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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와 환생
게시물ID : mystery_915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선샤인러브
추천 : 1
조회수 : 5628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9/05/16 08: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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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마와 환생

 

카르마와 환생 문제는 다들 잘 아시는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이 탄생한다고 해서 영혼이 새로 창조되는 것도 아니고, 죽음이 모든 것의 끝도 아닙니다. 이 물질계에서 진화하는 주체인 영혼은 탄생과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완성을 향해 점진적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육체적인 환생 상태를 결정하는 건 그 영혼이 물질우주에서 얻은 여러 경험들과 카르마입니다. 우리가 이 우주로 내보낸 것은 그 어떠한 것일지라도 그 보낸 자에게 반드시 되돌아옵니다. 이것이 카르마의 법칙입니다. 이것이 되돌아오는 시점과 그 양상은 무척 많은 변수들이 있어서 정확히 예측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런 것을 결정하는 것은 각 사람의 그리스도 자아와 카르마의 주님들이란 대사들입니다.

 

환생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전생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걸 그 이유로 지적합니다. 그러나 전생의 기억이 상실되는 이유는 자비 때문입니다. 만일 전생의 모든 일이 생생히 기억된 채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 고통이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 중에 하나가 전생에 자기를 살해한 사람이고 그 사람만 보면 그 기억이 떠오른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런 일이 만나는 사람마다 일어난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거의 돌아버릴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자아는 전생의 기억을 차단시켜서 현생의 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 상황에서 전생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내면의 선생이신 '그리스도 자아'가 현재 닥친 일의 인과관계를 이해시키고 그로부터 교훈을 얻게 하기 위해 잠시 차단막을 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전생의 기억이 필요할 때면 자연스럽게 그 기억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외에는 사실상 알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알아봤자 도움도 안되니깐 '그리스도 자아'께서 그 기억을 열어주지 않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전생이 알고 싶으면 지금의 자기 모습을 볼 것이고, 미래의 자기 모습도 지금 자신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때가 되어 우리가 모든 전생의 기억을 기억하고도 아무런 동요도 받지 않을 정도로 성숙되었을 때가 되면 모든 기억이 되살아나겠지요.

 

카르마는 좋은 카르마와 나쁜 카르마가 있습니다. 좋은 카르마는 그 영혼을 성장시키고 나쁜 카르마는 그 영혼을 구속합니다. 모든 카르마는 존재를 구속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도라든가 스승이라든가 도반같은 데서도 인연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이 있고 스승이 있은들 인연이 없는 사람에겐 먼 나라 얘기 아닙니까? 좋은 가르침을 만나고 스승을 만나는 인연이란게 좋은 카르마가 아니고 달리 뭐겠습니까?

 

좋은 카르마는 또한 좋은 모멘텀을 낳습니다. 모멘텀은 관성입니다. 습관의 힘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어떤 일이고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꾸 하다보면 잘하게 되는 겁니다. 자꾸 하다보면 그 일에 모멘텀이 생기고 그 모멘텀 때문에 점점 수월해지고 계속 하다보면 모멘텀이 커지고 커진 모멘텀 때문에 더 잘하게 됩니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를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좋은 모멘텀을 쌓지 않고는 승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모멘텀은 좋은 습관에 의해 쌓입니다. 그래서 승천은 좋은 습관을 통해서 가는 길입니다. 수행이고 일이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진정한 수행자에게 있어서 수행은 일이고 일이 수행입니다. 참선이고 주문이고 많이 해 본 사람이 잘한다는 얘깁니다.

 

그런 수행이 잘 안된다고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 잘하고 싶으면 지금 당장 하고 또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자질이니 근기같은 걸 따지는데 그건 결국 자기가 쌓은 모멘텀인 것이지요. 자질이나 근기가 부족하다고 느끼면 지금부터 그걸 쌓아가는 게 최선이지요. 누구는 스승이 없는 걸 탓하는데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스승도 소용없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카르마의 법칙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의 자기 자신을 만든 건 바로 자기 자신이고 미래의 자기 모습도 자기 자신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아앰 프레젠스' 즉 '진여, 법신'은 일체의 카르마로부터 자유롭지만, 이곳에서 진화하는 부분은 절대적으로 카르마에 의해 규정됩니다. 나의 본질은 '아앰 프레젠스' 즉 '법신'이니깐 나는 본질적으로 카르마와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앞서 말했듯이 여기서의 나는 물질계에서 진화하는 '영혼'입니다. 그것은 그 선택한 결과에 따라 신처럼 될 수도 있고,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도 카르마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엄밀히 말해 아무 것도 안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카르마(행동, 운동)도 짓지 않을 수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그들이 아무런 카르마를 짓지 않는 상태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동, 운동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명상 중에 일어나는 침묵이나 정지는 다른 차원의 의식에 진입함으로써 지금까지 익숙했던 소리(진동)를 잊는 것일 뿐입니다. 그가 살아있는 한 그의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진동이 방사되어 나올 것이고 그 나온 진동이 역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결정할 것입니다. 아무런 진동도 일으키지 않으면 그건 죽음입니다. 카르마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펼쳐집니다. 하나는 보속이고, 다른 목적은 가르침입니다. 보속은 그야말로 작용/반작용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내가 보낸 에너지는 보낸 만큼 되돌아온다 이거지요.

 

가르침은 그 에너지를 돌려보내되 그 영혼에게 최대한 배움을 줄 수 있도록 안배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안배를 하는 이들이 카르마의 주님이고 이 대사들은 우리들 각자의 주님인 '그리스도 자아'와 협의하여 그런 안배를 계획, 시행합니다. 나쁜 카르마가 영혼을 구속한다고 했는데 예를 들어보지요. 만일 누군가 남에 대해 독설이나 비방을 심하게 하면서 일생을 보냈다고 하면 언젠가는 벙어리나 심한 언어장애를 가진 채 태어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독설이나 비방의 모멘텀을 그대로 지닌 채 정상적인 언어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면 또 다시 독설과 비방의 카르마를 쌓게 될 겁니다.

 

그 사람은 언어 능력으로 인해 다음 생애서도 카르마의 빚만 더 늘려갈 가능성이 높은 거지요. 이럴 경우 카르마의 주님들은 그 사람의 성향을 비쳐봐서 정상적인 언어 능력 을 부여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전생에 자기가 욕했던 사람들로부터 다시 꾸지람이나 힐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에 처하게 함으로써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듣는 고통이 어떤 건지 알게 하겠지요. 그렇게 해서 욕이나 비방을 해선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겁니다. 이처럼 독설과 비방의 카르마는 언어적 부자유를 초래할 겁니다. 여기서 작용하는 건 우리 영혼에 대한 신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진정 원한다면 나쁜 카르마를 더 이상 안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악을 짓지 않는가 하늘은 시험을 한답니다. 그 시험에 통과하면 능력이 부여됩니다. 이게 바로 비전(이니셰이션)입니다. 스승은 반드시 제자를 시험한 다음 자기의 정수를 물려줍니다. 사소한 능력도 다 해당됩니다. 새로운 이해, 시각 등도 마찬가지지요)

 

그리스도 자아와 카르마의 주님들은 이처럼 한 영혼을 지상으로 내보냄에 있어서 그가 최대한으로 빚을 갚을 수 있고, 가능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는 조건 속으로 보냅니다. 그 사람인 잉태한 시기와 장소, 탄생한 시기와 장소는 그 사람의 카르마가 앞으로 펼쳐질 양상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주란게 실은 카르마의 전개되는 양상인 것이지요. 이처럼 한 영혼의 탄생은 하늘의 주도면밀한 안배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를 낙태시켜 버리는 것은 그 안배를 엉망으로 만들게 됩니다. 한 번 낙태된 영혼은 태어날려고 했던 시기와 장소, 부모등과 비슷한 조건이 다시 창출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게 몇 년이 될 지 몇 만년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카르마의 주님들이 그 영혼의 잉태와 탄생시기 등을 정할 때는 하늘의 별들의 위치같은 것까지도 고려합니다. 그래서 그와 똑같은 별들의 위치가 되돌아오려면 몇 만년이 걸리는 수도 있습니다. 낙태를 자행한 자는 남의 소중한 기회를 박탈했으니 그 대가로 자신의 기회가 박탈될 것입니다.

 

환생이란 것 자체가 신의 자비의 결과입니다. '죄를 진 영혼은 그 죄와 함께 죽는다'고 합니다. 이 말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말인데 아마도 영혼의 심판과 관련이 있는듯 싶습니다. 나쁜 카르마를 해결하지 않은 채 영원히 가지고 다닐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낙태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입니다. 물론 무지로 인하는 때가 많지만 몰랐다고 그 카르마가 어떻게 되지는 않습니다.)

 

때가 되면 영혼은 '우주적인 평가'를 받는데 이 평가 결과 나쁜 카르마가 더 많으면 그 영혼은 그 카르마와 함께 소멸되어 버립니다. 히틀러나 스탈린은 그런 과정을 거쳐 영원히 소멸되어 버렸습니다. (카르마의 법칙은 냉혹합니다. 용서를 구할 때 빼고는)

 

승천은 미리 심판을 앞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주어진 시간과 기회가 소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적극적으로 카르마의 빚을 갚고 자기의 다르마를 다하여 그 시기를 앞당기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날의 일에 대해 용서와 자비를 구하는 행위도 실은 그날 지은 나쁜 카르마를 그날 해결하는 것으로 이것도 일종의 심판을 앞당기는 행위입니다.

 

환생은 심판에 서기에 앞서 빚을 청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연장해 주는 것입니다. 대사들에 의하면 인류가 타락하기 이전에는 환생이란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물질 우주로 나온 영혼은 천년이나 이천년 정도 지구에서 학습하고는 신에게로 되돌아갔다고 그럽니다. 인류가 타락하면서 나쁜 카르마가 누적되자 이를 갚을 수 있는 기회로서 환생이 시작되었다는 얘깁니다.

 

또한 타락 이전에는 직접 구루(신)를 맞대면하고 배울 수 있었지만 타락 이후에는 그 사람의 카르마가 선생 노릇을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선악과라는 상대적인 세계관(에너지 베일 ener -gy veil, 즉 악evil)에 빠지면서 절대를 볼 수 있는 시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구루(신)를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구루를 떠난 인류에게 카르마는 그 구루의 대리자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카르마가 주는 문제와 도전들을 헤쳐나 가면서 배움을 얻어야 합니다. 집안이나 학교, 직장 같은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감정을 조절할 수 없는 자는 결코 자신의 주인(master)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려면 먼저 상대방을 보는 시각부터 바꿔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보면서 상대방에 대한 나쁜 감정을 누그러뜨리기란 어려운 일이지요. 만일 상대방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보고 내 안에 그 하느님을 공경하는 맘이 굳세다면 상대방이 뭐라고 나와도 늘 자비로 대할 수 있을 겁니다. 하늘은 우리가 그렇게 하게 될 때까지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우리 곁에 보낼 겁니다. 맘에 안드는 사람들 속에서 맘에 안든다고 상대방과 다투면 고통이 따라올 것입니다.

 

그 고통이 싫으면 그 상대방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물론 그 자리를 외면할 수도 있지만, 언젠가 반드시 그와 똑같은 자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사람과 다시 만나기 싫으면,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상대방과 내가 실은 하나임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 안에 계신 신에게 에고를 굴복시키는 수밖에 없지요)

 

현실의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다고 그 어려움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다시 그 사람을 태어나게 해서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만듭니다. 그 사람이 그 어려움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필요한 배움을 얻을 때까지 그는 똑같은 어려움에 거듭거듭해서 봉착할 것입니다. 이것을 '마이트레야의 비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늘은 카르마를 이용해서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르마(업)가 되돌아 올 때는 항상 배울 태세가 되어 있는게 중요합니다. 업보라고 해서 두려워할 것도 못되고 배우겠다는 자세로 받아들이라는 얘깁니다.)

 

마이트레야(미륵존여래불)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대표자'로 우리들 각자의 '그리스도 자아'와 협의하여 우리들의 카르마를 가지고 우리 영혼에게 비전을 줍니다. 물론 그것이 전개되는 것은 '카르마의 주님'들이 하는 것이지만요. 여기서 비전(이니셰이션)에 관한 '듀알 컬' 대사의 가르침을 인 용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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