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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이나라는 국민을 무시하고 묵살하느라 바빴군요..(퍼옴주의)
게시물ID : sisa_5616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곤잉
추천 : 10
조회수 : 492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4/11/19 21:22:27
두산백과

계엄령

[ ]
요약
국가 비상시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헌법 일부의 효력을 일시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하여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긴급권의 하나로 대통령(최고 통치권자)의 고유 권한이다.
대한민국 건국 직후 제주도 사건, 여수·순천 사건, 6·25 전쟁 등 국가에 환란이 발생했을 때 선포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에는 정치적 혼란이 야기되어 수차례 비상계엄령을 발령한 역사가 있다.

4·19 혁명(1960. 4. 19)

제1공화국 이승만 정권 시대에 부정부패, 부정선거에 의한 장기집권 시도가 진행되자,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1960년 4월 19일 이른바 ‘4·19의거()'가 발생하였다. 서울의 치안이 통제 불능 상태에 이르자 이승만 대통령은 오후 3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출동시켜 학생 시위를 저지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을 인정하고 학생에게 발포하지 않고 결국 학생이 계엄군 탱크를 장악하였다. 그 결과 계엄령은 효력을 잃고,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고 말았다.

5·16 군사정변(1961. 5. 16)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이 들어섰으나 혼란과 무기력이 사회 전반을 휩싸고 있자, 박정희가 주도하는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다(1961. 5. 16). 당일 새벽 군부는 서울과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아침 09:00를 기하여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장면 정권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곧 과거의 정치활동을 중지시켰다. 당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 ‘맥그루더’ 장군은 윤보선 대통령에게 혁명군을 진압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내각책임제하의 윤보선 대통령은 장면내각이 이미 무기력해졌음을 감지하고 군사쿠데타를 인정하였다. 결국 군사정변은 성공하고 모든 국내 치안이 계엄군에 의해 유지되었다.

6·3사태(1964. 6. 3)

제3공화국 시절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위한 ‘한-일회담’이 진행중일 때 이에 학생과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계속하였다. 6월 3일 대규모 학생시위가 이루어지자,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4개 사단 병력이 투입되어 학생 시위을 진압하였다.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다.

10월 유신(1972. 10. 17)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획책하고, 개혁의 지속을 위해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드디어 1972년 10월 17일 19:00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유신정치’를 시작하였다. 4개항의 비상조치를 포함한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국회해산, 정당 및 정치활동 중지, 헌법 일부 중지, 비상국무회의 작동을 선포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1979. 10. 26)

10월유신(유신독재)의 무리한 추진이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켰고,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였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국가원수 부재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다. 국가원수는 국군통수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통령의 부재는 국가의 환란이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이상적인 헌법질서로는 치안을 유지할 수 없다. 따라서 초헌법적 통치수단이라 할 수 있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어 질서를 유지하게 되었다. 계엄사령관은 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이었으며, 후에 12·12 사태로 신군부세력의 제1표적이 되어 체포되었다.

12·12 사태(신군부 쿠데타)(1979. 12. 12)

10·26사태 이후 최규하 대통령 체제로 불안한 정국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1979. 12. 12, 오후 6시),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여 하극상()의 도전으로 순식간에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였다. 신군부는 12월 13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규하 정부를 접수하여 새로운 군사독재 시대를 열었다.

5·18 민주화운동(1980. 5. 18)

유신독재체제에 이은 신군부 세력의 탄압정치는 국민의 불만을 고조시키고 전국적으로 산발적인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시민 집회가 대규모로 진행된 이후, 신군부는 더 이상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5월 17일 드디어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계엄군을 주둔시켰다.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 학생들이 등교가 저지되자 계엄령과 휴교령 해제를 외치며 시위를 하였다. 그러나 계엄군은 공수특전단과 탱크 등을 동원하여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우리 나라에서의 계엄령은 국가적 환란 때문에 발령되기보다는 내부 정치적 혼란으로 야기된 국민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발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계엄령의 잦은 발동은 명예롭지 못한 역사이며 민주주의에 상처를 주는 일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엄령 [戒嚴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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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계엄령을 검색해서 자세히 알아보니까 친절하게 설명해주더군요. 마지막에 두줄문장이 제일 빡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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