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귀국 직후 그는 ‘선(先) 정부수립 후(後) 친일파 숙청’을 주장했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국론분열이나 민심혼란을 이유로 다시 반대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반민법 제정과정에서부터 비협조적이었으며,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이후에는 탄압과 방해책동으로 일관했다.
반민법이 공포된 1948년 9월 23일 서울운동장에서는 내무부 주관 하에 ‘반공 국민대회’가 열렸는데 형식상은 반공대회였으나 실지로는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였다. 이날 대회에서 윤치영(尹致暎) 내무장관 이승만 대통령의 축사를 낭독한 후 “해방 이후 처음 보는 애국적 대회”라고 극구 칭찬했다. 반면 국회는 이날 반공대회가 국회를 적구(赤狗)으로 모독하고 반민법을 반대하기 위한 대회라고 규정하며 이승만 정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이승만 정부는 반민법 반대 국민여론을 조장하는 한편 반민법의 김을 빼기위해 개정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한 1949년 1월초부터 특위가 와해된 8월말까지 총 80여 회의 국무회의를 열었는데 이 중 11회에 걸쳐 반민법 개정을 논의한 바 있다. 또 이승만 정부의 특위 방해공작은 비열할 정도였다. 특위가 엄연히 법적 기구임에도 조사활동비 등 필요한 예산을 제대로 배정하지 않았으며, 필요한 자료요청도 “침수” “분명치 않음” 등을 이유로 거부하기 일쑤였다.
한편 친일세력들은 특위 요인 암살을 통해 특위를 무력화를 기도했었다. 반민법 공포 직후인 1948년 10월경 노덕술, 최난수 등 친일경찰들은 특별검찰관 노일환·김웅진, 특별재판관 김장렬 등을 납치한 후 강제로 ‘나는 38선 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을 하는 것보다 이북에 가서 살기를 원한다’는 취지의 성명서를 자필로 써 신문사 등에 보내고는 38선으로 가는 도중에 이들을 살해해 애국청년들이 살해한 것으로 가장하려 했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이들이 고용하려 했던 테러리스트 백민태(白民泰)가 암살대상자 명단을 본 후 두려움을 느껴 조헌영 의원 등에게 이 계획을 고백하면서 백일하에 드러났다. 암살대상자 명단에는 이들 외에도 대법원장(김병로), 검찰총장(권승렬), 국회의장(신익희) 등 거물인사 다수가 포함돼 있어 이 음모에는 노덕술 이상의 상충부에서 개입됐을 것이라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러나 주모자인 노덕술 등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5월 들어 사태는 더욱 악화되기 시작했다. 소장파 이문원 의원 등 3명이 남로당과의 연루혐의로 체포된데 이어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사건’이 터졌다. 앞서 6월 4일 특위는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 종로경찰서 사찰주임 조응선 등 친일경찰들을 반민법 제7조 해당자로 체포하였다.
'반민특위 습격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던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앞줄 왼쪽 첫번째)과 최란수(앞줄 왼쪽 세번째). 헌병대 시절의 사진임.
출처 : <정운현 '역사에세이' 칼럼 중..> http://blog.ohmynews.com/jeongwh59/2930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