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5.18기념재단 (www.518.org)
광주사태, 5·18, 오월항쟁, 5·18민주화운동/민중항쟁, 모두 같은 말인가요? 정확한 용어는 무엇인가요?
우리나라에서는 사건이 발생한 날짜를 이름으로 붙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일어났기 때문에 3·1운동이라 부르고, 4·19혁명은 1960년 4월 19일에 발생한 사건이라 4·19혁명이라 부릅니다. 5·18은 1980년 5월 18일에 발생했기 때문에 5·18, 혹은 5·18○○○○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항쟁이라고 하면 “맞서 싸운다”는 의미가 있고, 운동은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힘쓰는 일. 또는 그런 활동”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진상규명과정에서 5·18 단체와 광주시민들은 5·18을 광주항쟁, 혹은 5·18민중항쟁이라 불렀습니다. 1997년 4월 17일, 5·18 주범들에 대한 반란 및 내란죄가 확정된 뒤, 같은 달 정부에서 5월 18일을 ‘5·18민주화운동기념일’로 제정 발표하고 그해 5월 18일 정부 주관 아래 첫 기념일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5·18 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이 일단락되고 5·18민주화운동이 특정 지역의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전국민적 차원의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역사적 평가가 내려진 것입니다. 법적으로도 5·18은 헌법이 보장한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문란 시킨 신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으로 공인되었습니다. 국가기념일 제정 이후 5·18의 공식 명칭은 5·18민주화운동이 되었지만, 여전히 광주 시민들은 5·18민중항쟁이라는 명칭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광주사태’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사건을 은폐하고, 왜곡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므로, 이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5·18민중항쟁의 발생원인은 무엇인가요?
국민들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이후, 참다운 민주주의를 실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전두환을 대표로 한 신군부 세력이 다시 유신독재체제를 연장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국민들은 이에 항의하며 민주화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신군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다른 지역에서의 시위는 잦아들었지만, 광주지역에서는 시위가 계속되었습니다. 신군부는 광주를 외부와 완전히 고립시킨 후 폭도들을 진압한다는 미명 하에 광주시민들을 학살했습니다.
광주에서만 일어난 사건이었나요?
아니오. 광주에서만 일어난 사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시 광주 지역은 정치는 물론이고 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소외된 지역 중의 하나였습니다. 1963년 대통령선거에서 다른 지역보다 박정희에 대한 지지가 높았지만, 박정희정권 하에서 광주는 산업화는 물론 정치권력의 소외지역이었습니다. 따라서 광주지역에서는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맞서 민주화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민청학련, 긴급조치 철폐투쟁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광주 사람들은 유신체제의 종말과 함께 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더욱 뜨거웠습니다.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세력은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다음,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김대중 등)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신군부는 전국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전쟁 상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광주는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었으며, 신군부 내에 광주지역을 대변할 만한 사람이 없어 희생양으로 삼기 쉬웠습니다. 이에 신군부는 광주를 희생양 삼아 자신들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했지만,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광주에서는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신군부의 권력찬탈 시도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었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신군부는 광주를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 폭도들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을 학살하는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때, 타지에서 이 소식을 접한 민주화운동세력들이 몰래 광주로 들어와서 항쟁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오지 못한 사람들은 각 지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가까운 전남·북 지역에서는 많은 피해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와 집회를 해산하기 위해서 경찰이 아닌 계엄군이 투입된 까닭은 무엇인가요?
1979년 10월 부마항쟁에서 계엄군이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주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역할은 경찰이 담당했습니다. 경찰에서 계엄군으로 진압 주체가 바뀌면서 폭력의 수준이 한층 과격해졌습니다. 정규 훈련을 받은 군인 앞에서 평범한 학생과 시민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좌절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신군부와 계엄군의 지도부는 초기 진압과정에서 강경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시위대의 해산 효과를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특히 전쟁 발생 시, 적진의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군인부대인 공수부대가 진압군으로 투입되어 더욱 폭력적이고 과격한 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진짜로 경상도 출신 군인들이 광주에 투입되어서 일어난 사건이었나요?
사실이 아닙니다. 당시 파견된 계엄군 중에는 경상도 출신 외에도 서울, 경기는 물론이고 광주 지역 군인들도 일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군부가 언론을 통제하고, 광주를 고립시킨 까닭에 많은 소식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을 다 죽인다' 는 소문과 유언비어가 있었을 뿐입니다.
실제로 피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공수부대 가운데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 술 냄새를 풍기는 사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사람 등이 시위대에게 강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특정 지역의 군인들만이 참여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물론이고, 임산부까지 총칼에 쓰러졌다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5월 24일, 진월ㆍ송암동에서는 시위를 진압하러 온 군부대 간에 오인 사격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11공수여단은 달리는 차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나 집을 향해 M16을 마구 쏘아 길가에 있는 집들이 모두 벌집투성이가 되었고 가축들도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마을 앞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중학교 1년(방광범)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마을 어귀에서 놀던 전재수(초등학교 1년)는 벗어진 신발을 주우려는 순간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5월 20일, 임신 8개월 된 최미애 씨는 전남대 근처에서 군인이 정조준한 총에 맞아 쓰러졌고, 병원에 옮겼으나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항쟁 기간에 광주시민들은 어떻게 살았나요? 다른 지역 사람들은요?
신군부는 언론보도는 물론이고 외부로 연결되는 모든 수단, 전화, 기차, 시외버스 등을 차단하고 광주를 고립시켰습니다. 항쟁 기간 광주는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고 광주 시민 스스로 규칙을 정해 질서를 지키며 스스로 통치를 했습니다. 그때 절도나 공공기관에 대한 침탈행위가 없었으며 부녀자들은 조를 짜서 음식을 해서 나누어 먹고 병원에서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에 시민들이 피 모으기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시장에서는 무료로 음식과 생필품을 나누는 등 시민공동체, 절대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이는 우리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소중한 경험입니다. 한편, 일부 소식을 전해 듣고 광주 인근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은 광주로 들어와 투쟁에 합류하거나 관공서, 탄광 등에서 무기를 획득해 시위를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들은 언론의 왜곡 보도로 인해 광주의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항쟁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나요? 참여자 중에 간첩이나 불순분자가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처음에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쟁이 시작되었지만, 항쟁의 진행과정에서 시민,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모든 광주시민들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특히 항쟁에 참여한 학생 중에는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 중학생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들은 헌혈운동을 많이 했으며, 일부 학생들은 시민군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얼굴을 가린 사람들, 신분이 정확치 않은 피해자를 두고 간첩이나 불순분자로 왜곡하는데요, 당시 무기를 소지했던 시위대(시민군)의 일부는 후한이 두려워 복면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항쟁 참여자 가운데는 구두닦이, 넝마주이, 부랑아 등 연고를 알 수 없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야말로 전 시민, 민중이 참여한 항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항쟁 중에 시민군들이 교도소를 습격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왜 그랬나요?
사실이 아닙니다.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기록(전교사 전투상보)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를 근거로 비슷한 유언비어가 있을 뿐, 그때 시민군들은 광주의 고립과 봉쇄를 뚫고 담양과 장성에 광주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교도소 앞의 차단을 뚫어야 했고,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기 위해서 교도소 앞으로 출동했을 뿐입니다.
오히려 3공수부대가 교도소 인근 주택가는 물론 지나가는 시민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도소 부근에서는 10구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담양 집으로 경운기를 타고 귀가하던 주민 4명 중 2명은 계엄군의 총에 숨졌고 2명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진도로 가려던 용달차에 타고 있던 일가족 중 1명은 계엄군의 무차별 사격에 숨지고 2명이 부상당하였으며, 교도소 부근 보리밭을 지나 귀가하던 학생 또한 계엄군의 총격에 사망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근거로 우리는 시민군들이 수감자를 석방시키기 위해 교도소를 습격하였다는 주장은 당시 무고한 시민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한 계엄군이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 퍼트린 사실 왜곡과 유언비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이 왜 총을 들었나요? 누가 시민군인가요?
5월 21일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에 많은 시민들이 희생되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의 필요성을 느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민의 군대가 국민을 학살하는 순간 더 이상 그들은 국민의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이후 일부 청년들이 광주와 가까운 화순, 담양, 나주, 남평 지역의 파출소와 무기고를 찾아 무기를 탈취하면서 동시에 시위의 확산을 전개합니다. 경찰의 피신과 지역 주민의 협조로 시민군은 순조롭게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 무기들이 시민들에게 지급되면서 이른바 '시민군'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들어서 군인들도 어쩔 수 없이 총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맞는 건가요?
사실이 아닙니다. 시민군이 등장한 21일 이전에 이미 계엄군에 의한 총상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시민을 향해 발포해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처음 이 발포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은 계엄군의 과잉진압에 극도로 격분하게 되었고 투쟁이 한층 더 거세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월 20일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군은 일제히 총을 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시민을 향한 최초의 집단발포였습니다. 이후 21일 금남로 집단발포로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기자 시민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실재로 당시에 죽거나 다친 사람은 소수의 몇 명뿐이라는데, 시민들의 피해규모가 어떤가요?
그 동안 정부가 인정/집계발표(2001. 12. 18)한 항쟁 당시 사망자 수는 민간인 168명을 포함하여 총 195명이었고, 부상자는 모두 4,782명이었습니다.
한편 지금까지 5·18의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보상금 지급 결정자는 총 5,189명으로 사망자 155명, 행방불명자 77명, 상이 및 연행구금 등 기타 4,957명이었습니다. (2009년 5월 현재, 6차 보상 재심 추진 중, 광주시민주정신선양과 참조)
하지만 아직도 발견되지 않고 확인이 안 된 행방불명자, 암매장된 사람들, 시체가 소각된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5·18민중항쟁 희생자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당시에는 사망자와 부상자의 정확한 통계를 내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조사기간과 주체에 따라 피해 규모에 많은 차이가 있었습니다. 또한 5·18과 무관하게 사망한 사람들을 제외하는 과정에서 자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군인들도 많이 다쳤다는데, 사실인가요? 군 부대간 오인 사격도 있었다던데요.
국방부 보고서에 의하면 항쟁 당시 23명의 군인 사망자가 발생하였는데, 주요 사망원인은 군부대 사이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총상 사망자입니다. 특히 1980년 5월 24일 오후 2시 광주와 목포 간 도로변에 있는 진월·송암동에서 벌어진 군부대간 오인사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주남마을 주둔지를 보병 제20사단에게 인계하고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던 11공수여단을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송암동 효천역 근처에 매복해 있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군인 9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당시 도청에는 200~500여 명이 남아 있었는데, 진압이 시작되면서 여성을 비롯한 일부가 빠져나가고 항쟁지도부와 40~50명의 청년?학생들이 민원실 건물에 배치되어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였으며, 나머지 인원은 본관 건물에 배치돼 있었습니다.
결국 27일 새벽,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과정에서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목숨을 잃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헌병대로 끌려갔습니다.
끝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죽음이 예견되는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던 시민군의 의지와 정신은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는 어떻게 되었나요?
1980년 5월 27일 시민군을 진압한 전두환은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을 사임시키고,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이 됩니다. 그러나 철저히 통제되고 왜곡되어 숨겨진 광주의 진실은 죽음을 무릅쓴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조금씩 드러나게 됩니다. 5월의 진실,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결국 1987년 6월항쟁의 성과로 직선제 개헌, 총선에서 국회의 여소야대 정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1988년 광주청문회를 통해 전두환의 만행이 드러났지만, 당시 전두환과 함께 신군부를 이끌었던 노태우가 대통령이었기에 여전히 신군부의 세력은 막강하여 전두환 대통령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5·18문제를 역사에 맡겨두자'는 담화를 계기로 5월의 진실을 알고자 했던 시민들의 좌절은 전국민적 5·18학살책임자에 대한 고소고발 운동을 일으켰고,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신군부 세력은 법정에 서게 됩니다. 마침내 1997년 전두환은 1심에선 사형, 2심에선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가 출범을 앞두고 '과거와의 화해와 타협'을 위해 사면을 단행함에 따라 약 2년 만에 모든 형이 사면되어 석방되었습니다.
경상남도 합천에 가면 일해공원이 있습니다. 2004년 8월 준공되어 완공, 잠정 명칭으로 새천년 생명의 숲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한 뒤 2007년 1월 29일부터 일해공원이라는 명칭을 확정,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공원의 명칭이 전두환의 아호, 일해를 의미합니다. 전두환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1980년 5·18 당시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이후에도 한국민주화운동 세력을 탄압했던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만든 공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가족들이 유공자로 인정되면서 많은 혜택을 받는다는데 사실인가요?
1980년 5월 27일 도청이 진압된 이후, 5·18과 관련해서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고, 고문과 구타 등 폭력에 시달렸으며, 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항쟁 과정에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픔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1988년 광주청문회에 의해 진실이 조금씩 드러나기 전까지는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피해자, 그 가족들은 그 슬픔과 분노조차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의 감시와 처벌이 이어졌기 때문이지요. 다행히도 1997년 5월 18일이 민주화운동 기념일로 제정이 되고, 2002년 제정된 5·18민주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따라 유공자의 혜택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공자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상황과 참여를 증빙해야 하는 절차 등을 거쳐야 하므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유공자가 되지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유공자가 되어도 가족을 잃은 슬픔을 대신할 순 없겠죠?
반면에 5·18 당시 시민군 등의 진압 공로로 서훈을 받은 인사는 모두 91명입니다(대통령, 국무총리 표창자 10명 포함). 이들 가운데 현재 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돼 대우를 받고 있는 인사는 박준병 당시 20사단장을 비롯해 13명의 군인들이 있습니다. 정부는 유공자 중 상당수가 위관급 이하 군인으로 상명하복의 군 조직 특성상 이들에게서 훈장을 뺏는 것은 군 위계를 흔들 수 있다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서훈치탈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다른 맥락이지만, 최근에는 5·18 당시 진압작전에 투입됐다 정신질환을 앓게 된 진압군을 국가유공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당시 공수부대 전령병이었던 김○○은 진압군으로 투입됐다가 1981년 전역했고, 4개월 만인 1982년 3월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김○○은 진압군 투입 당시 '학살을 멈추라'고 요구하다 동료·상관 등과 주먹다짐도 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항쟁을 진압한 군인과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동시에 유공자가 되어있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1980년 5월, 항쟁 당시에 간첩사건이 많았다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왜 그런가요?
항쟁 기간에 일어난 간첩사건은 모두 2건이며 관련자로 처벌 받은 사람은 4명입니다. 그 중 1건이 5월 24일 서울역에서 붙잡힌 간첩 이창용(본명 홍종수) 사건인데, 당시 언론에서는 시민의 신고로 이창용이라는 간첩이 붙잡혔다고 보도되었지요. 그런데 이후 이창용은 5?18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특히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이창용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을 조사한 결과, 5월 16일 전남 보성을 통해 이창용이 침투했으나, 5·18관련 임무를 갖고 있지 않았고 광주로 잠입하려던 시도가 없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신군부가 마치 광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꾸며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던 것입니다.
나머지 1건은 당시 시민군 방송을 담당했던 전옥주와 차명숙이 어떤 시위대의 신고로 인해 경찰에 조사받은 사건인데요, 이것 또한 간첩 사건이 아님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므로 당시에 간첩이 침투해서 항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는 신군부의 여론조작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5·18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해마다 5월이면 세계의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광주를 찾아 5·18영령이 잠들어 있는 국립5·18민주묘지에 들러 그 뜻을 기립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지만, 광주는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등대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항쟁 당시, 수준 높은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정신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을 뿐 아니라 압제에 저항하는 세계 진보적인 사람들의 가슴에 가장 경이로운 민중항쟁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제3세계의 진정한 민주화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18민중항쟁은 저항과 단죄를 넘어 나눔과 자치, 연대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우리 모두가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물론, 인류 역사의 숭고한 가치로 승화시켜 나가야 할 세계의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다른 지역 사람들은 5·18에 대해서 왜 잘 모르나요?
1980년 5월 당시 언론은 신군부의 권력찬탈 음모에 맞서 싸운 광주시민의 정의로운 행동을 폭동이라 낙인찍었고, 광주시민을 폭도라 불렀습니다. 광주로 향한 모든 전화와 교통수단이 마비되었고,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도 사용할 수 없었기에 다른 지역사람들은 언론의 보도를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고문하는 등 폭력을 행사하였기에 심지어는 유가족조차 사실을 이야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많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5·18 단체와 광주 시민들이 진상규명운동을 전개했고, 이를 통해 1980년 5월 광주의 진실이 마침내 국민과 세계 각국에 알려지면서 광주시민은 폭도의 누명을 벗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신군부와 그 정치 세력들이 지속적으로 지역감정을 이용하여 5·18을 광주만의 일로 축소하고 왜곡시키는 일을 해오고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보다 오히려 국내에서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 사람들이 5?18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다른 지역,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나요?
안타깝게도 경제 개발 등을 이유로 전 세계에는 많은 군부, 독재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1980년 대한민국의 광주에서 일어난 항쟁은 군부독재, 개발독재 하에 있던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1986년 필리핀의 피플파워, 1988년 미얀마의 8888민주항쟁, 1991년 타이의 5월 시민혁명, 1998년 인도네시아의 5월항쟁 등을 찾아보세요.
그런데, 아시아에서만 이런 일들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축구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추악한 전쟁’(guerra sucia)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1976년 3월 24일 쿠데타로 집권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좌익 게릴라 소탕이라는 명분 아래 1983년까지 8년 동안 무제한의 국가 폭력을 동원하여 무고한 시민들을 체포·납치·구금·고문·사살·처형하였습니다. 한 인권단체의 비공식집계에 따르면, 이 기간에 희생된 사람은 강제 실종 3만 명, 강제 입양 500명, 정치범 1만 명이며, 정치적 망명자 또한 30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희생자들 또한 노조지도자, 노동자, 정당지도자, 정당인, 임산부, 학생, 성직자, 교사, 작가, 언론인, 지식인, 어린아이, 외국인 등 각계각층에서 속출하였습니다. ‘추악한 전쟁’이 전개되는 동안 아르헨티나의 무장 게릴라 단체는 산발적인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이내 괴멸되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그 누구도 ‘추악한 전쟁’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는 공포의 상황이 지속되었고,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강제 실종되었습니다.
1977년 4월 13일 오후, 어머니 14명이 ‘5월 광장’ 동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강제 실종된 자식의 행방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도무지 종적조차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궁(Casa Rosada)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5월 광장’에 모인 것입니다. 오후 3시 15분이 되자 어머니들은 가방에서 흰 수건을 꺼내 머리에 두르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거창한 구호도, 요란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원을 그리며 걷고 또 걸었습니다. 이후 어머니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3시에 광장에 나타나 3시 30분부터 4시까지 침묵시위를 벌였습니다. 몇 달에 걸친 집요한 요청 끝에 5월 광장 어머니들은 내무장관과 면담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5월 광장 어머니들의 시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5·18의 진실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요?
5·18민중항쟁은 민주화를 저해했던 군사독재, 억압과 폭력의 사회적 분위기를 국민들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 역사적 사례가 되었습니다. 특히 저항권의 정당성과 '무장투쟁'의 합법성까지 처음으로 공인받았다는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력, 상부상조, 정서적 유대 그리고 평화가 꽃피웠던 1980년 5월 22일에서 27일까지의 해방 광주의 자치경험은 국가권력으로부터 해방된 시민사회의 자율과 자치의 가능성을 암시해준 매우 희귀한 사례로써 시민사회 자율성의 최대한의 신장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민주화의 이념과 미래상을 탐색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 경험이자 자산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5·18의 진실이 알려지기 까지는 험난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5?18의 진실을 알게 되는 과정은 기억투쟁과 함께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보수 웹사이트를 중심으로 5·18을 왜곡하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5·18의 역사적 정당성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5·18을 비하하고 왜곡하는 유언비어를 유포함으로써 보수 세력을 결집하고, 신군부와 학살자들의 범죄 사실에 대한 면죄부를 부여하고, 또한 5·18을 광주 지역의 문제로 만들어 정치적 분열을 꾀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왜곡인사인 지만원 씨는 2002년 5·18 명예훼손으로 형을 구형받은 바 있으며 이후에도 지속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2009년 검찰이 기소하여 현재 재판이 진행 중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신군부의 폭압에도 불의에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인권, 평화 등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위해 저항했던 정신, 그리고 남녀노소를 넘어 넝마주의, 학생, 농민, 노동자, 지식인, 예술가 등을 가리지 않고 한마음 한뜻으로 위기상황에 대처했던 공동체 정신, 1980년 5월 27일, 죽음을 각오하고 도청을 지켰던 희생 정신 그리고 이 뜻을 이어가고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 사람들의 정의감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나은 민주주의를 꽃피우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