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고대사 연구가 편향되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역시 일본서기 雄略 천황 실존 여부에 대한 이슈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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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王은 479,496,502 년 3회에 걸쳐서 南朝에 조공했으나, " 일본서기"에
따르면 雄略 천황의 재위연대는 456-479년이므로 연대적으로 대부분
일치한다. 또한 武라고 하는 외자로 이름을 나타낸 것은 雄略 천황의 이름인
오오하츠세와타카게 ( 大泊瀨幼武 ) 의 어간에 해당하는 타케(武)를 따서
武王이라 쓴 모양이다
- 이노우에 미츠사다 " 일본의 역사 신화에서 역사로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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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와타리 신이찌로가 쓴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천황에서 인용한 일본의
대표적 고대 사학자 이노우에 미츠사다 글입니다. 책에서는 왜 5왕을 일본서기에
비정하려고 했던 여러 학설들을 소개하면서 이시와타리 신이찌로의 결론은..
" 도대체 이런거 왜 하는데 ?" 였습니다만.. 실제로 보면 일본서기와 중국 정사의
倭 5왕은 연대가 다 어긋날 뿐 아니라 그 혈연 관계도 틀린 부분이 많습니다.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천황 서문은 일본 고대사 연구가 제국주의 시대의 황국사관에서
벗어나서 실증사학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제국 주의 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일갈합니다만.. ( 사실 이런 일본인이 더 무서운 일본인이죠 )
일본서기가 479년에 죽었다고 기록했는데 중국 양서에는 502년에 정동 장군을
제수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 즉 살아있었다는 이야기인데 ) 연대적으로
대략적으로 일치하니 그냥 넘어가자는 것은 역시 무책임한 이야기인듯 합니다.
아무리봐도 어느 한 쪽이 잘못된 기록이라고 보고 어느쪽이 맞는지 검토를 해야 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이에 대한 반론들은 이런 것들이 있어왔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양서의 왜왕 무 정동장군을 수여 기록은 倭가 조공을 하지 않았는데
梁에서 일방적으로 군호를 수여한 것이다. 梁은 왜왕 武 일본서기의 웅략이 23년에 전에
죽은 것을 몰랐다. 이런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한 배경에는 양서 본기 쪽에 왜왕 武가 梁에 조공한 기록이 없는 것을 근거로
하시는 듯 합니다만
江左歷 晉、宋、齊、梁,朝聘不絕。- 北史 열전 82 倭 -
양자강 이남에 진 송 제 양이 들어섰고 (왜의 ) 조공은 끊어지지 않았다.
라고 하는 기록이 있어 본기에 기록이 없을 뿐 倭는 梁나라 시기에도 조공을 했다고
봐야 합니다
때문에 만일에 왜왕 武가 웅략이고 실제로 479년에 죽었다면 梁이 이것을 몰랐을리는
없습니다.
이 이외에도 이 모순을 설명하려는 여러 가설들을 세우셨습니다만 여기에서 이런
화두를 던지고 싶습니다
혹시 우리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분석을 하는 것은 아닐까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만 두개의 기록이 상호 모순될 경우 어느 한 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를 보는 것이 맞겠지요
502년 중국 梁의 왜왕 武 정동장군 제수 기록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검토해 보았지만
479년 일본서기 웅략 사망 기록을 읽어 보아야 하는 것 아닐까요?
실제로 읽어보면 479년 일본서기 웅략 사망 기록이 허구라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사서인 수서를 그대로 도용했기 때문입니다.
웅략 이라고 하는 인물이 실존인물이고 실제로 479년에 죽은 기록이 있어서 일본서기를
만든 사람들이 그것을 서기에 적은 것이라면 그대로 적었겠죠.
수서를 복사했다는 것은 실제로 그런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가공의 사실을 적은 것입니다.
아래의 일본서기 웅략 천황 사망 기록과 수서 고조가 유언을 하는 부분을 보도록
합니다.
雄略 23년의 기록입니다.
八月庚午朔丙子。天皇疾彌甚。與百寮辭訣。並握手歔欷。崩于大殿。』
遺詔於大伴室屋大連。與東漢掬直曰。方今區宇一家。烟火萬里。
百姓艾安。四夷賓服。此又天意欲寧區夏。所以小心勵己日愼一日。
盖爲百姓故也。臣連伴造。毎日朝參。國司郡司随時朝集何不■竭心府。
誡勅慇懃。義乃君臣。情兼父子。庶藉臣連智力内外歡心。
八月庚午朔丙子 천황의 병이 몹시 위중하였다. 백료들과 작별의 말을
나누고 손을 잡고 한탄하였다. 대전에서 崩하였다. 大伴室屋大連과
東漢掬直에게 유언하여 말하기를 지금 천하는 一家요 烟火는 만리에
뻗어있다. 백성이 평안하고 사방 오랑캐가 다 복종하였다. 이는 천하가
국내를 안녕히 하려고 하신 까닭이다. 마음을 책하고 자기를 격려하여
나날이 하루하루를 삼가는 것은 백성을 위함이다. 臣,連,伴造는 매일
조정에 나오고 國司郡司가 때에 따라 참석한다. 어찌 마음을 다하여
타이르는 것을 은근히 하지 않으랴 義로는 군신이요 정으로는 부자를
겸하였다. 원컨대 臣連의 지혜에 의하여 내외의 인심을 기쁘게 하고자
한다.
다음은 隋書의 高祖記 4年의 기록 四年春正月丙辰,大赦。甲子,幸仁壽宮。乙醜,詔賞罰支度,事無鉅細,
並付皇太子。夏四月乙卯,上不豫。六月庚申,大赦天下。有星入月中,
數日而退。長人見於雁門。秋七月乙未,日青無光,八日乃復。己亥,
以大將軍段文振為雲州總管。甲辰,上以疾甚,臥於仁壽宮,與百僚辭訣,
並握手歔欷。丁未,崩於大寶殿,時年六十四。遺詔曰:
嗟乎!自昔晉室播遷,天下喪亂,四海不一,以至周、齊,戰爭相尋,年將三百。
故割疆土者非一所,稱帝王者非一人,書軌不同,生人塗炭。上天降鑒,
爰命於朕,用登大位,豈關人力!故得撥亂反正,偃武修文,天下大同,
聲教遠被,此又是天意欲寧區夏。所以昧旦臨朝,不敢逸豫,一日萬機,
留心親覽,晦明寒暑,不憚劬勞,匪曰朕躬,蓋為百姓故也。王公卿士,
每日闕庭,刺史以下,三時朝集,何嘗不罄竭心府,誡敕殷勤。義乃君臣,
情兼父子。庶藉百僚智力,萬國歡心,
뒤로 가면 복사한 부분이 더 나오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참 쉽습니다. 중국이 23년 동안 열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고 무리한
가설을 세운다거나 하는 것 보다 일본서기 웅략 사망 기록만 보면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는지 참 쉽게 알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일본 학자들은 이런 것을 몰라서 웅략을 왜왕 武에 비정하기 위하여 저런
비논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참고로 일본서기가 중국 사서 이곳 저곳을 도용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20세기
초에 쓰다 소기치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가 되었던 부분입니다. 쓰다 소기치는
후에 천황 모독죄로 재판에 회부된 이후에는 연구 방향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어쨋든 새롭게 알려진 사실들은 아닌 것입니다.
당연히 일본 학자들도 알고 있겠지요. 그런데도 무리하게 일본서기 기록을
중국 정사에 비정하려고 하는 것은 역시 같은 일본인 이시와타리 신이찌로의
말을 곱씹어 생각해 볼 수 밖에 없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