을 박아 놓았는데, 감무(監務) 허규(許揆)가 이것을 알고 그 못을 뽑은 다음 계문(啓問)하니, 당시 사람들은 황엄이 압승술(壓勝術)695) 을 썼다고 매우 의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4책 12권 3장 B면 【영인본】 1책 364면 【분류】 *외교-명(明) / *농업-임업(林業) / *과학-지학(地學)
[註 695]압승술(壓勝術) : 주술(呪術)을 쓰거나 주문(呪文)을 외워 음양설(陰陽說)에서 말하는 화복(禍福)을 누르는 일. 염승술(厭勝術). ☞
정조 46권, 21년(1797 정사 / 청 가경(嘉慶) 2년) 6월 24일(계사) 1번째기사
우리 나라에 인재가 없는 것이 산천에 쇠말뚝을 박은 것 때문임을 논하다
차대를 하였다. 상이 우의정 이병모(李秉模)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인재가 점점 옛날만 못해지고 있다. 명(明)나라 초기에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가 우리 나라에 와서 유람하면서 산천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단천(端川)의 현덕산(懸德山)에 이르러 천자(天子)의 기운이 있다고 여겨 다섯 개의 쇠말뚝을 박고 떠났었으니 북관(北關)에 인재가 없는 것은 실로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서울에 내려온 맥(脈)은 삼각산(三角山)이 주장이 되는데, 들으니 수십 년 전에 북한산성(北漢山城) 아래에다 소금을 쌓고 그 위를 덮어서 태워 마침내 염산(鹽山)이 되어 내려온 맥을 진주(鎭住)시켰으니 현재 서울에 인재가 없는 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연유하지 않았다고는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이 비록 상도(常道)에는 어긋난 듯하지만 이치로 보아 더러 있음직도 하다. 그렇다면 지금에 이르러 헐어버리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니, 병모가 아뢰기를, “이것 또한 천지의 도를 도와주는 하나의 단서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총융사(摠戎使)를 거친 조심태(趙心泰) 등에게 묻기를, “염산(鹽山)은 어느 곳에 있는가?” 하니, 심태 등이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으므로 일이 마침내 정지되었다.
【태백산사고본】 46책 46권 52장 A면 【영인본】 47책 26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人事) / *왕실-경연(經筵) / *수산업(水産業) / *역사-고사(故事)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예나 지금이나 미신은 쉽게 통용되기 마련인지 옛날 옛적 초가삼간에 기와집 짓던 시절에야 조선이나 중국에서 풍수지리에 근거한 주술적인 방책으로 말뚝을 박았다는 소문들은 생소한 행위라 그럴듯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는 파일 공법으로 현대의 건축물들은 땅에 수십개의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지어지고 있는터라 당연히 쇠말뚝은 미신이라는 논거가 입증(?)되었으나 이것과 쇠말뚝은 다르다고 믿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쇠말뚝 보다 깊고 확실하게 틀어박는게 파일 공법이고 하다못해 전봇대도 마찬가지인터라 이 쪽이 더 악랄할터인데 이런 애기를 하며 쇠말뚝은 실록에도 나와있는 우리의 도시전설이에요 하면 친일파, 생각없는 녀석 소리를 듣기 쉬운 것을 보면 참 뭐랄까 멜랑꼴리하네요.
이래서 우리는 퇴마록을 멀리해야 됩니다.(?)
그런데 혈을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쇠말뚝이 아니라 그 혈에 기운을 모아다 주는 쉽게 말해 흐름에다 길이나 수로를 내어 기운을 틀어 막는 것이지요, 가령 긍정적인 형태이지만 배산임수의 지형에서 남쪽에 흐르는 강이 그러한 사례가 될수 있겠는데, 이게 또 인위적으로 해도 효과가 있습니다. 이처럼 쇠말뚝 같은 민속학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보다 풍수지리적으로 효과 있는 방책이 존재하지만 이런 것은 또 잘 믿거나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도 신기하긴 합니다.
시각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