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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시민들은 무기를 들지 않았을까?
게시물ID : history_91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임시보관함
추천 : 6
조회수 : 613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05/15 08:36:04

4.19혁명 사건과 사고 일지

http://www.419revolution.org/ezboard.asp?BID=board04&mode=view&idx=669&skey=contents&stext=%C5%BB%C3%EB&page=1&category=&fm=ADMIN&sysop=


- 일시 : 1960-04-19


- 사건명 : 대학생과 군중 데모


- 광역지역 : 서울


- 내용


"학교 근처 조동일(趙東一) 하숙방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운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3년 데모주동 학생들, 9시 20분 1천여명의 학생들과 가두 데모 결행. 중앙대생 김봉년(金奉年), 녹음기를 들고 무기고 근방에서 총소리를 녹음하다가 경찰의 총탄에 맞아 녹음기를 안은 채 현장에서 즉사. 숭실대생 김창섭(金彰燮), 소방차를 타고 시위하다가 남대문 부근 2층 건물에서 숨어 쏘는 경찰의 총탄에 맞아 절명. 하오 3시 40분경 데모대가 태평로파출소 쪽을 향해 접근하자 대기중이던 경찰관 2명은 카빈총으로 응수, 어린 학생들을 마구 쓰러뜨렸다. 그러나 선두의 데모대는 탄막을 뚫고 돌진, 파출소 안에 휘발유통을 내던져 불을 질렀다. 불꽃 속에 갇힌 순경들은 총을 난사하면서 도망치다가 실탄이 떨어져 데모군중에 붙잡혀 비참하게 짓밟혀 죽었다. 한편 12시경부터 서대문 이기붕 집에 돌발적으로 몰려든 데모대도 4시 30분경 경비경찰의 발사로 수 명의 희생자를 내고 물러섰다. 하오 6시경 내무부 정문 앞에서 연좌 데모를 하던 중앙대생 데모대 등 2천여 시위 군중들을 향해 경찰이 무차별 총격. 하오 6시 30분 2백여 명의 학생들은 구둣발에 채이면서 중부서로 연행. 하오 3시경 소공동 특무부대 앞에서 경기고생 이종량(李鍾亮) 사살. 밤 8시경부터 시위대,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들을 모조리 불태우면서 약 30정의 카빈총마저 탈취, 창동쪽으로 몰려감. 이 때 과속으로 달리던 데모대의 차량들이 신설동 로타리에서 구경나왔던 국민학교 어린이 두 명을 침. 한성여중 2년생 진영숙(陳英淑), 데모대와 트럭을 타고 미아리 고개를 넘다가 북악파출소에서 날아온 총탄에 사망. 밤 8시 40분 탱크부대를 앞세운 육군 제15사단 병력이 조재미 사단장의 인솔 아래 서울 중랑교 부근에 집결, 밤 10시경부터 시내 요소에 배치."



결론 : 민주항쟁이 비폭력이여야한다는 단서 붙인다면 인류역사에 시민혁명사, 민주항쟁사, 독립운동사는 통채로 날아가 버린다.




The death of democracy is not likely to be an assassination from ambush. It will be a slow extinction from apathy, indifference, and undernourishment. 

-Robert Maynard Hutchins


민주주의는 매복 암살 따위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냉담과 무관심에 의한 영양 결핍으로 서서히 소멸되는 것이다. 

-로버트 허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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