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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븅신사바]실화-우산없는 밤거리
게시물ID : panic_745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Wanⓖ꽃님
추천 : 15
조회수 : 1760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11/15 05: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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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가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은행나무는 연두와 노랑이 섞이기 시작하고, 반팔을 입기에는 춥고 외투를 걸치기에는 어색했던 시기였다.

 사실 더위나 추위가 그렇게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날씨가 어떠하던 나는 하루 종일 교복만 입고 다녔었으니까.

 그야말로 하루 종일이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학교를 마치면 바로 학원, 
학원을 끝내면 근처 독서실에서 대충 시간을 때우다 집으로 가는 식이었다.
얼마 안 되는 용돈을 아끼려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도착하면 언제나 시간은 대충 열 시 반을 넘기는 정도.

즉, 나의 인생이란 것은 언제나 실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날씨가 어떠하던 간에, 전혀 신경 밖의 일이다.



 그 날 아침, 어머니께서는 밤늦게 비가 올거라고 하셨다.

 우산을 챙겨가는 것이 너무 귀찮았다.
고작해야 겨우 몇 십분 밖에 있을 텐데, 그 정도 때문에 올때갈때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 싫었다. 
절로 퉁명스런 말이 나왔다.

"날씨 좋기만 하구만, 뭘."

 어머니가 그래도 가져가라고 말씀하시며 내민 우산은, 하필 살 두어 개가 망가진 찌그러진 우산이었다.
당시 집에 있던 우산이라는 게 다들 그런 것 밖에 없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대문을 닫았다.


 그리고 밤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학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림자까지 선명한 맑은 하늘이었는데,
밤이 되어서 나오니 그사이 어두워진 주변이 온통 축축하다.
나트륨 등의 불빛이 물바닥에 반사되어 주황빛 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많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실눈으로 봐야 비가 오고 있구나, 하고 느낄 정도의 잔비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독서실까지 걸어서 간다고 한다면, 왠지 교복이 눅눅해져서 공부할 맛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궁색한 핑계라고 스스로도 생각은 했지만, 아무튼 오늘은 바로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로 결정했다.
가는 길에 교복이 젖겠지만, 어차피 내일 아침 쯤이면 말라 있겠지.

집은 그리 멀지도, 그렇다고 아주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다.
버스로 친다면 네 정거장 정도? 걸어서 삼십분 정도 걸리는,중간에 큰 도로도 지나가지 않는 조용한 동네 길이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밤길은, 우산 없이 걷는 나의 발소리 말고는 조용했다.
화단을 끼고 멀리 떨어진 도로에서 가끔, 물길을 짓밟는 자동차의 타이어 소리, 
빗방울에 나뭇잎에 들러붙는 소리, 상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음악 소리,골목 구석에서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
비가 오는 밤의 일상적인 소리들이 나와는 아주 동떨어진 소리마냥 아스라히 들려왔다.

주황빛 가로등, 주변에서 귓가를 간지럽히는 도시의 소리, 그리고 터벅 터벅, 나의 발소리.
우산이 있었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나밖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터벅터벅.

또각.

나위 귓가에 다른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나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제서야 내가 땅을 보고 걷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마 가랑비 때문이리라.

발소리의 주인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약간 경계심이 들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웠던 나의 세계에 대한 침입자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에 대한 소심한 복수라고 생각하면서, 그사람을 대놓고 쏘아보았다.
왜냐하면, 밤이었으니까. 가로등은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하나가 놓여있었을 뿐이고, 그만큼 거리도 멀다.
내 얼굴 같은 건 보이지도 않겠지.

그런데 발소리는 어떻게 들렸지?


 그 때부터 내 주변의 모든 소리들이 사라졌다.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나의 온 신경이 그 사람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선, 그 사람은 여자였다. 
몸에 딱 붙는 가죽 자켓과 바지를 입어,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걸음걸이나 전체적으로 왠지 중년은 되어보이는 아주머니 정도로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같이 우산을 쓰고 있지 않았다.
검은색 얇은 곱슬머리가 비를 맞아 거칠게 엉켜 있다.
얼굴은 머리카락과 그림자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을 보면 볼수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뭔가 당연한 것이 빠져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는 분위기는 독특했다. 왠지 모를 긴장감...
생각을 거듭할 수록, 그 사람과 나와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길은 어떤 갈림길도 없는 외길이었다. 아마 저 가운에의 가로등이 비추고 있는 바로 아래쪽 쯤에서는 마주쳐 지나가리라.

터벅, 터벅,
내 발소리만큼 이제는 내 심장 뛰는 소리도 귀에 들릴 듯 하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았다.
저 사람에게서는 발소리가 나지 않는다. 
거리가 가까워 질 수록 명확해졌다. 처음에는 멀리 있어서 들리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굽 높은 힐을 신고 있는데도 이 정도 가까이 온거리에서까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마치 걷고 있지 않기라도 한 것 처럼 조용하다.
터벅, 터벅.

하지만 분명히 다가오고 있다.

어느새 가로등 불빛 아래까지 가까워졌다.
두근, 두근, 심장 뛰는 소리가 목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그쪽에서는 딱히 나를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냥, 지나 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터벅, 터벅, 두근, 두근...
우산이 있었더라면 그저 얼굴을 가리고 지나갔을 텐데.
너무 후회가 된다.


거의 다 왔다.
가로등 바로 아래에서 나와 그 사람이 교차하는 지점.
가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천둥처럼 울려온다. 
저쪽에게도 이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든다.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싸한 느낌이 온 등을 훑는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여전히 상대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래, 설마하니 귀신도 아니고서야 갑자기 나를 덮치기야 하겠어? 
마음을 다잡으며 무심코 불빛에 비친 그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순간, 나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 멈춰 설 뻔 했다.


아직까지도 그 순간이 잊혀지지를 않는다.




그 사람, 얼굴이 없었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마냥 
눈도, 코도,입도 없었다.
다만, 머리카락에서 썽어지는 빗물만이 
얼굴 속에 묘한 얼룩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잘못 본 것일까? 
잘못 본 게 틀림없어.
하지만 가로등이 바로 위에 있었다. 
잘못 봤을 리가 없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 나를 지나쳐 갔다는 느낌이 들자 마자,
스스로 목을 부러뜨릴 것처럼 
격렬하게 고개를 휙 돌려, 뒤를 찾아보았다.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또각.


아스라히 앞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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