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왕력)
第一 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제1 동명왕 [갑신년에 즉위하여 18년간 다스렸다.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으로 추몽이라고도 한다. 단군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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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은 우리 민족의 시조로서 고조선의 첫 임금이며, 단군(壇君)·단군왕검(壇君王儉)·단웅천왕(檀雄天王)이라고도 한다. 그런데『삼국유사』왕력편에는 고구려 동명왕이 “이름이 주몽 또는 추몽이고 단군의 아들(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이라고 언급하고 있어 동명왕과 단군의 아들의 관계가 주목된다. 『삼국유사』는 고려시대에 편찬되었기 때문에 후대의 산물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고구려 자체에도 단군에 대한 전승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초기에 왕통을 계승한 집단으로 후에 고구려를 구성하는 5부(部) 중 소노부(消奴部)가 된 비류국(沸流國)은 선인(仙人)의 후예라고 하여 단군을 조상으로 인식하였으며, 현재 집안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각저총(角抵塚)과 장천(長川) 1호분의 그림에도 곰과 호랑이와 여인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어 단군신화와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후대의 산물이 아닌 예전부터 내려오던 전승이 고려시대에 기록으로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기록도 이러한 역사인식의 산물로 보인다.
근래에는 고구려사회에서도 단군신화가 전승되고 있었음을 주목한 일련의 연구가 등장하였다. 고구려에서 국초에 『유기(留記)』 등의 사서를 편찬하여 그 전부터 구전을 통하여 내려온 고구려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보아 단군신화가 기록되어 있는 『고기』 역시 구전을 통해서 내려온 것을 『고기(古記)』라고 표현되는 사서에서 수록한 후 『삼국유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현재의 형태로 전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이종욱, 1993) 구체적으로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21년(247)조에 선인왕검(仙人王儉)의 존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 사회에 단군신화가 전승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서영대, 1994)
현재 집안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씨름그림으로 유명한 각저총(角抵塚) 그림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나무 아래에서 씨름을 구경하는 모습이 확인되었으며 장천(長川) 1호분의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가 단군신화와 연결되는 모습을 볼 때(강룡남, 1996), 단군신화가 고구려와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체로 5세기로 편년되는 벽화고분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군신화 연대논의를 더욱 높여 준다고 할 수 있다.(조법종, 2006)
원래 신화는 역사적인 사실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속에 내재된 역사성을 중시하여야 하며, 어떤 맥락에서든 신화의 의미는 풀려야 한다. 그러나 단군의 개국신화를 그대로 왕조사인 것처럼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단군신화는 단순한 고조선의 건국신화일 뿐 아니라 한민족 국가들의 형성과 관련된 신화이고, 나아가 조선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나라의 주민들로 이루어진 한민족 형성의 신화가 되기도 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이종욱, 1993)
『삼국유사』기이편 고구려조에서는 주몽=동명설화를 말하면서 『단군기(壇君記)』를 인용하여 “단군이 서하 하백의 딸과 가까워져 아들을 낳고 부루라 이름했다(壇君與西河河伯之女要親 有産子名曰夫婁)”고 한다. 북부여의 왕이 단군의 자손이라는 말이다. 『단군기』라는 책이 어떤 성격이 책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부여왕의 권위가 단군의 전승과 결부됐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정경희, 1983)
단군과 동명의 관련 신화를 보면 여러 가지 공통점이 보인다. 즉 동명 또는 주몽의 어머니는 금와왕에 의해서 유폐되고 있는데, 이는 단군의 어머니인 곰이 “삼칠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기(忌)했다”는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와 같은 유형의 것으로, 고구려 사회의 수신혈(隧神穴)에서 제를 지내는 습속은 이것과 관련된다. 또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는 『구삼국사』를 인용하여 주몽이 죽었을 때를 “가을 9월 왕은 승천하여 내려오지 않았다. 이 때 나이는 40이었다(秋九月 王升天不下 時年四十)”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곧 단군의 아버지 환웅의 고향인 하늘로 돌아가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동명설화의 밑바닥에는 단군신화의 유산이 상당히 짙게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정경희, 1983)
한편, 고구려초기에 왕통을 계승한 집단으로 후에 고구려를 구성하는 5부(部) 중 소노부(消奴部)가 된 비류국(沸流國) 또한 단군을 시조로 하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와 단군의 역사적인 관계를 더듬어 볼 수 있어 주목을 끈다.
비류국(沸流國) 왕 송양(松壤)에 대하여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구삼국사(舊三國史)』의 동명본기(東明本紀)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류왕 송양이 일러 말하길 ‘나는 선인의 후예로 대대로 왕이 되었다. 금일 그대는 나라를 세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용이 되는게 어떠하겠는가?’라고 한 것은 이 또한 단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 (比流王松壤謂曰 予以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則此亦疑檀君之後也)” 이것은 선인과 단군을 동일한 의미로 파악한 견해로서 단군인식이 고구려 건국초기에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박경철, 1996)
현재 집안지역에 존재하고 있는 씨름그림으로 유명한 각저총(角抵塚) 그림에서는 곰과 호랑이가 나무아래에서 씨름을 구경하는 모습이 확인되었으며 장천(長川) 1호분의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로 알려진 그림 속에 중앙의 나무와 그 나무를 향한 여인의 모습에서 웅녀의 단군잉태 기원모습과 연결된다고 한다. 특히 그림 좌측에 굴속에 곰 같은 동물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단군신화와 연결된다고 한다. (강룡남, 1996)
이것은 단군신화가 고구려와 구체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대체로 5세기로 편년되는 벽화고분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단군신화 연대논의를 더욱 높여 준다. 그런데 주몽집단에 앞서 존재한 송양집단의 단군시조인식은 고구려 사회에서는 비주류적 인식으로 유지되다가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친 뒤 전민족적 시조인식으로 새롭게 확산 재정립되었다고 파악된다. 이것이 단군신화가 삼국의 시조신화와 같은 전승과정을 갖지 못하고 후대에 부각된 원인으로 보인다.(조법종, 2006)
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것이나, 단군과 하백녀의 혼인을 통하여 부여왕인 부루(夫婁)가 태어났다고 하는 기록은 한국의 여러 초기국가의 건국세력들이 혈통을 같이 한다고 보고자 하였거나 또는 그렇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단군신화는 단순한 고조선의 건국신화일 뿐 아니라 한민족 국가들의 형성과 관련된 신화이고, 나아가 조선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나라의 주민들로 이루어진 한민족형성의 신화가 되기도 한다는 데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이종욱, 1993)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cid=4402&docId=1808442&mobile&categoryId=4402
요약 : 고구려인들이 고조선의 계승의식을 가졌다는 사료들이 있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은 침략전쟁이다기 보단 영토회복전쟁에 가깝다고 할 것 이다.