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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투더코아의 詐欺 列傳]55.흉노열전(匈奴列傳)
게시물ID : history_188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투더코아
추천 : 2
조회수 : 151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1/24 03:53:15

투더코아의 詐欺 列傳.

http://www.podbbang.com/ch/6526   <ㅡㅡ 팟캐스트를 들으시려면 이곳을 클릭하세요~ ^^

blog.daum.net/carilla


*흉노열전(匈奴列傳)


중국은 본토중원을 제외한 여러 부족을 사이팔만 이라고 했다.

그중에 특히 사방의 오랑캐를 일컬어

동쪽의 동이(東夷)

서쪽의 서융(西戎)

남쪽의 남만(南蠻)

북쪽의 북적(北狄)

이라 하였다.

그중에 동이란 주로 만주와 우리나라 조선을 일컫는말이고

남만이란 지금의 중국남부와 인도차이나 지역을 아우르는 부족,즉 백월.동월 .남월등의 서남이를 말하며

서융과 북적은 크게 구분이 되지 않는,

지금의 몽골이나 청해성 등지에 흩어져 살던 민족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역시 북쪽의 오랑캐와의 관계는 뗄래야 뗄수가 없다.

고대 중국의 흥망성쇠는 항상 흉노나 북방민족과 연관이 있었다.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생겨나고 망해가는데는 자체적 이유도 있었지만

십중팔구는 북방 이민족의 침략 때문이거나 과도한 정벌로 인한 재정의 탕진이 주된 이유가 되었다.

오늘 다룰 흉노의 경우에도 진시황 이래로 몽염을 필두로 하여 막대한 재정을 지불하고

흉노를 정벌한것이 진나라 멸망의 이유중 하나였으며

흉노를 방비하기 위한 만리장성 축조 또한 그 이유가 되었다고 할수 있을것이다.

 

초한 쟁패기에는 중원에서의 각축때문에 흉노에게 신경을 쓸 여가가 없었을것이고

한나라가 개창하여 고조가 등극한 후에도

평성의 전투에서 고조가 크게 수모를 당하고 위기를 겪었으니

중원의 한민족에게는 흉노를 위시한 북방민족이 항상 골칫거리였을것은 자명하다.

 

크나큰 위기를 겪고 천신만고끝에 살아 돌아온 고조는 유명으로 흉노와 싸우지 말것을 명했을 정도이니

그 고충은 미루어 짐작해 볼만 하다.

 

하.은.주 3대 이래로 중국에서는 언제나 흉노가 재난의 근원이었다.

한실에서는 흉노의 강약의 시기를 알아내고 군비를 갖추어 그들을 정비하려 했다.

이제부터 흉노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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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제현무 연상곤어평성(以高帝賢武 然尚困於平城)

 

흉노의 조상은 하 왕조 우 임금의 후손인 순유라 일컬어 진다.

요.순시절의 이전에는 이들을 가리켜 산융.험윤.훈육 따위로 불렀다.

대체로 북쪽의 미개척지대에서 목축을 하며 이리저리 이동하며 살았다.

 

가축은 말.소.양 등이 많았고 진귀한 가축으로는 낙타.나귀.노새.버새.푸른말.야생마 등이 있었다.

물과 풀을 찾아 이동하며 살았기 때문에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있을수 없었고

농사도 짓지 않았으며 소유한 땅도 없었다.

그래서 땅문서 라는것도 없고 모든것은 구두약속을 하고 지냈다.

 

어린 아이들도 양을 타고 다니며 활로 새나 쥐를 쏘아 잡았다.

소년이 되면 여우나 토끼사냥으로 집안의 식용재료를 충당했다.

 

활을 당길만한 힘과 말을 제대로 탈줄아는 청.장년이 되면

전원이 무장기병이 되는것이었다.

그들은 평화시에는 목축에 종사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원이 전투에 임해 침략과 공격에 나섰다.

그것이 그들의 천성이었다.

 

그들의 무기는 원거리에는 활을 사용했고

근접전에는 칼이나 짧은 창을 사용했다.

싸움이 유리하면 무작정 진격했고 불리하면 사정없이 도망쳤다.

그들은 후퇴를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이익이 있으면 무조건 달려나갔으므로

예의 같은것은 있을수 없었다.

 

군주 이하 모든 백성들이 가축의 고기를 주식으로 했고 가죽으로는 옷을 해 입었다.

좋은 살코기는 젊은 장정들이 먹었고 나머지를 노인들이 먹었다.

건장한자가 존중 되었고 노약자들은 자연히 천대 되었다.

 

아비가 죽으면 그 아들이 아비의 후처를 아내로 삼았고

형제가 죽으면 그의 처를 아내로 삼는것이 풍습이었다.

 

그들은 위,아래 할것없이 이름을 불렀고

성 같은것은 애초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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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왕조의 도가 쇠미해지자 공유가 대대로 이어받았던 직관의 벼슬을 잃고

서융으로 이주해서 빈 땅에 도읍했다.

그후 300년이 지나 융적이 고공단보를 공격했다.

단보가 도망하여 기산 기슭에 도읍했다.

그때 빈의 주민들이 모두 단보를 따라가서 새 도읍을 이루고 주나라를 일으켰다.

그후 백여년이 지나 주나라 서백 창 이 견융을 정벌했다.

10년이 지나 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정벌하고 낙양에 도읍했다.

주무왕은 융이를 경수와 낙수 이북으로 추방하고

그들에게 계절마다 조공을 바치게 했다.

그들이 사는 지역을 황복 이라고 불렀다.

 

그후 약200년이 지나 주나라의 도 역시 쇠미해 졌다.

목왕이 견융을 정벌하고 네마리 흰 이리와 네마리의 흰 사슴을 잡아서 돌아왔다.

그런 뒤부터 황복에서는 조공을 바치러 오지 않았다.

 

목왕이후 200여년이 지나 주나라 유왕이 총희 포사 때문에 신후와 사이가 벌어졌다.

신후가 노해서 견융과 합세하여 여산에서 여왕을 죽이고

드디어 주나라의 초호택을 점령해 경수와 위수 사이에 거주하며 중국을 침략하는 발판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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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양공이 이때 주나라를 구원해 견융을 치고

기산에까지 이르러 비로소 제후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주나라 평왕은 이때 풍.호 를 떠나 동쪽으로 이동하여 낙양에 도읍을 정했다.

 

그로부터 65년 후 산융이 연을 넘어와서 제나라를 쳤다.

제희공이 도성 밖에서 그들을 맞아 싸웠다.

 

그후 44년 뒤에 또 산융이 연나라를 쳤다.

연나라가 제나라에 도움을 청하니 제환공이 북쪽으로 산융을 쳐서 쫓아냈다.

 

그후 20년이 지나 융적이 낙읍을 쳐서 주나라 양왕이 정나라 범읍으로 달아났다.

이것은 처음에 주양왕이 정나라를 치려고 융적의 딸과 정략결혼 했는데

나중에 양왕이 융적의 딸 적후를 내치니 적후가 원한을 품고 융적을 끌어들여 양왕을 내 쫓은 일이었다.

 

그래서 양왕이 축출되고 융적이 세운 자대 가 왕이 되었으므로

융적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주나라의 북부가 융적에게 유린되었고

침략과 횡포가 자행되었으므로 중국사람들이 몹시 괴로워 했다.

 

주나라 양왕이 도망쳐 도성밖에 산지4년이 되었다.

양왕은 진(晉)나라로 사자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때마침 진나라에는 걸출한 군주 진문공이 방금 즉위하여

패기만만하게 패업을 성취 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던 때 였으므로

진문공은 즉시 군사를 일으켜 융적을 쳐 쫓아내고 자대를 잡아 주살하고

주양왕을 낙읍으로 돌아갈수 있게 하였다.

 

이 무렵에는 진(秦)과 진(晉)이 강국으로 행세하던 때였다.

진문공이 융적을 하서지방의 은수와 낙수 사이로 몰아넣었고

진목공은 서융의 현사 유여를 얻어 서융의 8개국을 진나라에 복속 시킬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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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후에 진(晉)도공이 융 으로 사자를 보내 화친을 제의하자

융적이 비로소 진(晉)에 입조했다.

 

다시 100여년이 지나 조양자가 구주산을 넘어 대 를 격파하고 북방 융족과 인접하게 되었다.

조양자는 점차로 한.위 와 함께 지백을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영토를 분할 소유 했다.

그래서 조나라는 대 땅과 구주산 북쪽을 자기 소유로 했고

위나라는 하서와 상군을 소유하여 모두 융적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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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에는 진(秦)나라가 강성하여 융적의 땅을 점차로 먹어 들어갔고

혜왕에 이르러서는 의거의 25개 성을 함락 시켰다.

혜왕은 위나라까지 쳐서 서하와 상군땅을 진나라로 편입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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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소왕 때에 소왕의 모친 선태후가 융왕과 사통하여 두 아들을 낳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선태후는 이를 부끄러이 여기고

감천궁에서 융왕을 속여 죽인뒤에 군사를 동원하여 의거를 쳐서 멸망 시켰다.

 

이때부터 진(秦)나라는 농서.북지.상군을 소유하게 되었고 장성을 쌓아 오랑캐의 침입을 막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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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라 조무령왕은 나라의 풍속을 바꾸어 호복을 입고 말을 타고 활을 쏘았으며

북쪽으로 임호.누번 등을 격파한 후 장성을 쌓은 뒤에

대 땅으로 부터 음산산맥에 이르기까지를 요새로 만들어

운중군.안문군.대군 등을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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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에 진개 라는 현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는 흉노에 볼모가 된적이 있었는데 흉노에서는 그를 매우 신임 했다.

진개는 그때에 정세를 잘 파악해 두었다가 귀국하자마자 동호를 격파했다.

이때 동호는 천리나 퇴각했다.

 

ㅡ진왕 정을 암살하려 형가와 함께 떠났던 진무양이 바로 진개의 손자였다.ㅡ

 

연 에서는 장성을 조양에서 양평까지 구축했고 상곡군.어양군.우북평군,요서군.요동군을 설치해

흉노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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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의관과 속대를 할줄아는 예제의 문명국은 전국칠웅이었으며

그중에 흉노와 접경하고 있는 나라는 연.조.진 이었다.

 

그때 조나라장군 이목이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흉노가 감히 조나라 변경을 넘보지 못했다.

 

그후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시황제가 몽염에게 10만의 군사를 주어 북쪽 흉노를 치게 했다.

몽염은 하남땅을 모조리 손에 넣고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었다.

황하를 따라 44개의 성을 쌓고 죄수들로 구성된 군사들을 강제 이주시켜 이곳을 수비했다.

 

몽염은 또 구원에서 운양까지 직선도로를 통하게 했으며 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골짜기를 이용해 참호로 삼아 임조에서 요동까지 대장성을 축조 했으니 그 길이가 1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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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에는 동호와 월지가 강했다.

 

흉노의 선우를 두만 이라고 했는데 그들도 진나라를 이길수는 없어서 북쪽으로 아예 이주해서 살았다.

 

십여년이 지나 몽염이 죽었다.

제후들이 진나라를 배반해 중국 전토가 소란했다.

진나라가 강제로 이주시킨 죄수부대도 모조리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국경수비가 허술해지고 여유가 생긴 흉노는 점차로 황하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진나라 이전의 요새선으로 남하하여 다시 중국과 접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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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선우에게는 묵특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런데 두만선우가 총애하는 연지가 말자를 낳았다.

두만선우는 태자를 폐하고 말자를 태자로 세우려고 묵특을 월지국으로 볼모로 보냈다,.

그런뒤 두만선우는 갑자기 월지국을 공격했다.

그러자 두만의 예상대로 월지국에서는 볼모인 묵특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묵특은 월지국의 명마를 훔쳐타고 본국으로 도망쳐 돌아왔다.

 

두만선우는 자신의 계획이 어긋났지만

아들 묵특의 용기를 장하게 생각하여 1만기를 거느리는 대장으로 삼았다.

 

묵특은 아버지 두만선우가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사실을 알고 계책을 세웠다.

명적을 만들어 소지하고는 부하들에게 말타고 활쏘는 훈련을 시킨뒤 명령했다.

"이것은 소리나는 화살이다.

내가 이 명적으로 쏘거든 너희도 내가 쏘아 맞춘것을 일제히 쏘아라.

쏘지않는놈은 모두 목을 벨것이다."

 

그런후 묵특은 부하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

명적으로 새를 쏘았는데 함께 쏘지 않는자가 있었다.

묵특은 그자리에서 쏘지않은 병사들의 목을 모두 베었다.

 

얼마후 묵특은 명적으로 자신의 애마를 쏘았다.

좌우에서 주저하여 감히 쏘지 못하는자가 있었다.

묵특은 역시 쏘지않은자를 베었다.

 

다시 얼마 지나서 묵특은 명적으로 자신의 애첩을 쏘았다.

좌우가 몹시 두려워 하며 쏘지 못하는자가 있었다.

그래서 묵특은 그자를 베었다.

 

묵특이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두만선우의 명마를 보고 명적을 쏘았다.

좌우의 부하들은 그제서야 주저함 없이 두만선우의 말에다가 대고 화살을 쏘았다.

 

"됐다.

이제야 쓸만하구나."

 

어느날 묵특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버지 두만선우를 따라 사냥을 나갔다.

묵특은 명적을 꺼내어 아버지 두만선우에게 화살을 쏘았다.

좌우의 부하들은 주저하지 않고 두만선우에게 활을 쏘았다.

 

두만선우가 죽자 묵특은 자신의 계모와 그 아들과 저항하는 대신들을 모조리 명적으로 쏘았다.

부하들은 묵특이 화살을 쏘는대로 모두 화살을 날려 그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묵특은 자립하여 선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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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무렵 인근에서는 동호가 그중 강했다.

동호 에서는 흉노의 사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내 두만선우가 생전에 아끼던 천리마를 달라고 했다.

묵특이 뭇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이니 주지 마십시오."

그러나 묵특은 생각이 달랐다.

"이웃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어찌 한마리의 말을 아끼겠는가?"

묵특은 동호에게 천리마를 주어버렸다.

동호에서는 묵특이 자신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사자를 보내어 이번에는 묵특의 연지를 요구했다.

묵특의 신하들이 펄펄 뛰며 노하여 말했다.

"감히 선우의 연지를 달라고 하다니 무도하기 이를데 없는 놈들 아닙니까?

연지를 주지 마시고 군사를 보내어 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묵특은 생각이 달랐다.

"이웃나라끼리 어찌 한사람의 여자를 아끼겠느냐?"

그래서 묵특은 여러 연지중에서 사랑하는 연지 한명을 택하여 동호로 보냈다.

 

동호의 왕은 더욱 교만해졌다.

흉노와 동호사이에는 1천여리의 버려진 황무지가 있었다.

그 무인지경의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고 천리의 버려진 땅이 바로 국경인 셈이었다.

교만해진 동호가 사자를 보내 말했다.

"흉노와 동호 사이에 경계로 삼고있는 1천여리의 불모지는 흉노에서도 이용가치가 없어서 버려둔 땅이니

우리 동호가 이를 갖도록 하겠소."

 

회의가 열렸다.

신하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쓸모없는 땅이니 주어버리십시오."

"안됩니다.

다른 계락이 있는듯 합니다."

"주어도 그만 안주어도 그만이니 논의할 가치도 없습니다."

 

가만히 듣던 묵특이 그제야 불같이 화를 냈다.

"땅이란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그 땅을 줄수 있단 말이냐?"

 

그래서 묵특은 땅을 주어버리자고 한 신하들과

주어도 그만 안주어도 그만 이라고 말했던 신하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묵특은 즉시로 말에 올라 전 군대에 명했다.

 

"동호를 칠것이다.

뒤늦게 출전하는자도 모두 베어버리겠다."

묵특은 동진하여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애초에 흉노를 만만히 보았기때문에 방비가 없었다.

그래서 동호는 처절하게 격파 되었다.

 

묵특은 동호왕을 죽인뒤 백성들과 가축을 노략질 하여 귀환했다.

그는 말에서 내릴틈도 없이 곧바로 서진하여 월지를 쳐부수고

뒤이어 남향하여 하남의 누번.백양 두 부족을 격파하여 복속 시키고

예전에 몽염이 탈취해간 땅을 삽시간에 점령해 버렸다.

그로인해 한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고

조나.부시.대.연 등과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의 한나라는 항우와 싸우느라고 정신이 없을때였기 때문에 흉노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묵특은 황하 이북을 모두 석권하고 자신의 위치를 강고하게 할수 있었다.

묵특의 군대는 궁사만도 30만이 넘었다.

 

순유에서 두만선우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동안 흉노는 때때로 강대하고 약소했으며

그들끼리도 이합집산이 되풀이 되었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이 전승해 내려온 내력을 차례대로 기록할수는 없었다.

 

그렇나 묵특이라는 걸출한  왕에 이르러서는 북방 만족들이 모두 복종할만큼 강대해지고

남으로는 중국과 대치할만큼 대단한 형세를 이루게 됨으로서

비로소 흉노의 관직과 칭호정도는 기술할수 있게 되었다.

 

선우 밑에는 좌현왕.우현왕.좌곡려왕.우곡려왕.좌대장.우대장.좌대도위.우대도위.

좌대당호.우대당호.좌골도후.우골도후 등을 두었다.

 

흉노에서는 어질다.현명하다 라는말을 도기'라 했는데

그래서 태자를 좌도기왕 이라 불렀다.

 

또 좌우 현왕 이하 당호에 이르기까지 그게는 1만기.작게는 수천기를 거느렸으며

그들을 둘러싸고 24인의 군단장들이 있어 이들을 만기 라고 불렀다.

 

여러 대신들의 관직은 모두 세습 되었고

흉노의 귀족에는 호연씨.난씨.수복씨가 있었다.

좌 자가 붙는 왕족이나 장군들은 동방에 위치하며 상곡군 동쪽을 담당 하였고

예맥 민족과 조선민족에 접하고 있었다.

우 자가 붙는 왕족과 장군들은 서방에 위치하여 상군 서쪽을 담당하였고

월지.강족.저족 과 접하고 있었다.

선우의 도읍지는 대군.운중군을 대하고 있었다.

 

각 부족은 제각기 자기영역이 있었으며 그 안에서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며 살았고

그들중에서 좌우의 현왕과 좌우곡려왕의 영역이 가장 컸다.

 

좌우의 골도후는 선우의 정치를 보좌 했으며

24인의 군단장은 각각 천인대장.백인대장.십인대장.비소왕.상.봉.도위.당호.저거 등의 속관을 두었다.

 

매년 정월에는 여러 군단장들이 선우의 왕정에 모여

대규모의 화합을 가지고 제사를 지냈다.

가을이 되어 말이 살찔때가 되면 대림에서 대집회를 열고 백성과 가축의 수효를 점검했다.

 

흉노의 법률에는 평소에 칼을 한자 이상 칼집에서 뽑는자는 사형에 처하고

도둑질 한 자는 그의 가산 모두를 몰수했다.

가벼운 범죄자는 알형에 처했으며 중범죄자는 사형에 처했다.

 

선우는 매일아침 막영에서 나와 일출을 보며 절하고

저녁에는 달을 보고 절했다.

 

장례식에는 관.곽에다가 금은이나 옷가지등을 부장했으며

무덤에 봉분을 만들지 않고 상복도 입지 않았다.

군주가 죽으면 측근이나 애첩이 순장 됐는데 많을때는 수백에서 수천이나 되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적을 공격해서 목을 베거나 포로로 잡으면 상으로 한잔의 술을 내렸고

노획품은 그대로 본인이 갖게 하였다.

포로는 역시 잡은자의 노비로 삼게 하였다.

그러므로 전투시에는 제 이익을 위하여 맹렬하게 달려나갔다.

그들은 적을 발견하면 이익을 위해 새떼처럼 모여들었고

불리하여 패색이 짙어지면 구름처럼 흩어졌다.

전댕터에서 전사자의 시체를 거두어 돌아오면 그 전사자의 가재나 재산을 모두 얻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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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특은 북방으로 혼유.굴석.정령.격곤.신려 등의 5개국을 복속시켰다.

그래서 흉노의 귀족과 대신들이 모두 심복했으며

백성들도 묵특선우를 현군으로 받들어 모셨다.

 

그무렵 한나라는 비로소 중국을 평정하고 한왕신을 대군의 마읍에 도읍하게 했다.

그런데 흉노가 대공세를 펴서 마읍을 포위하자 한왕신은 흉노에 투항하고 말았다.

흉노는 여세를 몰아 남방으로 구주산을 넘어 태원군을 공격해 진양성 밑까지 쇄도했다.

 

고조가 이 소식을 듣고 병사를 거느리고 정벌을 나섰다.

때마침 엄동설한에 폭설까지 내려 병사들은 동상으로 손가락을 잃은자가 열명중 두셋은 되었다.

묵특은 한군이 추위에 곤란을 겪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고

거짓으로 패한척 하여 한군을 북쪽으로 유인했다.

 

묵특은 정예병을 감춘뒤 노약병을 선봉에 배치했다.

그러나 그런것을 알리 없는 한군은 보병을 32만으로 증원하여 도주하는 적을 쫓아 북진했다.

 

고조가 선두에 서서 평성에 도착했을때 묵특은 삽시에 정병40만을 풀어 한의 대군의 허리를 관통하고

평성 동쪽 백등산을 포위했다.

고조는 꼼짝없이 갇혀버리게 되었다.

 

고조는 7일간이나 포위되어 보급이 떨어져 식사도 하지 못하고 큰 위기에 빠졌다.

고조가 백등산 위에서 바라보니 새까맣게 둘러싼 흉노는 모두 기병대로서

그 위용이 참으로 강성하여 바라보는것 만으로도 질려버릴 지경이었다.

 

고조는 진평의 게책을 써서 연지에게 밀사를 통해 후한 선물을 보냈다.

과연 계책은 효과가 있어서 연지가 묵특을 달랬다.

"두나라 임금이 서로를 괴롭히는건 좋지 않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해도 선우께서 그곳에 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선우께서 그를 치려 하시지만 한왕 신의 간특한 계락이 있을지도 모르니

섣불리 공격하는것은 위험합니다."

 

묵특이 생각해보니 마침 한왕신이 합류하기로 했던 날짜가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

무슨 음모가 있는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연지의 말을 받아들여 포위망의 한쪽을 풀어 주었다.

고조는 활시위를 한껏 당긴채 살을 매겨 바깥으로 향하게 하고는

포위가 풀린 한쪽으로 도망쳐 나갔다.

 

고조는 마침내 자신의 대군과 만나게 되었고

묵특도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물러가 버렸다.

고조 역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면서 유경을 시켜 화친을 맺게 했다.

 

그뒤에 한왕 신 은 흉노의 장군이 되어 대군.운중군 등에 자주 침입해 약탈을 해갔다.

또 얼마 안되어 진희가 모반하여 한왕 신 과 짜고 대군땅을 공격했다.

한나라에서는 번쾌를 시켜 이들을 공격해 안문.운중 등의 여러 군현을 탈환하긴 했지만

요새선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다.

 

이무렵 흉노로 투항하는 한나라 장수들이 특히 많았다.

그래서 더욱 교만해진 묵특은 대군 일대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약탈을 자행했다.

흉노때문에 골치를 앓던 고조는 유경을 시켜 황실의 딸을 공주라 속여 흉노에게 보내 연지로 삼게 했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면포와 견포.술과 쌀.식품등을 제공한다는 조건으로

흉노와 형제국이 되는 화친을 맺게 했다.

그 이후로 묵특의 침략행위는 조금 줄어 들었다.

그러나 그후 연왕 노관이 모반해 수천명을 이끌고 흉노로 투항해 가서

상곡군의 동쪽을 왕래하며 주민들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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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가 붕어하고 효혜제와 여후의 시대가 되었다.

묵특이 여후에게 교만방자하고 망령된 편지를 보냈다.

ㅡ그대가 과부가 되었다 하니 나와 혼인하는것이 어떻겠소?ㅡ

 

한나라 조정이 발칵 뒤집어 졌다.

대로한 여태후가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자 번쾌가 나서서 흉노를 치자고 했다.

그러나계포가 나서서 말했다.

"고조의 현무함으로도 평성에서 큰 위기를 겪으셨는데

번쾌가 10만으로 흉노를 유린하겠다고 하는것은 태후를 기망하는것입니다.

번쾌를 참수 하시옵소서."

깊이 고민하던 여태후는 울며 겨자먹기로 참으며 정벌의 논의를 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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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가 즉위하여 화친조약을 다시 확인했다.

그랬음에도 흉노의 우현왕이 하남땅으로 쳐들어 와서 한나라 주민들을 약탈하고 죽였다.

효문제는 승상 관영에게 조칙을 내려 거기8만5천을 주어 고노 땅으로 진출해서 우현왕을 치게 하였다.

우현왕은 관영에게 패하여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이듬해 흉노선우가 한나라로 편지를 보냈다.

ㅡ하늘이 세운 흉노의 대선우는 삼가 중국의 황제에게 묻노니 그동안 무양한가?ㅡ

<중략>

편지는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한나라는 그런 흉노를 벌할 방법이 없었다.

당시의 흉노는 월지를 격파하고 동호를 정벌하여 전성의 강성함을 누리고 있었으며

흉노를 쳐서 이긴다 해도 얻을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효문제는 결국 흉노와 다시 화친하기로 했다.

 

효문제 전원6년에 한나라에서는 흉노에게 답신을 보냈다.

 

ㅡ황제는 삼가 묻노니 선우의 대선우는 무양한가?ㅡ

<중략>

 

흉노의 편지는 오만했으나 황제의 편지는 '무엇 무엇을 줄테니 화친의 약속을 잊지 말라'하는 내용이었다.

이때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한나라가 흉노에게 조공을 바치는 형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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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후 묵특이 죽고 아들 계육이 서서 노상선우라 이름하였다.

노상선우가 즉위하자 효문제는 다시 황족의 한 여자를 공주라 하여 선우에게 보내 연지로 삼게 했다.

 

그때 연나라출신 환관 중항열을 공주의 보호관으로 삼아 보냈다.

중항열은 흉노땅으로 가기 싫었지만 조정에서 억지로 보내려 하자 속으로 크게 불평 하였다.

"두고보자.

내가 흉노에 가면 반드시 한나라의 화근이 될것이다."

중항열은 흉노땅에 도착하자마자 선우에게 귀순해 버렸다.

선우는 중항열을 몹시 총애 하였다.

 

흉노의 선우와 대신들은 한나라의 비단과 식품과 보화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러자 중항열이 이렇게 간했다.

"흉노의 인구는 한나라의 일개 군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흉노가 강한것은 바로 의복과 음식때문입니다.

그것들이 한나라와 다르고 또한 한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있기 때문 입니다.

만일 지금 선우께서 풍속을 변경하여 한나라 물자를 애용한다면

흉노는 한나라 물자의 10분지2도 소비하기 전에 한나라의 속국이 될것입니다.

그러니 선우께서는 한나라의 비단옷을 입고 나가시어 수풀과 가시덤불속을 헤치며 말달려 가십시오.

그러면 한나라의 비단옷은 반드시 찢기어 못쓰게 될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한나라의 비단옷이 흉노의 털가죽 옷보다 훌륭하고 튼튼하지 못하다는것을 보여주십시오.

또한 한나라의 음식을 모두 버리셔서 그것들이 우리가 먹는 짐승의 젖이나 건락만큼

편리하고 맛있지 않다는것을 백성들에게 보여 주셔야 합니다.

 

선우가 중항열의 뜻을 받아들여 그렇게 했다.

백성들이 이런 모습을 보고 한나라의 물건들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중항열은 흉노의 귀족들에게 숫자를 기록하는 법을 가르쳤다.

흉노의 귀족들이 매우 좋아 하였다.

 

한나라 황제가 선우에게 보내는 편지는 한자한치의 서판을 사용했다.

중항열은 선우가 한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낼때 한자두치의 서판을 쓰게 하고

봉투나 봉인의 도장도 더 큰것을 쓰게 하였다.

 

흉노선우의 편지는 더욱 거만하고 방자하게 되었다.

ㅡ하늘이 낳고 해와 달이 세우신 흉노의 대선우는 한나라 황제에게 묻노니 무양한가?ㅡ

 

중항열은 선우에게 한나라를 침범하기에 편리한 지점을 잘 알아두게 하고

밤낮으로 선우를 설득 지도 했다.

 

효문제14년.

흉노는 14만의 기병을 이끌고 조나.소관 쪽으로 침략했다,.

북지도위를 죽이고 가축과 백성을 약탈해 갔다.

드디어 팽양을치고회중궁을 불태운뒤

옹땅의 감천궁에 이르렀다.

효문제는 전차1천대와 기병 10만을 보내 대비했다.

이 싸움에서는 큰 충돌 없이 흉노가 물러가고 양쪽 군대에는 큰 공이나 피해가 없이 끝났다.

 

그 이후에도 흉노는 매년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여 노략질을 해 갔다.

운중군과 요동군이 가장 피해가 컸으며 대군 같은곳은 만여명 이상이 죽기도 했다.

흉노와 한나라는 매번 화친을 맺었지만 그때마다 흉노가 화친의 약속을 어기고

국경을 약탈하는 일이 이어졌다.

효문제는 새로 화친의 조약을 맺으며

매년 일정량의 황금과 면포.견포.차조.누룩 등을 흉노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는 말이 화친이지  사실상의 조공국이 되는 형식이었다.

흉노는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지 않게 되었고

한나라도 요새선을 나가서 흉노를 공격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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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계육선우가 죽고 그 아들 군신선우가 즉위했다.

군신선우가 즉위하자 효문제는 다시 화친을 확인했다.

그런데 중항열이 새 전우를 꼬드겼다.

군신선우는 즉위4년만에 화친을 깨고 상군과 운중군으로 대거 침입했다.

그들은 극심한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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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문제가 죽고 효경제가 즉위 하였다.

그런데 조왕 수가 흉노와 결탁하여 오초7국의 난을 틈타 침입해 오도록 했다.

그러나 한군이 조나라를 포위해 격파해 버렸기 때문에 흉노는 침략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이후 효경제는 다시 흉노와 화친조약을 맺었다.

본시의 협약대로 흉노와 관문에서 교역하고 흉노에 물자를 보내주고

한나라 공주를 흉노에 시집 보냈다.

효경제의 치세에는 변경에서 비록 소규모의 충돌은 있었지만

대규모의 침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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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무제가 즉위하자 무제역시 흉노와의 화친을 확실히 하고

그들을 후하게 달래었다.

그래서 흉노는 한나라 국경을 침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히려 한나라가 먼저 화친을 어기어 계략을 썼다.

마읍성 부근에 사는 섭일노인을 시켜 흉노에 접근하여 교제하게 하였던 것이다.

섭일노인은 마읍성을 바치는척 하고 선우를 유인했다.

선우는 마읍성의 재물을 탐하여 섭일의 계략에 넘어가서 10만의 기병을 이끌고무주현의 요새로 쳐들어갔다.

한나라에서는 마읍 주변에 30만의 대군을 매복시키고

어사대부 한안국이 호군장군이 되어 네명의 장군을 독려하여 흉노를 일망타진하려고 대기하고 있었다.

 

선우는 마읍성을 향해 돌진하려 하였다.

그런데 들판에 가축들이 무진장 널려있으나 목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것이 이상했다.

선우는 변경의 봉화대를 습격하여 안문군의 위사를 사로잡았다.

선우가 위사를 죽일듯이 위협하자 위사는 모든것을 불어 버렸다.

선우는 크게 놀랐다.

선우는 군사를 철수시켜 요새선을 벗어난 후에 말했다.

"내가 위사를 잡게 된것은 천명이다."

그래서 위사를 천왕이라 부르게 했다.

 

매복한 한군이 선우를 치려고 아무리 기다려도 흉노군은 오지 않았다.

그들은 흉노군이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한군은 아무도 공을 세운자가 없었다.

특히 왕회의 별동군은 흉노의 치중대를 기습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만난것은 치중대가 아니고 흉노의 본진 이었다.

왕회는 흉노의 본진이 규모가 너무 커서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고 말았다.

원래 이 계획을 세운것은 왕회였다.

전략 자체가 애초부터 너무 졸렬했을뿐 아니라 흉노를 공격하지 않은것이 황제의 분노를 샀다.

왕회는 참형에 쳐해졌다.

 

그로인해 흉노는 한나라와의 화친을 끊고 걸핏하면 한나라의 변경지대를 노략질 했다.

또한 관문에서는 무리한 교역을 요구했다.

한나라에서는 흉노를 달래기 위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느라 골머리를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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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읍의 사건이 있은후 5년뒤에 한나라는 네명의 장군에게 각각1만기씩을 주어

관시 부근의 흉노를 치게 했다.

상곡으로 출격한 장군 위청은 용성에서 700명의 흉노를 배거나 사로잡았다.

공손하는 운중에서 출격하였지만 전과가 없었다.

공손오는 대군에서 출격했는데 7000의 병력을 잃고 대패했다.

안문군에서 출격한 이광은 역시 대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공손오와 이광은 투옥 되었다가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그해 겨울.

흉노가어양군으로 침입하여 그 피해가 매우 컸다.

그 다음해.

흉노의 2만기가 침입하여 요서태수를 죽이고 2000명의 백성을 잡아갔다.

그리고 어양으로 침입해 1000여명의 한군을 죽이고 한안국을 포위했다.

한안국은 전멸할뻔 했으나 마침 구원병이 도착해서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다.

 

그 이듬해 위청이 다시 운중군으로 출격해서 서쪽 농서 땅에 이르러

흉노의 누번왕.백양왕을 하남에서 격파하고

흉노의 수급과 포로수천명을 얻었다.

 

그래서 한나라에서는 드디어 하남땅을 평정하고 삭방군을 설치했으며

옛날 진나라시대의 몽염이 구축했던 요새를 다시 수리하고

하수를 발판으로 삼아 방비를 굳건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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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신선우가 죽고 그 아우 좌곡려왕 이치야 가 자립하여 군신선우의 태자 어단을 내쫓고 선우가 되었다.

어단이 도망쳐 한나라로 망명해 오자 섭안후로 봉했으나

수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이치야선우가 즉위한 해에 수만기를 몰고 대군으로 침입해서

대군태수 공우를 죽이고 1000여명을 잡아갔다.

그 후에도 매년 침입하여 수천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한나라에서는 위청을 대장군으로 하여 여섯 장군을 합세시켜

10만의 병력으로 삭방군 고궐을 치게 하였다.

 

흉노의우현왕은 무방비 상태로 술에 취해 있었는데

한나라군대가 한밤중에 우현왕을 포위하자 크게 놀라 몸을 빼어 달아났다.

정예의 흉노기병들도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한군은 우현왕에게 소속되어있던 1만5천여명과 비소왕10여명까지 잡았다.

그해가을 흉노는 보복으로 1만기를 대군에 투입해 조위 주영을 죽이고 1천여명을 잡아갔다.

 

그 이듬해 한나라는 다시 위청에게 10만기를 주어 정양에서 수백리리상 출격하게 하여 흉노를 쳤다.

그때 얻은 포로와 수급이1만9천이었으나 한군에서도 두명의 장군과 3000의 병력을 잃었다.

 

한나라에서는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1만기를 주어 농서군에서 출격하게 하여

연지산을 지나 1천여리 지점에서 흉노를 쳤다.

그때 얻은 흉노의 수급과 포로는 1만8천이었고

휴도왕을 격파하고 제사지낼때 쓰는 황금상까지 빼앗아 왔다.

 

이때 흉노가 크게 반발하여 대군.안문군을 침범하여 수백명을 살해 납치 해갔다.

 

한나라에서는 박망후 장건과 이광장군을 시켜 우북평군에서 진격해 좌현왕을 치게 했다.

그러나 이광장군은 좌현왕에게 포위당해 4천명의 군사로 1만여명의 흉노를 죽이며 분투했다.

이광의 부대가 거의 전멸하기 직전에 박망후의 군대가 당도하여 간신히 살아날수 있었다.

 

한군의 손실은 매우 컸다.

공손오는 곽거병과의 약속시간을 대어 오지 못했고

박망후 장건 역시 이광과의 약속날짜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두사람 모두 사형에 해당 되었지만 속전을 내고 서민으로 떨어졌다.

 

흉노에서도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혼야왕과 휴도왕이 부하를 수만명이나 죽게한것에대해 선우가 문죄하여 죽이려고 하자

놀란 두 왕은 한군에 항복을 교섭했다.

 

곽거병이 이들을 영접하려 했는데 혼야왕은 휴도왕을 죽이고 자신의 백성들만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혼야왕이 투항하자 농서.북지.하서 지방의 흉노침공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그 이듬해 흉노군은 우북평군과 정양군으로 숫만기가 침입하여 1천여명을 살해하거나 납치해 갔다.

한나라에서는 대대적인 정벌을 계획했다.

 

한나라에서는 말을 배불리 먹이고 10만의 기병대를 동원했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이 군대를 양분해 인솔했다.

흉노가 이 소식을 듣고 치중을 멀리 대피시킨뒤

정예군을 이끌고 사막 북쪽에서 대기하다가 위청과 접전했다.

 

어느 해질무렵에 큰 바람이 일자 한군은 그 틈을 타서 좌우로 군사를 내어 선우를 포위 했다.

선우는 불리함을 느끼고 수백기의 친위대만을 거느린채 포위를 뚫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한군은 날이 어두워 선우를 추격하지 못하고

대신 포로와 수급을 얻은것이 1만9천 이었다.

 

선우가 급히 도망칠때 그의 병사들이 한군과 섞여서 흩어졌으므로

결국 선우는 혼자 몸으로 사막으로 피신했다.

그렇게 되자 흉노의 우곡려왕은 선우가 난전중에 죽었다 생각하고 스스로 선우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진짜선우가 죽지않고 살아 돌아오자

우곡려왕은 선우의 칭호를 버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한편 곽거병은 대군땅에서 출격해 2천리를 행군하다가 흉노의 좌현왕과 접전했다.

이때 한군은 흉노를 대패시켜 좌현왕과 장군들을 모두 도주케 했으며 수급과 포로를 얻은것이 7만 이었다.

곽거병은 낭거서산에서 봉제를 올리고,고연산에서 선제를 올렸다.

 

곽거병의 군대는 한해 까지 진격했다가 돌아왔는데 그 후로부터 흉노는 멀리 달아나 사막의 남쪽에서 선우의 왕정을 볼수 없었다.

 

한나라에서는 적극책을 써서 황하 북쪽 삭방군서쪽까지 진출해

곳곳에 요새를 세우고 5~6만의 관리와 병사를 배치해서 흉노땅을 점차 잠식해 들어갔다.

 

결국 한나라의 두 장군이 출격하여 선우를 포위하고8~9만의 흉노를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지만

한나라 역시 수만명이 죽고 말도 10만필이나 죽는 피해를 입었다.

한나라는 더이상 말이 없어서 흉노를 추격할수 없었다.

 

흉노역시 더 견딜수가 없어서 화친을 청해왔다.

황제는 흉노의 화친제안을 조정회의에 붙였다.

혹자는 화친하자고 했고 혹자는 끝내 흉노를 쳐서 복속 시켜야 한다고 했다.

 

장사 임창이 나서서 말했다.

"흉노는 퍄전한지 얼마 안돼 지금 몹시 곤궁합니다.

이때 밀어부쳐서 흉노를 속국으로 삼아 봄 가을로 변경으로 와서 입조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황제는 임창을 사신으로 삼아 흉노로 보냈다.

 

선우는 임창의 제안을 듣고 크게 노했다.

그래서 임창을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한나라는 다시 병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때마침 곽거병이 죽어서 원정은 취소 되었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한나라는 흉노를 치지 못했다.

 

이치사 선우가 즉위13년만에 죽고 그 아들 오유가 선우에 올랐다.

오유선우가 섰을 당시에 한나라는 남쪽의 동월과 남월을 치느라고 흉노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흉노역시 한나라의 변경을 침범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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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선우가 선지 3년만에

한나라는 이미 남월을 멸했으므로 태복 공손하를 시켜 흉노를 치게 했다.

공손하가 1만5천기로 구원에서 2천리를 나아가 뒤졌지만 흉노라고는 한명도 볼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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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곽길을 사자로 흉노에 보내한나라의 위세를 알리게 했다.

곽길이 선우에게 말했다.

"지금 남월왕의 목이 한나라 수도의 북문에 걸려있습니다.

지금 천자께서는 몸소 병사를 거느리고 변경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선우께서는 가능하시다면 나아가 한나라와 한번 겨루어 보십시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남쪽을 향해 한나라의 신하가 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선우는 크게 노했다.

선우는 곽길을 만나게 한 신하를 그자리에서 목베어 죽이고 곽길을 북해로 추방해 버렸다.

 

오유선우는 한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대신 병사와 말을 쉬게하고

수렵을 통해 승마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면서

한나라로 자주 사신을 보내 좋은말로 화친을 청했다.

 

이무렵 한나라는 동쪽으로 예맥과 조선을 정벌해 군으로 삼고

서쪽으로는 주천군을 설치해 흉노와 강족과의 통로를 차단했다.

 

서쪽으로는 월지.대하와 우호하고

한나라 공주를 오손왕에게 시집 보내어 흉노를 지원하던 서쪽 여러나라를 떼어놓았다.

또 북쪽으로도 영토를 더욱 확장해 현뢰까지 가서 요새를 구축했다.

그러나 흉노는 한마디도 항의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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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유선우는 한나라에서 사신이 오면 교묘한 말로 사자의 비위를 맞추어

한나라의 재물을 가급적 많이 얻기위해 거짓말을 했다.

"내가 한나라로 직접 들어가서 천자를 뵙고 형제국이 될것을 약속하고 싶소."

 

한나라 사자가 귀국하여 그대로 보고하자 한에서는 선우를 위해 장안에다가 대 저택을 건축했다.

그러나 선우는 한나라에 가지 않고 흉노의 고위관리를 한나라에 사자로 보냈다.

그런데 그 흉노사자가 그만 병에걸려 죽고 말았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흉노의 사자를 살려보려고 온갖 정성을 다했지만 별수 없었다.

 

한나라는 노충국에게 2천석 고관이 차는 인수를 주어 사신으로 보내면서

수천금의 비용을 들여 정중히 장례를 치룬 유해를 운구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는 한나라가 흉노의 사신을 죽인것이라고 트집을 잡아

노충국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후 흉노는 한의 변경을 자주 침범하여 노략질을 해 갔다.

 

한나라는 곽창을 발호장군으로 삼고 착야후 조파노를 삭방군 동쪽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했다.

노충국이 흉노에 억류된지 3년만에 오유선우가 죽었다.

그 아들 오사려가 서서 선우가 되었다.

오사려는 나이가 어려 아선우 아 불렀다.

 

그로부터 선우는 병력을 북서쪽으로 증강해 좌익의 군사는 운중군에 맞서고

우익의 군사는 주천군.돈황군에 맞서게 했다.

 

아선우가 즉위하자 한에서는 흉노를 이간시키려고 두사람의 사신을 보내

한사람은 선우를 조문하게 하고 한사람은 우현왕을 조문하게 했다.

그러나 두 사신 모두 붙잡혀 아선우에게 억류되었다.

 

한나라 사신으로 억류된자는 모두 10여명 이었으며

한에서도 흉노의 사신이 오면 역시 억류하여 비등한 수효를 만들었다.

 

이해에 한나라는 이사장군 이광리를 시켜 서쪽으로 대원을 정벌케 하고

인우장군 공손오 를 시켜 수항성을 구축하게 했다.

그해 흉노 땅에서는 큰 눈이 내려 많은 가축이 굶어죽고 얼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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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선우는 나이가 젊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흉노사람들은 불안과 곡포에 떨었다.

좌대도위가 선우를 죽이려고 몰래 한나라로 사람을 보냈다.

"선우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나라가 너무 멀어서 걱정이니

만약 한군이 마중나와서 보호해 준다면 흉노에서 곧 반란을 일으키겠습니다."

 

한나라가 기뻐하고 수항성에서 좌대도위를 맞을 준비를 했으나 여전히 거리는 멀었다.

그래서 이듬해 착야후 조파노에게 2만기를 주어 삭방군2천리까지 진출하게 하여

준계산에서 좌대도위를 맞이해 오도록 했다.

 

조파노가 약속한 날짜에 약속한 지점으로 갔으나 좌대도위는 오지 않았다.

조파노는 철수 하면서 흉노와 접전해 수천명의 수급과 포로를 얻었다.

그러나 수항성을 400여리 남겨둔 지점에서 흉노의 8만기가 조파노를 포위했다.

좌대도위의 모반이 사전에 발각되어 주살되고

아선우는 재빠르게 군사를 일으켜 조파노를 포위한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조파노는 밤중에 몸소 물을 구하러 나섰다가

매복한 흉노군에게 사로잡혔다.

흉노는 즉시 한군을 공격했다.

장수를 잃은 한군은 매우 당황했다.

조파노 휘하의 호군 곽종과 상장군 유왕이 논의 했다.

"장군을 잃은 죄는 사형이오.

교위들까지 모두 주살될것이 두려워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소."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구려."

 

그리하여 전군이 흉노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아선우는 크게 기뻐하며 기습병을 내어 수항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하고 주변을 맘껏 노략질 하다가 돌아갔다.

 

그 다음해 아선우가 수항성을 공격하러 출전했다가 도중에 병들어 죽었다.

아선우는 즉위한지 3년만에 죽은것이었다.

아선우의 아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선우가 될수 없었다.

스래서 아선우의 숙부,

즉 오유선우의 아우인 우현왕 구리호가 선우가 되었다.

 

구리호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에서는 광록대부 서지위를 시켜

오원군의 요새밖 수백리 지점에 천여리에 걸쳐 성채와 망루를 쌓았다.

그리고는 유격장군 한열과 장평후 위강을 주둔시키고

강노도위 노박덕을 시켜 거연택에 요새를 구축했다.

 

구리호 선우가 즉위한지 1년만에 죽었다.

구리호의 아우 좌대도위 저저후가 선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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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는 후세인의 가필이라 한다.

 

저저후 선우가 즉위하자 한나라 사신가운데 흉노에 항복하지 않은 자들을 모두 석방하여 돌려보내 주었다.

그래서 노충국 등도 귀국할수 있었다.

 

선우가 즉위한 초기에는 한나라의 침공이 두려워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린아이다.

어찌 내가 감히 한나라의 천자와 대등하기를 바라겠는가?

한나라의 천자는 나의 아버지 같은 어른이다."

 

한나라는 중랑장 소무를 파견해 후한 선물을 보냈다.

그러나 저저후 선우는 처음과 달리 점점 오만해 졌으므로 한나라의 기대는 어긋났다.

이듬해 조파노가 도망쳐 한나라로 돌아왔다.

 

이듬해 한나라 이사장군 이광리가 3만기를 이끌고 주천군에서 진출하여 천산에서 우현왕을 공격해

흉노의 수급과 포로 1만을 얻었으나

돌아오는 길에 흉노에게 포위되어 전사자가 2만에 가까웠다.

한나라는 인우장군 공손오가 서하군에서 출격해 강노도위 노박덕과 탁야산에서 합류했으나

전과는 없었다.

 

또 기도위 이릉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거연 북쪽 1천리까지 진격하게 했는데

흉노병 1난명을 살상하고도 병력과 식량이 다해

이릉은 흉노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의 병사는 겨우 400명만 살아 돌아왔다.

흉노선우는 이릉을 존중하여 그의 딸을 이릉에게 시집 보냈다.

 

다시 2년이 지나 이광리가 6만의 기병과 보병10만을 이끌고

삭방군에서 출격하여 노박덕의 1만기와 합류했다.

 

또 유격장군 한열른 3만을 거느리고 오원에서 출격 하였고 인우장군 공손오는 4만으로 안문에서 출격했다.

 

이 정보를 들은 흉노는 처자와 재산을 모두 여오수의 북쪽으로 대피 시킨후

선우가 직접 10만기를 이끌고 여오수 남쪽에서 이광리와 접전했다.

 

이광리는 선우와 10여일을 싸워 지친데다가

자신의 가족들이 무고의 난 에 연루되어 몰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흉노에 투항했다.

 

한으로 귀환한 사람은 1000명에 겨우 한두명 뿐이었다.

 

유격대장 한열도 전과가 없었고

인우대장 공손오도 좌현왕과 싸웠으나 불리하여 철수하고 말았다.

 

이 해에는 한나라 군사로 출정해 흉노와 싸운 군공을 논할 여지조차 없었다.

 

조칙을 내려 태의령 수단을 체포했다.

그가 이사장군 이광리의 가족이 몰살되었다고 지껄여

이광리로 하여금 흉노로 투항하게 했기 떄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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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말미에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공자가 쓴 <춘추>에는 은공과 환공사이의 일은 명료하게 서술 되었으나

자신과 동시대인 정공과 애공 사이의 일은 자세히 서술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당세에 너무나 가까운일을 기록하는 일이라

비판을 꺼린 때문인듯 하다.

 

속인들의 흉노에 관한 의견은 모두 일시적인 권세를 얻기위해

제 의견이 채택 되도록 아첨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피아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결함을 항상 가지고 있다.

장수들은 중국이 광대하다는것만 믿고 기거만장 하며

천자는 그들의 말만 믿고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요임금은 현명한 군주였지만 혼자서 성공한것이 아니며

오로지 우 임금을 얻고서야 비로소 중국 구주를 안정시킬수 있었다.

 

성왕들의 위업을 계승하려면 오직 훌륭한 인물을 골라 가려쓰는것에 달렸을 뿐이다.

오직 훌륭한 인물을 가려쓰는데에 달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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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흉노열전의 이야기를 모두 알아 보았다.

주나라 문왕.무왕이 나라를 창건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북쪽 이민족의 역사를 한눈에 보려하니

그 자료도 부족하고

또한 그들 스스로의 문자가 없으며 역사를 기록한 사실이 없기때문에

역사의 조종인 사마천조차도 그들의 계보를 자세히 알수는 없었다.

북방의 이민족인 흉노는 때로는 모이고 때로는 흩어지며 자신의 세력을 이어 나갔고

한나라 이후에는 한나라와 대등하거나 때로는 오히려 한나라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중국의 한민족과 대립하고 공생해 나갔다.

중국사람들이야 흉노족을 그저 미개한 북방의 오랑캐라 칭할지 몰라도

흉노족 스스로는 당당히 자신들의 계보를 이어나가며 세계 각지에 자신들의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유럽의 헝가리 라는 나라의 이름 자체가 흉노족의 나라임을 스스로 증명하는것이고

중앙아시아는 물론이며 서쪽으로는 로마제국까지 세력을 폈고

동방의 예맥과 우리 조선땅까지 큰 영향을 미친것은 틀림이 없다.

 

단재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보면 우리 나라의 고대 제도에도 흉노와 똑같은 좌현왕 우현왕이 있고

좌곡려 우곡려의 제도가 있었으며

대림 이라는 숲에서 천신에게 제사지내던 풍습 마저도 매우 흡사하다는것을 알수 있다.

 

이는 우리 조선민족 역시 남쪽 한반도로 이동하여 고구려를 이루기 이전까지

목축을 위주로한 유목 생활을 했기 떄문에 드넓은 중앙아시아 대륙으로부터 이어진

거대한 역사의 한 축이었음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문자가 없어 역사를 기록하지 못했고

토지가 척박하여 농사를 지을수 없었기 때문에 목축에 의지하여 이리저리 이동하여 살았음으로

물려 내려진 유산이 없어서 기록의 역사와는 단절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북방의 유목민족은 끊임없이 생명을 유지하며 이어져 내려왔기때문에

그 민족의 위대함 역시 가벼히 볼것만은 아닐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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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의 이민족이 흉노 하나로 대표될수는 없지만

그중 역사상에 가장 강성했던 민족으로 단연 꼽을수 있는것이 바로 흉노족이다.

한나라 이후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후한 시대이후 그들 스스로 분열하여 세력을 펴지 못했고

5호16국 시대에 이르러 몇몇 부족이 세력을 키워

전조.후조.북량.하 나라등을 세운바 있다.

 

그후 수나라.당나라 시대에도 역시 크게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13세기 경 송나라 시대부터 부족간의 경쟁과 협력으로 힘을 키워나갔다.

 

몽골족이 흉노의 직접적 후손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한 원나라의 징기즈칸 과 그 후손들 역시 시대만 다를뿐

같은지역 에서 같은 유목생활을 하던 북방민족임은 두말 할 나위도 없으려니와

동북 아시아의 여진족과 거란족.또 돌궐족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혈통차이는 있을수 있어도

말타고 활쏘며 드넓은 초원을 달리던 북방민족의 기개를 가진 사람들임에는 틀림 없다.

 

중화민족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에 제국을 건설했던 원나라나 청나라의 선조들도

모두 수천년전 흉노족의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을것이라는 생각에는 의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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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긴 이야기와 우리 민족의 오랜 옛날 이야기를 깊이 상상해보며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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